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대한민국第一號)

[대한민국 제1호] 남북 간 첫 공식회담은 1971년 적십자접촉

好學 2010. 6. 9. 22:19

 

[대한민국 제1호] 남북 간 첫 공식회담은 1971년 적십자접촉

 

 

 

1971년 8월 20일 정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남북 적십자사 요원 4명(남북 2명씩)이 총을 들지 않고 악수를 나눴다. 우리측에선 이창렬·윤여훈, 북측에선 서성철·염종련이 첫 남북 적십자회담 개최를 위한 1차 파견원 접촉에 나섰다. 1948년 분단국이 된 이후 남북 대화 테이블에 마주 앉은 첫 주인공이 된 것이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관계자는 "이창렬·윤여훈씨는 대한적십자사 요원으로 나갔지만 실은 중앙정보부 소속이었다"고 했다.

남북은 1950년 6·25전쟁을 거치면서 20년 넘게 서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화는커녕 1968년 1월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노린 '김신조 일당 무장공비 침투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1970년 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남북이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평화통일 구상을 밝히면서 남북관계는 전기를 맞는다.

1971년 8월 20일 정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남북 적십자사 요원 4명(남북 2명씩)이 총을 들지 않고 악수를 나눴다.
이 맥락에서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는 특별성명을 통해 남북 이산가족의 인간적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적십자회담 개최를 북측에 제의했다. 이틀 뒤인 8월 14일 조선적십자사 손성필 중앙위원장은 평양방송에서 최두선 총재 앞으로 보내는 서한을 발표, 우리측 제의를 수용하면서 "가족만이 아니라 친척·친우까지 포함한 자유 왕래를 실현시키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1971년 8월 20일의 첫 남북 회담이 열리게 됐다. 이후 남북은 1972년 8월 11일까지 5회의 파견원 접촉과 25회의 예비회담을 갖고 본회담 장소·일시·의제에 합의했다. 1차 남북 적십자회담은 1972년 8월 30일 평양에서 열렸다.

1972년 5월 김일성 당시 수상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간의 '평양 극비 회동'도 적십자 접촉을 계기로 성사됐다. 정부 관계자는 "1971년 8월 첫 회담 이후 남북은 다른 채널을 통해 비밀 접촉을 계속했다"며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4월 26일 그간의 접촉 결과를 보고받고 이후락 중정부장에게 특수지역(북한) 출장에 관한 친필 훈령을 내렸다"고 했다. 분단 이후 통일에 대한 첫 남북 합의인 7·4공동성명도 '김일성·이후락 회동'에서 조율됐다.

물론 1971년 8월 이전에도 남북 당국자가 얼굴을 마주친 적은 있다. 1954년 4월 한반도 통일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정치회담에 우리측 변영태 외무장관과 북측 남일 외무상이 참가했지만 "공식적인 남북 접촉이나 회담으로 보지 않는다"(통일부 당국자)는 설명이다. 지난 8월 28일 끝난 적십자회담까지 남북은 모두 595차례의 공식 회담을 기록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