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6·25] [미니 戰史] [7] 유엔군의 참전
전쟁 발발 채 하루도 안돼 유례없이 빠르게 안보리 소집… 27일 군사지원 결의문 채택
1950년 6월 25일 오전 11시 26분(한국시각) 미 국무부 러스크 차관보 책상 위에는 한국에서 발송된 전화통지문 한 통이 올라왔다. 무초 주한 미 대사가 보낸 긴급 보고서였다. 보고서엔 '오전 4시 북한이 남한을 기습 공격. 양상으로 볼 때 전면공격임에 틀림없음. 이미 개성은 점령됐음'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미국과 유엔 지도자들의 신속한 대응은 지금까지도 거의 유례를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채 두 시간도 안 돼 주말 휴가 중이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미국은 유엔대사를 통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청했다. 이어 전쟁 발발 20여시간 만에 안보리는 북한에 '침략행위 즉각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해 모였다. 현지시각 일요일 오후 2시였다.
북한군 남침 행위가 멈추지 않자, 안보리는 27일 유엔 회원국가들에게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권고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당시 59개 유엔 회원국가 중 이 결의문을 지지한 나라는 53개국이었다.
국제사회의 발 빠른 대응은 국제환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당시 유엔 안보리는 5개 상임이사국과 6개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돼 있었다. 상임이사국은 미국과 영국·프랑스·소련·자유중국(지금의 대만) 등이었는데, 소련은 그해 1월부터 자유중국 대신 중공을 상임이사국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안보리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안보리는 소련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미국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트루먼 대통령은 우선 해군과 공군에 '38도선 이남 지역 군사목표에 대해 작전'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문산과 의정부 등 서울 이북지역에 대한 폭격이 시작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또 30일에는 맥아더 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 보고서를 토대로 미 지상군 작전을 명령했고, 38도선 이북 지역에 대한 해·공군 작전도 허락했다.
미국이 적극적인 한반도 방어에 나선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된다. 우선 한국은 유엔의 지원과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로 북한의 불법 남침은 유엔의 권위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세계 평화에 대한 큰 위협이었다. 둘째는 당시 소련 공산세력의 엄청난 확장으로 국제사회 불안정성이 크게 훼손돼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자 다른 유엔 회원국들의 참전 제의가 잇따랐다.
7월 1일 미 제24사단 예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한반도에 도착해 5일에는 오산 전선에 투입됐다. 7월 8일에는 유엔군사령부 설치가 유엔에서 결의됐고 초대 사령관에 맥아더 원수가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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