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한국교회사]] 해미 순교성지

好學 2010. 5. 21. 20:23

 

[[한국교회사]] 해미 순교성지

 

 


해미 성지 전경

 


해미 순교성지 정문

 


기념 성당

 


노천성당, 십자가탑과 제대

 


순교 감옥터

 


진둠범과 순교 유적비

 


진둠벙, 죄인 둠벙이라 하여 순교자들이 수되어 죽은 곳이다

 


순교 생매장 그림

 


유해 참배실

 


순교자들의 유해와 치아들

 


해미 순교지 호서좌영

 


서문, 지성루라고도 하는데 서문 밖으로 끌고가 죽였다

 


서문 밖 처형지 순교현양비

 


순교현양비와 자리개돌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어

죽이기도 하였다. 사진은 자리개질에 사용된 돌다리이다

 


300년 이상 된 호야나무

 

감옥터에서 당시 손발을 묶이고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리어

고문대로 쓰여지던 호야나무 

 


옛 처형지를 여숫골이라 불렀다. 순교탑이 세워져있다

 

순교자들의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듣던 곳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처형지 순교탑

 


해미 진남문

 

해미읍성은 사적 제 116호의 성으로 성곽길이 1,800m, 성곽 높이 5m, 면적 60,000평으로, 이 성은 1421년(세종 3년)에 왜구의 해안 지방 침투를 막기 위하여 축조하였으며, 조선 시대 평지에 축성한 석성으로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성이다. 충청남북도의 군사를 통할하던 병마절도사가 230여년간 주둔하였다. 1651년(효종 2년)에 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고 이어서 반양리에 있던 해미현이 이곳으로 옮겨와 읍성이 되었으며 겸영장이 현감이 되고 호서좌영으로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군사권을 관장하였다.성벽 주위에는 탱자나무를 심어 적병을 막는데 이용하였다 하여 ‘탱자성’이라고도 불렀으나 현재는 대부분 없어지고, 진남문에서 관아문에 이르는 진입도로 주변에만 탱자나무가 있을 뿐이다. 당초 성읍 내에는 학교, 면사무소 등의 관공서와 민가가 많이 있었으나, 정비 복원 사업 추진을 위하여 모두 철거되고 현재는 관아문과 동헌 등이 있다. 또 이 읍성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 간 근무하였고,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정조 대왕 당시 잠시 유배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미읍성은 이러한 군사적, 행정적인 측면과 아울러 천주교 박해 80년간에 1천명의 순교자가 처형된 성지로도 유명하여 신앙적인 측면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다.

 

해미 성지 순교역사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 절도사의 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국토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 기록을 남긴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병인 대박해 때에만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명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지속적인 박해 동안에 해미 진영(지금의 해미 읍성)의 두 채의 큰 감옥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 지방에 끌려온 천주학 죄인들이 항상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바로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이 감옥터에는 당시 손발을 묶이고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리어 고문대로 쓰여지던 호야나무 가지가 지금도 흔적을 지니고 서 있다. 그래서 감옥터를 1950년대에 해미 공소 신자들이 식량을 절약하여 1800여 평을 확보하고 공소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에 정부가 문화재 관리 정책의 명목으로 공소 강당을 철거하고 그 터를 일부 보상, 일부 징말하고 순교 기념비만 새로 세워주었다. 그 후 오늘 날 그 터의 교회적 성역화 사업이 불허되고 있다. 이렇게 내포에서 끌려와 감옥에 갇혀 있던 그 많은 순교 선열들을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 진영 서문 밖에 끌어내어 교수,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더욱 잔인한 방법이 고안되기도 했다.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어 죽이기도 하였고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 죄인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지금은 해미 진영 서문 밖 바로 앞에 있는 칠십평 좁은 순교지에 자리개질해서 죽였던 돌다리가 보존되어 있는데, 1956년도에 서산 성당으로 이전 보존되었다가 1986년 9월에 원위치로 귀환되었고 바로 그 곁에 1989년에 세운 순교 현양비가 있다. 하지만 그 일대의 순교터가 아직 확보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많은 숫자의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한마디 명령으로 산사람들을 밀어넣어 흙과 자갈로 끌어 묻어버렸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해미 지역 외인들을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해서 죄인 둠벙이라 부르고 있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 하는데 이 때 캐어내던 뼈들은 수직으로 서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해미진영 서녘의 생매장 순교 벌판에서는 1935년도(일제 시대) 서산 본당의 범 베드로 신부 지도하에 순교자의 유해 발굴 때 유해 일부와 유품 성물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9월 20일 유해 발굴터인 원위치로 안장되었고, 순교자의 유해는 별도로 보존 처리되어 보존되고 있다.(유해참배실). 그리고 유해 발굴지 인근인 하천 위에 16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조형물인 해미 순교탑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 이 불확실한 이름과 출신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을 뿐, 그 밖의 모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모두가 무명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순교자들 중 홍주(홍성) 및 공주 등 상급 고을로 이송된 순교자들은 이송 사실과 이름들이 기록으로 남겨진 것으로 보아 그 이송된 순교자들은 해미 진영장의 독자적 처결에 있어서 사후에 문책거리가 됨직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으며, 해미 진영은 처형 후 문책의 배후 세력을 갖지 못한 서민층 신자들만을 심리나 기록 절차 없이 마구잡이로 죽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해미 성지는 1985년 4월에 해미 본당이 창설된 후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를 발족하였고 순교 성지 확보 운동을 전국 신자들에게 홍보하여 꾸준히 모금한 결과 1998년 말에 생매장 순교 성지를 약 7천 평 확보하였고, 그리고 이어서 1999년 5월부터 3천 명의 회원들로부터 성전 건립 기금을 모아 2000년 8월 기공식을 하였고 2003년 6월 17일 기념 성전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셔놓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생매장 순교지 일대는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듣던 곳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