도시 교회로부터 선교비를 받기로 했지만 돈이 오지 않아 낙심한 강원도 산골 목회자가 있었다. 어느 날 서울의 작은 교회에서 선교비를 지원하겠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온다. 고마운 마음에 서울을 찾은 목회자는 그만 기겁을 하고 만다. 교회 강대상이라고 해봐야 책상에 붉은 천을 뒤집어씌웠고, 산골교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피아노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 놀란 것은 그렇게 가난한 교회가 1년 예산의 대부분을 선교비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강원도에서 온 목회자는 강단에서 참회했다. “여러분, 사실 저는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목회를 그만 둘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교회를 보니 목회를 새롭게 해야겠다는 각오가 생겼습니다. 이제부터 열심히 하겠습니다.”
서울의 한 교회는 수정교회고, 가난한 교회 살림에 큰 돈을 선교비로 내놓은 목회자는 조일래(64) 목사다. 수정교회는 1977년 서울 대림동 개척 시절부터 ‘먹을 것이 없을 때부터 선교해야 훗날 교회가 성장했을 때도 과감하게 선교할 수 있다’며 재정의 50%를 선교에 쏟아부었다. 지난 34년간 교회는 담임목사 사례비를 줄 돈이 없어도, 교회건축비가 없어 사채를 끌어 쓸 때도, IMF 구제금융의 한파 속에서도 선교비만큼은 절대 손대지 않았다. 그렇게 지금까지 보낸 돈만 해도 120억원이 넘는다. 교회는 2005년 인천 불로동으로 교회를 옮기고 1만5943㎡(4823평)의 대지 위에 예배당과 선교사 안식관, 수련원, 대안학교, 어린이집 등을 갖춘 연면적 1만2200여㎡(3700여평)의 선교센터를 지었다. 지금도 교회 경상비의 절반은 무조건 선교비로 보내는 조 목사를 만나봤다.
-집사 신분으로 교회를 개척했다고 들었습니다.
“부산대 경영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하나님이 주신 사명 따라 76년 9월 몇 만원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어요. 영등포의 허름한 여관에 이불보따리를 풀고 서울신학대에 원서를 넣으려고 갔는데 ‘아직 입학시즌이 아니니 내년 봄에나 오라’면서 돌려보내더군요. 아내와 1년4개월 된 아들과 함께 예배드릴 곳을 찾다가 작은 성결교회를 방문했습니다. 4명이 앉아 있었는데 예배 시간이 됐는데도 담임목회자가 안 오는 거예요. 그러다 결국은 제가 예배를 인도하게 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전도사님이 계셨는데 목회가 잘 안 되니 포기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차여차해서 그 네 분과 함께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없는 교회 살림에 예산의 절반 이상을 선교비로 보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선 목사 수가 적어 사람하나 더 채우시려고 목회자를 부르시는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수가 적어서 수정교회를 세우신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목사, 교회를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수정교회의 존재 이유는 선교 아닙니까.”
-그래도 반대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77년 교회를 개척하고 사례비도 못 받을 때입니다. 그때 돈으로 5000원을 선교비로 보낸다니까 집사님이 펄쩍 뛰어요. 둘째 아이 젖이 나오지 않아 보리차를 먹일 때도 선교비는 줄이지 않았어요. 86년 서울 대림동에 4층짜리 교회 건물을 지었을 때 모두 빚이었습니다. 어느 날 집사님들이 쫓아왔어요. ‘목사님, 이러다 교회 떠내려갑니다. 재정은 저희가 맡을 테니 포기하세요’라고 해요. 그래서 그랬습니다. ‘세계 선교기지가 언제 빚 있다고 선교 중단하는 것 봤습니까. 그러면 선교 의지가 약해져서 안 돼요’라고요. 지난해만 해도 선교비로 11억원을 보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서울 대림동과 인천 불로동 땅을 기적적으로 싸게 구입할 수 있었던 게 드린 선교비보다 더 크다고 봐요. 지금 생각해보면 ‘선교 안했으면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큰 부흥을 주셨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가족들이 고생을 많이 했겠습니다.
“사실 가족에게 가장 미안하죠. 두 아들이 해달라는 걸 제대로 해 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아이들이 잘 커줬습니다. 36세인 큰아들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지금 인도선교사로 나가 있습니다. 작은 아이도 연세대를 나와 외국계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옆에 있던 이은자(60) 사모는 “하나님이 모든 걸 까마귀를 통해서 물어다 주시는 것처럼 성도들을 통해 주셨다”면서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거들었다. 사실 조 목사는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통장이 없다고 한다. 월급 통장도 교회 사무원이 관리하고 있단다. 이 사모는 “불로동 땅을 사고 교회를 건축하면서 1억∼2억원씩 약정했다”면서 “그렇게 따지면 한 달에 얼마씩 헌금하겠느냐. 나는 머리 아파서 계산 못하니 목사님이 간간이 주는 생활비로 산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재정이 부족할 땐 불평이 나왔을 것 같습니다.
“사실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할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이게 뭡니까’하고 불평한 적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내가 굶는 것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면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먹이십니다. 그렇게 안하시는 이유가 다 있어요. 불평하지 않고 알아서 해주실 줄 믿고 살아왔어요. 그게 믿음 아닌가요.”
-목사님에게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을 알고 가르치는 데만 몰두하지 말고 말씀대로 살아야 하며 주님의 뜻을 이뤄드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머릿속 생각대로 ‘나는 이것밖에 못해’라며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내 형편, 내 생각을 따지다 보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틈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신앙생활의 간증이 없어집니다. 힘이 없어집니다.”
-열정만큼은 젊은 목회자 못지않은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청년 같다는 말도 자주 듣습니다. 성경에는 적당히 살라는 말이 없어요. ‘죽도록 충성하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주님을 신뢰하고 살다보면 자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사실 대부분의 교회는 선교지향적 교회를 표방한다. 하지만 모두가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비결이 있다고 한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이 있을 때 ‘해야 할 것’을 먼저 실천한다고 한다. 오늘 한국교회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수정교회와 조일래 목사가 그 답을 말해주고 있다.
인천=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수정교회, 선교사 18명 파송… 미자립교회 17곳 도와 |
수정교회는 ‘이웃에 복음을! 농어촌에 선교비를! 온 세계에 선교사를!’이라는 구호 아래 매년 12월 첫째 주 자체적으로 선교사대회를 개최할 만큼 선교에 관심이 높다. 1989년 스페인에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이후 네팔 필리핀 태국 남아공 등에 18명의 선교사를 보냈다. 네팔에 병원과 학교를 세웠으며 국내에 17개, 해외에 12개의 지교회를 건립했다. 현재 17개의 미자립교회를 돕고 있다.
교회는 특수선교에도 관심이 많다. 한국대학생선교회와 한국복지재단 등 27개의 특수선교지를 돕고 있으며, 광양노인복지센터와 불로중학교 볼링부 등 지역사회 5곳을 지원한다. 교회에는 현재 필리핀 노동자 100여명이 모이는데 필리핀 목사 아래 자체적인 교회를 구성하고 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교단 내 국내선교위원회와 총회교육원 등 여러 기관을 돕고 있으며, 매년 20여명에게 장학금도 지급한다. 북한선교에도 관심이 높아 2002년부터 북한 분유보내기 운동에 동참해 1년에 네 차례씩 총 1000만원 상당의 분유를 전달했다. 2008년 8월과 2009년 3월 북한 개성과 중국 베이징에서 오경우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서기장의 초청으로 기독교 민간교류 활성화를 위한 만남을 갖기도 했다.
교회 내 선교사 안식관이 있다는 게 독특하다. 교회는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교단에서 건축비 12억원을 지원받아 1320여㎡(400여평)의 선교사 숙소를 마련했다. 각 가구마다 1∼3개의 방이 딸린 아파트형 안식관에는 선교사 1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2008년 어린이집을 개원했으며 140여명이 재학 중이다. 지난 3월엔 기독교 대안학교인 수정국제크리스천학교를 개교했다. 기독교 가치관이 담긴 미국 밥존스대학교의 교과서를 활용하며, 국어와 역사를 제외한 전 과목을 영어로 가르친다. 현재 초등학교 1∼3학년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