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대한민국第一號)

[대한민국 제1호] 1983년 첫 간염백신, 그건 기적이었다

好學 2010. 6. 8. 21:10

 

[대한민국 제1호] 1983년 첫 간염백신, 그건 기적이었다

 

 

 

1983년 6월 23일, '간 박사'로 유명한 전(前) 서울대 의대 내과 김정용 교수와 제약회사 녹십자 연구진은 대한민국 백신 제1호를 들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순수 국내 기술과 시설로 국내 최초 B형 간염백신 '헤파박스B'가 탄생한 것이다. 미국 제약회사 MSD사와 프랑스 파스퇴르사에 이은 세계 3번째이다. 백신 황무지 나라에서 10여년에 걸친 집념 끝에 얻어낸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인구의 10~13%가 간염 환자인 '간염 왕국'이었다. 40대에 간암이나 간경화로 요절하는 국민들이 속출하던 때였다. 김정용 박사는 연구실에 붓글씨로 쓴 '구인의국(救人醫國)',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라는 좌우명을 걸어놓고 B형 간염백신 개발에 매달렸다. 1970년 초반 미국 하버드대에서 간염 바이러스 분리·정제 기술을 익히고 귀국한 직후였다.
김정용 박사
당시 일본 제약회사 미도리주지사(社)는 'C.Y. Kim'이라는 이름의 한국인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간염 바이러스 관련 국제학술지 논문을 보고 저자인 하버드대 연구원 'C.Y. Kim'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김정용 박사의 영문 이니셜이다. 국내 녹십자사가 미도리주지사의 의뢰를 받고 김 박사를 찾아내자, 사장단이 서울대병원으로 날아왔다. 그러나 김 박사는 일본 방식의 백신 개발을 고집하던 미도리주지사와 결별하고 녹십자와 함께 고군분투를 해야 했다.

그때는 피를 팔고 사는 매혈(賣血)이 가능했다. 연구를 위해 간염 환자의 피가 필요했던 김 박사는 병원에 피 팔러 온 사람들에게 특이한 제안을 했다. 주사를 맞고 매달 한 번씩 5cc의 피를 뽑아주면 헌혈한 값의 돈을 주겠다고 했다. 김 박사는 "그런 환경이 있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연구를 잘할 수 있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백신 사용 승인 허가를 받아야 하나 보건당국은 백신 심사 기준조차 없었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간염백신이 나온 후에야 이를 보고 기준을 만들어 승인이 떨어졌다. 당시 김 박사와 녹십자가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B형 간염백신 시제품을 만들어 놓고도 세계 1호를 놓친 아쉬운 대목이다.

현재 198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의 B형 간염 보균자는 1%가 채 안 된다. 싼값에 국산 백신이 보급된 덕이다. 이후 헤파박스는 아시아 전역에 수출되어 지금까지 5억 도즈(1회 접종 단위)가 넘게 접종됐다. 국산 단일 의약품으로는 최대 수출액을 기록했다.

요즘 신종플루가 유행하면서 백신 확보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녹십자가 유일하게 인플루엔자 백신 제조 기술과 생산 시설을 갖고 있으나 국내 수요량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다시 한번 '구인의국'의 정신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