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우주만물]세상만사

[만물상] 김경득

好學 2010. 6. 22. 21:28

 

[만물상] 김경득

 

 

“시미즈서(署)의 고이즈미여 기억하는가.

‘너희 조센진놈들. 뭐 제대로 하는 법이 없어’라고 모욕을 지껄여대던 일. 그 답례를 할 때가 왔다.

내 목숨과 바꿔 답해주겠다.”

김희로(본명 권희로)의 수첩에는 찢어지는 가난과 차별 속에 뼛속 깊이 새겨온 원한이 가득했다.

그는 야쿠자 2명을 살해하고 인질극을 벌인 뒤 31년간 수형생활을 했다.

▶역도산. 본명 김신락. 씨름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14세 때인 1938년 일본인 형사가 일본씨름(스모) 선수로 키우려고 일본으로 데려갔다. 일본인의 아들로 입적해 귀화한 뒤 프로레슬러가 된 역도산은 1963년 야쿠자의 칼에 숨질 때까지 타고난 몸과 흥행감각으로 영웅이 됐다. 역도산의 흥행성을 높이기 위해 일본 흥행사들은 그의 기록에서 조선 냄새를 완전히 탈색시켰다.

▶지난달 28일 타계한 김경득 변호사는 거대한 차별의 벽 앞에서 김희로식도 역도산식도 아닌, 일본 속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길을 앞서 닦았던 사람이다. 56년생의 전반부는 철저한 일본인, 후반부는 누구보다 피 뜨거운 한국인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귀화하지 않으면 사법연수원 교육을 받을 수 없고 따라서 변호사 자격도 얻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더 이상 차별을 피하지 않고 차라리 떳떳한 한국인으로 살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그는 1976년 아사히신문 투고란에서 선언했다. “나는 그동안 내 안의 ‘한국적인 것’을 거부해왔다. 한국말 배우는 것도 거부하고 길에서 어머니를 마주쳐도 모르는 척 지나쳤다.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 아르바이트로 모교 와세다대 앞뜰을 쓸며 사법부와 외로운 투쟁을 벌여 마침내는 차별의 벽에 구멍을 뚫었다. 3년 뒤 김경득은 일본 최초의 외국인 변호사가 됐다.

▶“일본의 정책은 차별의 프라이팬에 재일 한국인을 콩 볶듯 해서, 못 이겨 뛰쳐나가는 사람들을 한 명씩 동화시키는 것 아니냐.” 그의 비판은 매서웠다. 종군위안부 소송부터 공무원 국적차별 소송까지 한국인의 아픔이 담긴 재판에는 늘 그가 있었다. 담도암이라는 중병을 얻었지만 투병시간마저 아까워하며 뛰어다녔다. 그가 생전에 못내 안타까워한 것은 해마다 1만명씩 늘어가는 교포 3세의 귀화행렬, 그중에서도 뿌리를 숨기기 위한 ‘도피성 귀화’였다.

그는 세계 유례없이 폐쇄적인 일본의 국적 정책과 관행이 귀화를 다그치고 있음을 꿰뚫어 봤다.

그 강요된 귀화의 행렬이 길어지고 있는 때라 서둘러 떠난 듯한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