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유럽

[E.U] 오스트리아 공화국

好學 2009. 10. 21. 21:38

 

오스트리아 공화국

 

Republik Österreich1
(국기) (국장)
표어: (없음)
국가: 산의 나라 강의 나라
수도
48°12′N, 16°21′E
공용어 독일어 (나머지는 지역적으로 쓰임.), 슬로베니아어, 크로아티아어, 헝가리어
정부 형태 공화정
하인츠 피셔
베르너 파이만
독립
 • 독립
나치 독일로부터 독립
1945년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83,871km² (113위)
1.3%
인구
 • 2005년 어림
 • 2001년 조사
 • 인구 밀도
 
8,206,524명 (86위)
8,032,926명
97명/km² (78위)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5년 어림값
$2670억 (35위)
$32,962 (9위)
HDI
 • 2006년 조사

0.951 (14위)
통화 유로2 (ISO 4217:EUR)
시간대
 • 여름 시간
CET (UTC+1)
CEST (UTC+2) 
ISO 3166-1  040
ISO 3166-1 alpha-2  AT
ISO 3166-1 alpha-3  AUT
인터넷 도메인 .at
국제 전화 +43
11918년 11월 11일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22002년까지는 실링을 사용했다.

 

 

 

(독일어: Republik Österreich 레푸블리크 외스터라이히[*], 통용: 오지리(墺地利))은 유럽, 알프스 산맥 동부에 있는 나라이다. (독일어: Wien, 영어: Vienna)을 수도로 정했고, 독일어를 공용어로 정했다.

 

역사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오스트리아의 역사입니다.

독어 이름 외스터라이히(Österreich)는 고대 독어 오스타리히(Ostarrîchi)에서 유래하는데 동쪽 영토라는 뜻이다. 그 이름은 오스트리아로 라틴어화 되었는데 동쪽이라는 뜻이다.

고대 [편집]

선사시대부터 교통의 요지로서 여러 민족의 이동이 많았다. BC 8세기 무렵부터 할슈타트문화의 중심이 되어 정착한 켈트인이 BC 2세기에는 노리쿰왕국을 세웠다. 기원 전후 로마인도 다뉴브강 남쪽 연안에 이르러 노리쿰을 속주로 편입시켰고 뒤늦게 빈도보나(지금의 빈)를 건설하였다. 게르만인도 1세기에 이 지방으로 진출했다. 로마 제국은 그 대응책에 고심하면서 4세기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훈족의 서진(西進)으로 435∼453년 아틸라의 지배를 받았으나, 그가 죽자 게르만부족들의 재편성과 자립화가 진행됐다. 그러나 동방으로부터 슬라브족을 동반한 아바르족이 진출하였고, 5세기 말 로마인이 철수했다.

중세 [편집]

서쪽에서 5세기 후반 이래 왕국을 형성하고 있던 프랑크족은 6세기 로마 교회와 손을 잡고 점차 남동쪽으로도 진출하여 카롤링거 왕조카롤루스 대제(재위 768∼814) 영도 아래 8세기 말 바이에른을 복속시키고 다시 동진하여 791∼796년 아바르족을 괴멸시켜 여기에 오스트마르크를 설치했다. 9세기 말부터 서진을 시작한 마자르인은 10세기에 이곳으로 진출하였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 동프랑크 왕국을 계승한 작센왕조 오토 1세(재위 936∼973)는 955년 마자르인을 격파하고 오스트마르크를 재건,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이 탄생하였다.

사촌인 바이에른공과 싸워 이겨 황제가 된 오토 2세(재위 961∼983)는 976년 바이에른으로부터 오스트마르크를 분리시켜 변경백(邊境伯)의 영지로 삼아 이것을 바벤베르크가에게 하사했다. 바벤베르크의 군주들은 동방식민을 추진해서 경제발전을 꾀하였고, 서임권을 둘러싼 황제와 교황의 분쟁을 이용해 세습을 관행화하였으며, 슈타우펜가와 벨프가의 분쟁에서도 프리드리히 1세(재위 1152∼90)로부터 1156년 세습공령으로의 승격을 획득했고, 아울러 영역 내에서의 재판권을 인정받았다. 1192년 슈타이어마르크공령도 병합하여 남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나, 1246년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최후의 군주인 프리드리히 2세(재위 1230∼46)가 전사함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1246∼73)를 맞게 되었다.

주변 지역의 분쟁에 개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접 제후들의 무력개입을 초래했으나, 보헤미아(뵈멘)왕 오토카르 2세는 1251년 빈을 점령하고 아드리아해까지 진출해 동남유럽에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1256년 독일의 대공위시대(1256∼73)에 때맞추어서 황제위를 요구하였다. 이에 반대한 독일 제후들은 1273년 알자스와 스위스 등지에 기반을 둔 합스부르크백작 루돌프를 황제로 선출했다. 황제 루돌프 1세(재위 1273∼91)는 제국영토의 반환을 거부한 오토카르를 1278년에 죽이고 오스트리아를 합스부르크가의 영지로 확보했다. 그러나 제후들은 너무 강대해진 합스부르크가에게 계속해서 황제위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1291년 이래, 특히 14세기에는 오랜 기간에 걸친 스위스 독립전쟁으로 고초를 겪었을 뿐 아니라, 카를 4세(재위 1347∼78) 밑에서 번영한 룩셈부르크가와도 대립, 1356년 금인칙서(金印勅書)에서도 7선제후(七選帝侯)에서 배제되어, 룩셈부르크왕조가 후스 전쟁(1419∼36)으로 단절되고 알브레히트 2세가 1438년 즉위한 뒤에야 합스부르크가가 황제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1453년 대공령으로 승격하였다.

합스부르크가의 아들들에 대한 분할상속 전통은, 결과적으로는 결혼정책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으나 영토분할과 계승권분쟁이 생김으로써 통일국가로 나아가는 데에는 방해가 되었다. 1477년 부르군트공주와 결혼한 황제 막시밀리안 1세(재위 1493~1519)는 1495년 독일 제국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좌절되었다. 1496년 그의 아들 필립이 스페인 왕녀와, 1515년 그의 손자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헝가리 왕녀와 결혼했다. 이 결혼정책은 프랑스와의 대립을 장기화시키면서 프랑스와 동맹관계에 있는 오스만 제국와 대립을 가져와 합스부르크가는 동·서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었으나, 필립의 장남 카를 5세(재위 1519~1556)가 프랑스 왕과의 전쟁에서 이겨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면서 "합스부르크 세계 제국"이 출현했다.

근대 [편집]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룩한 세계제국도 1521년 스페인계와 오스트리아계로 분할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재위 1556~1564)는 농민전쟁에도 직면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북상으로 헝가리왕 라요시 2세(재위 1516~1526)가 1526년 모하치에서 죽자, 보헤미아·헝가리 두 왕국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1529년 빈을 포위당해 겨우 격퇴하고 1531년 독일왕이 되었으며 헝가리에서는 얼마 되지 않는 북서부를 지배했을 뿐이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 뒤 1556년 카를 5세로부터 제위를 승계받았으나 종교 쟁의에는 간섭할 수 없었다. 합스부르크가의 내분 뒤 페르디난트 2세(신성로마황제, 재위 1619~1637)가 1617년 보헤미아왕이 되어 반종교개혁을 강행하자, 1618년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다.

30년 전쟁은 단순히 개신교로마 가톨릭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탄생의 태동이기도 하였으며 체코 민족주의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열강의 간섭 속에서 오스트리아의 군주들은 개신교에 대항한 반종교개혁을 통해 농노제를 다시 확립하였고, 서방에서는 영국과 결탁해 루이 14세의 침략을 막았으며, 동방에서는 1683년 오스만 제국의 빈 포위를 격퇴한 뒤 헝가리전토를 지배하였다. 권력 집중을 도모하고 영토 통합을 꾀하였으며, 산업 육성·농민 보호에 힘썼으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해외 진출을 단념하고 스페인왕위를 포기하였으며, 네덜란드이탈리아에 영토를 확보하였다. 오스트리아 계승전쟁(1740~1748)에서는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을 빼앗겼으나 영토분할을 막기 위한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이 인정되어, 마리아 테레지아(재위 1740~1780)에게 상속시켰다.

1756년 프랑스와의 동맹에 성공했으나 7년 전쟁(1756~1763)에서도 슐레지엔을 수복하지 못했고, 오히려 헝가리 귀족과 타협해 동방에서의 제정 러시아의 진출과 독일에서의 프로이센 왕국의 발흥을 도운 셈이 되었다. 전중·전후의 부흥을 위해 행정·재정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 요제프 2세(재위 1765~1790) 치하인 1781년 <농노 해방령>과 <관용령>을 발포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1790년 요제프 2세의 죽음으로 개혁정책도 좌절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에 직면한 합스부르크가는 영토를 유지하기 위하여 나폴레옹이 대관하기에 앞서서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건국했으나, 슬라프코프에서 참패한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메테르니히1810년 황녀 마리아 루이자와 나폴레옹결혼을 추진하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교묘히 해방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빈 회의(1814∼1815)를 주최하고, 복고·정통·연대를 기조로 반동체제를 국내적·국제적으로 확립해 자유의 움직임을 탄압했다.

메테르니히 체제 아래에서도 산업발전에 따라 시민의 힘이 강해졌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으로 빈 등지에서 3월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는 망명했다. 혁명의 전면에 하층시민이 부상하자 산업시민층은 혁명에서 후퇴해 10월 말 반혁명의 승리로 끝나고, 1851년 이후로는 신 절대주의의 A. 바흐 체제가 되었다. 혁명 뒤에는 농민해방을 정착시키면서 산업 근대화를 추진시켰기 때문에 산업 혁명이 전개되면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영토의 기반을 동·중유럽에 두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다민족국가가 되었고 혁명은 여러 민족의 독립운동을 표면화시켰다. 헝가리 토지귀족의 독립운동은 러시아 군대의 원조로 1849년 진압되었으나, 체코의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는 슬라브 여러 민족에 영향을 주었다. 크림 전쟁에서의 외교적 실패와 고립화 속에서 이탈리아민족주의 운동은 1859년 독립 전쟁으로까지 고조되었고, 그 패전으로 바흐체제는 붕괴되었다.

위기에 직면한 오스트리아는 여러 민족의 요구를 참작, 1860년 연방주의적인 10월 칙서(Oktoberdiplom)를, 1861년에 2원제의회를 인정하는 2월헌법(Februar-Patent)을 반포하여 부르주아적 권력의 강화를 시도했지만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완패하자 헝가리 토지귀족과 제휴, 그 왕국을 인정해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성립시켰다.

이 노선은 반발하는 슬라브 여러 민족의 요구를 억압하고 1873년 공황을 거쳐 1879년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운동의 고조와 함께 노동운동도 성장하였다. 이 해에 <모든 민족과 정당을 대표하는 황제내각>이 성립되자, 이로 인한 독일인과 체크인의 민족적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보헤미아에서는 <언어령(Sprachenverordnung)>이 되풀이되었지만 대립은 일상생활로까지 번져 격화를 거듭하였다. 1888년 결성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1907년 보통선거제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1909년 민족별로 분열되자 민족주의가 고양되어 혼란에 말려들었다.

현대 [편집]

발칸 반도로의 진출은 범슬라브주의와 대립되었고,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제1차세계대전에 돌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제국은 해체되고, 1918년 사회민주당 주도로 공화국이 성립되어, 국민의회 결의에도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독일공화국의 한 구성요소>라고 명기되었으나 이 합병은 전승국들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특히, 산업이 앞선 보헤미아의 상실, 전후 경제혼란과 1929년 대공황에 따라 그리스도교사회당이 대두하였다.

1932년 돌푸스내각은 사회당, 공산당과 더불어 합병을 주장하는 나치를 탄압했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나치에 가담해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을 단행하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나치 독일이 패배하는 가운데, 1945년 3월 빈에 소비에트 연방군이 진주하였고, 전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 점령 아래 유럽에 대한 경제원조로 공산주의의 확대를 막고자 한 경제지원책인 마셜 플랜을 받아들였으며, 4개국회의를 거쳐 1955년 오스트리아국가조약으로 자유영세중립국으로 주권이 회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유럽 연합의 회원국으로 지내고 있다.

정치 [편집]

정당 [편집]

2006년 10월의 오스트리아 국회의원 총선거(Nationalratswahl)에서 획득한 의석수를 기준으로 정렬하였다.

이 두 정당은 현재 알프레드 구젠바워총리(사민당)의 지도 아래 대연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 선거의 패배로, 기존 인민당-자유당 연정을 이끌던 볼프강 쉬셀총리는 2007년 1월에 사임하였다.

지리 [편집]

오스트리아는 알프스 산지가 3분의 2로 되어있다.

서쪽은 스위스리히텐슈타인, 북서쪽은 독일, 북쪽은 체코, 동쪽은 슬로바키아, 헝가리, 남쪽은 슬로베니아이탈리아 등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행정 구역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오스트리아의 행정 구역입니다.

오스트리아는 9개 연방주로 구성되어 있다.

주민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오스트리아의 주민입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인(97%)이 대부분이다.

독일인 외에도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루마니아인, 체코인, 러시아인, 보스니아인, 기타등의 동유럽인, 아랍인, 타이족, 터키인, 집시, 기타 민족이 거주한다.

종교 [편집]

오스트리아에서는 84%가 로마 가톨릭을 믿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존재했던 1918년까지는 국교였다. 또한 6%의 개신교도 존재하는데,루터교, 개혁교회, 감리교, 침례교등이 있다. 그외 그리스도교 교파로는 37개의 교회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동방정교회가 있다. 이슬람교도 존재하는데 터키인과 이란인이 믿는다.

언어 [편집]

독일어가 공식적인 공용어이며, 지역적으로 슬로베니아어, 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가 쓰이고 있다. 러시아어영어도 쓰이나, 영어가 그중 많이 쓰인다. 이 나라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참관국이기도 하다.

군대 [편집]

이 나라는 징병제헌법으로 정해져 있다.

경제 [편집]

현대의 경제상황 [편집]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오스트리아가 입은 피해는 매우 극심한 상태였다. 게다가 종전 후 4개국에 의한 분할점령, 소련에 의한 생산설비의 철거, 그후 오랫동안 계속된 동서 양 진영의 대립에 휘말려 경제부흥이 늦어졌다. 그러나 1949년부터 시작된 마셜플랜(유럽부흥계획)을 바탕으로 유럽부흥자금에 의한 원조가 제공됨으로써 이와 같은 경제상태에서 벗어나 급속도의 재건을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특히 1955년의 독립 이후 소련에 접수된 재산이 반환되는 등 자극요인에 힘입어 오스트리아 경제는 고도성장을 달성하여, 전쟁 이전을 능가하는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겪는 동안에 산업 구조는 고도화하고 중화학 공업을 비롯하여 수출도 크게 신장되었다. 더욱이 1951년 이래 연평균 6%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유럽에서 독일·이탈리아에 이은 고성장을 이루었으나, 1970년대 이후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3% 정도로 성장이 둔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다 1993년에는 세계적인 경제 정체 등으로 인하여 -0.5%로 떨어졌고 1994년부터 경기가 호전되어 2.5%의 성장률을 나타내었다. 이후에는 1995년 1.7%, 1997년 2.5%, 1998년은 3.3%, 1999년 2.3%, 2000년 3.4%로 안정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주요산업은 제철업, 금속 가공업, 관광 산업이다. 오스트리아 경제 체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최대의 특색은 자본주의를 기조로 하면서도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국영화가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치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실시된 옛 독일 자산의 국가관리도 큰 작용을 하고 있다. 토지 이용은 산지가 많기 때문에 경지율은 17%에 불과하여 목초지 25%를 합쳐도 식량생산에 이용할 수 있는 토지는 국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1997). 그러나 식량자급률은 꽤 높다. 농장당 농지면적은 24ha로 그다지 크지는 않고 농지면적 10ha 미만인 농장이 거의 반을 차지하며 소규모 영농(營農)이 많이 행하여지고 있다. 1997, 1998년의 농업부문 성장률은 0%로서 정체를 보였다.

농업과 임업 [편집]

경지는 동부의 저지(低地)에, 목초지는 서부의 산지에 많이 분포해 있고 경지의 2/3는 곡물을 심는 밭이다. 주요 작물은 ·호밀·보리 등의 맥류를 비롯하여 감자·사탕무·목초류 등이고 과일로는 포도·사과·자두 등이 생산된다. 가축으로는 ·돼지를 비롯하여 ·염소·도 많이 기르고 있는데 최근 들어 큰 가축으로는 소가 불어나고 말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낙농산물의 일부는 수출되기도 한다. 국토의 45%(386만ha)를 산림이 차지하고 있으므로 임업은 오스트리아의 중요 산업 가운데 하나이며, 세계 6위의 침엽수목재 수출국으로서 대부분(85%)을 수출하고 있다. 산림은 중·남부 지역에 많고 목재를 비롯한 제지·화학 공업용 원료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광공업 [편집]

광물자원의 혜택도 꽤 많이 받고 있다. 예로부터 개발이 진행되어온 철광은 유럽 최대의 노천굴 광산으로 유명한 슈타이어마르크 주(州)의 에르츠베르크가 주산지이며 바로 남쪽의 도나비츠에는 대규모 제철공장이 있다. 그러나 최근 동구국가들과의 가격경쟁에서 밀리면서 국내수요를 위해서만 채광할 뿐이며 많은 광산들이 휴광상태에 있다. 석탄은 매장량이 많은 편이나 수입하는 쪽이 값싸기 때문에 최근에는 폐광상태의 탄광이 눈에 띄고 있으며 국내 수요의 1/3에도 못 미치는 공급량을 나타내고 있다.

그밖에 암염·흑연 등의 생산량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석탄 생산량이 적은 대신 수력발전이 발달하였으며 유럽에서 중요 수력발전국의 하나로 부근 여러 나라에 전기를 수출한다. 석유는 매장량이 약 3억 1000만 톤으로 추정되며, 천연가스는 인근 산업단지나 발전소 등으로 공급한다.

공업 [편집]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공업 생산의 대부분은 국영 ‘오스트리아 공업광산 관리회사’에 통합되어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주요 생산부문은 철강·화학기계·전기기기·식품 등이다. 특히 오스트리아에서 개발된 LD제강법(製鋼法)을 비롯하여 제철기술이 발전되어 있으며 제품뿐만 아니라 기술수출도 여러 나라를 상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석유화학·제철·자동차 등 중화학공업 분야에는 국영 대기업이 많이 진출하였으며 세계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나, 한때 활기에 찬 제지나 섬유공업 등은 정체상태에 머물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편 전통적 미술공예품을 제작하는 각종 수공업도 전문화한 상태로 남아 있다. 제조업은 2000년 현재 전체 고용의 20.2%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 밀접지역인 빈과 인근지역에 산업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동남부지역은 주로 기계공업, 화학공업, 전기·전자공업이, 서부지역은 섬유·유리공업이 발달하였다.

이상과 같은 오스트리아의 산업구조는 크게 나누어 철강·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학 공업 부문과 식품·섬유·제지를 중심으로 하는 경공업 부문을 자본주의적 생산의 2대 지주로 삼고 있으며, 이와 함께 소규모 영농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생산과 공예품을 중심으로 하는 각종 전자본주의적(前資本主義的) 공업생산이 널리 남아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대외 무역 [편집]

EFTA(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 유럽 자유 무역 연합)에 소속되어 있는 오스트리아의 경제는 수출이 국내총생산의 약 40%를 차지하는 대외의존형 구조로서, 무역면에서 EFTA 국가들과 EC(European Community:유럽 공동체)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2000년의 무역실적은 수출 617억 5000만 달러, 수입 680억 1000만 달러로 적자를 기록하였다. 주요 수출국은 EU(European Union: 유럽 연합) 국가들로서 전체의 62.6%를 차지하며 그중에서도 독일이 34.8%를 차지한다. 주요 수입국은 역시 EU 국가들로서 전체의 68.4%를 차지하며 그중 독일이 41.7%를 차지한다. 주요 수출품은 자동차, 전기 제품, 기계, 철강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전기제품, 기계, 섬유제품 등이다.

관광 산업 [편집]

오스트리아를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의 수도 해마다 늘어 이에 의한 외화수입이 국제수지 적자를 메워주고 있다. 알프스산맥이 동서로 국토를 길게 관통하고 있어 예로부터 산악관광이 발달하여왔으며 동서교통의 요충지였고, 특히 도나우강의 수상교통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지금도 국영‘도나우선박회사’의 역할은 상당히 크다. 철도는 동부 지방에 발달해 있으며 반 정도는 전철화(電鐵化)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로 교통이 급격히 발달하여 빈-잘츠부르크-인스부르크에서 이탈리아로 이어지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개통되었다. 철도보다 버스를 많이 이용하는 경향을 보이며, 알프스 지방에서는 등산전차·리프트·케이블카 등의 관광시설이 발달되어 있다. 1999년 현재 숙박업·요식업 종사자는 전체 고용인구의 4.7%를 차지한다. 관광업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현재 6.4%로 EU 국가 중 제일 높다.

빈을 비롯한 6개 주요도시에 공항이 있고 국영 오스트리아 항공 회사(AUA)가 국내 및 유럽 여러 나라에 취항하고 있다. 우편·전신·전화도 모두 국영이고, 경제계의 대표적 기관으로는 연방산업회의소가 있다.

노동 조합 [편집]

노동조합으로는 1945년에 결성된 오스트리아 노동조합(OGB) 총동맹이 있다. 초당파적(超黨派的) 조직인 OGB의 주된 목표는 완전고용의 실현에 있으며 전 근로자의 약 60%가 가입하고 있다.

문화 [편집]

오스트리아는 음악으로 유명하다. 그 유명한 작곡가이자 연주자,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제일 먼저 세상빛을 보았다. 베토벤, 슈베르트 등도 오스트리아에서 수많은 연주회를 가지고 방문했었다.

오스트리아의 현대 문화환경은 풍부한 유산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유산은 건축과 시에서는 중세부터, 의학과 과학에서는 18, 19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마찬가지로 빈 화랑들은 많은 옛 대가들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어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편이다. 오스트리아는 음악분야에서 가장 높이 인정되는 문화적 공헌을 했으며 이 전통은 계속되고 있다. 유명한 오스트리아 작곡가로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란츠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가(家) 등이 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폰 베베른 등은 현대음악의 창시자에 속한다.

문학에서는 종종 독일어 문화의 정체지역으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19세기 고전기 이후의 프란츠 그릴파르처, 요한 네스트로이, 페르디난트 라이문트 등과 20세기 초기의 후고 폰 호프만슈탈, 아르투르 슈니츨러 같은 작가들은 독특한 오스트리아의 특성을 보여주었다. 20세기 후반에 국제적 명성을 얻은 작가로 슈테판 츠바이크, 로베르트 무질, 페터 한트케, 엘프리데 옐리네크 등이 있다.

오스카르 코코슈카알프레트 쿠빈은 오스트리아 현대미술의 최초의 창조자에 속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완전히 재조직된 빈 국립 오페라는 밀라노라 스칼라 와 함부르크와 뮌헨오페라와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빈 교향악단은 세계의 음악도시에서 연주했다.

외교 [편집]

대한관계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한국과는 1963년에 수교하였으며 1974년에는 북조선과도 수교하였다. 한국과는 무역협정,사증면제협정,한-오스트리아 투자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승만 전(前)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터미네이터로 잘 알려진 아널드 슈워제네거, 경영학 박사인 피터 드러커도 이 나라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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