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한국교회사]] 영광 야월교회

好學 2010. 5. 21. 20:27

 

[[한국교회사]] 영광 야월교회

 

 


영광 야월교회

 

배유지(유진벨)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주, 군산, 나주로 하여 목포에 선교센터를 만들고 전라지방에 복음을 전하던 중 당시 육상도로가 열악하여 선박을 이용하여 서해안으로 북상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법성포 인줄 알고 들어온 것이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게 되었다.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1908년에 염산리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후에 이 교회를 야월교회로 개칭하게 된다.일제시대에는 야월리에 일본의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일진회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지방유지 들을 매수하여 친일 세력을 형성하는데 이를 저항하는 뜻있는 세력이 전국적으로 퍼져서 소위 상록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며 농촌 잘 살기 운동, 애국사상 고취운동, 생활개선운동, 한글 가르치기 운동 등을 펴기 시작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중앙과 연락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극심하여 잘 연락이 되지 않으므로 YMCA에 몸을 담게 되고 여기에서 이들은 복음을 듣게 되어 이들이 주축이 되어 야월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950년 6.25 동란이 지나가고 9.28 수복이 될 대 기독교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국군과 UN군을 환영했다 하여 공산군 잔당인 공비들이 마지막 철수 직전 교인들을 잡아 처형했다.  김성종,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최판원 집사는 염산 설도 수문 앞에서 개별적으로 끌어다 물에 빠뜨려 처형하였고 그의 가족들과 수많은 교인들은 두우리 쪽 큰 북재 넘어 공동묘지에 직경 6m 넓이의 구덩이를 파서 밤에 손과 몸뚱이를 묶어서 구덩이에 수장시키어 죽이기도 했다. 후에 한 구덩이에서 80구의 사체를 발굴하기도 했다.  이어서 그 해 10월 어느 날 그들은 교회당 건물까지 소각해 버려서 그 곳은 몇 년 동안 교회 없는 마을이 되었었다. 야월 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값진 신앙을 지키다가 한 분도 남김없이 살해되어 순교제물이 되어진 것이다.  교회가 불타고 교인이 한 명도 남김없이 순교하였고 교인 대다수가 생매장 되어 순교를 한 점이 한국 교회사에서 유일한 교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