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주일예배]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2)

好學 2009. 11. 11. 00:33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2)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9장 18-2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하실 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하더라. 그분께서 그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침례자 요한이라, 하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며 다른 이들은, 옛 대언자들 중의 하나가 다시 일어났다. 하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엄히 명하사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고 셋째 날 일어나니라, 하시니라.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로되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면 구원할 것임이라.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버림을 받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들을 부끄러워하며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자기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 중에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임이라.”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과 같은 하나님의 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옆에 두고 우리의 왕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게 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금 읽은 본문에 집중시켜 우리가 배울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은 성경이 우리가 배우기 위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필요한 것을 알고 도움을 받으며 위로를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교회의 핵심은 일요일 저녁예배와 수요일 저녁예배에 모인 사람들이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회에 대해 알고 싶으면 수요예배에 가보면 됩니다.

물론 일요일저녁 예배에 가셔도 그 교회가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이처럼 일요일저녁에 모였습니다. 즉 우리가 교회나 교제나 성경말씀 등의 값어치를 알고 나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주 험난한 파도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나타나곤 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이 ‘헌신’이라는 것 때문에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정해진 법칙 속에 있는 것인가요? 무엇이 좋고 나쁜지 따져보듯 우리의 삶을 평가해 본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가요? 내가 다른 그리스도인에 비교해서 비교적 낫다든지 55-60% 그리스도인보다는 내가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7장 15절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인정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라.” ‘그렇지, 나도 바울의 느낌과 같아, 교회에 가서 참되게 살려고 작정하고 사회에 나가면 죄를 짓는단 말이야.’ 모두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결심을 하는 것은 또 내 인생을 멍들게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0장 12-13절을 보십시오.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오직 주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의 모든 길로 걷고 그분을 사랑하며 또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섬기며 내가 이 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령하는 주의 명령과 그분의 법규를 지키는 것이 아니냐?”

저는 오늘 아침 설교를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설교의 기본으로 하려고 합니다.
12절에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 합니다.

바너라는 기독교 연구 기관에서 조사를 한 결과를 작년에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 성인 4,000명을 대상으로 했는데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보다 약간 더 이혼을 한다고 했고, 27%의 거듭난 기독교인(이것은 자기가 거듭났다고 한 것임)이 24%의 다른 기독교인 보다 이혼율이 높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새로이 진화한 “헌신”의 기준입니까?

제가 목회한 33년간을 되돌아볼 때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어놓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교인들도 많았습니다. 매년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일에 참가했지만 헌신하지 않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참가에서 헌신으로 갈 수 있을까요? 펜이 있으면 메모해 두십시오. 저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헌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선교사가 되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께 헌신하는구나 하며 찬사를 보내지만 또한 이것은 동시에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가장 강력한 표현중의 하나는 자신의 삶을 헌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난 후에는 그렇게 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침예배에는 완전히 헌신을 했다가 저녁때에는 그렇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하지만 내일은 안하고 지난주는 했지만 다음주는 안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며 겪는 어려움입
니다.

저는 헌신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질문에 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8절에서 너희 생각에는 내가 누구냐고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위대한 예언자, 지도자, 우리가 따라야 하는 완벽한 도덕선생, 아니면 훌륭한 설교자 중에 하나인가요? 19절에 보면 사람들은 침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이는 엘리야가 왔다고 하며, 옛 대언자가 다시 일어났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20절에서 그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우리가 기다리던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 존경, 두려움, 경의, 복종을 해야 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즉 야고보서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욕망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면 우리가 경배 드리는 것에 대해 주의해야 합니다. 나의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을 활용해서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 몰몬교인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전도를 합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모하메드, 모세, 아브라함 등과 같은 선지자 정도로 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2년 동안이나 가정들을 방문해 전도를 합니다. 성경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지도 모르고요. 그들은 그렇지만 나는 성경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둘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면 우리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23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침체되는 것은 자신이 길을 막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엇이 옳은지를 알고 행하고 싶지만 자신이 그것을 가로챕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어제 저는 하루 종일 설교준비를 하고 늦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항상 양보운전을 하는데 어제 두 개의 차선이 한 개로 되면서 한 차씩 양쪽 줄에서 가는데 갑자기 어떤 차가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때 제가 어떻게 했는 줄 아세요? 안 비켜주었죠. 그때 저는 즉흥적으로 오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설교를 준비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양보하기 싫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부정 못하는 거지요. 나를 부정하고 그 차를 가게 해야죠.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신약사전에서는 자기 자신에서 자유로워지고 모든 자신의 안전을 포기함으로 얻어지는데 이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아무 조건 없이 드릴 때만 가능하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 조건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삶을 모두 드리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그만 두는지 아세요. 자신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싫다든가, 찬양이 싫다든가, 설교내용이 싫다든가, 성경교사가 가르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가 등등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판단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3년간 전도지를 돌려봤고 예수님에 대해 증언도 해봤지만 한 사람도 전도 못했는데 해서 무엇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의 전도는 하나님께 대해 헌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가 되고 안 되고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건 안 받건 그건 예수님의 일입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 못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의 1주 168시간을 계획하십니까? 왜 어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목회하는 것을 싫어하는지 아시는지요? 우리에게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늦게까지 일하는데 왜 성가연습, 일요일 성경공부에는 늦게 오는지 아세요? 토요일 전도지 돌리기에 3~4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자신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바쁜 버지니아 북쪽에 있는 여러분 중 일부는 항상 시간에 맞추어 교회에 옵니다.

바울은 얼마나 자주 죽는다고 했습니까? 매일입니다. 어제도 나는 부족했기에 오늘 또 죽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부정할 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왜 젊은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 안 하는지 아십니까?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반항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적은 세상 마귀가 아니라. 나 자신인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신을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자기를 죽이는 것은 즐거운 일만은 아닙니다.

세 번째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몸과 인생을 성령님께서 사용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규칙이고 기준이면 그렇게 따라야 합니다. 저한테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축구, 골프, 미식 축구 등을 할 때에는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지요. 그런 규칙은 잘 따르면서 교회에 나올 때의 복장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며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규칙과 법률을 잘 모르기도 하고 또 그것에 수긍할 수 있을지라도 모른다고 하면서 직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갈2:20) 이것이 여러분의 간증입니까?

오늘 본문을 생각해 봅시다. 22절에 예수님은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며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23절은 완전히 헌신한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모든 거듭난 사람에게 23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싶습니까? 예수님은 그러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매일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옛날의 저편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라야 구원받고 좋은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하는데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지옥에 가지 않게 해 주신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자기 자신의 인생이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구도운동(역자 주: 열린 예배)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방해하지 않게 찬양하며 KJV 등과 같은 것을 버리고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하도록 하는 예배운동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말씀하신 것은 십자가는 한 가지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손에는 세상, 육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십자가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로되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면 구원할 것임이라.”

성경이 나의 삶의 지침이 되고 좁은 길을 가는 것보다 내 친구와 많은 사람이 가는 좋아 보이는 길, 즉 넓고 쉬운 길을 가겠다고 하면 자기 생명을 잃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겁니다.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버림을 받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오늘 성경본문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 가야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완전히 바뀐 모습으로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9장 6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어떤 사람이 열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다가 이제는 그렇지 않는다는 분도 있을 겁니다.

아마 그 사람은 다시 태어나지(중생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요성경공부도 가르치고 성가대도 했는데요…’ 하겠지만 달라질 것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세상, 이웃, 직장, 육, 마귀, 자신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인생계획, 경력 등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었다면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에 대해 착각하고 있으며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죠나단 에드워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나의 권리, 의지, 감정에 어떤 권한도 없고 나의 몸 즉 혀, 손, 발, 귀, 눈에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나의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복종의 법칙이 되십니다.

세상, 육, 마귀는 내가 죽을 때까지 적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하건 간에 나는 그것을 하겠습니다. 나의 모든 길은 하나님의 영광 외에는 쓰지 않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빼먹는 것이 없게 하겠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간증입니까!

우리의 헌신을 다시 생각합시다. 세상에 내가 어떻게 보이기를 바라고 자기 존재가 세상에 나타내지게 되는 것을 바라면 잘못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 있습니까? 자신을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회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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