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音樂/[Classics의 名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好學 2009. 4. 5. 21:16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년 1월 27일 - 1791년 12월 5일)는 오스트리아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지금은 오스트리아이지만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대주교 관할 구역이었던 잘츠부르크에서 궁정 음악가인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페르틀 모차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형제로는 누나인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가 있었다. 모차르트는 태어난 다음 날 성 루퍼트 성당에서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라는 세레명을 받았다.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교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대주교에서 따왔으며, '테오필루스'는 '신의 은총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모차르트가 살던 당시에 라틴어: Amadeus, 독일어: Gottlieb, 프랑스어: Amadé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는 출판업자인 요한 야콥 로테르에게 모차르트의 출생을 알리는 편지에서 "...아이의 이름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 고틀리에브요."라는 글을 남겼다. 볼프강은 세 번째 이름을 좋아했고 또한 "아마데우스"라는 이름도 좋아했다.

모차르트는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교육자 중 한 사람으로,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었다. 레오폴트는 볼프강의 누나를 어린 나이에서부터 가르쳤고, 이를 볼프강은 지켜보았다. 세 살 때부터 볼프강은 누나를 보고 건반을 다루고 연주하는 법을 터득했다. 레오폴트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이 뚜렷이 빛을 발하게 되면서 작곡을 그만두었고 볼프강 볼프강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난네를의 뮤직북에 쓰여진 레오폴트의 기록에 따르면 어린 볼프강은 네 살때 여러 곡을 배웠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능력은 빠르게 발달하여, 다섯살 때 이미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여행

레오폴트는 어린 볼프강을 데리고 연주를 다녔다. 볼프강은 눈을 가리거나 손을 뒤로 해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으며, 그가 본 적이 없었던 어려운 악절을 갖고 즉흥 연주를 할 수 있었다. 한번은 볼프강에게 병이 난 적이 있었는데, 레오폴트는 아들의 몸보다는 수입이 줄어들 것을 더 걱정했다.

모차르트는 1762년 뮌헨을 시작으로 3년 반 동안 아버지를 따라 빈, 다시 뮌헨, 만하임, 파리 , 런던, 헤이그, 다시 파리, 취리히, 잘츠부르크, Donaueschingen, 뮌헨으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모차르트 일행은 1767년 말에 빈으로 가서 1768년 12월까지 거기에서 지냈다. 잘츠부르크에서 1년 동안 지낸 다음 이탈리아로, 1769년 12월에서 1771년 3월까지, 1771년 8월에서 12월까지, 1772년 10월에서 1773년 3월까지, 세 차례 갔다.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에서 그리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를 한 번 듣고 기억만으로 전부 써내려갔다. 1773년에는 빈 학파, 특히 하이든의 작품에서 교향곡·협주곡·피아노곡 등 기악곡을 배웠으며, 만하임에 가서 만하임 파의 악기법을 익혔다.

1777년에는 어머니와 함께 뮌헨, 만하임, 파리로 갔는데, 파리에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모차르트는 많은 음악가들과 만났는데, 그 중에서 1764-5년에 런던에서 만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81년 모차르트는 자주 여행하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엄격한 대주교와 다투고 오랫동안 몸담았던 잘츠부르크의 궁정 악단을 사직하였다.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주교의 작곡가로 들어가면서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옮겼는데, 얼마 못 가 쫓겨났다.

1782년 8월 4일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바람을 어기고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다. 둘은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네 명이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두 명의 아이 카를 토마스(Karl Thomas, 1784-1858)와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Franz Xaver Wolfgang, 1791-1844) 모두 결혼하지 않아 자식이 없다.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은 이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음악가의 길을 걷지만 아버지만큼의 명성은 얻지는 못한다.

1782년은 모차르트에게 행운의 해인데, 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 이후로 그는 자신이 쓴 피아노 협주곡을 스스로 지휘·협연하기 시작했다.

1782년부터 1783년까지 모차르트는 바로크 작품의 필사본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의 영향으로 바흐 나 헨델과 같은 작곡가의 작품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뒷날 마술 피리나 교향곡 제41번 에 등장하는 푸가처럼 바로크의 형식을 띈 작품을 쓰게 된다.

빈에 살던 중에 모차르트는 요제프 하이든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이 빈에 올 때면 같이 현악 사중주를 즉흥 연주하곤 했던 것이다. 1782년부터 1785년까지 작곡된 모차르트의 현악 사중주곡 중 여섯 개가 하이든에게 헌정된 것이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경외롭게 보았는데, 처음 모차르트의 작품을 듣고 레오폴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하느님 앞에 맹세하건대 당신의 아들은 내가 들어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곡가입니다. 그에게는 감각이 있고, 게다가 그는 가장 뛰어난 음악적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프리메이슨 단원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 마술 피리의 주제는 프리메이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모차르트가 가난에 시달렸다는 주장은 신화에 가깝다. 모차르트의 인기가 시들해졌던 때조차 모차르트가 벌어들인 돈은 서민들에 비하면 아주 많은 액수였다. 모차르트는 종종 친구들에게 을 빌려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여기 나오는 수사학적 표현과 낭만주의적 신화가 합쳐져서 모차르트가 가난했다는 세간의 인식을 만들어냈다. 현재 모차르트의 수입 내역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만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수입들만 해도 결코 가난에 시달렸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모차르트는 당대의 다른 음악가들과는 달리 자유음악가의 길을 걸었으므로 그가 속한 계층에서 체면을 잃지 않고 살기에는 돈이 부족했다. 모차르트가 친구들에게 돈을 빌린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모차르트와 그의 부인이 돈을 낭비했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과 《돈 조반니》를 썼던 빈의 집은 현재 보전되고 있다.

죽음

모차르트의 죽음과 그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설을 비롯하여 학설이 많다. 낭만적인 주장으로는 모차르트의 건강이 점점 약해지면서 그의 모습과 작품 역시 다가오는 죽음과 함께 쇠퇴하였다는 것이 있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해가 그에게 성공적이었으며, 그의 죽음이 가족들에게 충격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죽음이 급작스러웠다고 주장한다.

그의 죽음의 원인 또한 추측이 무성하다. 기록에는 그가 "무수히 난 좁쌀만한 발열"("hitziges Frieselfieber")로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현대 의학으로 진단할 수 있는 것에 비해서는 충분한 정보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사인에 대한 학설 중에는 선모충병, 수은 중독, 류머티스열, 덜 익힌 돼지고기에 의한 식중독 등이 있다. 환자의 피를 뽑았던 당시의 의술도 모차르트의 죽음을 앞당기는 데에 기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오전 0시 55분경에 죽었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작품 레퀴엠 의 완성을 여러 제자들에게 맡겼으나 끝내 완성시키지 못하다가 결국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가 완성시켰다.

모차르트가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달리, 그는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수입이 있었고 프라하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꾸준한 작곡 위촉을 받았다. 그가 말년에 전성기 때만큼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으며 돈을 꿔 달라고 쓴 편지가 있지만, 이는 그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번 돈보다 더 많이 썼기 때문이있다. 그 실례로 모차르트가 입은 옷은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의상이었다. 모짜르트는 빈 외곽의 성 마르크스 묘지에 묻혔다. New Groove에 따르면 그가 여러 사람과 함께 묻힌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당시 빈 중산층의 장례 풍습대로였다. 그것은 잘 정비된 묘지였으며 나무로 된 것이었으나 묘비도 있었다. 묘비가 나무였던 것 또한 당시 빈 중산층의 장레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실제 당시 빈에서는 화려한 장례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장례식 날 비가 오고 천둥이 쳤다고 하나 New Groove에 따르면 사실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이었다고 한다. 현재 모차르트의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는 것은 성 마르크스 묘지가 더 많은 묘지를 수용하기 위해 이장을 거듭하였기 때문이지 아무렇게나 묻었기 때문은 아니다.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남편이 죽은 후 추모 음악회, 미 발표 작품의 출판 등으로 경제적으로 성공하였다. 1809년 그녀는 덴마크 출신 외교관이었던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재혼했다. 그들은 덴마크로 이주했다가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여생을 마감한다. 콘스탄체와 새 남편은 모두 모차르트에 대한 전기를 남겼다.

음악

 

모차르트는 다작을 한 작곡가로, 오페라 약 26곡, 교향곡 약 67곡, 행진곡 약 31곡, 관현악용 무곡 약 45곡, 피아노 협주곡 약 42곡, 바이올린 협주곡 약 12곡, 회유곡 약 40곡, 그 외 독주곡, 교회용 성악곡, 실내악곡 칸타타, 미사곡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600 여곡을 작곡하였다. 그의 많은 작품이 그 당시에 있던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피아노 협주곡만큼은 모차르트 혼자서 발전시켜서 대중화했다. 모차르트는 미사곡을 포함한 종교 음악과 실내악곡, 그리고 디베르티멘토와 춤곡과 같은 가벼운 곡도 썼다.

주요 작품으로는 《주피터 교향곡》,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마술 피리》 등과, 최후의 작품인 《진혼곡》이 있다. 고전 음악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모차르트가 받은 영향

모차르트의 유년기는 궁정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 레오폴트의 교육으로 클라비어에 숙달하여 유럽 각지를 일찍부터 순회연주하였다. 당시 유럽의 각지에서는 여러 가지 새로운 양식적 시도가 있었으므로 모차르트의 여행은 그러한 새로운 예술적 동향에 직접 접할 기회를 부여받고 그의 창작능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처럼 그가 일찍부터 부친의 천재교육과 유럽의 연주여행에서 직접 체험하고 또한 받은 중요한 영향을 살펴보면 대강 아래와 같다.

  • 잘츠부르크 음악 - 어린 모차르트가 출생지에서 받은 영향은 그의 예술적 소질을 형성하였다. 잘츠부르크의 음악은 결코 깊이가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우아함이 감도는 경쾌감이 특징으로서, 이 지방의 작곡가 에이베를린이나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 미하엘 하이든의 음악에 기조를 이룩하기도 했다.
  • 파리의 음악 - 1763년에서 1764년, 파리에서 알게 된 슈베르트, 에카르트(Eccard), 르그랑(Legrand)의 영향을 받아 당시 파리를 휩쓸던 우아하고 경쾌한 클라브생 음악에서 감명을 받았다.
  • 크리스티안 바흐 - 1764-5년의 체재 중, 대 바흐의 막내아들 크리스티안의 교향곡에서 배운 바가 많았다.
  • 이탈리아 음악 - 1770년의 이탈리아 여행 중, 마르티니 신부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아 엄격한 대위법 음악에 대한 흥미를 더하였다.
  • 전(前)고전파의 작곡가들 - 1773년 여름의 빈 여행에서 하이든, 바겐자일, 몬 등의 견고한 구성미의 음악에 결정적인 자극을 받아 독일 음악을 재인식하였다.
  • 갤런트 양식 - 미하엘 하이든의 우아한 작풍에 감명을 받고 모차르트의 선천적인 음악적 기질과도 어울려 우아한 표현이 개화하였다.
  • 만하임과 파리 -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음악이 번영한 곳으로서, 만하임 오케스트라의 우수한 관현악 기법과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나 글루크의 오페라 세리아에서 극적 표현을 습득하였다.
  • 요제프 하이든 - 모차르트가 1781년 빈에 정착한 뒤부터 직접적인 교류에 의하여 한층 그 유대가 강해졌으며 그는 1782-1785년에 걸쳐 작곡한 6곡의 현악 4중주곡 <하이든 4중주곡>을 하이든에게 바쳐 감사를 표하였다.
  • 바로크 음악 - 반 스비텐 남작과 알게 되어 바흐나 헨델 등 바로크 대가의 음악에 접하는 기회를 얻어 엄격한 폴리포니의 기법과 정신 면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후세에 준 영향

그는 감정과 감각이 극도로 예민하여 당시의 각종 음악 양식을 부드러운 태도로 흡수, 여기에 개성의 심오한 특성을 반영하여 독일 고전주의 음악의 정수를 표현함으로써 후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의 교향곡은 그 개성적인 창작이 베토벤에게 이어졌고, 가극은 베버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모차르트가 "천재성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만큼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고 말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그의 제자 페르디난드 리스에게 자신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 의 1악장의 주제만큼 대단한 선율을 생각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 보내는 경의로 쓴 작품이 있는데, 마술 피리의 주제에 의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곡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위해 쓴 카덴자 등이 그것이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만나고 나서 그를 칭찬한 적이 있었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를 위해 《모차르티아나》를 썼으며, 구스타프 말러는 모차르트의 이름을 부르다 죽었다. 막스 레거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모차르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에 의한 것이다.


쾨헬번호

모차르트의 작품을 정리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1862년 루트비히 폰 쾨헬에 의해서였다.

 

전설

모차르트는 전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작곡가이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가 남긴 레퀴엠이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는 것인데, 많은 작가들이 이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글을 썼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학자들의 연구에는 방해가 되는 것이다.

유명한 것은 모차르트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독을 먹여 죽였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알렉산데르 푸슈킨의 연극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세르게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피터 섀퍼의 연극 《아마데우스》의 주제로 다뤄졌다. 《아마데우스》는 영화로 만들어져 여덟 개의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섀퍼의 연극에서 모차르트가 천박하고 촌스럽게 그려졌다 하여 이를 거짓 과장이라 비난하였다.

다른 전설은 모차르트의 음악적 천재성에 대한 것이다. 모차르트가 다섯 살때부터 작곡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학자들은 그가 20세 이전에 쓴 작품은 너무 단순하여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아마데우스》에서 그려진 것처럼 모차르트가 영감을 받아 머릿속에서 음악을 완성한 다음 한 번도 고치지 않고 써내려가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그는 신중하고 노력하는 작곡가였으며, 그의 음악적 지식과 기법은 오랜 시간동안 이전 시대의 음악을 연구함으로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젊은 시절에 당대 내려오던 작품들을 분석하지 않은 게 거의 없었다할 정도로 엄청난 노력을 했으며, 한 편에서는 '표절의 천재'라는 비아냥과 오명에 대해 평생을 싸워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