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6·25] [미니 戰史] [6] 북한군 최대 미스터리… 서울 점령 후 3일간 공세 멈춰
국군 전열 재정비 시간 벌어
북한군의 서울 진입을 막는 마지막 보루였던 '미아리방어선'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1950년 6월 27일 오후 호남지역에서 공비토벌을 하던 국군 제5사단과 전방에서 후퇴해 온 제7사단은 정릉~미아리~청량리를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아군은 나무로 만든 바리케이드에 돌을 올려놓는 식으로 도로 장애물을 설치했다. 하지만 이는 전차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던 당시 우리 군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병력이나 차량을 막을 때라면 몰라도 이 장애물이 전차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북한 전차는 미아리삼거리에 설치된 장애물을 쉽게 제치고 길음교를 통과, 서울 도심으로 진입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국군은 오전 2시 30분 한강다리를 폭파했다.
북한군의 최대 '미스터리'는 이때 발생했다. 당시 소련 군사고문단장으로 있었던 라주바예프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적을 추격하지 않은 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적에게 한강 남쪽 강변을 강화할 기회를 주었다."
북한군은 왜 3일 동안 공세를 멈췄을까. 그 이유에 대한 해답은 완전하지 않다. 그동안 ▲서울 점령 북한군 3·4사단에 한강을 넘을 도하장비가 없었다 ▲춘천쪽에서 오는 2·12사단을 기다렸다 ▲일단 서울을 장악하면 남한 전체에서 인민 봉기가 일어나 스스로 붕괴할 것으로 예상했다 등의 분석이 있었다. 이런 요소들은 북한군 '3일 지체'의 진짜 원인의 전체일 수도 있고 부분일 수도 있다.
어쨌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우세를 확신했고 승리감에 도취해 우쭐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북한군 전차와 병력은 28일 오전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등 자신감을 내보였다. 여기에 북한군도 전쟁경험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이 주춤한 사이 국군은 한강 이남에서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흩어진 병력은 삼삼오오 한강을 건너왔고, 주력부대들이 흩어진 지 10여 시간 만에 3개 사단으로 재편성됐다. 육군본부는 29일에는 양화대교에서 지금의 신사동 지역에 이르는 지역을 지키는 시흥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홍일 소장)를 편성했다.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선 것은 서울을 점령한 지 6일 후인 7월 3일이었다. 서울 함락과 한강방어선 전투를 거치면서 국군은 전쟁방어개념을 '38선고수'에서 '지연전'으로 전환하게 된다. 미군 지상군 선발대는 7월 1일 부산에 첫 상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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