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救援論]구원.신앙.계시.

[스크랩] 판넨베르크의 인간학

好學 2009. 11. 5. 23:35

 

판넨베르크의 인간학

 

 

이장섭

 

 

Ⅰ. 문제 제기 및 연구 목적, 연구범위와 방법

 

현대까지 조직신학에서 인간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연구되어 왔으며,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이해는 단독적으로 논의되어진 것이 아니라, 철학의 발달, 성서해석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현재의 철학적 방법과 성서 해석의 방법을 이해하며, 이러한 방법론들이 어디까지 발전해왔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철학적 신학적 해석학의 발달로 인하여 생성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오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새로운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철학적인 방법으로 연구되어 왔던 인간이해를 신학에 수용하여 독특한 “신학적 인간이해”를 시도하고 있는 현대 신학자가 곧 판넨베르크이다. 그는 인간학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데, 그 하나는 1960년대 초에 쓴 “무엇이 인간인가(Was ist der Mensch?)”라는 책이고 또 하나는 1983년에 쓴 “인간학(Anthropologie in theologischer Perspektive)”이라는 책이다. 그는 20 여년에 걸쳐 “인간학”을 두 권이나 쓴 것이다. 이 두 권의 책들의 공통점은 지금까지 철학에서 논의되던 “철학적 인간학”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는 철학적 인간학의 창시자라 말할 수 있는 쉘러(M. Scheler)의 “세계개방성(Weltoffenheit)”이라는 개념을 기초로 하여, 자연과학적, 심리학적 인간 이해까지도 수용하여 그의 논리를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그가 수용하고 있는 철학적 인간이해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그의 두 권의 저서를 비교함으로써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두 번째 책인 “인간학”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첫 번째 장(章)만을 다룰 것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 책 -무엇이 인간인가?- 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 전체가 두 번째 책의 첫 장에서 거의 다루고 있기 때문이고, 그 첫 번째 장이 그의 인간학 전체 구조의 핵심인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장과 3장은 이러한 인간 본성의 이해를 근거로 한 실천적인 부분으로서 “인간과 사회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문화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판넨베르크가 긴 시간 동안 인간학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의 중심주제는 “인간학”이 아니라 “신학의 보편성”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계시의 보편성을 찾고자 하여, 구속사를 거부하고 세속사를 하나님의 간접적 계시의 장(場)으로 선택하였다. 그가 말하는 “신학의 보편성”이라는 관점에서 인간학이 어떤 위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의 인간학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에 있어서 “인간학”이 가지는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여기에 대해 연구한 사람은 없다. 다만 1990년 대구 카톨릭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논문-W. Pannenberg의 人間 理解에 關한 硏究, 양태현-으로 연구해 놓은 것밖에 없다. 이 논문에서도 주로 인간 본성론(本性論)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 개방성과 신개방성(Gottoffenheit)에 관해 다루고 있으나, 이 개방성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하여만 다루고 있을 뿐이다. 그는 판넨베르크가 말하고 있는 이러한 개방성이 “하나님의 형상”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개방성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개방성이 하나님의 형상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를 밝혀보고자 한다.

 

II.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수용

 

판넨베르크는 그의 인간학을 기술함에 있어서 철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철학적 인간이해를 토대로 하고 있는데, 그가 처음으로 쓴 “인간이란 무엇인가(Was ist der Mensch?)”이라는 책에서도 이러한 구조를 수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먼저 그가 받아들이고 있는 철학적 인간이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이러한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한 그의 신학적 이해를 시도하고자 한다.

 

II-1. 막스 쉘러(Max Scheler)의 세계 개방성을 통한 동물과 인간의 차이

 

막스 쉘러의 “人間의 地位(Die 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라는 책은 철학적 인간학의 기본적인 토대를 제공하였다. 소위 철학적 인간학은 이 책이 출판됨으로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즉 이전까지 자연과학적, 생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어오던 인간에 대한 문제를 철학적인 문제로 이끌어 내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주장하고 있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인 “세계 개방성”은 모든 철학적 인간학의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이러한 철학적 인간 이해의 기본 개념인 “세계 개방성”을 판넨베르크는 그의 인간학을 시도함에 있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이 개념을 신학적으로 해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먼저 쉘러가 말하는 인간의 “세계 개방성”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쉘러는 그의 인간 이해를 인간 내부로부터가 아니라 인간 외부에서 출발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 되도록 하는 생명은 모든 것의 외부에 있다고 함으로써 그는 종래의 자연과학적 인간학에서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연구를 근거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쉘러의 인간 이해가 행동주의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판넨베르크가 주장하는 “세계 개방성”이라는 개념도 바로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데서 도출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견해에 몰트만(J. Moltmann)도 동의를 하고있다. 즉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대상세계를 무시하고 세계에 개방되어 있고, 이러한 세계에로의 개방은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전제가 된다고 한다.

정신적 존재는 이제야 충동과 환경에 구속되지 않고, 환경에서 자유요, 세계 개시적(開始的, weltoffen)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신적 존재가 세계를 가진다. 동물은 환경만을 가지며, 환경 속에 망아적(忘我的)으로 몰입하지마는, 정신적 존재는 원래자기에게 주어진 환경(동물만이 환경을 가지며 환경 속에 망아적으로 사라지는 것이다)의 저항 중심체의 반동 중심체를 대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고, 이런 대상의 기재(棋在)를 원칙상 자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은 제한이 없다. 즉 저 대상계와 그것의 소여(所與)가 생명적 충동조직 때문에, 또 이 충동조직 속에 저장된 감관기능과 감관기관 때문에 받는 제한이다 (필자가 고딕체로 적음)

쉘러는 이와 같이 철학적 인간학으로 출발하는 점에 있어서, 인간 내면에 있는 조건들의 특징에서가 아니라, 보편적인 생명현상에서부터 그 이론의 근거를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간을 외부적인 생명의 관계들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과 동물은 동일하게 대상세계(혹은 주위세계, Umwelt)를 가지고 있는데, 이 대상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가지는가에 따라 인간이 동물로부터 구별된다. 여기서 말하는 대상세계란 인간과 동물의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말한다.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주어져 있는 세계에 던져진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는 인간과 동물은 수동적인 존재라 부를 수 있고, 또한 일치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동물은 그 대상세계를 가지고는 있으나 그 대상세계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동물은 그 대상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인식하지 못한다. 오로지 그들은 충동(Triebe)에 의해서 움직인다. 반대로 인간은 그 대상세계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벗어나기도 하고, 그 세계로부터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쉘러는 이러한 인간의 기능을 내성(內省)이라고 부른다. 이 기능을 인간이 소유하고 있음으로, 인간은 유기적인 것에서 실존적으로 해방될 수 있으며, 자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중심이 대상세계로부터의 속박․압박․생명적인 것의 의존, 그리고 생명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충동적 지능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그 세계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그 세계를 변화시키고, 그 세계를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만드는 작업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유와 해방, 대상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행위의 근원이 세계 개방성이며, 대상세계로부터의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을 설명해 주는 원리이다.

나아가서 인간은 이러한 세계 개방성이라는 원리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대상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을 세계를 개방할 수 있는 능력인 정신(Geist)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이 정신 안에 이성(理性)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쉘러는 “정신에 의해 ‘인간’이라고 불려지는 존재는 환경을 세계라는 존재의 차원으로 확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리적․심적 성질을 다시 대상화할 수 있고, 개별의 모든 심적 체험, 그 생명적 기능 자체 등을 다시 대상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쉘러가 말하는 정신은 영적인 것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 있어서 대상화될 수 없는 것은 오직 정신뿐이라고 말한다.

정신은 그 자신을 대상화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순결한 활동성이요, 자신의 존재를 오직 그 작용의 자유 수행 중에서만 가진다. 정신의 중심인 인격은 대상적 존재도 물적(物的)인 존재도 아니요, 부단히 실현하는(이런 성질을 본질상 가진) 작용들의 질서 있는 결합체이다. … 모든 영적인 것은 대상으로 될 수 있으나, 정신 작용은 대상이 될 수 없고, 지향(志向)도 그러하며, 영적(심적) 현상 자신을 관조(觀照)하는 작용도 한다.

이러한 정신의 우선성이 모든 충동을 억제하고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 정신은 육체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육체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또한 이것은 동물이 가지고 있지 않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정신적 존재”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세계 개방성”과 “정신적 존재”라는 말은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II-2.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의 인간이해

 

판넨베르크는 자신의 인간학을 기술하기 위해서 두 가지의 철학적인 인간학의 토대를 수용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쉘러의 “세계 개방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과 칸트학파의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자유주의 신학자였던 헤르더의 인간이해를 그의 두 번째 책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그는 헤르더가 말하는 인간이해의 어떤 측면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이곳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첫 번째 책인 “무엇이 인간인가?” 라는 책에서는 헤르더의 이론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후기에 나온 “인간학”은 그의 이론이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쉘러와 헤르더의 이론을 근거로 하여 전개시킨 인간학이 어떤 구조를 지니고 있는가를 기술하고자 한다.

헤르더의 인간 이해는 “인간의 영혼이 자라고, 가치 있는 인간성을 만들기 위한 사회교육의 과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특징을 “결함과 결핍(Lücken und Mängeln)”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여기에서 말하는 “결핍”은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뇌, 즉 인간 이성과 필수적으로 대비되는 대칭요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감각이 예리하지 못한 측면은 존재하고 있으나, 인간은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함으로써 그 결핍이 상쇄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이성과 자유를 통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결핍과 결함으로부터 자기를 완성(Selbstvervollkommung)해 나간다. 이런 면에서 이성과 자유는 자기완성을 위한 필수적인 요인이며 원천이라고 본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 즉 우주 안에 있는 인간의 특별한 위치는 이성 또는 모든 인간적인 능력의 조직(Einrichtung)에 달려 있으며, 특히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라 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완성을 위한 이성과 자유는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Gottesebenbildlichkeit)”이라는 말과 일치하는 것이다.

헤르더는 “인간에게는 동물적 본능 대신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방향을 주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삶의 방향성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살아갈 방향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가진 하나님 형상이다. 그의 “하나님의 형상” 이라는 개념은 전통적인 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계몽주의 철학에서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동물이 본능에 의해 자신들의 행동양식을 규정하고, 그 행동양식에 맞추어 살아가듯이,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형상, 곧 이성과 자유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은 종교를 통하여 인간의 영혼 속에서 실현되고, 또한 그가 말하는 신앙이란 인간을 교육하게 하는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인지(Vernehmen)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헤르더는 인간이 하나님 은총의 작용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새로운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자기 운명을 실현하는 과정 중에서, 즉 하나님의 섭리의 영향력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은 종교적 삶의 문제와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종교를 떠나서는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식한다는 것과, 세계를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교과서(Buch Gottes)로 인식하는 것은 서로 일치한다.

헤르더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인간다움은 같은 말이며,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 개개인은 인간이 되며, 전체 인류라는 것도 이러한 개인들의 교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편으로 교육과 전통이, 다른 한편으로 이성과 경험이 인간화(Humanität)에로 이끌어 간다. 왜냐하면 그는 특별히 이러한 인간화를 위한 요인들이 상호작용을 이끌어 내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예정(göttliche Vorsehnung)이 효력을 발휘한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을 통하여 한편으로 인간의 목표와 종착점으로서의 최종 형태인 “신을 닮은 인간의 모습”에 도달되어지고, 심지어 전혀 다른 현존재로 도달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헤르더의 인간 이해는 쉘러가 주장하는 “세계 개방성”이라는 철학적 인간이해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그가 말하는 세계 개방성의 목표도 다름 아닌 “인간화(Menschenwerdung)”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 개방성이란 동물이 가지지 않은 인간의 특성으로서 자신이 던져져 있는 대상세계로부터 자유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상세계로부터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세계를 다스릴 수 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헤르더가 말하는 신학적으로 이해한 “하나님 형상”을 가진 인간도 그 최종 목표가 “인간화”로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언어(Sprache)를 가지고 이 세계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헤르더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어느 정도 신학적으로 그리고 성서적으로 정당한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단지 신학적인 개념을 차용한 철학적 개념이라면 그의 인간학도 여전히 철학적 인간학에 머물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헤르더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판넨베르크에게서도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헤르더의 인간이해와 그의 신학 구조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II-3.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개관

 

전통적으로 신학에서 인간을 말할 때, 그 출발점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피조된 존재”라고 하는 명제에서부터이다. 이것은 P문서에 나오는 창조기사, 즉 창세기 1장26-27절에서 유래한다. 이 구절에서 학자들은 두 가지 개념을 도출하고 있는데, 하나는 “형상(Zelem, εἰκών, imago)”이라는 개념과 모양(dmuth, όμοίωσις, similitudo)이라는 개념이다. 이 두 개념의 대한 논쟁은 초대 교회의 교부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클레멘스(Clemens)와 오리게네스(Origenes)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영혼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시에 받은 것이고 모양은 나중에 그 형상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레네우스(Irenäus)와 터툴리안(Tertullian)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영혼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와도 결합되어진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구별 -형상과 모양- 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은 상실하였으나,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하지 않았다고 본다. 즉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도 동물과 구별되는 자유의지와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터툴리안에 의하면 죄를 지은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이나 이성은 이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으며,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를 잇는 어거스틴(Augustin)은 초대교회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터툴리안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에 의하면 타락이전의 인간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즉 본래적인 의(iustitia originalis)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본래적인 의는 상실되었으며.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으나, 상실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인간은 타락이후에도 여전히 이성과 오성(悟性)은 남아 있다고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

중세신학에서도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고있다. 그래서 모양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잃어버린 본래적인 의를 뜻하였으며, 형상은 인간이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없어지지 않은 인간 본래의 것, 즉 인간의 이성, 의지의 자유 등은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만이 인간 본성의 특징으로 남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인간다움에 속하는 본질적 특성이므로, 원죄로 인한 타락으로도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공동체, 첫 인간에 주어진 본래적인 의의 근거로 보지 않고,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와 동일시한다. 여기에서 종교개혁자들과 중세 신학자들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형상이 현실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반면, 중세 신학자들은 하나님과의 현실적 관계를 위한 전제조건이며 인간 본성의 형식적인 구조의 특성으로 보았다. 이것은 후기에 부룬너(E. Brunner)가 말하고 있는 “형상의 흔적”과 비슷한 내용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의 현저한 차이점이 있는데, 루터(M. Luther)는 인간은 원죄를 통해 단지 하나님의 모양뿐만 아니라 하나님 형상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한다. 즉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까지도 상실되었다고 본다. 그는 말하기를, 형상과 모양을 구분할 수 있는 근거는 성서 어디에서도 없으며, 그러므로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 어떤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중세신학에서 주장되던 본래적인 의는 하나님의 형상과 구분되지 않고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모든 것이 상실되었다고 말한다.

칼빈(J. Calvin)은 타락한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의 파편이 남아 있어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전 인류를 관찰하면 우리들에게 고유한 본성은 이성이다. 이것은 마치 감정을 가진 우리가 무생물과 구분되는 것과 똑같이 우리와 짐승들과 구분 지어 주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의 하나님의 형상론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한 형상과 모양의 구분을 수용하고는 있어나 ‘하나님의 모양’에 관한 언급은 없다. 단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간에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은 더러워지고 거의 말살되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형물이 되어버려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한다. 대신에 그는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을 구분하면서, 인간의 이성은 지상적인 것에 속하는 특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적 전통을 이어받은 19세기의 변증법적 신학자인 바르트(K. Barth)는 원죄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즉 남김없이” 제거되고 말았다. 인간의 이성적인 본성, 문화적인 능력, 인간성,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아무런 흔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든 모양이든 모든 것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Anknüpfungspunkt)이 인간 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sola gratia) 인간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는 예외 없이 인간전체에 그 영향을 미친다. 바르트의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는 루터의 이해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루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을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로 본 것이 아니라,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es)로 보았다. 즉 인간이 남자와 여자의 유비로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유비, 나-당신의 관계로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룬너는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은 그 내용적인 의미, 즉 본래적인 의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죄인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은 피조물 세계에 있어서 인간이 가지는 “우선적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어야 할 인간의 규정, 곧 “형상 소유자의 기능(Bilderträger-funktion), 혹은 형상 소지자의 규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 혹은 규정은 인간의 타락을 통해서 완전히 폐기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기 위한 ”전제“가 되며 ”바로 죄 속에“ 존속하게 된다. 그는 인간의 이성이나 능력에 “흔적”이 남아 있어서 원죄로 인한 타락 이후에도 내용이 변형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고유성안에 계속 남아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형식적 하나님의 형상(formale imago Dei)과 내용적 하나님의 형상(materiale image Dei)을 구분하여 죄로 인하여 상실된 본래적인 의, 즉 내용적인 하나님의 형상은 잃어 버렸으나, 인간의 인간존재, 인간성(humanitas), 더 자세히 말해서 인간의 언어 능력(Wortmächtigkeit)과 책임성, 즉 형식적인 하나님의 형상은 남아 있다고 보았다. 그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론은 전적인 상실을 부정하는 칼빈의 이론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까지 살펴본 결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두 흐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다고 하는 흐름(M. Luther-K. Barth)과 신의 형상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즉 모양과 형상으로 구분하여 모양은 상실하였으나,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형상은 남아 있다고 보는 흐름이다.(초대교부-J. Calvin-E. Brunner) 물론 이들이 설명하고 있는 의미는 비슷하지만, 개념은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파괴된 형상이 남아 있어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이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자연 신학의 흐름이다.

헤르더가 말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이성, 즉 자기완성을 위한 이성과 자유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이성, 자유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것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부정하는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임이 위에서 밝혀졌다. 이런 점에서 헤르더의 하나님의 형상은 초대교부로 시작된 “형상과 모양”을 구분해 놓고 부분적인 타락을 논하는 여타의 신학자들의 해석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이성이나 자유 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부분적인 상실을 인정하고 있는 학자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이성 또는 자유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하나님과 유사하다는 인간 존재는 오로지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 즉 하나님 섭리의 작용을 통하여만 실현되는데, 이것을 인간이 점점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점진적인 하나님 형상”을 인정하고, 또한 이러한 발전적인 인간형상론을 주장하는 일부 인본주의적 사상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인간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 관한 물음과 하나님에 관한 물음을 연결시키는데, 이것도 하나님 형상과 결부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넘어서 미래에 이루어질 영생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판넨베르크 이러한 사상이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되지 않고, 또한 형상과 모양을 나누어 생각하는 학자들의 전통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부룬너의 자연신학적 전통을 따르고 있다. 부룬너가 말하는 접촉점은 다름 아닌 신을 향한 개방성이며,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이다. 판넨베르크는 이성과 신앙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신앙이란 그에게 있어서 철학적 인간학에서 말하는 세계 개방성, 결핍의 존재, 이성과 자유와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Ⅲ. 세계 개방성과 하나님의 형상을 통한 인간 이해의 접근

 

Ⅲ-1. 세계 개방성과 하나님의 형상

 

우리는 쉘러의 세계 개방성과 하나님의 형상이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과 세계 개방성은 일치한다” 는 명제가 신학적으로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세계 개방성과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論)하고 있다:

“인간의 세계 개방성은 신과의 관련성을 전제하고 있다. 이 사실이 불분명한 곳에서는 “세계 개방성”이라는 말이 마치 인간이 세계를 지향하도록 되어 있는 것처럼 불분명한 반면 그러나 인간은 그가 자기의 세계로 생각하는 모든 것을 넘어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여기에서는 중요하게 거론된다.…인간을 짐승으로부터 구별하는 이 특유한 세계 개방성에서 초점이 되는 것은 신에 대한 물음이다.…인간이 신의 형상이라는 성서의 사상이 뜻하는 것이다. 신을 향한 인간의 목표는 세계에 대한 그의 지배권에서 드러나되 신의 세계 지배의 대행자로서 나타난다.“

결국 그는 신의 개방성은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이며, 또한 이 개방성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초기의 사상은 후기에도 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전제에 대한 보충으로서 헤르더의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이해를 수용하고 있다. 그의 후기 “인간학”에서는 ”세계에 대한 개방적 태도에 있어서 종교는 부차적 요소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 요소와 동시에’ 나타난다“ 고 하고 있다. 이제 세계 개방성은 그의 인간학을 논(論)하는데 있어서 이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일차적인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초기 ”무엇이 인간인가?“라는 그의 저술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다.

세계 개방성은 핵심에 있어서 신 개방성을 의미한다.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세계를 뚫고 신을 향한 이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에서 그는 그의 목표, 하나님과의 공동성을 향하는 도중에 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움직임이 신을 향하고 있는 한 그 안에서 이미 신과의 공동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쉘러가 말한 인간의 세계개방성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대상세계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방성은 이 대상세계를 넘어 신을 향하고 있다.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인간의 개방성은 신을 향한 개방성을 전제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개방성의 목표는 신 개방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신 개방성은 인간에 의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과 세계개방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의 통일성은 자아 밖에서 올 수밖에 없는데, 그 통일성을 유지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자아 관련성과 세계 개방성 사이의 가교(架橋)는 여전히 인간 쪽에서 세울 수 없다. … 창조자로서의 저 유일한 신이 세계의 통일을 보장하면 그는 세계 안에서의 건전, 우리 현존의 전체성, 자아 연관성과 세계 개방성 사이의 갈등의 극복도 보장한다. … 자아 관련성과 세계 개방성의 갈등은 우리 스스로에 의해 극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와 전(全) 현실성의 일치는 오직 신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세계개방성과 자아에서 일어나는 긴장의 해결점을 하나님으로부터 찾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심으로 인간의 현존 안에 있는 자기 중심성의 문제는 극복될 수 있다. 그는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세계개방성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완전히 거부하고 잇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물과 인간이 만나고 또한 경험하는 세계가 동일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인간이 세계를 향하여 개방한다고 할 때에, 그가 만나고 경험하는 세계가 동물이 접촉하고 있는 세계와 구별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향하여 개방한다는 것이 인간의 의지에서인가? 또는 인간 본래에 존재하고 있었던 개방성인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 형상은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측면에서의 다루어져야 할 문제가 아닌가? 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Ⅲ-1-1. 인간과 동물이 만나는 세계는 같은 것인가?

 

판넨베르크도 이에 관해 질문하고 있다. “무엇에서 인간은 본래 개방적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면서 그는 “인간과 동물이 만나는 대상세계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대상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만나는 존재 자체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즉 동물은 대상세계와 본능적으로 결합되어 있어나, 인간은 그 개방에 있어서 목적을 가진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대상세계에 대해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대상세계를 초월한 세계에 대해서도 열려 있다. 대상세계를 넘어서서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까지 열려 있으므로 인간은 대상세계를 새롭게 만날 수 있는 조건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방이 일어나는 원동력은 충동이라는 것인데,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충동이란 동물적 충동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즉 본능적인 욕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충동은 전적으로 만족할만한 어떤 목표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 있어서 충동은 불분명한 것을 향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모험으로 나타나고, 인간을 허공으로(in Offene gewiesen) 날아가도록 한다. 여기서 인간은 불분명한 목표와 그 허공 때문에 불안을 유발하며, 이 불안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에 대해 자신을 개방하게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계 개방성은 그 대상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그 대상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존재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인간에게서 개방성은 단지 대상세계를 만나거나 경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세계를 넘어서, 시간적으로는 미래를 공간적으로는 대상세계를 초월한 또 다른 세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현재를 넘어서고, 대상세계를 넘어서 인간이 열려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개방성은 인간의 본능적 충동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Ⅲ-1-2. 개방성은 신앙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

 

인간 삶의 모습은 그가 가진 충동에 의해 자신으로부터 벗어날려는 탈중심성(脫中心性)의 구조(exzentrischen Struktur)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단지 자아를 벗어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대상 세계를 향한 개방성을 뜻하는 근거가 된다. 인간은 주객 도식의 구조 자체 속에서 이러한 근거를 가짐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며, 또한 대상세계의 범위를 넘어서게 된다. 판넨베르크가 이러한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부터 출발되는가? 인간이 가진 이성의 능력인가 아니면, 정통적 교의학에서 말하는 신앙으로부터 출발하는가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개방성은 신을 향한 개방성으로 결론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는 신을 향한 인간의 개방성을 그의 계시이해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을 향한 개방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인간이 가진 그 개방성은 곧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신의 계시”는 전통적인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구속사(Heilsgeschichte)가 아니라, 세속사(Profan Geschichte)를 포함하고 있는 보편사(Universale Geschichte)가 곧 하나님의 행위로서 그 자신을 나타내는 계시라고 말한다. 즉 그에게 있어서 계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일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알려줄 때만 그 분을 알 수 있다는 정통적인 계시이해를 역사라는 장(場)으로 끌어들인다. 그가 이렇게 정통적인 계시이해를 역사의 장(場)으로 끌어들이는 이유는 17세기 정통주의 교의학에서의 “계시 이해” 가 과학적 이성의 빛을 회피하는 반계몽주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계시의 보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보편사로서의 계시 이해는 곧 계시의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그가 이렇게 계시를 이해함으로써 “보는 눈을 가진 자에게 열려있는 보편적인 성격을 가진 계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역사적 행위 속에서 나타나는 성서적 신의 계시는 자연적인 눈으로 지각 가능한 사건이며, 밀의적․신비적 사건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신을 향한 인간의 개방성은 보편적인 이성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며, 또한 그 개방성의 근거는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곧 보편적 이성에 의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가 “유한한 객체에 대한 모든 인간적인 관계는 무한함에로 향하는 관계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래서 종교적인 바탕을 지닌다”고 하는 말은 정당하다. 결국 그가 말하는 대상세계를 향한 개방, 그리고 신을 향한 개방은 인간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근거이며 인간다움을 형성하는 길이다. 이 길의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화이며, 그것은 신을 향한 자신의 개방성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러한 목표로 인간을 중재하는 것은 이성을 통한 외부세계의 경험이며, 이 경험은 교육(Bildung)을 필수 불가결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은 무엇을 위한(Wofür) 개방성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즉 그가 말하고 있는 개방성이 하나님의 계시이해를 목표하고 있고, 그것이 인간의 자기 정체성 획득이라는 것과 동일시 될 수 있다면, 개방성의 목표는 하나님에 관한 인식의 문제인가, 아니면 인간에 대한 물음이 곧 하나님에 대한 물음이 될 수 있다는 논리의 증명인가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개방성의 목표를 판넨베르크는 창조설화에 나타난 대상세계의 다스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미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Kosmos)가 인간을 위한 세계라는 근거에서 출발하고 있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이 세계를 성서의 창조설화에서는 하나님께서 이간에게 그 지배권을 맡기셨다고 표현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이 세계자의 관리자로 규정되고 있다는 것은 안간이 세계에 종속되지 않고, 세계에 향하여 개방되어 있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그는 인간이 세계의 관리자가 됨으로써 이 세계에 가득 찬 신화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현대 인간학이 인간의 개방성의 정신사적 뿌리들을 성서적 사유에서 취했다는 것은 물론 우연이 아니다. 성서의 창조 설화는 인간을 세계의 주로, 물론 그의 관리자, 그의 형상인 신의 위임을 받은 지배자로 선언하고 있다. 성서의 피안적인 신과 결부되면서 인간은 모든 남은 피조물들에서 벗어나 있고 세계는 그에게 있어서 이미 다른 종교들에게 있어서와 같이 신들로 가득 찬 하나의 세계일 수도 있고, 그로 인한 경건한 경외의 대상일 수도 없었다. 세계는 비신화화(非神話化)되고 있고 인간의 관리권(管理權)에 위임되었다.

또한 인간이 세계로부터 개방됨으로써 시간적으로는 미래를 현재에서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으며, 이 미래를 향해서 인간은 자신을 개방할 수 있게 되었다. 미래를 향해 개방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이 구별되는 점이며, 미래를 향한 개방은 자신을 벗어나서 새로운 것을 선취하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이 된다. 이러한 희망은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도 자신을 개방하게 될 뿐만 아니라, 죽음을 향해서까지 그 개방성을 확장시킬 수 있다.

 

Ⅲ-1-3. 대상세계를 향한 개방성의 근거로서의 신뢰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개방성에 있어서 근거가 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개방성이 곧 대상세계를 향한 개방성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은 단지 계시를 인식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고 있다.

상황이 불투명한 대상세계에 대한 개방성의 근거로서 판넨베르크는 “신뢰(Vertrauen)”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이 속해 있는 그 이웃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신뢰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무한한 신을 신뢰하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모든 유한한 상황과 환경을 넘어서도록 촉구하고, 또한 이러한 무조건적인 신뢰는 시야를 열어주고 그 시야는 유한한 사물들을 의미 있게 지배하도록, 신의 이름으로 세계를 관리하도록 인간에게 능력을 준다. 판넨베르크가 말하고 있는 대상세계를 향한 개방성의 근거로서 “신뢰”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 중의 하나로써, 먼저 무한한 신에 대한 신뢰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사이의 관계의 기초가 되고, 대상세계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III-2. 세계 개방성과 인간의 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세계개방성이었다. 이 개방성은 단순히 대상세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이기도 하였다. 대상세계를 향한 개방성은 신뢰를 근거로 이웃을 만나고, 대상세계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으로, 신을 향한 개방성은 이성을 근거로 보편사로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개방성을 가진 인간을 말하는 것이 전통적 신학에서 인간이해의 긍정적인 부분으로 본다면, 또 다른 면, 즉 인간이해의 부정적인 면, “죄인으로서의 인간”이해는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Ⅲ-2-1. 소외(Entfremdung)로서의 죄

 

판넨베르크는 “소외”를 “자의식과의 단절”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플레스너와 뷔스(D. Wyss)의 이론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소외로서의 죄를 설명하고 있다. 플레스너는 “자의식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육체와 대립되는 영혼으로 깨닫는다. 인간 삶에 있어서 이러한 이중적 측면은 영혼과 개별경험 사이의 이중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본성의 실제적 단절”이다“라고 말한다. 플레스너가 말하는 ”단절“이라는 의미는 육체와 영혼의 대립으로 생성되는 이중성, 즉 육체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단절을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과 구별된 의식은 본래적인 자아의 모습과 경험세계의 다양성을 단절시킴으로 자아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뷔스는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반성할 때 세계개방성의 결과로 의식의 분열이 나타난다고 보며, 이러한 자의식이야말로 “일차적인 자기 소외”의 경험 장소라고 묘사했다. 뷔스에 따르면 자의식 안에서 첫 번째 도달하는 단계는 자기 몸에 대한 구별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어낸 생산물에 대한 의식의 소외이다. 인간이 주변세계의 물체들을 마주 서 있는 타자로 경험하듯이, 자기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획득되는 생산물도 인간에게는 무엇인가 다른 것,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이러한 소외 개념은 막스(K. Marx)의 “소외이론”과 일맥상통한다. 막스(K. Marx)의 소외이론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게되어, 즉 노동자의 생산물은 낯선 본질로서, 생산자로부터 독립된 힘으로서 노동자에게 대립하여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뷔스가 막스의 소외이론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외부에 있는 대상세계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과의 불일치를 경험함으로써, 자신을 반성하게 되고, 기존에 동일한 것으로 느꼈던 자의식이 자아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경험되는 소외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플레스너가 말하는 “단절”과 뷔스의 “소외”는 대상세계를 경험함으로 생기게되는 자아와 자의식의 불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현상들은 자의식을 왜곡시키거나 자아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할 위기를 발생시키게 된다. 판넨베르크는 바로 이것을 죄로 규정하고 있다.

 

Ⅲ-2-2. 탐욕으로서의 죄

 

판넨베르크는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죄란 모두 하나님의 뜻과 모순되는 인간적인 의지와 행위로 규정하며, 이러한 죄의 원인을 탐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세계에 대하여 인간이 맺는 관계의 뒤엉킴은 탐욕(cupiditas 혹은 concupiscentia)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가 말하고 있는 탐욕에 대한 이해는 바울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어거스틴은 탐욕을 죄의 결과로 초래된 벌 또는 탐욕자체가 죄이며 이것은 새로운 죄의 원인이라 규정했다. 스콜라 신학에서는 죄악과 탐욕을 구분하면서 탐욕을 죄의 자료(materiale peccati)로서만 여긴 반면에, 종교개혁과 얀세니즘(Jansenismus)에서는 탐욕 자체가 죄라고 이해했다. …바울이 말하는 탐욕을 분석해 보면, 탐욕이 바로 죄 자체이면서 동시에 죄의 결과임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탐욕(cupiditas)이 사랑이나 의지의 전도(顚倒)된 모습으로 드러날 때는 탐욕자체가 죄가 된다.

판넨베르크는 탐욕 자체는 전도된 의지이며, 이 의지 속에서의 핵심은 자기애 혹은 교만(superbia)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만한 자아는 스스로를 중심이요 최종목표로 삼으려 하므로, 우주질서 속에서 그의 창조자요 최고선인 하나님에게만 어울리는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만다. 그래서 이기적인 교만은 암시적으로 하나님과 적대관계를 의미하며, 차차로 죄인을 공개적인 하나님의 적대자로 만들어 간다. 탐욕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신학에 있어서 보편적인 이해이다. 그는 이 탐욕은 “율법을 통해서 비로소 탐욕은 의식되기 시작한다. 율법에 인간의 탐욕과 모순이 온통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러한 모순은 그 깊이와 보편성이 분명히 밝혀진다”고 말한다. 그는 율법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는 탐욕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죄를 보편화시키고 있다.

 

Ⅲ-2-3. 자기중심적인 사랑(자기애)으로서의 죄

 

판넨베르크는 탐욕을 죄의 보편성의 근거로 말하고 있으며, 이 탐욕 안에 이미 잠정적으로 들어있는 자기애(Ichsucht)를 죄로 규정한다. 이 자기애도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리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애-정신의 부패(J. Müller)-는 후천적으로 생성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이라고 말하는데, 그는 로테(R. Rothe)의 의견을 수용하고 있다. 로테에 따르면 이러한 본성적인 자기애는 정신의 도덕적 자기 결단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죄의 선천성을 말하고 있다. 선천적이고 본성적인 자기애는 자신이 만나는 대상세계를 왜곡시키고, 자기 중심적인 성향으로 자신을 정립시키게 된다. 대상세계에 대한 왜곡,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통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선천적으로 타고 난 것이며,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Ⅲ-2-4. 죄의 보편성으로서의 원죄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죄성을 후천적 행위의 결과 또는 개별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며, 그 죄는 각 개인을 통한 전체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죄의 보편성의 근거를 그는 인간이 모두 죽음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죽음의 한계에 머물러 있는 인간실존을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실존이 긍정될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도 보편화 될 수 있다:

인간은 자기 행동을 통해서 비로소 죄인이 되거나 다른 사람들의 나쁜 표양을 본받음으로써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행동들보다 앞서서 이미 죄인이라는 말이다.… 죄악의 보편성은 원죄에 관한 셋째이자 결정적인 요소인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전제이다.…죽음의 보편적 성격은 죄가 실제로 만연되어 있음을 드러내며, 그래서 온 인류가 아담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과 일치한다.

판넨베르크는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최초의 죄인으로서의 아담을 “모든 인류를 총괄하는 원형으로 보고, 또한 인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담의 행로가 각 개인에게서 그대로 답습된다”고 하였다.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을 아담의 삶의 방식과 유비시킴으로서 죄인으로서 인간을 보편화시킨다. 또한 이러한 죄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인간에게 자신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 아담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아담은 원죄의 원형은 아니라 인류의 대표성을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원죄의 원형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탐욕이다. 단지 한 인간의 죄가 개인과 한 공동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그 범죄자로서의 모습이 인류가 생존하는 동안 계속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아담을 끌어들이고 원죄를 인류의 보편적인 죄로 해석하고 있다.

 

Ⅲ-2-5. 자기 패쇄성으로서의 죄

 

판넨베르크는 죄는 소외, 탐욕, 자기애, 죄의 보편적인 성격으로서의 원죄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죄의 특성들은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즉 죄의 근원을 어떤 악마적인 힘이나, 인간밖에 존재하는 죄의 근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죄의 중심을 인간안에 두고 있다. 자아와 자의식의 분열로서의 소외,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는 교만의 근거로서의 탐욕, 대상세계와의 분열을 야기 시키는 자기애는 결국 인간자신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판넨베르크가 말하고 있는 죄가 인간 자신으로부터 파생되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만나고 경험하는 대상세계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개방성의 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세계를 만나고 있는 인간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죄는 “인간학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죄를 인간학적으로 검증하게 됨으로서 구원도 보편성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판넨베르크가 이해하는 인간의 특징을 “세계개방성 그리고 신 개방성”이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개방성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렇다면 죄는 바로 이러한 개방성에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것이다. 자기 중심으로부터 갇혀 세계를 향해, 그리고 신을 향해 자기를 패쇄하는 것이 곧 그가 말하는 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패쇄성이 곧 죄라는 것을 “자신을 자신 안에 가두는 자기 고집”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자기 패쇄성으로 죄를 규정하는 것이 죄의 전체성을 포용할 수는 없으나, 인간의 특징인 개방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Ⅲ-3. 자기 정체성의 확립으로서의 구원

 

자신을 대상세계로부터 그리고 신으로부터 패쇄하는 것이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죄로 규정된다면, 그에게 있어 “구원(Erlösung)”이라는 것은 역시 인간학을 통해서 규정되는 것이 정당하다. 그는 “인간학”을 서술한 두 권의 책에서 구원의 이해를 위한 장(章)은 어디에도 할애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의 곳곳에서 구원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물론 전통적으로 신학에서 전통적으로 “인간의 문제”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구원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여러 곳에서 정의하고 있는 구원에 대한 이해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인간학” 의 일관성을 찾는 것도 정당 할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이해하는 인간은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세계개방성을 가진 존재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 패쇄성을 가지고 있는 죄인이다. 이러한 양면의 긴장관계 속에서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구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정체성의 확립은 인간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인간 자신의 결핍된 자의식을 실현시켜 줌으로써, 먼저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해준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인간 창조의 완성으로서(das Erscheinen Jesu als Vollendung der Schöpfung des Menschen) 파악하고 있으며,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과 예수의 통일성을 기초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스스로의 힘으로 패쇄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배려된 공동생활”에 참여하게 하고, 이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은 패쇄 된 자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Ⅳ. 결 론

 

판넨베르크의 인간학은 전통적인 종교 개혁적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존재로서의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로 출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철학적인 인간이해를 기초로 하여 신학적 인간학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쉘러가 말하는 인간의 “세계 개방성”을 헤르더의 “하나님 형상”과 결합시켜 인간의 “신개방성”을 주장하고 있다. 즉 그는 쉘러의 “세계 개방성”을 “신개방성”으로, 그리고 이 신개방성 자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의 “형상”개념에 대한 이해는 초대교부들, 특히 이레네우스, 터툴리안으로부터 시작되고 부룬너에 의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점”으로 정의되고 있는 자연 계시적 입장을 수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개방성”을 정의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말미암은 철저한 관계단절은 그의 신학에 있어서 부정되고 있다.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개방성이, 대상세계를 향하여, 그리고 신을 향하여 인간으로부터 개방되어 있다는 것은 전통적 신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과 세계에 대하여 인식의 주체가 곧 인간 자신이 되어버리는 위험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심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종교 개혁적 전통을 간과해버릴 수 있다. 즉, 그가 개방성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해석하게 된다면, 인간의 인식의 대상인 대상세계 혹은 신은 상대적이 되어버릴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신학은 종교 개혁적 전통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죄”의 이해도 이 개방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인식되는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방성에 대한 반대로서 인간의 패쇄성이 곧 죄로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패쇄성으로서의 죄”는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극복되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패쇄성으로서의 죄는 신학적인 의미에서 보다, 오히려 심리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오해를 남기고 있다.

판넨베르크의 이러한 인간이해는 그가 주장하는 “신학의 보편성”에 상응한다. 즉 보편사로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인식, 그리고 세계 현실에 관한 인식은 곧 하나님에 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이성과 같은 말이다”라는 그의 이론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성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다는 구조가 성립될 수 있다. 그는 “종교의 보편적인 현상이 하나님의 계시를 위한 해명의 원리나 척도로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우리에게 무엇이 말해지는가에 대해 기독교와 다른 모든 종교가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인간학은 단순히 신학적인 이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식하는 원리(Prinzip)이며 근거(Grund)가 된다고 볼 수 있으며, 그의 “인간학”의 서론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종교의 보편성을 확대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인간”에 관해 묻고, 인간을 위한 문제의 해결을 추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인간학은 그의 신학의 기본 주제인 “신학의 보편성”의 근거로서는 적합한 이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신학을 보편화시킨다”는 것이 단순히 철학적인 개념을 신학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리고 어떠한 해석학적 기준과 구조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 보편화 작업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상실해 버릴 위험성을 내포하게 되며, 타 종교와의 차별성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서가 아니라, 이성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면, 절대 타자로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가지게 된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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