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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10대 박해

好學 2010. 6. 5. 19:22

 

기독교 10대 박해 

 

 

 

기독교 10대 박해

1) 네로(Nero) 박해 (A.D 37 - 68) 54년에 황제에 오름 예술과 스포츠 광이었다. (1) 원인...로마 대화재 사건 (64년 6월 18일,14구중 3구 전소.7구 반소)

(2) 죄명... 방화 책임을 기독 신자에게 지움.

(3) 처형방법 * 맹견과 사자밥 * 십자가에 못밖음 * 화형

(4) 순교자...바울,베드로가 순교한 듯

(5) 네로의 최후 * 국민의 신망 잃음 * 원로원 결의를 퇴위, 69년에 자살

2)도미티안 (Domitian) 박해 (A.D51 - 96) 81년에 황제에 오름 자신을 주와 하나님으로 숭배 후에 암살 당함

(1) 원인...황제 예배 불복

(2) 죄명...기독교도 때문에 모든 신이 노했다는 죄명

(3) 처형 방법 ... * 재산 몰수 * 맹수와 결투 * 저명인사를 추방

(4) 순교자...황제의 4촌 동생 등 많은 신자

(5) 카타콤... 박해를 피해 지하 무덤에서 예배드림 (순교자들의 신앙 파수 무대가 됨) *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도미티안은 유대인들이 매년 예루살렘에 보냈던 헌금을 황제에게 바치도록 결정하였다.
박해 - 당시에는 아직도 로마 당국 지도자들의 마음 속에 유대인들과 기독교 신자들 사이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관리 들은 `유대교적 풍습`을 좇는 모든 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유대교 신자과 기독교 신자를 가리지 않는 새로운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런 핍박 가운데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고 요한 계시록이 쓰여졌다. (96년 기록) A.D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 받았는데 잠간 살펴보자.

1) 멸망전 상태 (1) 로마의 악정 * 펠릭스(Felix)(유대 총독)(51-62) (행 24:26), 알비누스(Albinus) (62-64)의 지나친 탐욕 * 개인 재산,공공 재산 압수 * 뇌물 만능 (2) 백성의 강포 * 감람산에 4천여명의 폭도 집합 (4분의 1이 죽고 다수가 포로 됨) * 유대인의 생업이 농업과 목축업이므로 선동하기 쉬움 (3) 제사장들의 부패 * 사리 사욕에 눈이 어두움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대표적,(행 23:3). * 지도 역량이 부족 (엘리아잘)

2) 멸망의 원인 (1) 가이사랴 유대인 반란 사건...헬라인이 유대인의 시민권 없음을 주장 하자 로마 정부가 이를 인정한 일에 대한 반란. (2) 예루살렘에서도 주정당이 득세하여 로마 군영을 습격.

3) 멸망의 과정 (1) 가이사랴에서 유대인 2만명 살륙. (2) 수리아 총독 갈루스(Gallus)가 3만명의 군사로 예루살렘을 공격 했으나 실패하다. (3) 로마 정부는 베스파시안 장군에게 6만명의 군대를 주어 예루살렘 을 공격하려 했으나 네로의 자살로 귀환. 베스파시안은 네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름 (4) 디도장군(베스파시안 아들)A.D70년 4월 5만8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니 외부와 교류되지 않아 식량 결핍 으로 고난 당함.

4) 멸망의 결과...70년 8월 28일에 함락 베스파시안이 황제에 오른지 2년 만에 예루살렘은 멸망. (1) 성파괴 (2) 성전 방화 (3) 사망자 110만명 (4) 포로9만 7천명 눅21:20-28 = 읽어보라 예루살렘 멸망시 예루살렘 성을 도망쳐 나온 960명은 마사다에 피신하였다 마사다는 천연적인 군사적인 요새로서 예루살렘 남쪽 100km에 위치한 높이 600m의 깍아지른 절벽으로 되어있고 정상에는 마름모 꼴의 분지로 되어있다. 이곳에 헤롯 왕은 유사시를 대비해 헤롯 궁전까지 지어 놓았다 3년 동안 유대인들은 이 곳에 거하였는데 끓임없는 로마의 공격에도 난공불락의 요새는 무너지지 아니했다. 드디어 로마 10군단 실바 장군은 마사다 서쪽에 토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로마는 로마를 대적하는 자는 나머지 한 사람 까지도 죽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끝까지 공격을 하였다.
마사다 성을 포위한 로마 군대는 가끔 성을 빠져 나와 도망친 유대인들을 모두 잡아 죽였고 굶주림으로 자식까지 잡아먹었다. 유대인 지도자 엘리아잘은 로마군의 토성이 다 쌓아지고 곧 공격이 있음을 알고 사람들을 모이게 한 후 "로마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자 로마인의 손에 죽는 수치보다는 스스로 죽자" 고 연설하였다.
최후에 그들은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남자들만 10명씩 조를 짜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9명을 죽이고 최후 한사람이 남아서 시체를 가지런히 하고 자신도 자살하였다.
로마군이 이튿날 아침에 총공격하여 마사다에 들어갔을 때는 고요함과 시체뿐이었다. 로마는 허무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마사다에 있는 유대인들은 에스겔37장을 (에스골 골짜기 마른 뼈) 읽으면서 죽었다. 자식이 죽어서 벌레에 먹이가 될 바에는 우리가 먹자고 먹었다. 최후에는 양식이 있어도 먹지 아니했다 양식이 없어 죽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양식을 남겨 두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로마에 붙잡힌 유대인들은 이집트 광산에 보내졌고 건강한 유대인들은 로마 투기장에 보내졌고 17세 이하 유대인들은 노예로 팔려졌다 (신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이 언약을 지키지 못했다. (신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 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 (신28:68)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실으시고 전에 네게 고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 으로 끌어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대적에게 노비로 팔려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 " 마사다 정복을 당한 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고 1948년 독립할 때까지 전 세계로 떠도는 유랑 민족이 되고 말았다 예루살렘은 그 동안 36번 정복당하고 10번 멸망당하는 험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제2세기의 박해 1세기 박해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지만 2세기 박해부터는 기독교인들의 신앙 생활이 구체적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A.D111년 플리니(Pliny) 는 터어키 비시니아 총독에 임명 너무나도 많은 기독교인들 때문에 기독교인들 문제를 놓고 트라잔 황제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러한 트라잔 정책은 2세기 3세기 초기까지 적용되었다.

3) 트라잔 (Trajan) 박해 (A.D97-117) 원인 = 비밀결사, 사회생활 내용 = 황제에 대한 예배 강요, 집회불허 순교 = 107년 익나티우스가 맹수에게 먹혀서 순교 플리니는 익나티우스를 로마에 보내서 재판을 받게하여 죽게 했다. 익나티우스(Ignatius)는 순교의 형장으로 가면서 7개의 서신을 남겼는데 초대 기독교사에 중요한 기록이다. ( 안디옥 감독 익나티우스 ) 초대 안디옥의 감독은 바나바였다.
익나티우스는 안디옥의 2대 감독이었다.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을 따르던 무리들이 스데반이 순교하자 안디옥으로 건너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행11:19-26 읽어보라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전파되었다. 안디옥 교회는 기독교의 "동방의 수도요. 창구"라고 일暄沮낫? 안디옥 교회가 이렇게 된것은 익나티우스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이러한 안디옥 교회의 감독은 초대 기독교 안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안디옥 교회 감독 익나티우스가 로마에 끌려가서 순교 당하게 된 것이다. A.D30-35 사이에 태어난 그는 순교할 당시에 나이는 70세였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 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존경을 받고 있던 자였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가 어렸을 때 예수께서 그를 가슴에 안고 축복 기도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바울처럼 소아시아 공동체들과 로마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일곱 편을 썼다. 1. 서머나 교회에게 2 .서머나 교회 감독 폴리갑에게 3. 빌라델피아 교회에게 4. 로마 교회에게

5 특히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는 로마에 성도들이 자신을 구출하려는 뜻을 알고 편지를 했다. 서머나 교회에게 보내진 익나티우스의 편지의 내용은 "단일 감독제"를 중요성을 말했다. 오직 감독에게 복종함으로써 교리의 순수성이 보장될 수 있으며 세례와 성찬 예식은 감독이 집례한 경우에만 유효한 성례전이 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그는 "감독을 존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중을 받게 되고 감독의 승낙을 받지 아니하고 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악마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감독이 찬성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께서 기쁨이 된다 감독에게 복종하되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한 것처럼 해야 한다 또 누구나 모두 집사를 존경해야 한다 감독이 성부의 대리자이듯이 장로들이 하나님의 회의요 사도의 무리인 것과 마찬가지로 집사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 훗날에 익나티우스의 감독에 대한 이론은 카톨릭이 채택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 10대 박해 (2) A.D 70-160 폴리갑 = 사도 요한의 제자. 익나티우스가 110년경 로마로 가는 길에 서머나 교회에서 폴리갑의 다뜻한 영접을 받았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은 2세기에 알려진 최고 성자요 순교자이다. 그는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었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에 서머나에서 화형을 당하였는데 그의 인내와 유명한 말은 잊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한 지방 총독에게 한 그의 답변이다.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겼으나 그 분은 나를 한 번도 저버리신 일이 없다.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 ? " 4) 하드리안 (Hadrian) 박해 (76-138) 117년 황제 오름 예루살렘을 멸망 시킨 디도 장군의 아들이다. 하드리안은 예루살렘 이름을 "앨리아 카피톨리나" 바꾼 자이다. 원인 = 그리스도인을 증오 내용 = 국경일에 황제에게 예배 강요 성묘에 여신상을 세우게 하였다.
(심한 박해는 없었다)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박해 (121-180) 161년 황제 오름 원인 = 야만족들의 침략과 홍수와 전염병과 기아 자연 재해들이 그치지 않고 일어나자 이것은 기독교 신자들 때문이라고 하였다 내용 = 177년 프랑스 리용에서 박해가 심했다 순교 = 폴리갑 순교. 또 이때 순교한 자들은 (78P 하단) 과부 펠리시타스와 그의 일곱 아들의 순교기가 있다. 펠리시타스는 특별회 교회에 의해 구별된 과부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당신에게 승리할 것이며, 나를 죽인다면 죽음을 통해서 더욱 큰 승리를 거두리라" 이에 총독은 그들을 마르쿠스에게 보냈으며 마르쿠스는 이들을 각각 다른 구역에서 처형시켰다. 저스틴 마터도 이때 죽었다. 당시 기독교 학자로 유명하였다.
쌍투스라는 소년은 갖은 악형 하에서도 단지 "나는 기독교인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 당할수록 계속 이 말만 되풀이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신자들 몇 명이 용기를 얻어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자의 최후를 맞았다. 3세기에 와서 교회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던 새로운 정책들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정책들을 발안하고 수행했던 황제들은 셉티무스 세베루스와 데시우스였다.
6) 셉티무스 세베루스 (Septimus Severus) 박해 (A.D 193-211)

원인 = 종교 혼합 정책을 실시하였다.
내용 = 태양 신에게 예배하도록 강요. 태양이 지존의 신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모든 신들을 하용할 생각이었다.

순교 = 이레니우스, 오리겐 부친 순교 퍼페투아, 펠리시타스, 레보카투스, 세터니누스, 세쿤두르스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는 두 집단이 있었다.
바로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이었다. 세베루스는 이 두 종교들의 확장을 막기 위하여, 기독교나 유대교에 개종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당시까지 시행되고 있던 트라잔의 법령에 추가되어 수행되었다.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칙령이 발해졌던 서기 202년은 기독교 박해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순교자들은 203년경에 죽은 퍼페투아와 펠리시타스 이다. 퍼페투아는 어린 아이를 가지고 있던 상류층 여인이었다. 펠리시타스는 그의 하녀이다. 펠리시타스는 당시 임신을 하고 있어서 혹시 순교를 하지 못할까 하여 두려워 하였다.
그러나 팔개월 만에 아이를 낳고 순교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간수들은 그녀에게 "해산의 고통의 비명을 지르면서 어떻게 원형 경기장의 짐승들을 대항할 수 있겠느냐 ?"고 물었다 그 때 그녀는 "현재 나의 고통은 나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야수들 에게 대항할 때에는 또 다른 이가 내 가운데 역사 하실 것이다. 내가 그를 위해 고난을 당하니 그가 내 대신 또한 고통을 받으실 것이 틀림없다 " 엘라가바루스(Elagabalus 218-222 ) 와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 222-235) 셉티무스 세베루스와 같은 혼합 정책을 추구했지만 기독인들에게 강요하지는 아니했다.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는 오리겐의 강의를 듣기도 하였다.
특히 244-249년까지 황제였던 아라비아인 필립은 기독교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막시민 때까지 반세기 동안 기독교 박해가 드믈었던 시대였다 이 때 기독교들의 수가 증가되었고 특히 귀족들 가운데서 기독교인들이 증가되었다.

7) 막시민 (Masmin)(막시미아누스)박해 (A.D 235-288) 간헐적인 박해. 교회의 감독인 두 사람 폰티아누스, 히폴리투스 광산에 보내어짐.

8) 데시우스(Decius) 박해 (A.D240-251) 249년 황제에 올랐다.

원인 = 로마의 영광을 위해 다시 옛 종교를 수복하고자 했다

내용 = 기독교인들을 회유시켜 배교하도록 유도하였다.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게 했고 향불을 살라야 했다. 순종한 자들에게는 증명서를 발부해 주었다. 전통적 로마인이었던 데시우스의 눈으로 볼때 여러 혼란한 현상은 로마 국민들이 옛날의 신들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옛 영광을 다시 복구하고자 한다면 옛날의 종교를 다시 수복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것이 데시우스 황제의 종교 정책의 기반이었다 황제의 목적은 순교자들이 아니라 배교자들을 낳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50여년 전 터툴리안은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 설파한 바 있었다.
왜냐하면 더욱 많은 피가 흐를수록 교인들의 숫자는 증가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기독교 신자들을 살해하는 대신에 이들을 협박하고 회유시켜 변절시킬 수만 있다면 그 옛날 이교를 부흥시키려는 데시우스의 속셈이었다. 이런 박해의 결과 교회 내에 새로운 칭호가 생겼는데 "고백자"와 "배교자" 즉 변절자 라는 칭호가 생겼다. 당시에 오리겐이 고문을 당하였고 출옥 후 죽었다. 그 외에도 신앙의 절개를 지킨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 반면에 변절자들 또한 수없이 많았다. 

 

( 변절자들에 관한 문제 ) 데시우스의 박해가 끝나고 교회는 약 40년 동안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교회는 큰 문제가 생겼다. 박해 기간 동안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황제의 제단에 제물을 바치고 절하고 분향한 변절자들에 대한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두 사람이 시프리안(Cyprian) 노바티안(Nobatian) 이다. 시프리안은 제사에 참여하였다
할지라도 진실로 회개한 자들에게는 교회에 다시 들어올 수 있다고 하였다.
시프리안이 변절자들을 위해 노력한 것은 그의 교회관 때문이었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며 교회를 어머니로 가질 수 없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변절자들을 쉽게 교회에 다시 복원시켜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노바티안(Novatian)도 시프리안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변절자들에 대해 더 엄격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에도 변절자들에게 대한 문제 때문에 서방 교회는 몇 번이나 분열을 반복하였다.
세례받은 후 죄를 범한 신자들의 처리 문제가 큰 문제였다.
종교 개혁도 바로 이러한 가운데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변절자에 대한 오늘날 교회 모습은 어떠한가 ? 교회는 치리와 용서가 함께 있어야 한다. 용서만 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죄에 대한 질책과 죄에 대한 회개를 외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사랑은 많이 외치는데 비해 죄에 대한 외침이 적다 용서는 있는데 회초리가 없다. 축복의 설교는 흔한데 죄에 대한 설교는 적다. 죄가 얼마나 무섭고 더러운지 지적해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보응의 하나님이신줄 성도들이 모르고 있다.  죄가 만연한 이 시대에 성도들도 죄를 밥먹듯이 하며 신앙 생활하고 있다 죄가 가득찬 이 시대에 교회가 진정으로 외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오늘날 교회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성도들이 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니다.
죄에 대해 알고 있다. 이것이 더욱 무서운 것이다. 교회에서 성도들의 죄에 대한 뉘우침은 있는데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의 소리가 없다. 다시 말해서 옷을 찢는 행위는 있는데 마음을 찢는 행위는 없다. (욜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 " 죄에 대한 무서움을 알고 더러움을 안다면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해야한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외친 "회개하라 !" 는 외침도 옷을 찢는 회개가 아닌 마음을 찢는 회개를 외친 것이다. 회개는 믿는 자들에게 참으로 큰 축복이다. 이 시대 초대 교회처럼 교회 안에 변절자들이 얼마나 많이 거하고 있는지 모른다. 교회는 죄에 대해 강하게 외쳐야 할 것이다. 성도들이 죄에 대해 회개하지 못하고 신앙 생활하고 있다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고 주의 종들의 책임이다. 회개 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항상 주어지지 않는다. 회개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회개하도록 하실 때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해야한다.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를 요구할 때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실로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할 때 우리 죄는 사함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찢는 회개가 무엇인가 ?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 죄 때문에 피를 흘려 죽으신 사실을 믿으십니까 ? 내가 또 죄를 짖고 사함 받으려면 예수의 피가 또 필요하다 (히9: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고통받으신 예수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하지 않겠는가 !

가룟 유다는 예수 앞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대표적인 사람이다.

성경을 보면 4번의 기회가 있었다.
1. (요13:21)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

2. (요13:26) "내가 한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

3. (눅22:48) "유다야 네가 입 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 "

4. (마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 유다는 전혀 예수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가룟 유다보다 더 악한 죄를 지은 자는 베드로다 그는 예수를 한번도 아니고 세번이나 저주하고 부인까지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생각하였다.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회개의 정의는 죄를 뉘우치고 내 행위를 고치는 것이다. 회(悔) = 뉘우칠. 개(改) = 고칠 우리가 어떤 죄악 속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죄를 뉘우치기만 하고 죄를 짖고 있다면 우리는 하루에도 수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장본인들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진정한 회개가 없는 예배라면 그 예배는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마음에 가득히 간직한 채 드려지는 예배 하나님이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 (사1:11-17) = 읽어보라 (계11:1-2) 초대 교회 역시도 변절자들에 대한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요구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도 성도들에게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 교회는 비로소 이 땅에 교회다운 교회가 될 것이다. 

9) 발레리안 (Valerian) 박해 (235-260) 잠간 동안의 박해 원인 = 병과 흉년은 신이 노한 까닭으로 기독교를 박해 내용 = 예배 금지, 재산 몰수, 황제 숭배 순교 = 키프리아누스 ( 4세기 초 박해 ) 초대 교회 박해 중 가장 심한 박해였다.
10) 디오클레티안 (Diocletian) 박해 (A.D245-313) 284-305년 까지 로마 황제 자리에 있으면서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원인 : 기독교인들이 군대에 입대를 거부 내용 : 기독교 병사들에게 신앙을 거부하도록 강요. 불복종한 자들은 처형.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자들을 체포. 황제 숭배 제사 강요. 잔인한 고문으로 처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