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18> 태국―참전용사 父子‘代이은 인연’
《6·25전쟁은 많은 사람에게 슬픔과 고통을 남겼지만 참전국 병사와 그 가족에게는 한국과 의미 있는 인연을 맺어주기도 했다. 이들에게 한국은 ‘제2의 고향’이다. 태국 육군대학 부총장인 통숙 타나꼰 대령(55)에게 6·25전쟁은 소중한 인연들을 만들어줬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아버지로 인해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은 통숙 대령은 한국에서 두 차례 근무했고 한국인을 아내로 맞았다.》
“아버지 세대가 피흘린 한국서 군생활-결혼… 제2의 고향”
육군대 부총장 통숙 대령
한국인 아내 만나 결혼…두 아이 출생지도 서울
통숙 위차이 씨 |
육군대 부총장 통숙 대령
한국인 아내 만나 결혼…두 아이 출생지도 서울
“부친이 남긴 인연에 감사”
6·25때 태국군 활약
美 이어 두번째 파병 결정
총인원 8693명 참전…포크찹-사동전투 큰 성과
방콕 시내에 있는 육군대학 내 부총장 접견실에서 만난 통숙 대령은 가벼운 인사가 끝나자마자 군복 왼쪽 앞주머니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가로 2cm, 세로 5cm 크기의 사각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는 금으로 된 불상이 있었다.
“아버지가 6·25전쟁 때부터 간직하던 불상인데 돌아가시면서 남겨주셨습니다. 저도 늘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통숙 대령의 아버지 통숙 위차이 씨(1925∼1970)는 태국 육군 군의학교에서 4년간 교육을 받은 뒤 장교로 임관했다. 그는 중위였던 28세 때 6·25전쟁 참전을 결심했다. 그의 첫 복무지는 경기 포천시 운천리 일대였다. 1953년 한국에 도착해 경기 일대 주요 전투지를 전투부대와 함께 이동하며 부상당한 환자들을 돌봤다.
1954년 어느 날 동료 병사들이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환자들이 있다는 현장으로 직접 차를 몰고 갔다. 비포장 길을 가던 중 차 아래에서 큰 폭음이 났고 그가 탔던 차는 심하게 파손됐다. 지뢰가 터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찰과상 정도만 입었을 뿐 크게 다치지 않았다.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불상이 자신을 지켜줬다고 믿었다고 한다. 당시 사고로 불상은 두 동강이 났고 지금은 통숙 대령이 그 불상을 수리해 지니고 다닌다.
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6·25전쟁 참전을 결정했고,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파병을 발표했다. 특히 육해공 3군 전투 병력을 모두 파병한 8개국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육군 1개 대대, 해군 프리깃함 2척과 수송선 1척, 공군 수송기 3대를 파견했다. 육해공군 및 적십자 요원 등을 모두 합쳐 총인원 8693명이 참전했다.
6·25전쟁 때 보여준 용맹성 때문에 태국군은 ‘작은 호랑이’(Little Tiger·태국 사람의 체구가 서양인보다 작지만 용맹하다는 의미에서 비롯됐다고 한다)라는 애칭을 얻었다.
태국군은 1950년 11월 7일 부산에 입항해 평양으로 이동했다. 첫 임무는 평양에서 유엔군의 철수작전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1·4후퇴 직후 미군 제1기병사단에 배속돼 1951년 3, 4월 반격작전을 수행하며 강원 화천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이후 1951년 8월 경기 연천 율동전투, 1952년 11월 경기 연천 서북쪽 포크찹고지(Pork Chop Hill)전투, 1953년 3월 경기 연천 고랑포 나부리전투, 7월 강원 김화 사동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아버지는 통숙 대령이 1970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던 날 교통사고로 숨졌다.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군인의 길로 들어서는 그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통숙 씨는 군의관으로서 대령 진급이 확정된 상태였다.
통숙 대령은 장교로 임관한 뒤 아버지가 참전했던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국을 경험할 기회가 찾아왔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태국 연락장교로 1987년부터 1년간 한국에서 근무를 하게 됐다. 그에게 찾아온 기회는 한국 근무뿐만이 아니었다. 연락장교로 있는 동안 주한 태국대사관을 자주 찾았는데, 이때 대사 비서였던 이경희 씨(46)에게 반해 1988년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인 이 씨는 서강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통숙 대령은 위탁교육생 선발시험에 합격해 1990년 한국 육군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기 위해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 서울대에서 한국어 공부를 한 뒤 육군대학에서 기본과정과 고급과정을 이수하고 1992년 태국으로 돌아갔다. 이 기간에 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통숙 대령의 두 아들이 태어난 곳은 태국이 아닌 서울 은평구 녹번동이다.
통숙 대령은 “한국말을 많이 잊어버렸다”면서도 천천히 한국어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국 사람이 다 된 것 같습니다. 한국은 제2의 고향입니다. 한국이 발전한 것과 한국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에 늘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한국과 인연을 맺게 해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泰의사-간호사 68명 참전
야전 후송병원에서 근무 “공산주의에 맞서려 지원”
6·25전쟁에 참전한 태국군에는 민간인 의사와 간호사 등이 적잖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태국적십자 소속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총인원은 68명.
이들 가운데 일부가 3월 말 방콕 교외에 위치한 타안반슥 참전용사촌 내 한 정자에 모였다. 참전용사촌은 태국 정부가 1950년대 6·25전쟁에 참전한 장병들을 위해 땅을 아주 싼 값으로 제공해 세워졌다.
“잠을 잘 때 항상 나침반을 손에 꼭 쥐고 잤죠. 북한군이 밤새 쳐들어와 나를 붙잡아 가면 몰래 탈출해 남쪽으로 도망치려고요. 당시 22세였는데 아마 태국에서 참전한 간호사 가운데 가장 어렸을 겁니다. 후방이었지만 늘 폭탄 소리가 나서 밤마다 무서워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빠윤 아룬렉 씨(81·여)는 19명의 동료 간호사와 함께 1951년 7월 부산에 도착한 뒤 ‘부산 121 야전후송병원’에서 주로 미국 캐나다 터키 환자들을 돌봤다. 빠윤 씨는 50여 명의 환자가 있는 1층 병동을 담당했다. 그는 “후송되고 싶어서 자기 발목에다 총을 쐈던 알렉산더라는 미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당시 병원 내 규율이 엄해 간호사들은 바지만 입어야만 했고 립스틱도 바르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1950년 10월부터 ‘8054 후송병원’에서 외과수술을 담당했던 의사 차뚜라뽄 홍사브라밧(84) 씨는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당시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를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 부산으로 가는 배에 탔다”고 말했다. 그는 주로 부상한 한국군과 미군을 맡았는데 포탄 파편이나 총에 맞은 환자, 그리고 동상에 걸린 환자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파도처럼 밀려온 적군… 맞서 싸운 40명 중 2, 3명만 생존”
■ 전투일지 남긴 태국군 대대장 쁘라윤 씨
‘담롱 유포 중위가 끝까지 싸우며 아군 자리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적군은 앞줄에 있던 병사들이 쓰러지면 바로 뒷줄에서 또다시 총알받이를 하려고 밀려왔다. 파도처럼 적군이 밀려왔다. 밀려오는 적군을 보고 아군 중에서 이탈자가 속출했다. … 40명의 병력을 진지로부터 2km 이상 진격시켰다. 후방에서는 야포 지원사격을 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 인원은 두세 명밖에 없었다. 1km만 전진하도록 했어야 했다. 속상하다.’
1951년 11월 13일 태국군 대대장(중령)이던 쁘라윤 눗깐짜나꾼 씨(94·예비역 육군 중장·사진)가 경기 지역에서 벌어진 한 전투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쁘라윤 씨는 중요한 전투가 벌어질 때면 메모지에 꼼꼼히 전투일지를 기록했고 전쟁이 끝난 뒤 노트 한 권에 모두 옮겨 적었다.
그는 “한국이 태국보다 춥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정말 추웠다. 태국군 중 많은 병력이 추위 때문에 발이 얼어 걸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며 “많은 병력의 전사 소식을 접하면 한국군 장교들이 자주 ‘속상해’라는 말을 해 ‘속상해’라는 한국말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태국군이 참여한 전투 가운데 큰 승리를 거둔 것은 포크찹고지 전투다. 태국군 대대가 미군 제2사단에 배속돼 경기 연천 서북쪽 저항선을 방어하던 중 중공군 제113사단 예하 2개 연대와 치른 전투다. 1952년 11월 1일부터 열흘간 벌인 전투에서 태국군은 12명이 전사하고 57명이 다쳤다. 반면 중공군은 204명이 죽고 400여 명이 부상했다. 중공군은 1952년 11월 1일과 7일, 1953년 1월 10일 야간공격으로 포크찹고지의 방어시설물을 파괴했다. 그러나 태국군은 돌격해 오는 중공군을 백병전으로 물리쳤다.
태국한국전참전용사회 회장인 차웽 용차른 씨(90·씨비역 육군 대장)는 포크찹고지 전투 당시 인사 담당 소령이었다. 그는 “1952년 11월 10일 밤 중공군 2개 중대가 태국군 8명이 경계를 서는 동쪽 지역으로 진격해 와 처음으로 백병전을 치렀고 공격은 다음 날 오전 4시까지 계속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후방에 있던 대대장이 최전선의 병사들에게 무전기로 ‘짜이 옌 옌(진정하라), 마이 떵 끌루어(무서워하지 마라)’를 반복했다”며 “태국군의 용맹과 미군의 105mm, 155mm 포 72문의 화력 지원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6·25때 태국군 활약
美 이어 두번째 파병 결정
총인원 8693명 참전…포크찹-사동전투 큰 성과
통숙 타나꼰 대령 |
“아버지가 6·25전쟁 때부터 간직하던 불상인데 돌아가시면서 남겨주셨습니다. 저도 늘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통숙 대령의 아버지 통숙 위차이 씨(1925∼1970)는 태국 육군 군의학교에서 4년간 교육을 받은 뒤 장교로 임관했다. 그는 중위였던 28세 때 6·25전쟁 참전을 결심했다. 그의 첫 복무지는 경기 포천시 운천리 일대였다. 1953년 한국에 도착해 경기 일대 주요 전투지를 전투부대와 함께 이동하며 부상당한 환자들을 돌봤다.
1954년 어느 날 동료 병사들이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환자들이 있다는 현장으로 직접 차를 몰고 갔다. 비포장 길을 가던 중 차 아래에서 큰 폭음이 났고 그가 탔던 차는 심하게 파손됐다. 지뢰가 터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찰과상 정도만 입었을 뿐 크게 다치지 않았다.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불상이 자신을 지켜줬다고 믿었다고 한다. 당시 사고로 불상은 두 동강이 났고 지금은 통숙 대령이 그 불상을 수리해 지니고 다닌다.
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6·25전쟁 참전을 결정했고,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파병을 발표했다. 특히 육해공 3군 전투 병력을 모두 파병한 8개국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육군 1개 대대, 해군 프리깃함 2척과 수송선 1척, 공군 수송기 3대를 파견했다. 육해공군 및 적십자 요원 등을 모두 합쳐 총인원 8693명이 참전했다.
6·25전쟁 때 보여준 용맹성 때문에 태국군은 ‘작은 호랑이’(Little Tiger·태국 사람의 체구가 서양인보다 작지만 용맹하다는 의미에서 비롯됐다고 한다)라는 애칭을 얻었다.
아버지는 통숙 대령이 1970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던 날 교통사고로 숨졌다.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군인의 길로 들어서는 그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통숙 씨는 군의관으로서 대령 진급이 확정된 상태였다.
통숙 대령은 장교로 임관한 뒤 아버지가 참전했던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국을 경험할 기회가 찾아왔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태국 연락장교로 1987년부터 1년간 한국에서 근무를 하게 됐다. 그에게 찾아온 기회는 한국 근무뿐만이 아니었다. 연락장교로 있는 동안 주한 태국대사관을 자주 찾았는데, 이때 대사 비서였던 이경희 씨(46)에게 반해 1988년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인 이 씨는 서강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통숙 대령은 위탁교육생 선발시험에 합격해 1990년 한국 육군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기 위해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 서울대에서 한국어 공부를 한 뒤 육군대학에서 기본과정과 고급과정을 이수하고 1992년 태국으로 돌아갔다. 이 기간에 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통숙 대령의 두 아들이 태어난 곳은 태국이 아닌 서울 은평구 녹번동이다.
통숙 대령은 “한국말을 많이 잊어버렸다”면서도 천천히 한국어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국 사람이 다 된 것 같습니다. 한국은 제2의 고향입니다. 한국이 발전한 것과 한국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에 늘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한국과 인연을 맺게 해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6·25전쟁에 참여했던 태국 간호사들이 낙동강 전선에서 태국군이 설치한 기관총을 만져 보고 있다. 사진 제공 태국간호사협회 |
야전 후송병원에서 근무 “공산주의에 맞서려 지원”
6·25전쟁에 참전한 태국군에는 민간인 의사와 간호사 등이 적잖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태국적십자 소속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총인원은 68명.
이들 가운데 일부가 3월 말 방콕 교외에 위치한 타안반슥 참전용사촌 내 한 정자에 모였다. 참전용사촌은 태국 정부가 1950년대 6·25전쟁에 참전한 장병들을 위해 땅을 아주 싼 값으로 제공해 세워졌다.
“잠을 잘 때 항상 나침반을 손에 꼭 쥐고 잤죠. 북한군이 밤새 쳐들어와 나를 붙잡아 가면 몰래 탈출해 남쪽으로 도망치려고요. 당시 22세였는데 아마 태국에서 참전한 간호사 가운데 가장 어렸을 겁니다. 후방이었지만 늘 폭탄 소리가 나서 밤마다 무서워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빠윤 아룬렉 씨(81·여)는 19명의 동료 간호사와 함께 1951년 7월 부산에 도착한 뒤 ‘부산 121 야전후송병원’에서 주로 미국 캐나다 터키 환자들을 돌봤다. 빠윤 씨는 50여 명의 환자가 있는 1층 병동을 담당했다. 그는 “후송되고 싶어서 자기 발목에다 총을 쐈던 알렉산더라는 미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당시 병원 내 규율이 엄해 간호사들은 바지만 입어야만 했고 립스틱도 바르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1950년 10월부터 ‘8054 후송병원’에서 외과수술을 담당했던 의사 차뚜라뽄 홍사브라밧(84) 씨는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당시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를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 부산으로 가는 배에 탔다”고 말했다. 그는 주로 부상한 한국군과 미군을 맡았는데 포탄 파편이나 총에 맞은 환자, 그리고 동상에 걸린 환자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 전투일지 남긴 태국군 대대장 쁘라윤 씨
‘담롱 유포 중위가 끝까지 싸우며 아군 자리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적군은 앞줄에 있던 병사들이 쓰러지면 바로 뒷줄에서 또다시 총알받이를 하려고 밀려왔다. 파도처럼 적군이 밀려왔다. 밀려오는 적군을 보고 아군 중에서 이탈자가 속출했다. … 40명의 병력을 진지로부터 2km 이상 진격시켰다. 후방에서는 야포 지원사격을 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 인원은 두세 명밖에 없었다. 1km만 전진하도록 했어야 했다. 속상하다.’
1951년 11월 13일 태국군 대대장(중령)이던 쁘라윤 눗깐짜나꾼 씨(94·예비역 육군 중장·사진)가 경기 지역에서 벌어진 한 전투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쁘라윤 씨는 중요한 전투가 벌어질 때면 메모지에 꼼꼼히 전투일지를 기록했고 전쟁이 끝난 뒤 노트 한 권에 모두 옮겨 적었다.
그는 “한국이 태국보다 춥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정말 추웠다. 태국군 중 많은 병력이 추위 때문에 발이 얼어 걸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며 “많은 병력의 전사 소식을 접하면 한국군 장교들이 자주 ‘속상해’라는 말을 해 ‘속상해’라는 한국말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태국군이 참여한 전투 가운데 큰 승리를 거둔 것은 포크찹고지 전투다. 태국군 대대가 미군 제2사단에 배속돼 경기 연천 서북쪽 저항선을 방어하던 중 중공군 제113사단 예하 2개 연대와 치른 전투다. 1952년 11월 1일부터 열흘간 벌인 전투에서 태국군은 12명이 전사하고 57명이 다쳤다. 반면 중공군은 204명이 죽고 400여 명이 부상했다. 중공군은 1952년 11월 1일과 7일, 1953년 1월 10일 야간공격으로 포크찹고지의 방어시설물을 파괴했다. 그러나 태국군은 돌격해 오는 중공군을 백병전으로 물리쳤다.
태국한국전참전용사회 회장인 차웽 용차른 씨(90·씨비역 육군 대장)는 포크찹고지 전투 당시 인사 담당 소령이었다. 그는 “1952년 11월 10일 밤 중공군 2개 중대가 태국군 8명이 경계를 서는 동쪽 지역으로 진격해 와 처음으로 백병전을 치렀고 공격은 다음 날 오전 4시까지 계속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후방에 있던 대대장이 최전선의 병사들에게 무전기로 ‘짜이 옌 옌(진정하라), 마이 떵 끌루어(무서워하지 마라)’를 반복했다”며 “태국군의 용맹과 미군의 105mm, 155mm 포 72문의 화력 지원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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