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Resistant, Non-Violence
무저항 (無抵抗) - 비폭력 (非暴力)
무저항에 대한 복음
내가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말이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뜻임을 깨달았을 때,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의미에 대한 종전의 나의 생각이 돌연히 변화되었고, 나는 공포에 떨었으며,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당시까지 내가 그 가르침을 이해하였던 이상한 방법에 대해서였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의미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으며,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왼쪽 뺨을 내밀어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왜 이렇게 단순한 말씀들을 단순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것들 안에서 어떤 우의적(寓意的)인 의미를 찾고 있었을까?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악한 자에게 결코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결코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 사랑에 배반되는 행위를 하지 말라, 그리고 만일 그래도 그들이 당신을 모욕한다면, 그 모욕을 참으라 그리고 여전히 다른 누구에게도 폭력을 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가 그것을 너무나 명료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말하였으므로 더 이상 명료하게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말한 사람이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거나 믿으려고 하면서, 나 자신의 힘으로 이것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주인이 내게 말한다, ‘가서 나무를 잘라 오라’, 그리고 나는 대답한다, ‘저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대답함으로써, 나는, 두 가지 중의 한 가지, 즉, 나는 주인이 말하는 것을 믿을 수 없거나, 나는 그가 명령하는 것을 하고싶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실행하라고 주신 계명에 대해서, 그리고 그 것에 대해서 그가 말하기를, ‘이것을 행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크다고 여김을 받을 것이다’, 처럼 말한 것에 대해서- 오직 그것을 행하는 자만이 생명을 받을 것이다라고 그가 말한 것에 대해서; 그 자신이 실행한 명령 그리고 그가 그토록 명료하고 단순히 표현하여서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이 있을 수 없다: 이런 명령에 대하여 심지어 결코 실행해 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은 나는 말했다, ‘ 그것을 나 자신의 힘으로 실행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나는 초자연적인 힘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땅 위에 내려왔다. 구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삼위 일체 중의 제 이 위인,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을 위해서 고통 받았고, 아버지 앞에서 그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셨으며, 사람들에게 교회를 주어서 그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를 보존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뿐만 아니라, 똑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원을 위한 가르침과 삶의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어찌하여 나는 그에 의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단순하고 명료하게 표현된 삶의 규칙이 실행하기가 너무나 어려워 심지어 기적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내가 말하였던가?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는, ‘행하라, 그것을 행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결코 실행이 어렵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나의 멍에는 안락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그의 법은 힘들지 않다’고 했다. 어찌하여 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즉, 그가 그토록 정확히 정의하였고, 실행하는 것은 쉽다고 말하였으며, 그가 몸소 사람으로 오셔서 실행하였고, 그의 초기 제자들에 의해서 실행된 것을- 어찌하여 나는 그것을 행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심지어 기적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하였던가? 만일 어떤 사람이 주어진 어떤 법률을 폐기하려고 전심 전력을 다한다면, 그 사람은 그러한 법의 폐기를 위해서, 그 법 자체는 실행될 수 없으며, 자신의 법에 관련된 입법자 자신의 의도는 그것이 실행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실행하려면 기적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이 더 효과적이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악에 대한 무저항의 법에 관해서 내가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이상한 생각-그리스도의 법은 신성하지만 그것의 실행은 불가능하다- 이 어떻게 나의 머리에 들어왔는지 기억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과거를 회상해 보고서, 그러한 생각이 결코 완전히 드러내놓고 나에게 전달된 것이 아니라(그랬다면 나는 그것을 거부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체, 나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젖과 함께 그것을 빨아 먹었으며, 그 뒤의 나의 전체 삶은 오직 내 안에서 이런 이상한 망상을 확인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며, 그의 가르침은 신성하다고 배웠다, 그러나 동시에 폭력에 의해 악한 사람들로부터 나의 안전을 지켜주는 제도들을 존경하도록 배웠다. 나는 성직자들에 의해서 이들 제도들을 존경하도록 배웠다. 나는 악한 자에게 저항하도록 배웠다, 그리고 악한 자에게 굴복하고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비굴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교육받았다. 그들은 나에게 심판하고 처형하는 것을 가르쳤다; 이후에 그들은 나에게 전쟁에 나가는 것을 가르쳤다- 다시 말해서, 살인으로서 악한 사람에게 대항할 것을 가르쳤으며, 내가 소속했던 군대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군대’라고 불렸고, 그들의 활동은 교회의 축복으로 신성시되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그리스도의 법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을 존경하도록 배웠다; 해를 입히는 자에 대항하고, 개인적, 가족적, 또는 국가적인 모욕에 대해서 폭력으로 복수할 것을 배웠다. 이 모든 것은 비난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은 훌륭한 일이며 그리스도의 법에 반대되지 않는다고 나에게 주입되었다.
나의 모든 주변 환경, 나의 평안, 나 자신, 나의 가족, 그리고 나의 재산의 안전은 모두 그리스도가 부정하는 법, 이에는 이라는 법에 의거하고 있었다. 교회의 박사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신성하지만, 그 실행은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불가능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그 실행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속의 교사들과 우리의 삶의 모든 해석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실행 불가능성과 환상적인 성격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에 반대되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서 가르쳤다. 하나님의 가르침의 실행 불가능성의 인정은 점진적으로 그렇게 나에게 스며들어와서 매우 친밀해졌으며, 그것은 그런 식으로 나의 욕망들과 맞아 떨어져서 나는 결코 이전에 내가 맞이하고 있는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한번에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그의 가르침의 토대는 악한 자에 대한 무저항임에도, 의식적으로 그리고 은밀히 재산, 재판, 정부, 그리고 군대들의 형성을 위한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치되는 삶을 확립하며, 똑 같은 그리스도에게 악한 자에 대한 무저항 및 용서의 법이 우리들 안에서 실행될 것을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너무나 명백한 것이 아직 나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만일 그것들이 우리의 복지를 위해서 그토록 필요하다면,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서 삶을 준비하고 조직하며, 그리고 나서 재판들, 처형들, 전쟁들이 있어야 한다고 기도하는 것이 훨씬 단순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잘못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말로서 믿으면서 행동으로 그를 부정함으로써 생겨났다.
악한 자에 대한 무저항의 명령은 모든 가르침의 완전한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경구가 아니라 의무가 따르는 규칙- 준수되어야 하는 법- 일 때에 오직 해당된다.
이것은 참으로 모든 것을 여는 열쇠이다, 그러나 오직 그것이 자물쇠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야 그렇다. 이런 선언을 단순히 초자연적인 도움이 없이는 실행이 불가능한 금언으로 여기는 것은 전체 가르침을 폐기함이다, 그리고 어떤 가르침이 통일되고 근본적인 주장이 제거되었다면 사람들에게 불가능함 말고 무엇으로 느껴지겠는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그것이 심지어 단지 어리석게 보일 뿐이며 달리 보일 수 없다.
엔진을 장치하고, 보일러를 데우고, 그것을 동작시키고서도, 연결 벨트를 달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악한 자에 대한 무저항의 법을 실행함이 없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할 때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행해지는 것과 같다.
나는 최근에 유태교의 율법 학자와 함께 마태복음 5장을 읽고 있었다. 거의 매 문장마다 그가 말했다, ‘그것은 유대교 성서에 있다. 저것은 탈무드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구약 성서와 탈무드에서, 산상수훈에 있는 중요 구절과 매우 유사한 구절을 나에게 지적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악한 자에 대한 무저항의 행에 이르렀을 때 그는, ‘그것은 탈무드에도 있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대신에 그는 넌지시 나에게 물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이행합니까? 그들은 다른 뺨을 돌려댑니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특별히 그 당시에 나는 기독교인들이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뺨을 돌려대는 유태인들을 때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혹시 구약 성서나 탈무드에 유사한 것이 있는지 궁금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이것을 물어보았다. 그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거기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이 법을 실행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질문으로, 그는 기독교의 법에 이런 규칙이 존재함은, 그것이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지켜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실행이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고 있음으로써, 기독교적인 법의 부조리성과 무용성에 대한 인정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제 이 가르침의 의미를 깨닫고 나니, 내가 마주하고 있었던 이상한 내적인 모순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고 그의 법은 신성하다고 인정하면서, 동시에 나의 삶을 그 가르침과 모순되게 살아 간다면, 그 가르침이 실행 불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것 말고 내게 무엇이 남겠는가? 말로는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신성하다고 인정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비기독교적인 가르침을 고백하였으며 나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비기독교적인 제도들을 인정하고 복종하고 있었다.
구약성서 전체는 유태인들의 불행들은 그들이 거짓된 신들을 믿고 참된 신을 믿지 않은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무엘은, 사무엘 전서 8장 및 12장에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과거의 모든 불복종에다 그들은 한가지 새로운 것을 더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왕이었던 하나님 대신에 그들은 인간 왕을 선출하였으며, 그가 그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헛된 것’을 믿지 말라고 사무엘은 사람들에게 말한다(12장 21절). 그것은 유익하지도 않고 구원하지도 못하리니, 그것은 ‘헛된 것’- ’공허함’- 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왕과 더불어 멸망치 않으려면, 유일하신 하나님을 붙들라.
그리고 나를 진리로부터 가린 것은 바로 ‘헛된 것’, 즉 공허한 우상에 대한 신앙이었다. 그것으로 향하는 길 위에, 나에게서 진리의 빛을 가리면서, 그런 ‘헛된 것들’이 서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어느날 나는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궁의 브로비스키 문 쪽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문 앞에는 한 늙은 절름발이 거지가 앉아 있었는데, 누더기로 귀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주려고 지갑을 꺼냈다. 바로 그때, 크레믈린 성 쪽에서 씩씩하고 혈색 좋은 청년이 달려 내려 왔는데, 그는 양가죽으로 만든 제복을 입은 근위병이었다.그 거지는 병사를 보자마자 놀라 벌떡 일어나서, 알렉산드로프 공원 쪽으로 다리를 절름거리며 뛰어내려 갔다. 근위병은 그를 따라 잡으려 했지만 놓쳐버리고는 멈추어 섰다 그리고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 앞에 앉아 있었던 거지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그 근위병을 문에서 기다렸다. 그가 내게 다가 왔을 때, 나는 그가 글을 읽을 수 있는지 물었다.
‘알지요, 그런데 그것이 어떻단 말입니까?’ ‘당신을 복음서를 읽었소?’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를 읽어 보았는가?’ 그리고 나는 그 구절을 인용했다. 그는 그것을 알고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나는 그가 당황해 하는 것을 알았다. 지나가는 두 사람이 멈추어서 귀를 기울였다. 근위병은,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거지들을 그들이 쫓겨나야 할 곳에서 쫓아 냄으로써, 갑자기 악의 편에 있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마음이 편치 않음이 명백했다. 그는 당황해서 분명히 변명할 거리를 찾고 있었다. 돌연히 그의 영리한 까만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마치 갈 것처럼 나의 옆으로 돌아섰다. ‘그러면 당신은 군대의 규정을 읽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나는 그것을 읽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말씀 삼가십시오’ 하고 그 근위병은 그의 머리를 의기양양하게 흔들면서 말했다, 그리고 옷 매무새를 고치고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초소로 나아갔다. 이 사람이, 나의 모든 인생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사회적 상황이, 그것이 무엇이든지, 나와 대치하고 있는 그리고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일컫는 각 개인과 대치하고 있는 외면적인 문제를 상당히 논리적으로 해결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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