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릿말
김종우감독은 영력의 인물이었다. 그의 호는 천곡이다. 그는 1884년 9월 21일,경기도 강화군 위량면 홍천동 천곡촌에서 김철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2. 천곡의 학력
천곡은 어려서 부터 정직했다.그리고 지혜가 출중했다. 그는 8세부터 자기집 글방에서 한문을 8년간이나 수학했다. 그리고 16세가 되어서야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사립 보창학교에 들어가 몇달 수학했다.
꿈이 많은 천곡은 그곳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서울로 올라갔다. 배재학당에서 4년간 중학과를 졸업했다.(1907-1910) 이어서 배재학당 대학과에서 1년간 수학하다가 (1910-1911)피어선성경학원(1911-1915)을 졸업했으며,이어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본과를 졸업하였다(1915-1917). 그러나 천곡은 이러한 학교 교육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우직하고 유순하고 지혜로운 천곡은 학교를 떠나서 목회를 하면서도 계속 학문을 닦아야한다고 생각했다. 배움이란 끝이 없다고 했다.
3. 임신의 경위
천곡의 선조들은 서울서 벼슬을 하고 살다가 강화로 낙향했다. 천곡의 조부는 유교의 도학을 연구하는 고고한 유학자로서 덮어놓고 기독교를 능멸하거나 배격하지 않고 도리어 그 말씀을 받아 들여서 명상하며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내려진 그의 결론은 이러했다.
유교는 이미 너무 부패했다. 본바탕을 찾아보기힘들다. 사람들이 외식만 취하니 그 운명은 다 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형식보다는 그 교리의 본바탕을 주장삼아 가르치니 그 장래가 아름답다. 내가 예전엔 향교에서 꿈에 만나뵙던 공부자를 이젠 예수교 예배당에서 만나보기 되니 참으로 이사한 일이다. 아니 향교에서는 유교의 독신자라 하는 사람들이 술타령이나 하며 세월을 보내니 부패하기 짝이 없다. 어찌 그곳에 주공이나 공자가 게실소냐,공자가 다시 이 세상에 난다해도 예수교와 같이 착한 도를 가르치는 거룩한 곳에서 살기를 원할 것이다. 그런즉 나는 예수를 따라 감이 마땅하니라.
하시고 1901년 결신했다. 뒤이어서 천곡도 믿고 스크랜톤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1901.9). 그는 꿈을 안고 서울 배재학당을 찾았다.일하고 학비를 얻어 쓰고 자취하며 학업에 열중했다. 주일과 수요일은 동대문 밖으로 나가 각 곳에서 예배인도와 개인전도에 열심했다(1908부터). 특히 각심사교회로 파송을 받아(1910)일할 때에 많은 신기한 일을 경험했다. 이 겨험이 천곡을 큰 목자로 다듬는 계기가 되었다. 각심사란 곳은 사찰은 흔적뿐이고 무당촌으로 유명했다. 이곳 사람들은 거의가 첩을 한둘 안둔 사람이 없었다. 천곡은 열심히 기도하며 진지하게 권면했다. 이로써 첩들이 청산하고 몸과 마음을 온전히 주께 헌신하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
천곡은 밤예배가 끝나면 다시 30리 길을 걸어서 학당 기숙사로돌아가야 했다. 밤길은 언제나 도적의 위험과 들짐승의 위험이 따르고 있었다. 매양 이 위험을 되도록 잘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가끔 피하지 못하고 당해야만 할 때가 있었다. 이 현장이 천곡의 신앙을 더욱 견고케 하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할 수 있게 했다. 성령이 그를 이끌어 주셨고 끊임없는 기도는 그의 마음을 굳세게 했고 평안케 했다. 그의 강하고 담대한 믿음과 기도는 그로 하여금 도적떼가 나타날 때에 알려주셨고 늑대들이 그를 호위해서 산길을 무사히 지날 수 있도록 했다. 천곡의 마음에 복음의 확신을 안겨다 주었다.
4. 취직의 세갈랫 길
1911년 봄이었다. 천곡이 배재학당 대학과에서 1년을 공부한 뒤에 여러가지 사정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때마침 천곡에게는 세곳이나 일자리가 나왔다. 당시 고등관의 월급이 40원이었다. 그런데 서양인 금광에서 월급 70원에 오라고 했다. 관청에서 판임관으로 오라 했다. 끝으로 정동교회 담임 최병헌 목사가 월급 10원에 교회일을 하자는 것이었다. 실로 답답한 취직의 세 갈랫 길이었다. 어디로 가나?물질?지위?아니 주의 일? 그렇다 주의 일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갈등은 심했다.
천곡은 진관사로 가서 머물면서 7일간 날마다 세 차례식 그 뒷산 절벽에 자리잡고 기도했다. 주께 서원했다. 주여 나의 갈 길을 열어주소서. 나의 길을 밝히소서 내 눈앞에는 세갈렛 길이 보입니다. 어디로 가오리까?
7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천곡의 귀에는 분명하게 들려왔다. 똑떡히 들려왔다. 이 어리석은 자식아! 어찌 그리도 미련하냐! 네게 무엇이 제일 귀하냐 천하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너의 생명이 아니더냐? 라는 소리였다. 천곡은 물욕과 권세욕에서 탈피했다. 한달에 10원짜리 주의 일을 하기로 마음 굳게 작정했다.
5. 영력의 계획 목회자
천곡은 중생의 체험을 한 후 각처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수천의 새로운 신자를 얻었다. 목회에도 훌륭했다.설교도 훌륭했다. 필자가 신학교에 있을 때에도 낮 예배는 파송지로 갔지만 밤예배시간은 학생 거의가 정동으로 나갔다. 짧고도 은혜로운 설교라는데 학생들의 일치된 평이었다. 그가 목회자로서 성공했던 사항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한마디로 말해서 계획 목회이었다(1924.10.16.정동구역회록,1925.9.17.정동구역회록을 참고).
2) 그 계획은 항상 직원들과 교인들의 협조를 요구했다. 그리고 시행에 옮겼다.
3) 교우 심장에 철저했다. 아울러 개인전도에도 경주했다. 특히 빈자를 돌보았다.
4) 속회에 중점을 두고 조직,모임,내용을 더욱 충실히 하도록 힘썼다.
5) 대전도회,개인전도회,사경회 등의 충분한 준비기간을 두었고 특별히 남자들이 많이 참석하도록 힘썼다.
6) 엡윗청년회의 활동과 주일학교운동에 담임자로서의 많은 협조가 있었다.
7) 특히 임원들이 임직위원회의에 불참하면 곧 방문해서 다음에는 반드시 참석토록 힘썼다.
이상의 사항을 실행하기 위해서 천곡은 계속적인 기도와 성경연구와 사랑으로 교인들을 돌보고 감싸주고 어루만져 주는 역할을 다했다.3.1운동으로 상처받고 희생되고 흩어졌던 양떼들이 서서히 모여 들었다. 많은 인재들이 천곡의 신앙을 본받아 살아갔다. 그는 교회 교육으로도 많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데 협력했다. 우선 하기성경학교가 시작되었고 주일학교 영아부가 신설되었고,무산자를 위한 야간학교가 개교되었다. 탁아소가 시작되었다.
천곡의 전도생활 30년사(1908-1938)는 실로 소탈하고 단조로웠다. 그러나 그의 영력으로 매는 줄은 사랑과 평화와 기쁨으로 이어졌다. 그의 전도생활은 배재학당 학생시절(1908)로 비롯된다.학창시절의 전도생활은 많은 신기한 일들을 경험했다(1908-1914). 1914년 정동교회에서 전도사 일을 보는 중 1916년 목사의 집사 안수를 받았다. 1917년 동대문교회로 파송받아 시무 중 1918년엔 목사의 장로안수를 받고 정회원에 허입했다. 이어서 정동교회 담임자(1919-1927),경성지방 감리사(1927-1929),상동교회 담임자(1929-1932),수표교교회 담임자(1932-1934 감리사겸),다시 정동교회 담임자(1934-1938)로 시무했다. 장감 연합협의회 회장일도 보았다(1922) 1932년에는 한국교계에서 <진흥년>으로 신앙부흥운동을 일으켰다.1938년4월에 서대문서에 검속된 일도 있었다.
1938년 10월 10일에 기독교 조선감리회 제3회 총회에서 제3대 감독을 선거하는 중 23회 투표해서 천곡 김종우 목사는 감독으로 피선되었다. 영력의 목회자 천곡이 취임사에서 6만여 명의 합한 뜻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받아들여 순종한다고 했다. 그는 감독으로 취임한 후에도 변함없이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힘썼다.
그는 조선 감리회보의 감독의 편지란을 통해서 꼭 아홉번의 글을 썼다. 그 글월에서는 한결같이 사랑,평화,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강조했다. 또한 교회 부흥책을 위해서는 <기독교의 맛을 알아야 한다>,<교인이 서로 아껴야 한다>,<노쇠 목자를 위한 은급기금이 필요하다>,<큰목적을 위해 자기의 작은 목적은 희생되어야 한다.이것이 하나이 되는 지름길이다>,<연부년 부흥>,<예수밖에 없음>,<연회에서도 은혜받자>,<연회 후에는 사랑으로 목사를 맞고 보내라>,<휴양은 필요하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화평과 기쁨은 휴양해선 안된다> 고 했다. 끝으로 추절의 신계획에서 가을에 할 일을 <정신수양과 교회사업을 계획세워 할 것>을 주장했다. 종교교육과 전도사업에 각별히 심혈을 경주하라고 했다.
1939년 9월 17일 영력의 지도자,계획목회의 부흥사, 천곡,김종우 감독은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이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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