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전쟁역사]6.25 전쟁,이전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20·끝> 전시 병동 외국의료진의 휴먼스토

好學 2010. 6. 28. 21:01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20·끝> 전시 병동 외국의료진의 휴먼스토리

 

 

 

5개국 의료진 한국 파견… 자유 지킨 전장에 ‘인도주의 꽃’ 피워

 



6·25전쟁 당시 스웨덴 의료팀의 일원이었던 칼 그루네발트 씨(왼쪽)가 부산의 스웨덴 적십자병원에서 한국인 환자 및 간호보조원들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그루네발트 씨는 이때 병원에서 부인 엘사 라르손 씨를 만나 사랑을 꽃피웠다. 사진 제공 주스웨덴 한국대사관

 

《6·25전쟁 때 유엔군으로 전투병을 보낸 16개 참전국 외에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등 5개국은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을 파견해 한국을 도왔다. 특히 노르웨이와 덴마크, 스웨덴 3국은 전후 한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스칸디나비아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국립의료원을 세워 한국 공중보건 시스템의 선진화 기틀을 닦았다.》

포화 속 로맨스

스웨덴팀 의사 - 간호사 결혼… 현지 언론에 크게 소개돼

6개월간 3000여 차례 수술

○ 스웨덴 의료진의 전쟁 속 로맨스


  칼 그루네발트 씨(89)는 스웨덴의 1차 한국 파견 의료팀 소속 소아과 의사로 6개월 동안(1950년 8월 24일∼1951년 2월 24일) 근무했다. 스웨덴 스톡홀름 북부의 달라르나 지역에 거주하는 그루네발트 씨는 기자의 전화를 받고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15분 뒤에 다시 전화를 걸자 그루네발트 씨는 “우리 국제의료팀은 인도주의 실천을 위해 한국에 파견됐다. 부산에 도착해 보니 일회용 반창고도 제대로 없었다”며 60년 전의 기억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인은 끝까지 고통을 참으면서 부상을 이겨냈다”며 이런 한국인의 모습은 그가 힘든 시기를 겪을 때마다 극복하는 힘이 됐다고 말했다. 스웨덴 의료진은 6개월 동안 약 3000회의 수술을 하는 등 헌신적인 지원을 했다.

그루네발트 씨는 부산의 스웨덴 적십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스웨덴 간호사 엘사 라르손 씨와 사랑을 키웠고 귀국 직후 결혼을 했다. 이들의 러브스토리는 ‘전쟁 중의 로맨스’라는 제목으로 현지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적십자 소속으로 6·25전쟁 때 간호사로 활약한 알마 파스쿠토 씨(오른쪽)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국방무관인 서남열 대령에게 당시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있다.사진 제공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아내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에서의 추억이 묻어 있는 물품들, 특히 아내가 좋아하던 탱화는 그의 집안 곳곳에 걸려 있다고 한다. 그루네발트 씨는 “부산에서 우리 부부가 구입한 세라믹 반지를 평생 간직해 왔다”고 말했다.

때로는 24시간 쉬지 않고 근무해야 하는 전시 병동에서 피어난 로맨스는 그루네발트 씨 부부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1차 파견자 48명 가운데 5명이 스웨덴인 또는 미국인, 캐나다인과 결혼하거나 약혼하는 등 인연을 맺었다.



 

○ 이탈리아 간호사의 한국 사랑

“한국은 저에게 제2의 조국입니다. 그 당시 젊은 날의 정열이 오늘도 나를 붙들어주곤 합니다.”

이탈리아 적십자 소속으로 6·25전쟁 때 간호사로 활약했던 알마 파스쿠토 씨(100·여)는 최근 로마 파리올리의 자택을 찾은 이탈리아 주재 한국대사관의 국방무관 서남열 대령에게 60년 전의 기억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1950년 9월 20일 의료진의 한국 파견을 결정했다. 군의관과 군 약제사, 간호사 등으로 구성된 이탈리아 의료팀은 나폴리 항구에서 미국 군함 제너럴랭핏호를 타고 30일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파스쿠토 씨는 “이탈리아 적십자병원은 서울 영등포의 학교(현 신길초등학교)에 자리를 잡고 미8군 의료부대와 함께 활동했다”고 말했다. 150개의 침상에서 시작해 200개로 늘어난 이탈리아 병원에서는 입원환자 7041명과 외래환자 22만9885명이 치료받았다.

평생을 혼자 살아온 파스쿠토 씨는 쾌활하고 자유분방하던 당시의 에피소드도 전했다.

“땅에 닿지 않는 치마를 입은 우리에게 함장이 부산으로 향하는 동안 갑판에 나오지 말라고 했어요. 강풍이 불면 치마가 위로 올라가 수병들에게 이상한 광경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요. 하하하.”

“외부 기온이 영하 26도로 내려갈 정도로 서울이 너무 추웠어요. 추위를 이기며 병원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여자 간호사들끼리 돈을 쓰기 위해 도쿄에 가자고 ‘모의’했죠. 미군 장교를 구워삶아 수송기를 타고 무작정 도쿄에 도착한 뒤 갖고 있던 달러를 펑펑 썼어요. 그러다가 도쿄 주재 이탈리아대사관 직원한테 발각됐죠. 강제소환이라도 당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대사님이 저녁을 사주면서 위로해 줬죠. 그래서 처녀들끼리 스트레스를 푼 뒤에 다시 한국에 돌아가서 열심히 일했어요.”

파스쿠토 씨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함께 수행하던 사람들 가운데 현재 생존자는 10명 미만”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참전 전투병이 대부분 18∼20세의 젊은 청년이었던 것과는 달리 한국에 파견된 의사와 간호사들은 대부분 30대 이상의 나이였다.

헌신적 의료활동
, -민간인 23만명 치료
인도-노르웨이-덴마크도 병원등 보내 환자 진료


○ 병원선 등을 통한 지속적인 협력

덴마크는 1951년 3월 의사와 간호사, 의료종사원들을 태운 병원선 유트란디아를 한국에 파견했다. 유트란디아의 임무는 부상한 유엔군을 치료하는 것이었지만 민간인 부상자가 늘어나자 병원선 책임자인 코리 함메리히 씨는 유엔군 측과 협상을 벌여 한국군과 민간인 부상자뿐만 아니라 아프고 허약한 아이들의 치료까지 맡았다. 유트란디아는 부산항과 전방을 오가다 1952년 가을부터는 인천항에 정박해 활동했다.

유트란디아에서 근무했던 코리 벨렌도르프 씨는 2008년 6월 22일 덴마크 일간지 일란드포스텐에 실린 기고문을 통해 “한국인들이 덴마크의 참전에 대해 아직도 잊지 않고 고마워하는 것에 감사한다”고 밝혔다.

노르웨이는 의료팀과 행정요원 등으로 구성된 병상 60개 규모의 이동외과병원(NORMASH)을 1951년 7월 개설했다. 서부전선에 처음 설립됐던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은 의정부를 거쳐 동두천에 자리를 잡아 3년간 환자 9만 명을 치료했다.

인도는 의사와 위생병들로 구성된 야전의무부대를 파견했다. 위생병들은 인도 공수사단에서 공수훈련을 받은 군인들이었다. 실제 인도가 운영한 야전병원의 공수의무분대는 1951년 경기 문산에서 벌어진 미군 187공수연대전투단의 작전에 참가해 의료지원을 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 스칸디나비아 3국 전쟁뒤에도 남아 국립의료원 세워 ▼

대학병원 주임교수들 파견… 한국에 선진의술-철학 전수



“스칸디나비아 3국의 의료진이 한국에 전수한 것은 선진의술이나 첨단의료장비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의사의 기본 자질을 배웠습니다. 환자의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성심을 다해 치료하는 것, 그것은 의사로서 내 평생의 철학이 됐습니다.”

국립의료원 인턴 1기 출신인 박인서 한국·스칸디나비아재단(한스재단) 이사장(75)은 11일 인턴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국립의료원장, 삼성제일병원장을 지냈다. 한스재단은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3국과 국립의료원의 의학 및 문화교류 증진을 위해 1968년 설립됐다.

국립의료원은 1958년 스칸디나비아 3국 정부와 유엔 한국재건지원단(UNKRA)의 도움으로 탄생했다. 6·25전쟁 때 스칸디나비아 3국은 대규모 의료진을 파견했다. 이들 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폐허가 된 한국을 위해 의료단을 남기고 국립의료원을 세웠다. 의료단은 1968년까지 국립의료원을 통해 한국에 선진 의술을 전파했다. 당시 국립의료원은 의료진과 시설 수준에서 동양 최고의 병원이었다.

1960년 4월 한국의 의대생 30명이 전문의 수련을 위해 의료원의 인턴 1기로 첫발을 내디뎠다. “공교롭게 당시 4·19혁명이 일어났어요. 부상당한 학생들이 몰려들었죠. 그때 외국인 교수들이 수술 받을 환자와 입원할 환자를 질서정연하게 나누고 침착하게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선진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국립의료원의 외국인 교수들이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하면서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정계 인사들도 선진 의술의 덕을 보기 위해 국립의료원을 찾았다. 박 이사장은 “외국인 의사들은 그 인사들을 특별하게 치료해 달라는 부탁을 이해하지 못했다”며 “그들에게 환자는 다 똑같은 사람일 뿐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스칸디나비아 3국은 대학병원의 주임교수를 대거 파견했다. 그들은 환자대장과 병리검사대장 등 관련 기록 등을 꼼꼼히 남겼고 이는 국립의료원 내 박물관에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스칸디나비아 정부는 인턴들에게 선진의학을 직접 접할 유학의 기회도 제공했다. 박 이사장은 노르웨이 장학기관에서 전액 지원을 받아 1년간 노르웨이 대학병원에서 연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65년 국립의료원 출신의 첫 전문의들이 배출됐다. 박 이사장은 “외국인 의사들이 없었다면 한국 현대의학의 발전 속도가 상당 기간 늦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국립의료원은 개원 50주년 행사 때 당시의 의료진과 가족들을 초청했다. 국립의료원 이홍순 부원장은 “당시 덴마크국립병원 마취과 의사 아버지를 따라왔던 어린 소년이 같은 병원의 마취과 의사가 돼 한국을 방문했다”며 “그는 폐허나 다름없던 한국의 발전상에 감격해했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얼마 전 포울 호이네스 덴마크 대사도 이임 송별연에서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모한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며 뿌듯해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