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우주만물]세상만사

[만물상]이달의 독서인

好學 2010. 6. 25. 21:28

 

[만물상]이달의 독서인

 

 

 

세조 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김수온은 남에게서 책을 빌리면 한 장씩 뜯어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며 외우다 웬만큼 외울 만하면 아무 데나 버렸다.

신숙주가 아끼는 고서 한 권을 김수온이 와서 보고 빌려 달라고 했다.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줬더니 몇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신숙주가 그의 집을 찾아가 보니 빌려준 책으로 벽을 도배해 놓았다.

“누워 읽자니 이게 더 편할 것 같아 그랬소이다.”

 김수온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중국 당대의 사상가로 꼽히는 리쩌허우(李澤厚)는 문화혁명 때 농촌에 하방(下放)돼 ‘노동개조’를 받았다. ‘마오쩌둥 어록’과 마르크스·엥겔스 책 말고는 거의 모든 사상서적이 금서(禁書)로 묶인 시절, 그는 베개 아래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감춰 두고 몰래 읽었다. ‘봉건 사상가’의 책을 읽다 반동으로 몰릴 위험을 무릅쓸 만큼 독서는 그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유일한 실천이었다.


▶실학자 이덕무는 비바람도 못 가리는 빈한한 집에 살면서도 매일같이 책을 읽었다. 겨울밤 이불 위에 ‘한서(漢書)’ 한 질을 덮고 ‘논어’를 병풍처럼 세워 외풍을 막았다. 이렇게 평생 읽은 책이 2만 권이었다. ‘목멱산 아래 어리석은 사람 하나 살았다. 세상 일 알지 못하고 오직 책 보는 일만 즐거움으로 삼았기에 춥거나 덥거나 배고프거나 병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덕무가 스스로에 대해 쓴 글이다.


▶한국독서학회가 새해부터 ‘이달의 독서인’을 선정하기로 하고 ‘1월의 독서인’으로 이덕무를 내세웠다. 학회는 “이덕무가 책 읽기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독서로 얻은 지식을 마음에 새겨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다”고 했다. 학회는 ‘이달의 독서인’ 후보에 김정희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홍대용 한용운 유길준 안확 양주동 등 18명을 올려 놓고 달마다 시기에 맞는 인물을 뽑겠다고 했다. 갈수록 책사랑이 옅어져 가는 피폐한 시대를 일깨워 보려는 뜻이겠다.


▶마침 한 가구가 한 달에 책과 신문 값으로 평균 1만397원밖에 안 쓴다는 통계청 발표도 나왔다. 머리 손질과 장신구 구입 같은 치장 비용의 5분의 1에도 못 미친다니 서글프다. ‘○억 만들기’ 같은 책이 잘 팔린다는 세상에 고문진보(古文眞寶) 한 구절이 깨우침이 될까. ‘가난한 자는 책으로 부자 되고 부자는 책으로 존귀해진다.’ 이덕무의 별명은 ‘간서치(看書痴·책만 읽는 바보)’였지만 그가 지금 우리를 보면 “이 진짜 바보들아” 하고 일갈(一喝)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