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스포츠)이야기

한국의 축구 도입

好學 2010. 5. 29. 11:10

 

한국의 축구 도입

 

한국에 영국식 축구가 도입된 것은 1882년6월(고종 19년)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가 인천항에 정박했다가 축구공을 주고 떠난 때부터라고 전해온다. 축구의 체계적인 보급은 1904년 4월 관립 외국어학교에서 체육의 한 종목으로 채택하면서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축구경기는 1906년 3월에 대한 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가 삼선평에서 가졌다. 그러나 제대로의 틀을 갖춘 축구가 자리잡은 것은 1920년대에 와서였다. 1921년 2월 제1회 전 조선 축구대회를 개최했고, 이것이 전국 체육대회의 모체가 됐다. 유명했던 경평 축구대항전은 1933년 10월에 시작됐다.
그 후 한국축구는 발전을 거듭해 아시아의 왕좌를 지켜왔고,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하는 동시에 월드컵본선 5회 연속출전(총 6회출전)의 아시아 최고의 기록을 자랑아하는 위치에 와있다. 이러한 한국축구의 뿌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떤 자양분을 가지고 있나를 알아보기 위해 1980년대 초 아시아축구연맹(AFC)에서 조사단을 파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축구가 잘 될 이유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 오히려 잔디구장도 빈약하고, 겨울이 길어 훈련하기도 어렵고, 선수들이 병역을 치러야 하는 등 한국축구가 잘 안될 이유 세 가지를 찾아 보고했다고 한다.

 

척박한 땅에서 그래도 잘 꽃피우고 열매를 맺어온 한국축구의 발자취를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97년 영국함선이 인천에 들어와 승무원들이 궁내부 참리와 어전와 어전통여관들에게 축구의 선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이 대한축구구락부를 조직, 최초의 축구팀으로 탄생한다.

1920년 7월 13일 90여명의 유지들이 조선체육회를 창립함으로써 한국축구가 본궤도에 올랐다.

국제경기에 진출한 것은 1926년1월5일 배재고보 축구팀이 일본 대판에서 거행된 8회 전 일본 중등학교축구대회에 한국대표로 출전, 1회전에서 御影師範팀에게 1:0으로 패함.

1933년 9월 19일 유지 20여명이 朝鮮蹴球協會를 창립하여 지방별로 산만하게 난립하던 축 구단체들을 통일시켰다. 초대회장 박승빈.

1933년 10월 22-23 양일간 京城과 平壤 정기대항전이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려 무승부로 끝났다.

1934년 조선총독부는 축구개최권을 통제하려 했으나 관서체육회의 통제 반대 진정으로 기득권을 인정받다.

1947년 6월 19일 대한축구협회가 세계축구연맹(FIFA)에 정식으로 가입, 올림픽 참가자격 을 얻다.

1948년 7월 29-8월 14일 런던올림픽(14회)출전. 1회에서 멕시코를 5:3으로 눌러 세계 축구전 문가들을 놀라게 했으나 2회전에서 스웨덴(우승)에 12:0(62개의 슛)로 참패하다.

1954년 아시아 축구연맹(AFC)에 가입.

1954년 6월 16-7월 4일. 5회 스위스월드컵에 첫출전(3/7-14.일본을 5:1, 2:2로 물리쳐). 헝가리에 9:0, 터키에 7:0패.

1964년 18회 동경올림픽에 출전, 아랍공화국에 10:0, 체코에 6:1, 브라질에 6:0패.

1968년 멕시코올림픽예선 한3:3일, 한7:0비, 일15:0비. 골득실차로 일본 본선 진출해 동메 달획득(아시아 최초 상위입상)

1980년 3월 22-4월 6일 모스크바올림픽 예선(말련). 말련에 2:1패로 탈락.

1994년 6월 미국월드컵본선에 출전

1988년 6월 프랑스 월드컵본선에 출전(86멕시코, 90이탈리아월드컵에 이어 연속 4회 본 선 진출, 54년 스위스월드컵까지 5회진출).

월드컵본선 총14전 4무 10패 득11실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