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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6·25] [미니 戰史] [10] 고수 아니면 죽음… 낙동강 방어선 형성과

好學 2010. 6. 2. 18:10

 

[나와 6·25] [미니 戰史] [10] 고수 아니면 죽음… 낙동강 방어선 형성과 배치

 

 

 

 

국군 5개사단이 중동부·동부전선 128㎞ 맡고
美 4개사단·해병여단이 중부·서부 112㎞ 담당

1950년 7월 말 미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낙동강을 따라 연결된 지역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결정하고, 전 부대에 8월 1일자로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7월 한 달 동안 계속된 지연전을 끝내고 4일간 천연 장애물인 낙동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 워커 장군은 예하부대에 "전사할 각오를 하고 현 위치를 사수하라"는 강경한 훈령을 전달했다. 워커 장군의 '비장한 결의'는 뉴욕타임스에 '고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북한군은 7월 말 현재 한반도의 90%를 장악했고, 마지막 남은 경상도 지역을 압박하고 있었다. 호남 지역을 우회한 적 6사단은 하동-진주 방향에서, 적 4사단은 소백산맥을 넘어 대구 측방 거창-고령까지, 적 1·13·15사단은 문경-상주 방향으로, 적 8·12사단은 죽령을 돌파해 영주-안동으로, 적 2·3사단은 김천 외곽으로 진출했다. 동해안 쪽에서는 적 5사단이 포항 북쪽의 영덕을 위협했다.

북한군은 4개의 공격축선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그들의 최종 목표인 부산을 점령하고자 했다. 즉, ▲경부도로를 따라 왜관-대구방향 공격 ▲포항-경주 방향 공격 ▲창녕 서쪽 낙동강 돌출부를 공격해 유엔군 병참선 차단 ▲마산-부산 방향 공격 등이었다.

최초 형성된 낙동강 방어선(X선)은 동서 길이 90㎞, 남북 길이 150㎞로 총 240㎞였다. 이 중 국군 5개 사단(1·3·6·8·수도사단)이 중동부 및 동부의 128㎞를 담당했고, 미군 4개 사단(1기병·2·24·25사단) 및 1해병여단이 중부 및 서부 방면의 112㎞를 담당했다.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낙동강을 돌파할 계획이었지만, 철수하는 아군을 따라잡지 못했다. 초기 전쟁을 주도했던 전차의 80% 이상이 파괴됐고, 일선부대 전투력은 50~60% 수준으로 감소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북한군은 유엔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어 낮에는 모든 부대의 행동이 큰 제약을 받았고, 병참선이 300여㎞로 길게 늘어나 병력과 물자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다.

하지만 적은 그때까지 계속해 온 공격기세를 유지하며 여전히 전장의 주도권을 잃지 않고 있었고, 정면 공격을 통한 부산 점령을 위해 8월과 9월에 걸쳐 대공세를 펼치게 된다.

그때 그 장면

고무신 신고, 목총 들고 훈련받는 신병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고무신을 신은 신병들이 훈련소에서 목총(木銃)을 들고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