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주일예배]

[설교준비] 4

好學 2009. 10. 17. 11:03

[설교준비] 4

 

 

31.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하는 설교
이름을 말하면 알 만한 유명 목사는 설교 가운데 꼭 한 번씩 “죄송합니다. 용서하시고 들으십시오”라고 말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버릇이 있다. 듣고 보면 죄송한 말도 아니고 잘못된 말도 아니다. 아마 자기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죄송한 마음을 가지는 것 같다. 그렇게 죄송한 생각이 들면 안하면 된다.
설교는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목사를 시켜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목사는 많이 연구하고 준비해서 설교를 하지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잇는 것이다. 물론 말씀을 잘 전하기 위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잘못된 말이 아니며 죄송한 말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 목사는 언제나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어제 제가 최전방에 잇는 군인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것에는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 지휘관이 있었습니다” 이런 식이다. 왜 이렇게 말해야 하는가? 내가 듣기에는 자기가 얼마나 겸손한가를 듣는 성도들에게 말하기 위한 것 같았다. 겸손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살면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서 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죄송하다는 말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면 듣는 다른 성도들도 이미 그렇게 그 말을 이해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죄송하다고 사죄를 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짓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인 것이다. 성도들은 이런 모순되고 강요된 겸손과 잘못을 고백할 수 없는 위치에서 잘못했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목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짓은 하나님 앞에서도 좋은 짓이 아니다.

32. 대독 설교
목사의 큰 고민 가운데 한가지는 설교다. 설교를 하기는 하는데 듣는 성도들이 도무지 감동이나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정말 답답하고 괴롭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이 마지막 카드로 내놓은 이유가 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판이다. 도무지 목사의 설교가 은혜가 안되어서 떠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목사는 기가 팍 죽게 꼼짝 못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정이 든 성도라고 해도 더 이상 붙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설교를 잘하기 위한 노력으로 유명 목사의 설교 책을 사서 본다. 나도 유명 목사의 설교 책을 많이 사 보았다. 설교를 잘하기 위해 설교 책을 사서보고 연구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기 위해 설교 책을 사 보는데 기독교 서적 가운데 설교 책에 가장 많이 팔린다고 하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또 한가지 설교가 지천으로 날려 있는 곳이 있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설교만 취급하는 곳도 있고 어느 교회나 목사 개인 홈페이지에 많은 설교들이 올라 와 있다. 아마 그 분량을 책으로 계산하면 수천 수만 권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경험해 보니 인터넷에 올라 있는 유명 목사의 설교는 얼마나 내용이 풍부하고 그 문장과 예화가 적절하며 풍요로운지 경탄할 만했다. 그런 설교들은 내가 수 십일씩 기도하고 주석이나 다른 참고서들을 보면서 몇 시간씩 원고를 정리하여 완성한 설교와 도저히 비교할 수 없어 또 한번 나의 실력 없음과 감화력 없음을 깨닫게 했다. 그래서 수 십번도 더 내가 준비한 설교를 버리고 유명 목사의 설교를 마치 내가 만든 설교 인양 자신 있게 전하는 일들이 있었다. 이와 같은 버릇은 교회가 아주 어려운 시험을 당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도 시험을 당하고 성도들도 시험을 당해 피차에 상처가 많았을 때에는 어떤 설교를 해도 시험이 되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우리가 가진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설교를 하기 위해 유명 목사의 설교 책을 보고 그대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 설교에 성도들이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부터 남의 설교를 내 설교로 설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설교 책을 그대로 강단에 가지고 갈 수는 없는지라 원고지에 그 설교들을 적어 가지고 강단에 올라 가 설교를 했다. 그러다가 인터넷의 설교들을 보니 이것은 원고를 작성하지 않고 그 설교들을 있는 그대로 인쇄해서 사용할 수 있는지라 책을 보고 원고를 쓰는 일이 번거러워 인터넷 설교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점점 남의 설교를 내 설교로 사용하는 빈도 수가 늘어나면서 설교 준비를 하지 않게 되고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인 설교를 앵무새처럼 흉내를 내는 모창 설교자가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창 설교를 처음 할 때는 좀 괴롭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그 설교가 우리 교회 현실에 맞도록 고쳐 설교했다. 그러나 조금씩 편의주의적 타성이 붙였다. 나중에는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어졌다. 그리고 괴로움도 없어졌다. 오히려 첨단적인 목회를 한다고 스스로를 미화했다. 나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목회 잘하고 설교 잘하는 목사의 은혜로운 설교를 우리 성도들에게 먹인다고 자위(自慰)했다. 사람이, 목사가 참으로 이상하게 되어 갔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되더라는 이야기다.   
나는 이렇게 설교를 모방하거나 다른 목사의 설교를 참고하거나 또는 그 설교를 한자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설교에 대한 몇 가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①. 유명 목사의 설교를 참고하되 그 설교를 녹음기 재생하듯 따라 하지 말고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선포해야 한다.
유명 목사들의 설교는 많은 성도들이나 성숙된 성도들을 위한 설교가 대 부분이다. 그리고 그 분들은 목회를 아주 오래 하신 분들로 목회 경험이 풍부하며 그런 목회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그런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연륜과 목회 경험이 없는 젊은 목사들에게는 그 설교가 설교를 하는 목사나 듣는 성도 모두에게 맞지 않는다.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는 한가지 아주 위험한 착각을 하고 있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유명 목사의 설교를 자기 설교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착각이 그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성도들은 자기 목사의 설교 수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자기 목사에게 걸맞지 않는 설교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아주 쉽게 알아차린다. 몇 번은 속고, 몇 번은 알면서 넘어 가지만, 계속되면 무시하고 멸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의 것을 훔쳐 자기 것인 양 속여 먹이는 목사를 배척하던지 교회를 떠날 것이다. 인류 호텔의 요리사가 만든 요리를 요리사 견습생이 손님들에게 가져가서 “이 요리는 바로 내가 만든 것입니다.”라고 속이면 싫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②. 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 잘 알고 난 후에 다른 유명 목사의 설교를 사용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후 좌우 위 아래로 많이 알고 자세히 알고 나면 다른 목사의 설교를 자기 교회에 맞도록 요리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수 천년 동안 이어 온 설교자들의 설교는 어차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내가 아무리 새롭게 설교를 작성해서 선포한다고 해도 그 근거는 성경 66권에 있는 것이며, 어느 때에 누군가에 의해 선포된 말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같은 본문, 같은 내용의 설교를 했음에도 유명 목사의 설교에는 힘과 감동이 있는데, 내 설교에는 그것이 없다면 감동이 없는 설교를 한 목사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인격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말씀은 그렇게 전하지만 실제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는 이중적인 인격을 가졌다든지, 아니면 그 말씀을 고지 곧 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목사의 외식된 생활을 성도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그 설교를 준비하면서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해서 유명 목사의 설교든지 무명 목사의 설교든지,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이면 얼마든지 진리를 정확히 선포할 수 있는 말씀의 실력과 영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일과 신령한 기도 생활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는 모방 설교는 영양은 높지만 싸늘하게 식어 그 맛을 잃은 음식을 성도들에게 먹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성도들이 ‘우리 목사님이 저런 좋은 설교를 할 수 있는 실력이 없는데 저런 설교를 하는 걸 보니 설교 준비도 안하는 구나’ 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목사가 가는 길이 뻔하다.  
③. 듣는 성도들의 수준에 맞도록 설교해야 한다.
유명 목사의 설교라고 해서 모든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듣는 사람의 신앙적 수준에 따라 은혜를 받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목사가 자기 교회 성도들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는 수준을 안다면 자기가 아닌 다른 목사의 설교를 있는 그대로 선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명 목사의 설교를 참고할 경우에는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 맞도록 설교를 다시 만들어 선포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용하면 처음에는 모를지 모르지만 나중에 그 설교가 자기 목사의 설교가 아니라 다른 목사의 설교 인줄을 알게 되고 결국 녹음된 설교를 하고 있는 목사를 배척하게 될 것이다.

33. 택배 설교
토요일 오후에 무슨 일로 후배 목사를 찾아갔다. 마침 목사가 없어서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집배원이 편지를 가져왔다. 그가 두고 간 편지는 어떤 곳에서 보낸 인쇄물로서 큰 봉투에 담겨 있었다. 목사가 돌아 왔다. 그는 내가 건네주는 그 편지를 받아 아무렇게나 봉투를 �어 내용물을 흘끔 살펴 본 뒤에 책상 위에 던지면서 중얼거렸다. “인간들이 언제나 이렇게 늦게 보낸단 말이야----” 나는 그가 왜 그렇게 그 편지에 기분이 나빠하는지 몰랐다. 그는 나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 몸을 씻으려 세면실로 갔다. 그 사이에 나는 그가 그렇게 기분 나쁘게 받은 그 편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이름을 말하면 누구도 알만한 어느 유명 목사의 두 주일이 지난 커다랗고 굵은 글씨로 기록된 설교 원고였다. 그것은 분명 그 유명 목사의 설교를 참고하기 위한 것은 아니였다.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설교 원고였던 것이다. 후배는 그 원고를 자기 교회에 맞도록 손질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늦게 도착을 해서 시간이 없다고 투덜거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내일 주일은 마침 부활 주일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손질을 해도 그 원고의 설교는 부활 주일에 할 수 있는 설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빈은 설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전달하실 때에, 모여 있던 백성들의 귀에 하늘에서 직접 천둥소리로 말씀을 전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모습을 들어내시고 백성들에게 그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신다면 그 앞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목사를 시켜 그때 그 장소에 모이게 한 성도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대독 설교를 하는 목사는 설교의 깊은 의미도 모르고 설교를 말씀하게 하신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원하는 성도와 아무 상관없는 설교를 시간 때우기나 헛된 칭찬을 받기 위해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사용한다. 이 일에 대하여 어떤 목사는 ‘돈만 내면 주일 설교를 위하여 수 편의 설교를 파는 선악과가 우리의 땅에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이런 일에 설교자가 맛을 들이게 되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설교자가 아니고 남의 설교를 읽는 단순한 대독자(代讀者)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무슨 목사 모임에서 내가 이런 놀라운 일을 보았다고 했더니 젊은 목사들이 “목사님, 그게 뭐 잘못된 거예요? 목사들이다 알고 있는 일인데----. 우편으로 배달되는 설교는요 다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뿐이에요. 그런 좋은 설교를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 해 주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리고요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들이 많아요”라고 했다. 정말 우리 한국 교회의 미래가 암담해 지는 사고방식이 아무 여과(濾過)도 없이 만연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찔했다.
설교자는 주님께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마 24:45)라고 말씀하신 말씀에서 그 사명을 찾아 야 한다. 주님의 자녀들에게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는 직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이런 귀한 은혜를 다른 사람이 만든 설교를 가져다가 강단에서 대독하는 일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짓이다. 이런 목사는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 책망 받은 개으르고 나태한 종이다. 설교하는 목사가 모래 위에 집을 세우듯이 무성의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강단을 지키려 하는 것이 어떤 잘못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정말 개탄할 일이다. 이렇게 상당수의 한국 목사들이 소명을 받은 자로서의 임무 수행을 너무 소홀히 여기고 설교의 신성한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설교를 위한 땀과 눈물과 살아 있는 생명이 없다. 오히려 설교를 목회의 한 수단으로 삼거나 자기 인생 목표 달성 방편으로 삼아 성도를 이용하려 드는 목사가 많아진다. 바로 이런 목사들이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한다. 설교자의 땀과 눈물과 피로 성도들에게 말씀의 은혜를 끼쳐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하는 일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미 완성된 누구의 설교를 우편으로 파는 상혼(商魂)이 목사의 심령을 무사 안일주의로 빠지게 하고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상업적으로 만들어 진 설교’를 들으면서 그렇게 소중한 하나님과의 만남과 말씀의 은혜를 희생당하고 있다.

34. 인터넷 설교
인터넷은 모든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인류 최고의 문명의 이기(文明의 利器)다. 목사가 인터넷을 잘 이용한다면 목회에 많은 도움을 받을 거이다. 그러나 모든 문명의 이기가 그렇듯이 잘못 사용하면 목회를 그릇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나는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인터넷을 잘못 사용해서 목회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는 경우를 보았다. 이런 현상은 특별히 설교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인터넷에 실려 있는 설교를 그대로 받아 사용하는 것이다.
인터넷의 모든 기독교 싸이트에는 한결같이 설교 게시판이 있다. 그곳에는 각종 설교가 올라 있고 그것도 모자라 설교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싸이트에 연결해 주기도 한다. 그 연결 고리를 찾아 가 보면 수천 수만 가지의 설교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고 그 설교들을 다운 받아 프린트해서 즉시 사용할 수 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하는 전달자의 인격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듣는 성도들의 상황과 형편에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다른 목사들이 선포한 설교를 마치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 인양 설교를 한다면 아무래도 무엇이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마치 슈퍼마켓에서 잘 만들어진 만두를 가지고 식구들에게 먹이면서 '엄마의 정성이 깃들인 만두'인양 말하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는 설교하는 목사가 기도 많이 하고 말씀을 깊이 연구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자녀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찾아야 하고, 설교 듣는 성도들의 형편과 입장이 깊이 고려되어 그 시간에 그들이 듣고자 하는 말씀을 전하야 한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 드리고 설교 듣는 성도들의 심령에 믿음의 확신을 주고 생활에 활력을 넣어 주며,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목사는 한 번의 설교에 자기의 모든 인격과 사랑과 믿음과 열정을 담아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이것은 설교자의 특권이며 큰 축복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하고 아름다운 특권을 다른 목사의 설교를 대독해서 스스로 낡은 녹음기 같은 짓을 한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런 설교에는 설교자의 영혼과 성도들의 생명의 부딪침이 없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성도에게 전혀 현실감이 없고, 영적인 감동도 있을 수 없고, 인격적인 감화력도 없는 거저 귓전을 스쳐 들리는 설교일 뿐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나는 서울의 모 교회의 집사인 조카의 말은 우리 목사들에게 하나의 경고로 들렀다. “목사님들이 다른 유명 목사님들의 설교를 카피해서 설교하면 성도들이 모르나요? 우리 목사님이 저런 설교를 하지 못하시는 분인데 갑자기 저런 설교를 하는 게 이상하네?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거리지요. 물론 실망도 하구요”
나도 몇 번인가 다른 목사의 설교를 대독하면서 설마 우리 성도들이 대독 설교 인줄을 모르겠지 라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조카는 여지없이 대독 설교 목사의 그런 심리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사가 대독 설교를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①. 유명 목사가 그렇게 설교해서 목회를 잘하게 되었으니 나도 같은 설교를 하면 목회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②. 설교를 아주 잘하는 목사의 설교를 내가 대독했을 때 우리 성도들도 그 교회 성도들처럼 큰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③. 가장 큰 이유는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해 많은 고민과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④. 아무리 정성 드린 설교라 해도 유명 목사의 설교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 유명 목사의 유명 설교라고 해도 대독 설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듣는 성도들에게 은혜가 안된다. 그것은 유명 목사의 설교가 대독 설교를 하는 목사의 교회 현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목사의 대독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몇 번은 속아 넘어 가겠지만 얼마 되지 못해 설교 준비하지 않는 자기 목사의 약삭빠른 짓을 알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내가 대독 설교를 하는 목사라는 것을 고백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려 나갈 때 사울의 갑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물 맷돌 던지기로 골리앗을 물리쳤다. 목사들은 맞지도 않는 다른 사람의 갑옷을 입고 잘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 때문에 자기 발전이 안되고 다른 사람들 보기에 웃음을 자아내는 피에로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처음에 인터넷이 마약과 같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일을 쉽게 해결하려는 목사는 한 두 번은 양심의 가책도 느낄 것이고, 이런 일이 자기 발전에 큰 해악 된다는 것을 알고 자제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입맛 드린 쉽게 하는 버릇이 발동해서 기도 대신 컴퓨터 앞에 앉게 되고 펜을 들어 원고를 쓰는 대신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두리게 될 것이며, 그리고 순식간에 글자 화되는 프린트기 앞에서 ‘하나님, 오늘은 너무 바빠 할 수 없이 다른 목사의 설교를 참고합니다. 그러나 다음 주일 설교는 기도하고 주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아 설교하겠습니다‘라고 맹세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바쁘고, 또 그 다음 주일에도 바빠서 프린트 앞에서 기도하다가 나중에는 ’이렇게 하는 것도 하나의 달란트다‘라고 이상한 감사 기도를 한다. 결국 인터넷 설교에 중독이 되어 이성적인 성경 연구도 없고,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도 없으며, 성도들을 살피는 발걸음도 생략된 체 온통 인터넷의 모든 지식과 정보와 설교들이 모두 자기 것인 양 착각하는 엄청난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런 사람은 결국 이렇게 말하며 자기를 합리화할 것이다. “나는 정보화 시

대에 걸맞은 최첨단의 목회를 하고 있다. 일일이 책을 보고 지식을 얻어야 하는가? 그것은 한계가 있다. 인터넷에는 한계를 모르는 많은 지식이 있지 않는가? 노트 북 컴퓨터 한 개와 인터넷에서 내가 필요한 지식을 잘 찾아내는 검색 기술만 있으면 모든 지식이 다 내 것이다. 목회는 이렇게 첨단적으로 해야 한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착각하지 말라. 자기와 하나님을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죄인을 구원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지식을 계시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던 사람들이 있음을 본다. 그들을 우리들은 선지자라고 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인터넷이 아닌 직접적인 계시로 받아 그대로 죄인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죄인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부족해서 하나님이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이 오셔서 죽으셨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목사와 성도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우는 자와 함께 울며,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며, 죄인들과 함께 하며, 이곳 저것을 다니면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며, 밤을 세워 기도하는 것이며, 죄인을 사랑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도 없고, 그 말씀을 해석 책(주석)에 대한 탐구도 없고, 성경에서 감동과 감화를 받음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기도도 없고, 성도들과 함께 아파하는 아픔도 없고, 성도의 즐거움에 동참하여 기뻐하는 기쁨도 없고, 이웃을 사랑하여 헌신 희생하는 섬김도 없이 오로지 인터넷을 구경 다니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것인가? 결국 첨단이라는 미명 아래 그리스도를 위한 조그마한 헌신도 거부하고 있는 첨단 목사와 성도들에게 우리 하나님은 무엇을 기대하실까?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여기서 한가지 아주 중요한 문제를 집고 넘어가야 하겠다. 강남에서 부목으로 있다 강동 어디에 교회를 개척해서 많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어떤 목사는 미국의 유명 목사 설교를 많이 참고하여 설교한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 목사는 많은 설교 책을 출판했는데 그 책에서도 그런 말을 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도 그는 아주 설교를 잘한다. 즉 유명 목사의 설교를 모방해도 설교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설교를 대독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방 설교를 말한다.
모방 설교는 어차피 설교하는 모든 목사들이 피할 수 없는 설교의 한 형태다. 주님의 설교와 사도들의 설교와 선지자들의 설교를 모방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모방 설교는 창조적인 설교 보다 위험성이 더 적고 안전하다. 그러나 모방 설교가 성도들에게 새로운 말씀으로 은혜 되게 하려면 고도의 무엇이 필요하다. 모방 설교에서 필요한 고도의 무엇에 대해서는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좋은 설교’에서 설명하겠다.    

35. 다른 사람의 말만 인용하는 설교
내가 아는 어떤 목사는 설교 가운데 유명인 들의 말을 많이 인용한다. 그 분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자기 생각도 없이 오로지 유명한 사람들이 말만 있는 느낌을 가진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명언이나 금언들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설교를 기름지게 하고 짧은 말 가운데 가장 많은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말의 인용이 크게 잘못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이 있다. 설교는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데 포인트가 맞추어져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들이나 교회를 극도로 핍박했던 자들의 말이 설교에 유익이 도는 말처럼 사용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불타의 말도 등용하고 공자 맹자의 말은 아주 즐겨 쓰이는 말들이 된다. 나와 동기 동창인 목사는 너무나 공자 맹자를 설교 가운데 많이 이용해서 공자의 이야기를 하는지 맹자의 이야기를 하는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그는 어려운 한문을 말하고 풀이하는 것을 아주 즐겼다. 그런 그의 심중에는 아는 자의 교만이 가득했으며 자기가 아는 것을 모르는 성도들에 대한 멸시가 있었다. 그는 결국 퇴계로 어떤 교회에서 시무 하다가 경기도 어디 시골 교회로 갔는데 그 후 소식을 전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으려 온 사람들에게 복음이 아닌 다른 무엇을 말해서는 안된다. 유명한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는 명언집(名言集)의 여기 저기를 찾아 필요한 단어를 골라 가며 인용하지 말고, 그 사람이 그 말을 하게 된 동기와 이유를 충분히 알아 써야 한다. 문학 작품을 인용(引用)하여 복음을 잘 설명하려면 그 작품 전체를 알고 인용해야 한다. 작품의 한 구절을 떼어 내서 인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인용의 신중 여하를 듣는 성도들이 결국 알게 된다. 인용에 대해서는 예화 사용하기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36. 성경에는 무식하면서 세상 지식을 다 가진 것처럼 말하는 설교.
어느 목사 장로 기도회에 친구 목사가 강사로 초청을 받아 한 시간 동안 특강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친구의 강의를 들으면서 아차 했다. 그것은 친구가 예배에 대한 강의 도중에 수도 없이 ‘예배 문화’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동안 강의를 들은 목사와 장로들은 ‘예배 문화’라는 말에 전혀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고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명 강의를 했다고 하면서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나는 일단 안심을 했다. 그러나 강의를 마치고 상기된 얼굴로 만면에 웃음을 띤 체 나오는 친구를 한 구석으로 불렀다. 그리고 다구치듯 물었다.
“야 김 목사. 예배가 무슨 문화냐? 너는 요즘 문화라는 말이 홍수가 되어 음주 문화, 흡연 문화, 심지어 남녀간에 못된 짓거리도 문화라는 말을 붙여 성(Sex)문화라는 말도 하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예배를 그런 수준의 같은 단어로 묘사해야 되냐? 나는 내 강의를 듣고 있는 동안 죽을 뻔했다. 그런데 목사 장로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문화라고 해도 아무 질문을 하지 않아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너에게 질문할 수는 없잖아. 한심한 목사 장로들만 우글거린다. 그게 너에게 천만 다행 이지만---”이라고 말하며 몰아 세웠다. 친구는 난처한 얼굴로 아무 대답을 못하고 얼굴이 굳어 버렸다.
문화에 다하여 야후! 백과사전은 두산 세계 대백과 사전을 인용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문화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cultura에서 파생한 culture를 번역한 말로 본래의 뜻은 경작(耕作)이나 재배(栽培)였는데, 나중에 교양. 예술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의 인류학자 E. B. 타일러는 저서《원시 문화:Primitive Culture》(1871)에서 문화란?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등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리고 ”문화란 인류에서만 볼 수 있는 사유(思惟), 행동의 양식(생활 방식) 중에서 유전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에 의해서 소속하는 사회(협동을 학습한 사람들의 집단)로부터 습득하고 전달받은 것 전체를 포괄하는 총칭이다.“라고 했다. 즉 어디까지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정신적인 능력이나 획득된 습관이라는 것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인본주의적인 인간 사고의 생활 양식과 생각을 말한다.
그러나 신앙은, 더욱이 장로교의 신앙 관은 사람에 의해 주도되는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스스로 의를 행할 수 없으며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친구는 이런 구원적 신앙을 종교 문화적 차원에서 해석하고 동등시했다. 그리고 아무도 이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장로교의 목사들과 그야말로 장로교의 장로 수 백명이 모여 ‘예배 문화’에 대한 강의에 열렬한 지지 박수를 보냈던 것이다. 아마 예배 문화라는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 목사들이 있겠지만 강의한 목사의 체면을 보아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나 생각이 되었다.  
칼빈이라면 하나님 다음으로 아는 친구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강의를 한 것은 분명 실수다. 그 실수는 문화라는 말이 뜻하는 인본주의적인 실체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만히 있으면 성도들이나 사람들은 목사를 실상보다 높여 본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목사의 위신이 그렇게 천시(賤視)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식하면서도 유식한 척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비하(卑下) 시키는 것이다.        
세상일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척 말라. 무식이 탄로 난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문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도 다 몰라 실수를 연발하고, 그 실수 때문에 이단들이나 하는 설교와 말들을 거  침 없이 하면서도, 그 잘못을 모르는 판에 무슨 세상 지식을 그렇게 많이 가졌다고 아는 체를 해서 스스로 무식을 폭로해 빈축을 산다는 말인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해서 성경의 전후 좌우, 선후를 망라하여 가르치고 전해 보라. 성도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을 것인가? 성도들은 자기 교회 목사가 성경을 아주 잘 아는 바울처럼 되기를 바란다. 한 구절의 말씀으로 성경 66권을 모두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의 지식을 가지도록 하라. 아마 그것만해도 평생이 걸릴 것이며 그렇게 깨달은 말씀만 전해도 다 전할 수 없을 것이다.   

37. 타 교단, 신학적 비판, 정치, 경제에 대한 비판 설교
목사들이 한가지 강력하게 도전 받은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세상을 잘 살게 하기 위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으로 강단에서 최근에 있었던 어떤 사건들이나 정보들을 성도들에게 말하고 그것을 비판하거나 해설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경제에 대한 해설, 최근 정치에 대한 견해, 최근의 신학 동향, 잘못된 어떤 교단에 대한 비판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런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목사는 스스로 가장 현실감이 뛰어난 첨단 목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목사 혼자 생각하는 자화자찬(自畵自讚)일 뿐이다.
특히 장로교 계통의 교단에 소속된 목사들은 자기 교단에 대한 애착이 유난히 강력해서 자기 교단이 아닌 다른 교단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성토하는 일이 많다. 지금을 그렇지 않지만 60년에는 합동 측 장로 교단의 목사들은 한신 계열의 기장 교회들이나 통합 측의 교단 사람들은 아에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이단 정도로 매도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 반면에 그쪽 사람들은 합동 측 사람들은 바리세인들이며, 극 보수주의자들로서 하나님께서 벌써 오래 전에 버린 근본 주의자들이라고 정죄를 했다.  
지금도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목사들 가운데는 칼 발트의 책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고 발트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를 보수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어떤 중견 목사는 천주교인들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성도들 앞에서 상대를 비방하거나 비판하며 정죄 하는 말과 설교를 하게 되면 성도들의 얼굴에 아무 표정이 없지만 마음에 심한 저항감을 가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의 이야기도 그렇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목사들보다 성도들이 더 잘 안고 있다. 그런데도 그 방면에 훨씬 뒤떨어진 목사가 세상을 잘 살아 가는 방법을 말하면서 그 잘 살기를 위한 어떤 정보를-증권, 경제, 정치, 문화, 발전 없는 목사의 설교 체육등-을 제공하려 든다면 성도들의 차가운 비웃음을 살 것이다.
목사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만 집착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데로 목사에게 다른 복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성도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만을 듣기 원하고 있다. 그런데도 목사들은 시시하고 보잘 것이 없는 지식과 경험과 독서와 들은 이야기들을 굉장한 이야기처럼 떠벌리고 있다면 성도들에게 큰 비웃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지식이 목사를 목사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를 목사되게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38. 성도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설교
성도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설교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고 하셨는데 10년을 들어도, 20년을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 모양 그 꼴을 면치 못한다면 누가 그 목사의 설교를 계속 들으려고 할 것인가? 성도들은 한 달에 한 번 만이라도 목사의 설교에 감동되기를 바란다. 만일 그렇다면 그 성도는 심령의 갈급함 때문에 헐떡거리지 않을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일년에 한 번 만이라도 목사의 설교에서 가슴 벅차 오르는 감동을 얻는다면 그 성도는 결코 목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성도들 가운데 외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 저기 부흥회를 쫓아다니는 성도, 낯 예배는 자기 교회에서 드리고 저녁 예배는 다른 교회에 가서 드리는 성도, 시도 때도 없이 기도원을 찾아다니는 성도들이 있거든 ‘내게 체움 받지 못한 은혜를 받기 위해 방황하는 성도’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굶주려 먹을 것을 찾아다니게 만든 목사 자신이 크게 회개하고 각성해야 한다.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그런 성도를 비방하거나 경계만 하면 성도들 잃게 되고 말 것이다.   

39.이상한 목소리와 몸놀림
어떤 목사는 설교하면서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이상한 목소리를 낸다. 이런 자연스럽지 못한 음성으로 설교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외식으로 보일 수가 있다. 이상한 목소리는 큰 소리를 말하지 않는다.
내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의 목사는 매우 인자하고 목회를 잘하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 분에게 한가지 설교자로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성도들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고개를 깊이 숙이고 눈을 위로 치켜 뜨는데 흰 눈동자가 많이 보여 목사의 인상이 아주 이상하게 변하는 것이다.
어떤 목사는 흘려 내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는 것 때문에 성도들에게 심한 혼란을 준다. 또 다른 목사는 설교 중에 가끔 머리를 심하게 흔드는 버릇이 있어서 성도들을 불안하게 했다. 어떤 목사는 너무 손짓 얼굴 짓을 심하게 해서 듣는 성도들이 정신이 없다. 이런 나쁜 숩관들은 급히 고치는 것이 좋다. 고치지 않으면 더욱 더 빈번한 버릇이 되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홰손하게 된다. 설교자는 가장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해서 성도들의 신경에 거스림이 없어야 한다.  

40. 이상한 옷차림
넥타이를 매지 않고 설교 단에 서서 설교하는 목사를 보았다. 자기는 가장 보편적이며 자연스러운 스타일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성도들을 무시한 예의바르지 못한 목사다. 정장은 자기만 좋으라고 입는 옷이 아니다. 자기는 불편하지만 상대를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기 위해 입는 옷이다.
눈처럼 흰옷에 빨강 넥타이를 하지 말라. 넥타이에 매달려 반짝이는 금 넥타이핀을 하지 말라. 이상한 머리 모양을 하지 말라. 색깔이 짙은 안경을 쓰지 말라. 황금색의 굵은 반지를 끼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다른 곳으로 신경을 쓰게 하는 모든 것을 목사의 옷차림과 말투와 강단 주변에서 치우라. 목사가 가운을 입는 것이 좋다. 가운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목사의 개성을 가리는 효과가 있다. 목사가 흘러내리는 안경을 몇 번 치켜올렸으며 어떤 손가락을 사용했는가를 매 주일 세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면 그 목사는 라식스 수술이라도 받아야 한다.

41. 축복 대 성회
오늘의 설교가 너무 범람하여 옛날처럼 신선한 설교로서의 반응이 사라졌다. 60년대와 70년대만 해도 이웃 교회에서 부흥 집회를 하면 자기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 것처럼 은혜를 받기 위해 열심히 참석했던 광경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또 목사들 자신이 자기 교회가 아닌 이웃 교회의집회에 자기 교회 성도가 참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집회를 하는데 사람을 많이 오게 하는 방법으로 극한 처방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아주 자극적인 광고를 하는 것이다. 그 문구 가운데 ‘축복 대 성회’, ‘신유의 종 김 돌세 목사의 특별 신유 집회’, ‘지리산에서 평생 기도하고 내려오신 능력의 종 박천사 목사의 특별 대 성회’, ‘전도의 왕 최전도 목사의 전도 폭발 성화’, ‘개척 일년만에 5가정을 3,000명의 성도로 성장시킨 능력의 종 장성장 목사의 능력 성회, 심지어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강남의 어느 곳에 커다랗게 걸린 ’안현수 목사의 말씀 한 마당‘이라는 선전 현수막을 보았다. 한참 생각한 후에 그 광고가 부흥회의 광고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아마 그 목사는 부흥회를 마당 굿으로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성도들은 그런 사람 끌어 모으기의 선전에 속지 않는다. 아니 자꾸 세상을 따라 가려는 교회 지도자들을 안타깝게 보고 있다. 큰 대(大)가 없는 ‘부흥 성회’, ‘사경회’들은 모두 어디를 가고 이상한 굿거리 같은 짓들만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을까?      

42. 목석(木石) 설교
나무나 돌처럼 몸이 굳어져서 설교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듣기 힘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몸을 움직여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아주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주님께서도 손을 사용하셔서 말씀의 내용을 더욱 확실히 하셨다.(마 12:49) 돌과 나무처럼 미동(微動)도하지 않고 입으로만 설교하려 한다. 이렇게 설교하면 설교가 딱딱해 지고 전달이 잘 되지 않는다.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은 말 보다 오히려 몸의 언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심포지의 지휘자, 야구 투수, 배우들, 생명을 건 전쟁터의 군의 지휘관들은 모두 언어 보다 몸짓을 더 사용해서 의사를 전달한다.
설교자는 대화를 할 때에 오감과 사지백체(四肢百體)를 사용하는 것처럼 설교에서도 자연스럽게 온 몸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햄릿(Hamlet)가 그의 배우들에게 말한 것처럼 “행동은 대사에 맞추어, 대사는 행동에 맞추어 조절하라”는 말은 설교자에게 매우 중요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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