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은 1950년 6·25전쟁을 거치면서 20년 넘게 서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화는커녕 1968년 1월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노린 '김신조 일당 무장공비 침투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1970년 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남북이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평화통일 구상을 밝히면서 남북관계는 전기를 맞는다.
- ▲ 1971년 8월 20일 정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남북 적십자사 요원 4명(남북 2명씩)이 총을 들지 않고 악수를 나눴다.
1972년 5월 김일성 당시 수상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간의 '평양 극비 회동'도 적십자 접촉을 계기로 성사됐다. 정부 관계자는 "1971년 8월 첫 회담 이후 남북은 다른 채널을 통해 비밀 접촉을 계속했다"며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4월 26일 그간의 접촉 결과를 보고받고 이후락 중정부장에게 특수지역(북한) 출장에 관한 친필 훈령을 내렸다"고 했다. 분단 이후 통일에 대한 첫 남북 합의인 7·4공동성명도 '김일성·이후락 회동'에서 조율됐다.
물론 1971년 8월 이전에도 남북 당국자가 얼굴을 마주친 적은 있다. 1954년 4월 한반도 통일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정치회담에 우리측 변영태 외무장관과 북측 남일 외무상이 참가했지만 "공식적인 남북 접촉이나 회담으로 보지 않는다"(통일부 당국자)는 설명이다. 지난 8월 28일 끝난 적십자회담까지 남북은 모두 595차례의 공식 회담을 기록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