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초대敎會史

그리스도교 교세의 확장과 박해 2

好學 2009. 9. 7. 00:29

그리스도교 교세의 확장과 박해 2

 

 



중세 교회사
그리스도 교회는 교회와 국가의 연합시대를 거쳐 중세교회 시대로 들어선다. 중세교회사는 64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가 즉위한 590년부터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논제를 발표하기 전인 1517년까지로 볼 수 있으며, 이를 다시 네(4)시대로 세분할 수 있다.

1. 과도시대(590~ 800년):  64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의 즉위부터 샤를마뉴 대제의 즉위 전까지의 로마교회 발아기. 교회는 북유럽과 서유럽의 켈트족, 슬라브족, 튜튼족 사이에 퍼지고, 이슬람교가 일어나 흥성한다.
2. 성장시대(800~ 1073년): 샤를마뉴 대제 즉위부터 157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 즉위 전까지의 교회의 성장기. 교회는 크게 발전을 하지만, 큰 분열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에 일어난다.
3. 전성시대(1073~ 1303년): 절대교권자인 157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 즉위부터 194대 교황 복자 베네딕토 11세 즉위 전까지 교회의 전성기. 십자군 원정,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와 스콜라 철학의 대두, 대학과 고딕 건축양식의 발생, 이단 종파의 발생과 이에 대한 종교재판이 성행된 시대이다.
4. 쇠퇴시대(1303~ 1517년): 194대 교황 복자 베네딕토 11세 즉위부터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논제가 나오기 전까지 교황권의 쇠퇴와 종교개혁의 시기.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 교황의 분립, P.콘스탄스의 등장, 바젤에서의 개혁회의 개최, J.위클리프, J.후스, G.사보나롤라, 베셀 등의 활약, 독일의 신비주의자인 에크하르트와 타울러의 등장, 르네상스의 발아, 인쇄술 발달, 신대륙 발견 등이 있었던 시대이다.

로마교회 발아기 (590~ 800년) : 과도시대
세계사에서 중세(middle age)란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16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약 천 년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원래 르네상스시대의 지식인들이 고전고대(古典古代)와 그들의 시대에 끼어 있는 암흑과 야만의 시대를 중간시대(medii aevi)로 부른 데에서 유래되었다. 중세가 모두 암흑기라 할 수는 없고, 암흑과 비문화의 시기는 중세 전반기인 대략 5~ 10세기경이며, 그 후로 13세기 전후에 독특하고 우수한 중세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리스도 교회사에서의 중세사(中世史)란 590년 64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 즉위 때부터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관한 95개조 논제가 나오기 전까지의 920년간의 그리스도교회 역사를 말한다. 중세 교회사 시대는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어거스틴, 354~ 430년)의 신앙과 사상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던 시대였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였으며,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고, 새로운 중세 문화를 탄생시킨 선구자였다. 서방세계에서는 통합된 정치세력으로서의 서로마제국이 사라지고, 게르만 민족의 이동에 따른 정치적 공백기가 왔으며 문명권은 크게 삼분되었다. 동(東)에서는 로마제국의 전통을 계승한 동로마제국의 비잔틴 문명권이 존속해 있었고, 서(西)에서는 침입자인 여러 게르만 국가들이 서방 문명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7세기에 남동의 레반트에서는 동방 문명권인 이슬람 문명권이 나타났다. 세(3)문명권은 각각 그 특성을 유지하면서 유럽 중세 문화의 형성에 기여하였고, 최종적으로는 서방 문명권이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독특한 유럽문명으로 성립되었다.
1) 로마교회 발아기의 특성
중세 교회사 시대에 와서 고대 교회사 시대의 영광의 역사를 가진 동방의 헬라 교회는 안으로는 점차 생명이 말라 시들어갔고, 밖으로는 이슬람교의 발흥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반해 로마 교회의 세력은 확장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라틴민족은 본래 정치적 자질이 풍부하여 통일된 힘을 발휘함으로써 로마교회라는 큰 단체를 건설할 수 있었다.
2. 고대로부터의 관습과 문명이 로마교회에 내재되어 있어, 여러 이교적 배경을 가진 민족들이 교회로 들어오기가 쉬웠다. 이러한 일들이 결국은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를 초래하지만 큰 교회를 손쉽게 이루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3. 탁월한 역량을 가진 인물들이 감독(교황)이 되어 교권과 정치권을 장악함으로써 큰 교회를 이룰 수 있었다.
4. 카논법이라는 교회법을 제정하여 교황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5. 샤를마뉴 대제와 오토 대제 같은 영웅들이 나라를 다스렸기에 나라가 안정되었고, 그리스도교와 제휴하였거나 그리스도교를 옹호하였기에 교회 활동이 안정되었다.
로마교회는 서로마제국이 망한 후에도 이런 여러 가지 조건들의 상승작용으로 인해 여러 제후들이 군웅할거(群雄割據)하는 봉건 암흑시대에도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교권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권세가 커짐에 따라 부패도 깊어졌고, 교회는 외적 성장과는 반대로 영적 수준이 크게 낮아졌다. 이로 인해 민중들은 무지하게 되었고 미신적 신앙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신학과 사상도 정치적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여 별 발전이 없었다.
교리(사상)면에서 중세 교회사는 고대 교회사를 넘어서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일상 생활 속에 완전히 자리를 잡아서, 모든 사물과 일상사는 거의 다 그리스도교와 관련되어 있을 정도로 변하였다. 중세 그리스도교 문화는 새로이 중세를 지배한 게르만 민족의 독특한 근면성과 예술성, 그리고 로마인들의 정신적, 정치적 자질이 합쳐져 형성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수많은 성자와 위인이 나타나서 삶의 감화를 주었고, 또한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건축, 회화, 조각 활동도 크게 왕성하여 이로 인해 후대에 이름을 떨친 거장들과 거작들이 많이 나타났다.
중세 그리스도교 역사는 심한 타락의 시대가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신앙적 부흥의 역사가 있었다. 오늘의 로마 가톨릭을 지배하는 신학과 제도는 거의 중세기에 완성되었다. 이처럼 중세는 근대 사회와 근세 그리스도교를 탄생시키기 위한 준비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2)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

64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는 고대사와 중세사를 잇는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최후의 교부요 최초의 교황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540년경 로마의 부호의 집에서 출생하였고, 어머니와 고모가 성자 칭호를 받은 신실한 믿음의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로마 시장이던 부친이 죽자 물려받은 재산을 거의 수도원에 기증하고 자신은 수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금욕 생활로 건강을 해쳐서 평생 약한 몸으로 살았다. 그는 교황 특사로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되어 근무하였고, 교황 비서로 일하기도 하였다. 63대 교황 펠라지오 2세가 죽었을 무렵 롬바르디아인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을 때, 성 그레고리오 1세는 그 동안의 신앙과 덕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신임을 얻었기에, 교회와 원로원, 국민들이 그를 열렬히 지지하여 590년 9월에 거의 반강제로 교황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604년 3월 12일에 서거하였다.

서로마제국의 폐허 위에 야만인들(게르만족)이 새로운 왕국을 세웠을 때, 성 그레고리오 1세는 그리스도교회의 위상을 고수하면서, 이를 새로운 왕국 위에 떨친 탁월한 교황이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하였고, 이 이름은 오늘날까지 교황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가 위(位)에 오를 당시 교황(로마 감독)의 위세는 심각할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고 교회의 기강도 문란하였다. 그는 교황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수도사처럼 단순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는 교회의 중요 직위에 수도사를 채용하였고, 교직 매매를 금했으며, 성직자가 되면 결혼을 금하는 등 엄격한 규율을 시행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치적 행정적 수완이 뛰어나 롬바르디아족의 침략에 대응하여 군사력을 배양하고 무력과 조공으로 로마를 방어하였으며, 교황의 권위로 롬바르디아족과 화해하고 롬바르디아족 및 황제의 대표들과 끊임없이 교섭하면서 혼란한 투쟁 속에서 로마가 정복당하는 것을 막아내었다. 이런 활동으로 인하여 로마인들이나 롬바르디아족은 나약한 황제보다 그를 더 유력한 실권자로 생각하였다. 그는 교황청과 로마에 필요한 식량의 대부분을 시칠리아,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남부 프랑스에 있는 교황청의 재산에서 조달하였다. 그는 재산 관리에도 힘을 써서 교황청의 수입을 늘렸던 유능한 지주였다. 여기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그는 교회와 국가의 주요 필요를 충당하였으며 많은 구제를 하였다. 그는 또한 전도에도 힘을 기울여 아우구스티누스를 영국에 파송하여 선교를 시작하게 하였다. 고올(프랑스지역)을 로마 교회의 세력 범위 안에 두었고, 스페인의 교회도 아리우스파 신앙으로부터 정통파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서유럽에 있어서 교회 통일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성 그레고리오 1세는 교회 생활과 예배에 이르는 모든 분야를 정력적으로 손을 뻗쳐 정비하였다. 그가 정한 예배 순서는 지방에 따라서 다소 수정이 가해지기는 했지만 널리 서방 교회의 전형이 되었으며 그레고리안 성가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그는 연옥설을 신앙의 한 요목으로 정하였다. 그는 작은 죄는 심판 전 연옥의 불로써 정결케 되며, 다른 사람의 중보 기도를 통하여 연옥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분명하게 가르쳤다.

그는 성경 주해와 설교집을 많이 펴냈으나 학자로서는 별로 탁월하지 못하였다. 그의 성경 해석은 신학적으로도 신통하지 못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회의 실제 생활에 있어서 제롬의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고행주의를 따랐으며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따랐다. 그리고 후기에는 반펠라기우스주의로 기울었다. 그는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에서는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칼케돈 공의회에 이르기까지의 신앙을 계승하였고, 인간론과 구원론에서는 전통적 신앙에서 이탈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명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의로운 자가 될 수 있게 만드셨다.’고 그는 말했다. ‘유전된 원죄는 세례를 통해서 용서되지만, 생활 속에서 실제로 짓는 모든 죄는 일정한 행위를 통해서 탕감 받아야 한다.’ 즉 고행으로 자기를 형벌함으로써 죄의 탕감을 받아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이것은 인간이 현세적 형벌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형벌을 모면할 수 있다는 사상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리스도교회의 의식적 사죄는 영원한 형벌을 현세적 형벌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성자들의 중재를 통해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형벌이 감소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로마교회의 미사를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는 로마교회의 제도적 의식(儀式)을 하나님의 내적 은총으로 보았으며 그것을 외적인 신도들의 신앙 생활에 구체화시켰고, 신도들은 이 세상 곧 로마교회를 통해서 연옥을 지나 하나님의 나라로 간다며 하늘 나라에까지 로마교회의 권위를 부각시켰다.

 

3) 그리스도교의 서유럽 전도

유럽의 그리스도교 개종 역사는 사도 바울로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차츰 한 나라씩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다가, 11세기 초에 이르러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왕들이 그리스도교를 그들 나라의 국교로 삼았기에, 유럽 전체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그리스도교화 되기에 이르렀다.

3-1) 프랑스 전도

프랑스 지역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전한 사람은 이레네우스로 알려져 있다. 그는 2세기 후반에 리용의 감독으로 있었다.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지역에 적극적인 전도의 계기를 마련한 사람은 투르의 군인이요 수도사인 마르틴(Martin, Bishop of Tours; 361~ 400년)이었다. 프랑크족과 그 밖의 북방 종족들이 고올로 침입한 후에, 마르틴은 이곳에서 그들을 상대로 선구자적인 선교활동을 벌렸다. 그는 군인이었으므로 선교도 군대식으로 사람들을 강제로 그리스도교로 입교시키는 방법을 썼다. 그리고 수도사들을 데리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우상 사원과 무덤을 헐고 그리스도교를 전하였다.

- 클로비스 (Clovis)

프랑크족은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 1세의 영도 아래 점차 전 고올 지방으로 그 지배 영역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때로부터 고올(Gaul)은 프랑스로 불려지게 되었고, 프랑크족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클로비스왕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계기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비슷하였다. 그는 치열한 전쟁에서 하늘에 있는 십자가 형상을 보았고 그것을 본 후 승리하였기에, 그는 십자가의 도움으로 승리를 얻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496년 성탄절에 그는 3만 명의 부하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이로 인해 전 종족이 신자가 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타의적이고 대중적인 집단 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교화 되었기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교적 요소들을 그대로 안고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 샤를 마르텔 (Charles Martel, 샤를대제, 카롤루스대제, 카를(칼)대제)

프랑크 전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왕은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 마르텔(샤를마뉴)이다. 그는 패팽(Pippin)의 아들인 소(小)패팽으로 메로빙거 왕조를 몰아내고 카롤링거 왕조를 수립하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732년 투르 전쟁에서 이슬람 군대의 서유럽 진격을 영구히 막아낸 인물로 유명하다. 왕자 시절에 마르텔은 수도사가 되어 그리스도교를 더욱 높은 지위로 격상시켰다. 그는 왕위에 등극한 후, 독일과 네덜란드의 정권 확장에 교회를 이용할 필요를 느껴서 선교 사업을 후원하였다. 그는 서부 독일 대부분을 그리스도교화하고, 프랑크 교회를 개혁하고, 교황청과 프랑크족과의 관계를 접근시켜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선교 사업과 개혁 사업을 추진하였다. 샤를마뉴는 대주교 보니파키우스의 주선으로 742년 프랑크 교회 대회를 소집하여, 규칙과 계율을 엄수할 것, 교직자의 부도덕 행위를 엄금할 것, 신부(神父)의 결혼을 금지할 것, 금욕 생활을 장려할 것 등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747년에는 감독 회의를 소집하여 교황의 사법권을 인정하였다.

3-2) 독일 전도

독일 전도는 프러시아의 사도라고 불리는 윌리브로드(Willibroad, 657~ 739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영국인으로 아일랜드 교회의 감화와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아일랜드의 한 수도원에서 12년을 보낸 후 690년에 10명의 동지들과 함께 프러시아로 선교를 떠났다. 그는 695년에 교황의 임명으로 프러시아 감독이 되었고 698년에는 에터낙에 수도원을 세워 선교 중심지로 삼았다. 후에 그는 네델란드와 덴마아크에도 선교를 했고 많은 고생을 하며 북부 유럽에 로마교회의 터전을 세우는데 진력하였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영국 사람들로부터 위대한 선교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 가장 탁월한 인물이 독일에 전도를 한 보니파키우스(Bonifacius)였다. 그는 고등 교육을 받은 영국 귀족 출신으로 일찍부터 수도원 생활을 하다가, 신부가 된 후 선교를 나섰다. 처음에 그는 네델란드에서 선교하던 윌리브로드의 제자가 되어 그를 도우며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네델란드 왕이 전도 사업을 거절하자 실망하여 영국으로 돌아 왔다가 로마로 갔는데, 거기서 교황의 신임을 얻어 독일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독일의 오지 중 하나인 헷세로 가서, 그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적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그리스도교를 전하여 정통적 그리스도교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이 일로 그는 89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 2세에 의해 독일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723년 그는 헷세에서 군중들에게 표적을 나타냄으로써 많은 군중들을 압도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이후에도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하여 20년간 10만 명이 세례를 받게 만들었다. 보니파키우스는 서북 유럽과 중앙 유럽의 그리스도교 전파와 교회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고 732년에는 대감독이 되었다. 그는 744년 쾰른 남방 풀다(Fulda)에 베네딕투스계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은 후에 독일 중서부 전체의 학문과 성직자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3-3) 영국 전도

- 패트릭 (Patrick, Patricius)

400년경 영국에는 그곳에 주둔하는 그리스도교도인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그리스도교가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펠라기우스의 전도에 의하여 초보적이고 약간은 이단적 성격을 띤 교회도 서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 교회 제도와 조직을 정비한 선교사는 패트릭 또는 파트리키우스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패트릭은 웨일즈인지 스코틀랜드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그곳의 어느 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렸을 때 해적들에게 잡혀가서 북아일랜드의 어느 추장집에서 6년간 목동 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곳을 도망쳐 나와 고올로 가서 수도사 학교에 들어갔다. 그 후 그는 집으로 돌아왔고, 어느 날 아일랜드인이 와서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보고 432년에 선교사로 안수를 받고, 아일랜드로 가서 30년간 전도생활을 하였다. 그의 선교 지역은 주로 아일랜드 동북지방이었다. 그는 성실함과 열렬한 전도로 일반 시민들과 귀족들에게 신망을 받았고, 또한 수십 개의 교회를 세우고 수천 명에게 세례도 베풀었다. 그리고 수도사 학교도 세웠는데 그의 수도사 학교는 그의 후계자들이 세운 수도사 학교와 더불어 영국 학문과 경건 생활의 요체가 되었다. 패트릭의 사역과 설교는 당시의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그 후 중세기의 아일랜드, 영국 그리고 유럽 전체의 선교생활과 교회생활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of Canterbury)

영국 전도에 빼놓을 수 없는 선교사는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수행원 40명이었다. 64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는 596년에 선교를 위하여 이들을 영국으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영국 동남부에 위치한 켄트(Kent)왕국의 에델버트왕(Ethelbert)의 도움을 받아 수도 캔터베리에 자리를 잡고 전도를 할 수 있었다. 에델버트왕은 그리스도교 신자인 왕비 때문에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 후 왕 자신도 그의 백성 만여 명과 함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601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국의 대감독이 되었고, 선교 활동도 계속하였다. 그는 607년에 세상을 떠났다.

- 컬럼바 (Columba)

컬럼바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의 전도자로서 563년에 동지 12명과 스코틀랜드의 아이오나(Iona)섬으로 가서 교회를 세우고 수도원을 세워 꾸준히 전도 사업을 하였다. 그는 34년이나 전도를 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며 기적을 행하여 많은 신자를 얻었다. 나중에는 심지어 왕들도 그의 축복을 받으러 올 정도가 되었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위해 누구보다 많은 봉사를 한 전도자였다.

- 파울리누스 (Paulinus)

켄트왕의 누이이며 에델버트의 딸인 켄트공주는 노섬브리아 왕국의 에드윈왕에게 출가할 때 궁중 신부였던 파울리누스를 동반하였다. 파울리누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수행원 40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파울리누스는 에드윈왕에게 전도하여 세례를 주고 왕으로 하여금 국내의 유력한 자들을 모아 그리스도교의 채택 여부를 논의하게 하였다. 노섬브리아 왕국은 그리스도교를 채택하기로 결의하였고 파울리누스는 627년에 요크의 감독이 되었다.

- 아이단 (Aidan)

아이단은 아이오나섬 출신의 수도사로서 영국 북부 노섬브리아왕국 오스왈드왕의 청을 받아 그곳으로 가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635년에 감독 안수를 받고 린디스판섬에 주재하며 육지와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가 그곳 말을 배우기까지,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때면 왕이 그의 말을 통역까지 할 정도였다. 642년에 오스왈드왕이 전사하자, 왕의 친척인 오스윈(Oswin)과 오스위(Oswy)가 노섬브리아를 양분하여 다스렸는데, 오스윈은 오스왈드와 마찬가지로 아이단을 후원하였으므로 그는 선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아이단은 검소하고 근면한 생활을 하였으며 돈이 생기면 이를 노예 석방에 사용하였다. 그가 늙자 왕은 그가 순행하도록 좋은 말과 안장을 하사하였는데 그때도 그는 이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도보로 전도 여행을 계속하였다. 그의 이런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 영국 교회의 반동과 싸움

그리스도교는 영국 선교에서도 많은 파란곡절을 겪었다. 당시 영국에 존재하였던 제국(諸國)들 중에서 남부의 켄트 왕국은 그리스도교가 에델버트왕의 말년부터 어려움을 겪다가 그의 사후(死後)에 더욱 난관에 처하였다. 북부의 노섬브리아 왕국은 점차 제국(諸國)의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고 왕인 에드윈이 파울리누스의 전도를 받아 신자가 되었기에 그리스도교는 교세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633년에 중부 메르시아(Mercia) 왕국의 이교도(異敎徒) 펜다왕이 에드윈왕을 격파하여 죽이자 노섬브리아에서는 이교반동(異敎反動)이 일어났다. 그래서 파울리누스는 귀향하였고, 노섬브리아 왕가는 남·북계로 분열되어 심한 마찰을 겪었다. 아이오나섬에 망명하여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던 오스왈드가 노섬브리아로 돌아와 왕이 되었고, 그리고 아이단의 도움으로 그리스도교를 재건하였다. 642년에 펜다왕이 다시 침략하였고, 오스왈드왕은 전사하였다. 그러나 아이오나섬에서 오스왈드와 함께 개종한 그의 동생 오스위가 왕이 되어 651년에 국토를 회복하였으므로, 그에 따라 그의 권위가 널리 인정되었고 따라서 그리스도교도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오스위왕은 켈트 토속종교와 로마교회의 종교 의식의 차이를 조정하기 위하여 644년에 휘트비에서 영국 대표와 로마교회 대표를 모아 회의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 결과 앵글로색슨왕들은 로마교회에 속하기로 하였고, 제도와 예배 의식은 로마 교회의 법을 따르기로 하였으며, 부활절도 다른 서방처럼 일요일에 지키기로 결정하였다.

 

4) 중세 교회사 시대의 교리와 신학

중세 교회사 시대에는 두 가지의 주요한 교리논쟁이 있었는데, 하나는 화상(畵像) 예배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니케아 신조의 문구에 관한 것이었다.

니케아 공의회 시대인 4세기 중반에 이르자,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화상을 사용하여 예배를 드리는 일이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거의 일상화되었다. 7세기 초 64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는 교회 내에 성상과 그림 사용을 허락한 일이 있었지만 그것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단서를 붙인 바 있었다. 그러나 8세기에 오자 이러한 일들이 크게 문제시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성상이나 그림을 향하여 기도를 하는 등 우상화 분위기가 신자들 간에 팽배하여 이슬람교와 유대교로부터 우상숭배자라는 비웃음을 살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이런 비난의 근거를 제거하기 위하여 동로마제국 황제 레오 3세는 두 개의 칙령을 발표하였다.

첫째 칙령은 726년에 발표되었는데 '교회당 안에 화상(畵像)을 두는 것은 허락하나 그것을 만지거나 입맞추는 일을 불허하며 화상을 만질 수 없는 높은 곳에 걸라'는 내용이었다. 민중들과 수도자들은 이를 완강하게 반대하였고 다메섹의 요한도 반대하였다. 심지어 그리스 서부 주민들은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오기까지 하였으나 격파되었다. 둘째 칙령은 730년에 내려졌는데, 그 내용은 아예 '교회당에서 모든 화상들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89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 2세(715~ 731년)와 90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 3세(731~ 741년)가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 3세는 화상을 반대하는 자들을 모두 교회에서 추방하도록 명하였다. 특히 레오 3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741~ 775년)는 아버지보다도 더 열렬히 화상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754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대회를 열어, 화상뿐 아니라 십자가와 모든 휘장의 사용을 반대하였고, 교회당에서뿐만 아니라 집과 수도원에서도 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어려서 동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6세는, 섭정이었던 그의 어머니 이레네가 화상예배를 원하였기에, 95대 교황 하드리아노 1세와 협의하여 787년에 니케아에서 7차 세계 대회를 개최하였다. 동서교회가 함께 주최하였던 마지막 대회인 이 회의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화상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등(燈)을 화상 앞에 켜서 밝히며 향(香)을 태우는 것도 허락하였다. 다만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들은 화상을 예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라 곧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시대의 또 하나의 논쟁은 성령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올 뿐 아니라 아들인 성자(聖子)에게서도 나온다는 내용을 니케아 신조에 추가하는 일이었다. 스페인의 신학자들은 아리우스파와 싸울 때 '아들이신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동질로서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내용에다 아들과의 관련성을 덧붙여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는 내용을 붙인 니케아 신조를 사용하였다. 이 니케아 신조는 나중에 교황의 승인을 받았으며 범서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성령께서 아들로 말미암아서도 나옴을 인정하나, 특별한 문구를 덧붙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것은 후일 로마교회와 헬라정교회가 분리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이슬람교의 발흥

중세 그리스도교 교회사에 있어서 그리스도교회는 당시 신앙적 논쟁을 통해 교리를 확립함으로써 교회 발전의 기초를 놓았으나 이런 비실제적 문제에 너무 많은 시간과 재정을 소모하고 있었기에, 실제적으로 이단종파들에 대해서 거의 무관심하였으므로, 이슬람교에게 침투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당시 그리스도교회는 몬타누스파, 도나투스파, 아리우스파, 펠라기우스파, 네스토리우스파 등 많은 그리스도교의 분파들과 이단 종파들로 인하여 큰 혼란에 빠져 있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 이후에는 교회가 동방과 서방으로 분열되어 서로 논쟁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그리스도교의 가장 강한 방파제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발상지들, 곧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이슬람교로부터 침략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명목만의 신자들은 거의 이슬람교를 따르게 되었다. 이슬람교라는 이름은 아라비아어의 ‘이슬람’에서 나왔다. 이슬람이라는 말은 '신의 의지나 명령에 절대귀의(絶對歸依)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데 그 뒤 이러한 귀의 방법을 제도화한 문화적·사회적 복합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슬람교는 창시자 모하메드의 이름을 따서 모하메드교라고도 한다. 중세 그리스도교 교회사에 있어서 모하메드의 출현과 이슬람교의 발생은 로마교회에 큰 충격과 각성을 주었다.

 

1) 모하메드의 출현

칭찬 받는 자라는 뜻을 지닌 모하메드(마호메드)는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꼭 5세기 후인 570년에 아라비아의 도시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의 손에서 양육되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그는 우울하고 현실도피적인 성격이었으며, 신비주의적이고 환상주의적인 성향도 있었다. 그는 심령, 징조, 꿈, 주문 등을 믿는 미신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2살 때 숙부를 따라 시리아로 가서, 거기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과 긴밀하게 접촉하며 살게 되었다. 그는 이때 비로서 아라비아에서 행해지고 있는 잡신 숭배와 여러 부도덕한 행위들이 죄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모하메드는 부유한 과부 카디자 아래에서 낙타를 끄는 대상업(隊商業)에 종사하다가, 25살 때 그녀와 결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대상업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메카의 히라산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을 계속하였다. 그의 나이 40세 무렵인 610년에 그는 최초의 신적 계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 그것이 유일신 알라의 계시인지 확인할 수 없어 고뇌를 하였지만, 곧 예언자임을 자각(自覺)하였고, 그리하여 그는 그의 일신교적 원리를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유대교, 세속화되어 가는 그리스도교, 미신적이고 우상적인 아라비아 신앙 등은 이미 낡은 시대의 것이니, 오직 신의 지혜를 가지며 최후적인 계시를 받은 자신에게 모든 신앙과 생활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사람들에게 천지의 종말이 임박했으니 우상숭배를 중지하고 알라에게 귀의하여, 다툼과 부정을 그만두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도우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를 추종한 자들은 아내인 카디자, 사위인 알리, 양자인 자이드, 그리고 친구 아부 바크르 밖에 없었다. 반면에 그의 친척들과 고향 메카 사람들은 모하메드와 그를 따르는 소수의 신도들을 배척 박해하였다. 이에 627년 7월 15일, 모하메드는 신도들과 함께 포교의 활로(活路)를 찾아 메카를 버리고 북쪽으로 약 400킬로미터 떨어진 메디나로 도피하였다. 이것을 성천(聖遷 Hegira)이라 하며, 이슬람교에서는 이 날을 그들의 원년으로 삼는다. 메디나에서 모하메드는 대다수의 메디나 주민과 메카에서 이주한 신도들의 지지를 얻어, 이슬람 신앙을 실천하는 독자적 공동체인 움마를 만들었다. 630년에 그는 종교지도자 및 정치가로서 메디나에 살던 유대교도를 몰아내고 주변의 여러 아랍 부족들을 교화하여 메카를 정복하였다. 그는 메카 사람들과 싸워서 그곳의 신당과 우상들을 제거하고 메카를 신흥 이슬람의 중심지로 삼았다. 632년 모하메드가 죽을 때에는 아라비아 반도의 거의 전(全)지역이 이슬람교로 통일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하메드는 예언자로서 신의 계시를 전하고, 신의 계시를 코란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 지도자로서 그 가르침을 공동체 안에 심는 데 성공하였다. 모하메드는 이슬람교 설립의 목적을 당초에는 아라비아 백성들의 종교를 개혁하는 데에만 뜻을 두었으나, 점점 세계가 믿도록 하는 종교를 만드는 것으로 변경하였고, 이 뜻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력을 사용함도 사양치 않았다. 처음에 이슬람교는 다른 종교, 특히 같은 일신교인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등과 손을 잡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였으나, 그들이 박해를 가했기에 이슬람 역시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2) 경전 및 교리

이슬람교의 신앙과 생활 규범은 코란이다. 이 경전은 모하메드의 말씀과 행동을 수록한 언행록으로서 총11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코란에 의하면 모하메드는 최고이자 최종 예언자이며 종교, 정치 및 모든 사물의 원리를 결정하는 지상(至上)의 권위이다. 모하메드가 죽고 20년 후, 그의 후계자인 친구 아부 바크르(Abu Bakr)와 양자인 서기(書記) 자이드(Zaid)가 코란을 편집하였다. 이슬람교는 알라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내용에다 거기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교리에서 일부를 취하여 절충시킨 것 같은 그러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1. 이슬람의 근본은 일신교로서 모든 우상은 배척되어야 하며, 신의 뜻은 최고의 권위이므로 거기에 절대 복종하여야 한다.

2. 이슬람의 참신의 이름은 알라(Allah)이며, 알라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무죄한 천사들을 보냈는데 그들 중에 모세와 예수도 포함된다. 그러나 모하메드는 누구보다도 참 대예언자로서 모세나 예수보다 우월하다.

3. 예언자들 중의 예언자인 모하메드를 믿고 신앙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신의 보상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

4. 이슬람은 절대 복종을 요구한다.

5.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신앙 내용이자 생활 원리는, ‘알라신 외의 다른 신은 없다. 모하메드는 알라신의 예언자이다. 메카에 있는 카아바(Kaaba) 신당을 향하여 매일 다섯 가지 일정한 기도를 드린다. 9월인 라마단에는 30일 동안 금식을 한다. 메카를 순례한다.’는 등이다.

6. 이슬람의 도덕은 계율적이다. 이슬람은 신자가 해야 할 의무인, 기도와 금식, 구제(救濟), 메카 순례 등과 같은 근행(勤行)을 열심히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신으로부터 풍성한 보상을 받는다. 이슬람은 음주를 금하고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하나, 일부다처를 허용하며 부인의 지위를 천한 것으로 여기며, 노예를 허용한다.

 

3) 포교

이슬람교는 종교뿐 아니라 정치, 군사 등 모든 면에서의 권력을 장악함으로서 국가 전체를 이슬람화(化)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슬람교는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연합된 힘으로 정복 활동을 펴왔으므로, 이슬람교는 주변의 이교적 내지는 원시적 종교를 가진 부족들을 정복하였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국가들도 상당수 정복하여 그들을 이슬람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교의 확장은 모하메드가 죽은 후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의 후계자를 칼리프(Khalif)라고 하는데, 칼리프는 종교뿐 아니라 정치, 군사에 관한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최고의 실력자였다. 모하메드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친구이자 장인인 아부 바크르가 제 1대 칼리프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외국에 대한 정복이 시작되었는데, 먼저 아라비아가 이슬람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리고 그 후 약 100년 동안 이슬람교는 소아시아와 유럽을 점령해 나갔다. 이슬람은 피정복자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스스로 이슬람을 포교하는 데 선봉을 서는 그러한 폭넓은 포교 활동을 벌였다. 이로 인하여 이슬람교는 동으로 인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에 도달하였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 연안과 스페인 반도,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렀으며, 드디어 로마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4) 이슬람교의 분열과 분파들

모하메드가 이슬람교의 세력 확장에 크게 성공을 거두고 후계자도 없이 죽자, 후계자가 될 칼리프를 놓고 교권 다툼이 벌어졌고, 이로 인하여 이슬람은 분열과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632년 예언자 모하메드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자, 후계자를 둘러싼 갈등이 촉발되면서 두 종파의 분열은 시작되었다. 일부 추종자들은 혈족이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들은 모하메드의 사위이자 딸 파티마의 남편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Ali)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디나 지역 공동체 다수는 모하메드의 친구인 아부 바크르를 지지하였다. 모하메드의 후계자는, 1대가 아부 바크르(Abu Bakr, 632~ 644년)였고, 2대가 오마르(Omar, 634~ 644년), 3대가 오트만(Othman, 644~ 655년)이었다. 오마르는 이집트로 진군하여 641년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키고 그 유명한 도서관을 불태웠다. 오트만은 북아프리카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칼리프의 자리 다툼으로 오마르도 오트만도 다 살해되었다. 이 때문에 모하메드의 사위인 알리(Ali)는 훗날 4대 칼리프가 되었지만 6년 후에 그도 므아위아(Moiawiyai)에 의해 살해되었다. 5대 칼리프에 오른 므아위아 1세는 모하메드의 친척 우마이야가(家)의 자손이었기에 우마이야(Ommaiya) 왕조라고 불리운다. 이슬람의 분열은 칼리프의 자리 다툼 외에도 교리적 차이도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3대 칼리프 시대에 코란 외의 전설(傳說)이 생겼는데 이를 순나(Sunna)라고 한다. 이 순나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이슬람은 두 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순나를 전부 승인하고 스스로를 정통 이슬람교라고 부르는 파(派)를 수니파(Sunnites), 이를 반대한 파를 시아파(Shites)라고 하는데, 수니파는 주류(主流)로서 터키를 중심으로 하고, 시아파는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한다. 전세계 무슬림(12억8300만 명)중 수니파는 85%, 시아파는 15%를 차지한다. 시아파가 출현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카르발라 참극이었는데, 그 참극이 발생하기 전까지 칼리프는 공동체에서 선출해왔었다. 그러나 5대 칼리프인 무아위아는 자신의 아들(야지드)을 후계자로 임명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때 반대에 앞장선 인물이 알리의 차남인 후세인이었다. 후세인은 680년 야지드가 칼리프가 되자, 추종자들이 있던 쿠파로 향하였다. 이에 야지드는 부하를 시켜 쿠파로 향하던 후세인을 카르발라(현 이라크)에서 살해하고 목을 잘랐다. 카르발라 참극으로 알리의 추종세력은 하나로 집결되었으며, 이는 시아파라는 별도의 신앙 체계를 형성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카르발라는 시아파에게는 메카보다 더 중요한 성지가 되었고, 시아파들은 후세인 순교일을 수난의 날로 생각해 자신의 몸을 학대하며 그날의 고통을 새긴다.

이슬람교의 동방에 대한 포교는 순탄하였다. 632년에서 651년 사이에 페르시아 전체가 이슬람교 수중에 들어갔고, 더 나아가 인도까지 넘어갔다. 그리고 스페인도 점령 당하였다. 반면에 이슬람교의 서방에 대한 진출은 여의치 못했는데, 이는 중세 그리스도교회의 완강한 저항 때문이었다. 특히 711년 투르의 전투에서 이슬람교가 프랑크에게 패한 것이 큰 이유가 되었다. 이처럼 약 1세기 동안 이슬람교는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 동쪽으로는 중국 당나라의 국경에 이르는, 하나의 커다란 사라센제국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단일 지배 체제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우마이야 왕조가 거의 백 년에 이르러 쇠퇴하게 되자 이때를 틈타 알리의 자손이 일어나서 압바스(Abbas)를 칼리프로 옹립하였다. 이로서 우마이야 왕조는 무너지고 750년에 압바스 왕조가 열렸다. 압바스 왕조는 762년 티그리스강 하류에 있는 바그다드로 도읍을 옮겼다. 압바스 왕조는 아라비안나이트로 이름난 하룬알 라쉬드(Harounal Rashid, 786~ 809년) 시대에 가장 번영하였다. 우마이야 왕조가 망할 때 아브드 라흐만(Abder Rahman)이라는 왕족이 피신하여 스페인으로 건너가 코르도바에 도읍하고, 스스로 칼리프(아브드 알라흐만 1세, Abd ar-Rahm?n ㅣ)로 칭하고 후(後)우마이야 왕조를 열었다. 이리하여 이슬람교는 바그다드와 코르도바에 두 칼리프들로 서로 대립 경쟁하게 되었고, 10세기 초엽에는 바그다드의 동(東)칼리프로부터 이집트의 카이로 칼리프가 분리되어, 마침내 세 세력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10~ 15세기에 이르는 '국토회복운동'으로 마침내 그리스도교도에게 탈환되었고, 따라서 무어제국의 칼리프는 자연히 없어졌다.

이슬람교는 본래 교리가 계율적이고 타율적이어서 신비적인 요소는 적었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페르시아에 들어가게 되자 페르시아의 신비 사상과 접하게 되었고 이로서 이슬람교에도 신비종파(神秘宗派)가 생기게 되었다. 이것을 수피파(Sufiism)라고 한다. 율법주의와 신학적 사변에 의한 신앙의 형식화에 반대하고, 행위의 동기와 성전(聖殿)의 내적 의미를 강조하는 이슬람교의 수피파는 9세기 무렵 발생하였다. 수피파에게 있어서 신의 유일성이라는 것은 단지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고 고백하고 다른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그 이상인, 즉 유일신 이외에는 전혀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인간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일치시키는 일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신의 유일성이라는 것은 명상 속에서 자아 의식을 무(無)로 하고, 자기와 신을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이원적(二元的) 대립을 초월한 상황에서 자기를 지배하는 신을 실감하는 것(파나)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와 같은 신의 유일성을 체험한 사람을 성자(聖者; 왈리)라고 한다. 수피파는 그 성자의 전형(典型)을 예언자 모하메드에게서 찾았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 이외의 일체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 신에게만 사념(思念)을 집중하는 수행(修行)을 해야 한다. 이슬람교의 법에서는 이와 같은 수행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전통 이슬람교가 성법(聖法)의 준수를 통하여 신과 통교하는 공동체적 이슬람인 데 반해, 수피즘은 각 개인이 자신의 내면에서 직접 신과 통교하는 개인형(個人型) 이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수피즘은 소수 엘리트 운동으로 출발했으나 곧 수행방법이 정비되고, 신플라톤주의와 인도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이론화되었다. 12~ 13세기 사회적 혼란기에는 디크르(오로지 신의 이름을 부르며 생각을 신에게 집중시키는 일)에 의한 수행의 간이화(簡易化)와 신과 인간의 중개자인 성자에 대한 신앙으로 수피즘은 대중화되기 시작했으며, 교단(타리카)의 형태로 이슬람세계 전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슬람의 광범위한 포교와 발전에 활력을 준 것은 주로 수피적 이슬람과 수피교단의 성자 및 상인들이었다. 16, 17세기를 정점으로 발전의 시기가 지나고 이슬람세계는 다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수피들은 체험을 중요시한 나머지 지식을 경시했으며, 이성(理性)에 의한 규제를 떠난 수피즘은 주술화(呪術化)되었다. '신에게로의 귀의(타와쿨)’가 적극적인 활동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무위(無爲), 무활동, 현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해되었고, 무기력과 침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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