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 Believe
(나는 무엇을 믿는가)
복음서의 가르침
나는 내가 왜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이제는 어떻게 그리고 왜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었는지 두 권의 방대한 작품에서 말했다: [교리적 신학의 비판] 그리고, [해설을 통한, 네 가지 복음서의 새로운 해석과 일치점]. 나는 이들 작품에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숨기는 모든 것들을 질서있게 그리고 차근차근히 조사하고, 사복음서를 한 구절씩 번역하고, 비교하며, 결합하려고 한다.
6 년 동안 이것이 나의 작업이 되어왔다. 매년, 매월 나는 나의 기본적인 생각에 대한 한층 새로운 해석들과 확증들을 발견하고, 성급함이나 과욕으로 나의 작품 속에 스며든 오류를 시정하며, 이루어진 것들에 더해 나갔다. 나의 삶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아마도 이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끝날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필요한 것이며, 그래서 아직 생명이 있는 한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갈 것임을 확신한다.
신학과 복음서들에 관한 오랫동안의 외면적 작업은 이러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나의 내면적 작업은 달랐다. 그것은 신학과 원문들의 조직적인 조사가 아니라, 가르침의 참 뜻을 가리는 모든 것을 즉각 버리며, 진리의 빛에 따른 즉각적인 설명이었다. 그것은 부정확한 도면으로, 뒤죽박죽이 되어있는 조그만 파편들의 대리석 더미로부터 무엇인가를 재건축하려고 헛되이 애를 쓰다가, 만일 갑자기 커다란 조각으로부터 그것이 상상하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조상임을 짐작하고, 그것을 재구성하기 시작하고, 조각들이 이전처럼 앞뒤가 맞지 않음 대신에, 그 갈라진 단면들의 모든 곡선들이 다른 조각들에 맞아 들어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게 되는, 각각의 조각에 대한 확신을 찾게 된 사람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 그것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었으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의 열쇠를 찾았는지를 설명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열쇠가 나에게 모든 의심을 제거한 명료함과 확신으로서 진리를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이 발견은 나에게 이렇게 일어났다. 아직 어릴 때 내가 처음 스스로 복음서들을 일기 시작한 뒤로, 무엇보다도 나에게 감동을 주고 영향을 준 것은 사랑, 온유함, 겸손, 자기 희생, 그리고 악을 선으로 갚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다. 이러한 것은 언제나 나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본질이었다 - 그 안에서 나의 마음은 사랑하였고, 그것을 위해서, 절망과 불신을 두루 겪은 뒤에, 나는 노동하는 기독교 민중들이 삶에 부여하는 의미를 참으로 받아들였으며, 나도 그들이 고백하는 신앙, 즉 정통교회의 신앙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교회에 복종하였지만, 나는 곧 교회의 가르침에서는 내게 가장 중요하다고 느껴지던 기독교의 원리들에 대한 확증이나 설명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게 소중하게 느껴지던 기독교의 모습은 교회의 가르침에서는 핵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게 있어서 그리스로의 가르침 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이던 것은 교회에 의해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회는 다른 어떤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교회의 가르침의 이런 기이함에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글쎄, 그게 무슨 상관인가?’하고 나는 생각했다 - 교회는, 사랑, 겸손, 그리고 자기 희생 뿐만 아니라, 교리적, 외면적 의미 또한 인정한다. 이것은 나에게 이질적이며 심지어 나에게 거부감을 주지만, 그 안에 해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내가 교회에 복종하여 오랫동안 살면 살수록, 이런 교회의 가르침의 특징이 처음에는 내게 그렇게 해롭지 않다고 느껴지던 것이 점점 부각되었다. 교회는 교리의 이상함 그리고 박해들과 사형들, 그리고 전쟁들을 받아 들이고 인정함으로써 나에게 거부감을 주었다. 또한 다양한 교회 집단들의 상호 비방도 나를 역겹게 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나의 신뢰를 산산 조각 낸 것은 바로 내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본질로서 느껴지는 것에 대한 교회의 냉담함이었으며, 내게 본질적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것을 대한 편애함이었다.
나는 무엇인가가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느꼈으나, 무엇이 잘못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분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교회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핵심적인 것이라고 내게 느껴지던 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적으로 인정하였고, 어쨌든 그것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핵심적인 것이 더 이상 첫번째 자지를 차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본질적인 것을 부정함에 대해 나는 교회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교회는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방법으로 본질적인 문제를 인정하였다; 교회는 내가 그로부터 기대하던 것을 내게 주지 않았다.
나는 허무주의에서 교회로 전환했다, 왜냐하면 신앙 없이는, 나의 동물적인 본능들을 떠나서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삶이 불가능함을 오직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지식을 나는 기독교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지만, 그 당시 내게 나타난 기독교는 단지 어떤 특정한 마음의 틀이었으며, 매우 부정확하였고, 그것으로부터 명료하고 의무적인 행위의 법칙들이 도출될 수 없었으며, 나는 그런 법칙들을 찾으려고 교회로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내게 소중한 마음의 상태로 전혀 데려다 주지 않는 법칙들을 주었고, 그러면서 오히려 나를 그것으로부터 떼어 놓았으며, 나는 교회를 따라갈 수 없었다. 나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것은 기독교의 진리들을 토대로 하는 삶이었다; 교회는 그러나 내가 귀중히 여기는 진리들과는 매우 이질적인 삶의 법칙들을 내게 주었다. 교리들, 성사들의 준수, 금식들, 그리고 기도들에 관해서 교회에 의해 주어진 법칙들은, 내게는 불필요하였으며, 기독교의 진리들을 토대로 하는 법칙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교회의 법칙들은 오직 나의 삶에 의미를 주었던 그런 기독교적인 마음의 틀을 약화시키거나 때로는 명백히 파괴하였다. 무엇보다도 나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모든 인간의 악들- 개인들, 민족들, 다른 종교들을 비난함, 그리고 그런 비난들로부터 초래되는 처형들과 전쟁들- 이 모두 교회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겸손, 판단하지 않음, 상처를 용서함, 자기 희생 및 사랑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말로서만 찬양 될 뿐이었으며, 하지만 동시에 실제에 있어서 교회는 이런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러하므로 이런 모순들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내게 언제나 놀랍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복음서에 대한 지식에 관한한, 정확한 교회의 교리들이 기초로 하는 그런 구절들은 가장 애매하였으며, 반면에 실제적인 가르침을 인용한 것들은 가장 명료하며 가장 정확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교리들과 그것들로부터 발생하는 그들 교회의 의무들은 교회에 의해서 가장 명료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정의되었으며, 한편으로 가르침의 실제적 이행에 관한 언급은 가장 부정확하며, 모호하고 신비적인 방법으로 행해졌다. 그리스도가 그의 가르침을 설교할 때, 정말 이런 일을 원했을까? 나의 의문들에 대한 해답은 오직 복음서들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모든 것들 중에서, 산상수훈이 언제나 특별한 무엇으로 나의 앞에 부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것을 자주 읽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가 그러한 권위로서 말한 적이 없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모든 사람의 가슴에 직접 호소하는, 그토록 많은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도덕적인 규칙들을 준 적이 없다. 그 어느 곳에서도 그토록 많은 일반 대중 앞에서 말한 적이 없다. 만일 어떤 명료하고, 정확한 기독교적인 규칙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이곳에서 표현되었어야 한다. 산상수훈이 들어 있는 마태복음의 세 장들 안에서 나의 당혹함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나는 산상수훈을 자꾸만 읽었으며 그때마다 똑 같은 느낌을 경험했다: 뺨을 돌려 대고, 자신의 옷을 양보하고,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며, 자신의 원수들을 사랑함에 대한 행들에 대한 뿌듯한 전율을 느꼈지만, 또한 불만의 느낌도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설교 된 하나님의 말씀들이 명료하지 않았다. 모든 것에 대한 너무나 불가능한 포기가 요구되었다, 내가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모든 삶을 파괴하라는 것이었으며, 그러므로 그 같은 포기는 구원의 의무적인 주건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그렇지 않다면, 정확하고 명료한 것은 없었다. 나는 산상수훈 하나만 읽은 것이 아니라, 모든 복음서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모든 신학적인 주해서들을 읽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들은 사람들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완성도를 지적하는 것들일 뿐이며, 타락한 사람은, 죄에 빠져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이런 완성에 이를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안전은 신앙, 기도, 그리고 성사들에 놓여 있다는 설명- 그런 설명들은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나는 이런 설명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의 완성이 사람의 개인적인 힘에 의해서 성취될 수 없음을 사전에 알면서도, 제각기 개인적인 사람에게 관계되는 그토록 명료하고 찬란한 규칙들을 주었는지 나에겐 언제나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규칙들을 읽으면 그것들은 언제나 나와 직접 관련이 있으며 나의 개인적인 이행을 성취를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들을 읽으면서, 나는 언제나 나는 즉각, 바로 그 시간부터, 그것들 모두를 실행할 수 있다는 즐거운 확신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행하고자 희망하고 애를 썼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행함에 어려움을 경험하자마자, 나는 저절로 사람은 약하며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이것들을 행할 수 없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기억했다, 그리고 나는 약해졌다. 그들은 내게 우리는 반드시 믿고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믿음 적다는 것을 느꼈고, 그러므로 기도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된다고 말했다-바로 그 믿음이 기도를 가능하게 하고 다시 믿음을 주고 기도를 가능하게 하고-그렇게 영원히 반복된다.
그러나 이성과 경험은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행하려는 나의 노력들 만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의 신성을 증명하고 반증하는 무수히 많은 헛된 탐구들과 연구들 끝에, 그리고 많은 의혹들과 많은 고통 끝에, 나의 마음과 그 신비한 책은 다시 홀로 남겨졌다. 나는 그것에 다른 사람들이 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고, 다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었으며, 그것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오직 유식한 비평가들의 모든 설명들과 유식한 모든 신학자들의 모든 설명들을 통틀어서 믿지 않기로 한 뒤에, 그 모든 것들을 버리고 나서야 (‘돌아서서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서), 나는 갑자기 내가 이전에 깨닫지 못하던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것을 어떤 인위적이며 난해한 치환법, 일치, 또는 재해석의 결과로서 깨닫지 않았다; 반대로, 내가 모든 해석들을 잊어 버리자 모든 것이 나에게 자명하게 밝혀졌다. 나에게 복음 전체의 열쇠로서 작용한 구절은 마태복음 5장 38절 및 39절이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자를 대적치 말라’ 그리고 갑자기, 처음으로, 이 행을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그리스도가 자신이 말하는 것을 바로 말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즉시 일어난 것은 어떤 새로운 것 자체가 드러난 것이 아니라, 진리를 흐리게 하던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갔으며, 진리가 그 완전한 의미로 나의 앞에 떠오른 것이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자를 대적치 말라.’ 이 말씀들이 갑자기 나의 앞에 전혀 새로운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마침 내가 이전에 그것들을 읽은 적이 없는 것처럼. 전에 그 구절을 읽을 때에는, 나는 언제나, 어떤 이상한 맹목성에 의해서,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자를 대적지 말라’는 말씀을 빠트린 것이다, 마치 그런 말씀들이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또는 그것들이 아무런 확정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결국, 복음서에 익숙한 아주 많은 기독교인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가끔 그런 말씀들에 대한 똑 같은 맹목성에 주목할 기회가 있었다. 아무도 그것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끔 그 구절에 대해 말할 때 기독교인들은 그 말씀들이 사실로 복음서에 존재하는지 참조하기도 하였다. 똑같이, 나도 그 말씀들을 보지 못했으며 오직 다음에 오는 말씀에 있는 구절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누구든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도 돌려대라…’ 등과 같이; 그리고 이 말씀들은 사람들에게 부자연스러운 고통들과 손실들을 참으라는 요구로 언제나 나에게 느껴졌다. 그 말씀들이 나를 감동시켰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이행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단순히 고통 받기 위해서 그것들을 수행할 만큼은 결코 강하지 못할 것이라고 느꼈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래 좋다, 나는 다른 뺨을 돌려대자, 그러면 나는 다시 얻어맞을 것이다. 나는 원하는 것을 줄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것이다. 나는 생명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것을 빼앗겨야 하는가? 그리스도가 그것을 요구할 리가 없다.’ 이것이 이전에 내가 자신에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씀들 속에서 그리스도는 고통들과 손실들을 예찬하였으며, 그것들을 예찬하고 있으며, 과장을 하며 그래서 정확치 않고 애매하게 말했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지금, 악한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을 깨닫자, 그리스도는 과장하지 않고 있으며, 고통을 위한 어떤 고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명확하게 그리고 명료하게 그가 말한 것을 말한다는 것이 내게 분명해졌다. 그는 말한다: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라, 그리고 이것을 행함에 있어서,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라, 당신의 한쪽 뺨을 때리고서 저항을 받지 않으면, 다른 뺨을 때릴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겉옷을 빼앗고 나서 속옷 또한 빼앗을 것이다; 당신의 수고를 이용하였으면서, 당신에게 더 많은 수고를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빚진 것을 갚지 않을 것이다…이것들이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악한 사람에 저항을 삼가는 것을 계속하라.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때리고 당신을 욕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 그리고 내가 말해진 대로의 이 말씀을 깨달았을 때, 갑자기 애매한 모든 것들이 명료해졌고, 과장되었다고 느껴지던 것이 매우 정확해졌다. 나는 처음으로 전체 사상의 무게 중심이,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라’ 는 말씀에 있으며, 따라 오는 것은 오직 그 처음 명제의 설명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리스도가 우리가 고통 받기 위해서 뺨을 내밀고 옷을 포기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고통을 겪어야 함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덧붙였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먼 곳으로 여행을 보내면서, 아들에게 밤에 자지 말고 그리고 충분히 먹지 말고, 그리고 비에 젖고, 그리고 꽁꽁 얼어버릴 것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말하기를, ‘길을 가라, 그리고 만일 비에 젖고 얼더라도, 너의 여행을 계속하라’고 말함과 같다. 그리스도는, ‘너의 옷을 바치고 고통 받으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자를 대적하지 말라’,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런 말씀들, ‘악에 저항하지 말라’ 또는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라’ 는 그것들의 직접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서, 무엇보다도, 나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사상의 열쇠였다, 그리고 내가 명료하고 확실한 말씀들을 그토록 철저히 오해하였다는 것이 놀라와 졌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악한 자가 너희에게 어떤 짓을 하더라도 참아라 그리고 굴복하라, 그에게 저항하지 말라.’ 이보다 더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분명한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오직 이런 말씀들을 말하여진 그대로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이해하자마자, 그리스도의 전체 가르침이, 산상수훈에서 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혼란스러웠던 모든 것들이 분명해졌다; 모순되어 왔던 것이 조화로워 졌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쓸모 없이 보였던 것이 본질적인 것으로 변했다. 모든 것이 병합되어서 하나의 전체로 되었고, 마치 깨어진 조상(調像)의 조각들이 그들의 본래의 위치에 놓여 진 것처럼, 한 가지 사실이 의심할 여지없이 다른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산상수훈에 그리고 복음서들 전체에 있는 모든 것은 악에 대한 무저항에 대해 똑 같은 가르침을 확증하였다. 이 설교에서, 다른 어느 곳에서처럼, 그리스도는 결코 그의 제자들을, 즉, 악에 대한 무저항의 법칙을 실행하는 사람들을, 뺨을 때리는 자에게 뺨을 돌려 대고, 옷을 포기하고, 박해 받고, 매를 맞고, 그리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으로 말고는 타내지 않았다.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오직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 만이 그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오직 악에 대한 무저항의 법칙의 실행으로부터 초래되는 모든 결과들을 견뎌 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그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는 말한다: ‘거지가 되라; 악에 저항함이 없이 박해, 고통,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그 자신도 악에 저항하지 않고 고통과 죽음에 대비한다, 그리고 베드로를 쫓아 버리는데 그가 이것을 불평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악에 대한 저항을 금지하면서 죽는다 그리고 자신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모든 초기의 제자들은 이런 무저항의 명령을 실행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가난과 박해 속에서 보냈으며, 결코 악을 악으로 돌려 주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말하고자 하는 그대로 말한다. 이런 규칙을 언제나 이행하는 것은 매우 힘든다고 단언할 수 있다. 만일 제각기 사람이 이 규칙을 이행한다면 행복할 것이라는 주장에 찬성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이 우둔함으로써 추종한 현실성 없는 규칙들을 제안한 몽상가요 이상주의자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것은 우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아주 명료하고 정확하게 자신이 말하고자 의도한 것을, 즉, 그의 가르침에 따라서 사람은 악에 저항하지 말아야만 하며,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악에 저항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정말 불가능하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나 이렇게 단순하고, 명료한 그리스도의 말씀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출처 : http://www.cyberspacei.com/jesusi/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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