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주일예배]

[설교준비] 2

好學 2009. 10. 17. 11:00

 

[설교준비] 2

 

11. 현실성이 없는 설교.
이런 설교는 설교하는 목사가 성도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생긴다.
내가 잠시 몸담아 있던 노회에서는 이상한 풍속이 있었다. 노회 때나 매월 모이는 교직자 월례회에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하는 목사가 언제나 고정되어 있었다. 고정된 설교자는 회기(會期)의 노회 장이다. 그런데 그 해 노회 장은 나이도 40이 넘었고 목회도 상당히 오래 한 목사인데도 설교가 전혀 은혜가 되지 않았다. 목사가 노회 목사들을 앞에 두고 설교를 할 때에는 자기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말씀을 전하겠는데 늘 핵심이 빠진 뜻한 설교를 했다. 우선 그 설교가 상당히 어려웠다.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어렵게 표현하고 목사들의 현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를 주제로 했다. 또 한가지는 그 설교가 자기의 설교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유명 목사의 설교를 노트에 기록해 와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설교의 주제와 내용이 듣는 목사들의 요구와는 너무 많이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마 지난 주일에 교회에서 설교한 설교를 그대로 가져 와 설교하는 것 같았다. 노회 목사들이 모였으면 목회를 어떻게 잘 할 수 있는지를 말해야 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목회하고 있으니 위로와 격려가 있는 설교를 해야 하는데, 그 목사는 으레 어디서 그런 주제를 가져오는지 ‘성도들의 애국심’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주제로 장황한 설교를 했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설교는 목사에게 참으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설교가 듣는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고, 관심도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거나 전혀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그 설교는 따분하고 지루하기 그지없는 연설이 되고 만다. 나는 그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언젠가 목사의 설교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연구가 노회 적으로 있었으면 생각했지만 아깝게도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가정의 달 5월에 목사들은 가정 문제, 자녀와 교육 문제들을 설교의 주제로 해서 설교한다. 그런 설교들은 성도들 모두에게 아주 교훈이 되는 설교들이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Reuel L. Howe는 수백 개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 평신도들과의 토의를 거친 뒤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회중 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이의 없이 너무 많은 사상을 설교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불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사상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질 때에 그것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자신들의 삶과 의미 있는 연결을 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현실감 있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그 자료를 심방 하면서 찾거나 부 교역자들과 이야기하면서 얻든지 아니면 장로나 성도들과의 대화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많은 정보들을 얻을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을 가장 적절히 사용하여 설교에 반영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도들이 그 짧은 25분 동안의 시간에 무엇을 듣기 위해 교회를 나오는지,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성도들에게 하시고 싶어하시는지를 알고 설교하는 중책이 목사에게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고 성도들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설교를 매 주일 하고 있다면 그 목사를 틀림없이 목회 생명이 단축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목사를 배척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그를 강단에서 몰아 내실 것이 뻔하다. 아니면 성도 모두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킬 것이다. 이런 설교는 풍요 가운데 말씀의 기근을 가져 와 성도를 영적 아사지경(餓死地境)으로 내몬다.

12. 연설 같은 설교
우리가 신학교를 다니면서 소위 설교학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런데 그 설교학이라는 과목이 얼마나 엉성하고 배울게 없는지------ 그것을 배웠다고 해서 설교에 대하여 달인이 되었다든지 아니면 설교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병아리 목사들은 대게 설교를 연설하는 것처럼 한다. 연설 같은 설교는 우리가 교회에 가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설교를 말한다. 평소에 쓰지 않는 이상한 목소리, 평소의 대화와 다른 높은 말소리, 일상 생활에서 쓰지 않는 언어들과 표현 방법, 얼굴 표정, 몸놀림이 동원되는 그런 설교를 말한다. 그야 말로 사람이 이상하게 변해서 소리를 지르고 평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모습으로 줄줄이 연설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거 철에 유세(遊說)하는 후보자들이 연설하듯 하는 설교를 말한다.
강남의 어떤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는 아주 맹랑한 교육을 한 일이 있었다. 부흥사가 되기 위한 교육이다. 교육 과목 가운데 부흥사 목소리 만들기가 있었는데 그게 좋은 목소리를 쇳소리가 나게 만들어 듣기 거북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목사의 목소리가 쇳소리가 나는 것은 기도를 많이 하고 설교를 힘있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인데 여기서는 아에 그렇게 목소리를 망가뜨리고 새롭게 만들어 성도들을 기만하는 짓을 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목사들이 변질된 듣기 싫은 목소리를 얻어 얼마나 부흥사로 태여 났는지 모르지만 그런 모조품 부흥사가 우리 한국 교회에 활개를 친다면 우리 목사들은 점점 설 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일상 생활과 다른 목소리와 표현들과 몸놀림은 듣는 성도들에게 설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없게 하고 지루하게 만들어 설교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조바심을 일으킨다.   
주님의 설교를 자세히 연구해 보라. 그야말로 주님은 연설이 아닌 설교를 하시지 않는가? 늘 하는 일상 대화를 연구해 보라.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일대일의 대화를 하는 것처럼 설교를 하라. 대화 식 설교는 배워야 한다. 한경직, 곽선희, 옥한흠, 김삼환 목사님들의 설교를 참고하라. 그 분들의 설교를 모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분들의 설교와 여러분의 설교 차이를 모르겠거든 여러분의 설교를 녹음하거나 녹화해서 비교 해 보라. 그러면 확연히 구별이 될 것이다. 무엇이 대화 설교 인줄 모르겠거든 텔레비전 드라마 가운데 목사가 나와 설교하는 장면을 탤런트가 연기하는데 그 때 그들의 말하는 것을 자세히 보고 들으면 대화식 설교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글은 잘하는 설교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13. 긴 설교.
설교를 길게 하지 말라. 20분 내지 25분 정도면 족하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여 은혜를 받게 할 것인가?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시간은 20분 정도라고 한다. 20분이 지나면 말이 청취되지 못하고 귓전을 때리며 흘러 버린다고 한다. 60-70년대는 설교를 길게 했다. 친구 목사는 부흥회를 가서 10시부터 시작한 낮 성경 공부를 오후 4시까지 계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이미 옛 날 이야기다.
문제는 이렇게 인색하고 짧은 시간에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가 되도록 설교하는가 이다.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에 대한 설명을 이곳에서 다 할 수 없어 따로 설교 잘하기에서 말하겠다. 좋은 설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즉 감동과 감화력을 가진 설교를 말한다. 나는 일반 대중 가요를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에서 설교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들은 3-5분 동안 노래를 부르는데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는지 얼굴과 온 몸에 땀이 난다. 그렇다고 그들이 땀이 날 정도로 큰 소리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청소년들은 혼절하기도 하고 어른들은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한번만 들은 노래가 아니고 수 없이 많이 들어 알고 있는 노래지만 가수들이 부를 때는 감동되어 울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노래를 다른 사람이 부르면 장난이 되고 만다. 왜 그런 차이가 생길까? 목소리가 좋아서인가? 물론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노래를 부르는 그들이 그 노래를 부르기 위해 수 천번 노래 연습을 하고 거기에 자기들의 모든 인격과 영혼의 힘을 불어넣어 부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노력으로 감동을 주지 못하면 유명한 가수가 될 수 없고 성공할 수가 없다. 3-5분 동안 사람이 듣고 즐거워하는 노래를 부르는데도 이토록 노력하고 심혈을 기울이는데, 하물며 죄인을 살린다는 목사들이 20-25분 동안 죽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분명 이는 이사야가 말한 ‘개는 개로되 짖지 아니하는 개’와 같을 것이다.(사 56:10)
이 글은 읽는 목사들이 설교를 아주 잘해서 사람들을 변화하게 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란다.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으면 그 교회가 이층이던 지하실이던, 임대 교회든 성전을 가진 교회든, 크던 작던 가리지 않고 그 교회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암사동에 있는 어떤 아파트 단지에서 아주 잘 생긴 목사가 상가를 분양 받아 교회를 개척하고 5,000만원이라는 큰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잘했다. 누구든지 그 교회를 처음 나왔을 때는 놀라면서 마음 들어 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린 후에는 다시 그 교회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 그 교회는 개척한 후 2년이 넘었는데도 의자가 텅텅 비어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목사가 성도들이 듣기 싫은 설교만 골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처럼 하루 종일 설교해도 들을 만한 설교를 할 수 없거든 설교를 길게 하지 말라.

14. 주제가 많은 설교.
목사들은 설교에 욕심을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되 많은 것을 충분히 잘 전하려 한다. 이런 생각은 매우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 설교에 주제를 몇 개씩 설정하고 설교하면 듣는 사람이 혼란스러워 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종잡을 수 없게 되어 머리 아파한다. 목사가 설교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요한 복음 3:16절에는 성경 말씀의 모든 중요한 진리가 함께 들어 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신론이고, ‘세상을’하는 말씀은 인죄론이며,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는 말씀은 기독론이다.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라는 말씀은 교회론 이며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구원론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신론도 기독론도 얼마나 그 범위가 넓고 그 진리가 심오한가. 그런데 목사가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해서 설교를 할 때 모든 것을 다 말하려 하면 정말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 말씀에서 한가지만 설명하고 설교하기도 사실 쉽지 않다. Reuel L. Howe는 수백 개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 성도들과의 토의를 거친 뒤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회중 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목사가 설교에 너무 많은 사상을 포함시키고 있다고 불평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많은 사상들이 너무 복잡해서 자신들의 삶과 의미 있는 연결을 시킬 수가 없다고 한다“라고 했다.
설교의 주제는 한가지만 해야 한다. 두 가지도 많고, 세 가지는 혼란하며, 네 가지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가지도 알아듣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머리가 아파 다시는 설교들을 생각을 못하게 한다.  

15. 대지와 소지가 많은 설교.
20-25분 동안 설교를 하는데 대지와 소지가 많으면 아주 혼란스러워진다. 설교하는 목사는 설교를 질서 있고 알아듣게 하기 위해 대지와 소지를 설정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설교의 대지와 소지는 원고에만 있어야 한다. 첫째, 둘째, 둘째의 첫째 소지는 ---. 이렇게 설교하면 듣는 사람은 설교 내용 보다 대지와 소지의 숫자를 세는데 신경을 쓸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할 때는 대지, 소지를 말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설교를 해서 앞뒤의 말씀과 내용이 잘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대지는 많으면 세 가지 정도로 하고 적으면 한가지만 해도 좋다. 특히 대지 가운데 소지를 나누고 그것도 모자라 소 소지를 나누어 설교를 한다면 정말 설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혼란스러울 것이며 나중에는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게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럽게 대 소지를 나눈 설교가가 있다. 그 유명한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문이 그렇다. 그러나 그 목사는 설교할 때 대지, 소지를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듣는 성도들은 그 목사의 설교 원고가 그렇게 복잡하게 나누어진 대 소지를 가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은혜를 받는다.
대. 소지를 나눌 때는 반드시 다른 색연필로 표시를 해서 설교자가 혼란을 일으키지 않게 해야 한다.  

16. 싫증이 나고, 지루하며, 재미가 없는 설교
틸리케는 “우리의 설교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닿지 않고 있으며 선명하지 못하고 지겹기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의사 소통이 안되는 중요한 원인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재미없고 지루한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설교에 염증을 내게 하며 흥미를 잃게 만든다. 그리고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바로 설교자 자신이다. 설교가 싫증 나고 재미없는 증거는 아주 쉽게 판단된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대부분 졸고 있으면 바로 그것이 재미없는 설교에 대한 무언의 질책이라고 받아 들여야 한다. 졸고 있는 성도들 깨우기 위해 종을 치고 강대 상을 칠 필요가 없다. 졸리지 않도록 설교를 하면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목사의 설교에 흥미를 잃은 이유를 찾아 개선하지 않으면 밤 낮 잠만 자야 하는 목사가 되고 말 것이다.

17. 알아듣기 어려운 설교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적인 면에서 전문적으로 공부 한 사람이다. 그럼으로 전문 지식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목사의 전문 분야인 신학을 설교에 자주 이용하는 버릇이 있다. 이런 신학을 말할 때에 목사는 아주 잘난 척하기도 한다. 듣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신학을 아느냐’라는 말투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련한 목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신학을 말하되 신학이 아닌 성경으로 풀어 말한다. 성도들도 목사에 뒤지지 않을 만큼 알 것은 다 안다. 그들이 신학교를 다니지 않았을 뿐이지 수 십년 동안 설교를 듣다 보면 신학도 알고 성경도 안다.
그런 성도들을 앞에 두고 목사가 “인죄론이라는 것은. 신론이라는 것은, 신학적인 입장에서 칼빈을 어떻고 루터는 어떠하며, 발트는 어떠하다.”라고 하면 듣는 사람 가운데 속이 뒤틀린 사람들은 “칼빈이고 루터고 발트고 좋아하시네. 빨리 끝이나 내시지”하면서 주보에 안경 쓴 목사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다.
신학 뿐 아니다. ‘무슨 무슨 적(的)’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 철학적, 과학적, 의학적, 예술적등 가급적이면(여기서 나도 그 버릇이 나온다) 적, 적, 쩍, 쩍하지 말라. 그런 전문적인 지식을 아주 평소에 말하는 일상 용어로 바꾸어 알아듣기 싶게 바꾸어 말하는 고도의 표현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용되는 전문 용어에 대한 해박하고 확실한 지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부모가 어린 자식들에게 일상적인 대화 중에 ‘무슨 무슨 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강단에 올라가기만 하면 자기가 무슨 대 학자나 된 것처럼 연신 ‘무슨 적, 어떤 적’을 찾으니 듣는 성도들은 공부를 하는 것 같아서 머리가 아프다.   

18. 말의 뜻이 분명하지 않는 설교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 내는 가장 좋은 도구다. 그리고 그 도구는 사람의 말을 통해 나타난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이는 형태의 언어가 바로 설교다. 설교는 설교자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죄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는 아주 중요한 매개체다. 그리고 설교는 말로서 이루어진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말도 있다. 몸짓으로 하는 말이 있고 음악이나 그림이나 다른 어떤 매체를 이용한 말도 있다. 그렇지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입의 말이다. 설교자의 설교도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여 이루어진다. 그런데 설교자의 말이 분명하지 않고 그 의사 전달이 확실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은혜를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 잘하기를 위해 특별한 공부가 필요하다. 옛날에는 수사학이라는 것이 있어서 말 잘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그렇다고 말 잘하기를 배우지 않고 천연적인 말투와 어투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쉴새없이 말 잘하기를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그런 학원을 찾아 가 배우고 국어 사전을 옆에 놔두고 말의 바른 사용법을 배워야 한다. 긴말을 짧고 간결하게 하는 법을 배우고 같은 말이라고 상대방에게 감동과 기쁨과 확신을 줄 수 있는 말 잘하기를 배워야 한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상대방에게 바로 전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성공의 방편이다. 그것은 목사에게도 마찬가지다.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의사를 위해 설교자는 바디 렝게쥐(Body lange)를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눈 마추기(Eye contact), 표정 관리, 손놀림, 발의 움직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한시간 동안 설교했는데 내용 구성이 잘못되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 지루해 하는 것 보다 설교하는 목사의 종잡을 수 없는 말투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 준다. 호소적인 설교,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 회개를 말하는 설교, 헌신를 말하는 설교, 사랑의 고백 설교, 위로와 치유의 설교들이 모두 한결 같은 어투로 설교된다면 그것은 이미 설교가 아니라 연설이다. 설교 가운데 논술, 전개, 사건 설명, 대화, 이야기, 베드로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에 구원을 바라는 화급한 소리, 귀신 들린 아버지의 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대에 주변 사람들의 놀라는 말들이 한결같이 같은 음성과 어휘로 되었을리는 없다. 입체적인 언어 구사법을 훈련하라. 그래서 듣는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눈을 감고 있으면 그 상황이 눈에 보이듯이 설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노력이 있어야 할까?       

19. 말하고 그 말을 해석하는 잔소리 많은 설교.
설교의 초보자들은 어떤 말을 하고 그 말을 다시 설명하는 일이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설명하는 말은 대개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한데 결국 그 아까운 20분 동안에 말하고 설명하느라 다른 말씀 전할 시간이 짧아지고 그 설명은 잔소리가 되어 버린다. 설명할 때 쓰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잔소리’ ‘다시 말하면---- 잔소리’ ‘ 이 말에 대하여 누구누구는 이런 설명을 했다----잔소리’, ‘본문에 말씀하신 이 말을 내가 생각해 보니 이런 말이다---- 잔소리’ ‘일테면----잔소리’
설명을 할 필요 없이 설명하는 말을 먼저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만 부득이 설명을 해야 하거든 아주 짧게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해야 한다. 설명이 길어지면 하나님의 우리 사랑하심도 잔소리로 듣게 되어 버린다. 그런 설교를 듣고 나가면서 성도들은 “우리 목사님은 우리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왜 그렇게 잔소리로 말하는지----졸려 혼났네”라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혼이 나가면 되겠는가?
말을 많이 해야 설교자의 의사가 잘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잔소리가 된다. 적게 말하고 강력하며 생생한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이라고 말하고 이제까지 한 설교를 다시 설명하고 계속 말하면 듣는 사람들이 짜증을 낸다.

20. 확신이 없는 말투와 불필요한 언어 사용
설교자의 확신 없는 말투는 그 정도가 참으로 심각하다. 그런 말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것입니다'와 ‘같습니다’가 있다. 조그만 신경을 쓰고 듣고 있으면 설교 중에 이런 말들이 거침없이 무수히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여야 할 것입니다’,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되는 것입니다.’, ‘기원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입니다.’
또 확신이 없는 가정법의 언어사용이 심각하다. ‘인 것 같습니다.', '싶습니다.', ’짐작됩니다.‘같은 말들이 그것이다. 언제부터서 인가 이런 말이 우리 사회에 대 유행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이 꽃은 정말 아름답다‘라고 말하지 않고 ’아름다운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의 이런 ’것입니다‘와 ’같습니다‘의 말 버릇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도저히 부합되지 않는 말들이다.  
설교자는 언제나 확신이 차고 넘쳐 한다. 여기서의 자기 확신이란 자신의 신념이나 성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을 통해 성도들에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는 확정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설교하는 중에 '---인 것 같습니다.', '---인 듯싶습니다'등의 표현을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리성을 흐리게 한다. 이런 말버릇을 가진 목사는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기도해야 주신다는 말인 듯 싶습니다.“ 또는 ”기도하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라고 한다. `---인 것 같다'는 완전한 추측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싶다' 역시 관형어 아래에 `듯' `성'들과 함께 쓰이어 추측을 나타내는 말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추측으로 전할 수가 있을까? 설교자 자신이 `이 말씀은 이 뜻이다'라는 확신이 없으면 그 메시지는 전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을 설교자가 어정쩡한 표현으로 전하면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불 확실과 혼란만 가져 올 뿐이다.
일상적인 말버릇의 잘못 보다 그 정도가 훨씬 더 심각한 목사도 있다.
‘오늘의 이 말씀을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발트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글쎄요, 이 말씀의 뜻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생각은 그 뜻이 성령님의 말씀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각자 적당히 해석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설교에 전혀 사용할 수 없는 말들이다.
설교에 사용해서는 안되는 말 가운데 ‘--라고, --라는’ 것도 있다. 이 말은 인용격 조사(따옴 자리토씨)로서 분별없이 사용할 때 그러한 폐단이 나온다 예를 들면 ‘성경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 와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항상 기뻐해야 한다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들이다. 이런 문장에 '---라고', '---라는' 등등의 인용격 조사가 사용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한다라고'는 '---한다고'로 바로잡고, '---한다라는'은 '한다는'으로 바로잡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즉 ‘성경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 와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라고 해야 한다.
이상의 경우는 거의 습관에서 울어나는 부작용이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자의 단순한 분석이나 지식의 전달보다는 좀더 광범위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인용하려 한다. 이것은 매우좋은 일이다. 그럴 때는 이상과 같은 인용격 조사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화되어서 필요 없는 곳에서까지 이러한 말들이 사용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런데 목사가 이런 세세한 언어사용 방법까지 공부하고 생각하며 사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우리 한국말의 토씨와 형용사와 접두어와 접미어의 사용이 너무 어려워 여기에 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정확한 언어 사용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듣는 사람은 잘못된 언어 사용으로 인해 이질감을 느끼게 되고 은혜를 받는데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설교자는 최소한 언어의 사용에서 이질감을 유발하지는 말아야 한다. 가급적이면 설교자는 쉬운 말을 사용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므로 단호하고 결정적인 어휘를 구사해야 한다. 그리고 문장을 짧게 해야 같은 말이라도 힘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잘 알아듣는 효과를 가져온다. 한 문장에 ‘그리고, 그러나, 그러므로,,---하였습니다 만, 같은 접두어를 계속 사용하면 설교의 진의가 흐려지고 혼란스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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