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책여행]살아가는 방법들

이덕일 (역사평론가)의 시평

好學 2009. 9. 21. 20:39

이덕일 (역사평론가)의 시평

 

1,평생 공부

출처 : 2009.3.17(화) 조선일보 34면 오피니언란(이덕일 舍廊) 521글을 인용 직접 저술

 

안중근(安重根)의사가 뤼순(旅順) 감옥에서 쓴 휘호 중에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일일불독서,  구중생형극) :는 글이 있는 것은 그가 부단한 독서가 임을 말해준다, 그의 동양 평화론은 이런 부단한 독서에사 나왔다.   그의 동양 평화론은 이런 부단한 독서에서 나왔다. 매일 꾸준한 공부가 중요 하다는 뜻의

고사성어가 (刮目相對)괄목상대 인데, 삼일괄목(三日刮目)이라고도 한다.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장수 여몽(呂蒙)을 만만 노숙(魯肅)은 무략(武酪)만 있다 고 , 여겼느데  예전의 아몽이 아니다. 라고 놀랏다.  삼국지(三國志)여몽(呂蒙 )열전은 이때 선비는 혜여진지 사흘이면 마땅히 다시 눈을 비비고 봐야 합니다. (士別三日 卽更刮目相對) 사별삼일 즉경괄목상대 라고, 답 했다고

전해 준다. 용과 돼지를 뜻하는(龍猪)용저도 꾸준한 노력을 강조하는 뜻으로 사용된다.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아들을 성남(城南)으로 보내면서 지어 준 학문을 권장하는 詩,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에서 나이 서른에 뼈대가 형성되면 하나는 용이 되고, 하나는 돼지가 된다.

(三十骨각成, 乃一龍一猪 : 삼십골격성,내일용일저)고 한데서 유래한다.

 

과거 급제를 달 속의 선녀 상아( 女常  娥 )가 계수나무 가지를 꺾어 주었다는 뜻에서 절계(折桂)라고도 한다. 진(晉)나라 극선(극詵)이 자신의 장원급제 대책문을 월계수를 꺾은 것과 비교했다는 이야기가 진서(晉書)에 나온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인데,문제는 급제후 노력하지 않는것이다.  조선 초기 문신

변계량(卞季良)은 감흥(感興)이란 詩에서.  젊어서 노력하지 않았더니, 늙어서 아는게 없네(槪壯不努力,白首而無知 : 개장불노력,백수이무지)라고 한탄했다.  이는 겸양이지만 과거 급제후 학문이 황폐해진 사람들의 숫자는 셀 수도 없다.

일본 나가사키대 출신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시모무라 오사무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교훈으로 "노력, 노력, 노력," 을 꼽았다 고 한다....중략.... 노력을 하지않아 국제 경쟁력에서 약화의 주범 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늦지는 않았다 고  고봉 기대승(奇大升)은 詩 정자중을 송별하다(送鄭子中 : 송정자중)에서 노년의 노력이 어찌 끝내 폐해지리.

(白頭努力寧終廢 : 백두노력영종폐)라고 ...........

 

 

 

2,국새(國璽)

출처 : 2009.3.19(목) 조선일보 34면 오피니언란(이덕일 舍廊) 522을 인용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았을 때 예방(禮房)승지 성삼문이 국새(國璽)를 붙들고 통곡하자 왕위를 사양하는 척 하던 수양이 고개를 들고 노려보았다고남효은(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은 전한다. 인조반정 와중에 국새가 사라져 소동이 일었는데 새벽녁에 한 군인이 후원에서 주어 바친 사건도 있었다.

국새는 언제부터 사용되였을까?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 주석은 진(秦)나라 이전에는 민간에서도 금옥(金玉)으로 인장을 만들어 사용했으나 진(秦)통일 이후에는 천자만 새(璽)라고 쓰고  신하들은 감히 사용하지 못했다 고 전한다. 진시황의 국새에 대해 사기정의(史記正義)는 최호(崔浩)의 말을 빌려 이사(李斯)가 화벽(和壁)을 갈아서 국새를 만들었는데 한(漢)나리의 여러 황제들도 대대로 전했기 때문에 적국새(傳國璽)라 한다" 고 설명했다.

秦의 승상 이사가 만든 국새의 재료였던 화벽(和壁)이 화씨벽(和氏壁)이다.

 

춘추시대 변화(卞和)는 초나라 여왕(麗王) 무왕(武王)에게 옥돌을 바쳤는데 가짜라는 이유로 두 발이 잘렸다, 한비자(韓非子)는 화씨벽은 문왕(文王)때 비로소 보옥(寶玉)으로 인정받았다고 전한다. 훗날 진(秦) 소왕(昭王)이 화벽을 가진 조왕(趙王)에게 15성(城)과 바꾸자고 제안했으나 거절해서 연성벽

(連城壁)이라고도 불린다. 진시황이 통일 후 화벽으로 국새를 만들었으니 한(漢)의 황제들도 세전(世傳)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국새를 사용 했을까? 삼국사기 고구려 신대왕(新大王)

즉위년(165년)조는 연나부(椽那部)의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차대왕을 죽이고

그 동생 백고(伯固:신대왕)를 추대할 때 재상인 좌보(左輔) 어지류(於支留)가 무릎 꿇고 국새를 바쳤다고 기록 하고 있다.  이 역사 고구려 개국 초부터 전하던 전국새(傳國璽)였다.

 

사마천은 사기 에서 고조선 황실의 후계자를 태자(太子)라고 썼으니 고조선도 국새가 있었을 것이다. 진시황은 국새에 "하늘이 명을 방았으니 수(壽:장수)하고 영창하리라(受命于天,旣壽永昌 : 수명우천,개수영창)라고 새겼으나 사후 4년만에 나라가 망했다.  황실 흥성의 비결은 화벽(和壁)으로 만든 국새가 아니라 선정(善政)이을 알 수 있다.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 일 것 이다.

 

 

 

3,춘분(春分)

출처 : 2009.3.21(토) 조선일보 34면 (이덕일 舍廊) 523을 인용

 

조선에서 옥중의 사형수가 가장 고대하던 날이 춘분(春分)이었다. 춘분부터 추분(秋分)는 만물이 성장하므로 사형집행을 유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악범의 경우는 부대시(不待時)라 해서 추분까지 기다리지 않고 사형을 집행했다. 주역(周易)은 건괘(乾卦) 원(元).형(亨).이(利).정(貞)부터 시작한다.

정이(程 臣頁)의 주역주석서인 역전(易傳)을 정전(程傳)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원(元)은 만물의 시작이고, 형(亨)은 만물의 생장이며, 이(利)는 만물의 이룸이고, 정(貞)은 만물의 완성이다 라는 설명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의 삼반관제(三班官制)에서 "식년 문.무과 방방(放榜:

과거 급제자에게 증서를 주는것)은 춘분날 해야 한다고" 라고 말했다. 만물이 성장하는 춘분날 벼슬자리를 시작하라는 상서로운 뜻이다. 다산은 경새유표

전제(田制)에서는,"전지(田地)의 역사(役事)는 모두 상강(霜降:음력 9월경)후 시작해 춘분 전에 마쳐야 하는대, 마치지 못 했으면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

고도 말했다. 춘분 날부터는 농사를 지어야 항 때이지 부역할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동지(冬至). 하지(夏至) .춘분(春分) .추분(秋分). 입춘(立春). 입하

(立夏). 입추(立秋). 입동(立冬)을 여덟 절기라는 뜻의 팔절(八節)이라 한다.

팔절에 부는 바람이 팔풍(八風)인데 몇개만 예를 들면 춘분에는 명서풍(明庶風), 추분에는 창합풍(門안에+昌창 闔風), 입하에는 청명풍(淸明風)이 분다.

중국 남조(南朝) 양(梁)의 종름(宗凜)이 지은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는 24절기를 꽃바람소식 화신풍(花信風)과 함께 전해준다.

 

절기마다 세 꽃소식이 삼심(三信)이 있는데 소한삼신(小寒三信)은 매화(梅花). 산다(山茶). 수선(水仙)이고, 춘분 삼신은 해당(海棠). 이화(梨花). 목란(木蘭)이다. 춘분 추분 날과 가장 가까운 앞뒤의 무일(戊日)에 토지 신인 사

(社)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춘사(春社)와 추사(秋社)다. 예기(禮記) 명당위(明堂位)조는 천자가 직접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춘사 때는 곡식의 생육을 빌고, 추사 때는 거둔 수확을 감사한다. 3월 20일이 춘분이고 24일이 춘사를 지내던 무진(戊辰)일이다.

 

 

4,침구(鍼灸)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우물에 들어가 죽다(入井死)'라는 항목이 있다. 여름 5, 6월에 우물 청소에 나섰다가 우물 속 깊은 곳의 숨은 기운(伏氣) 때문에 갑자기 숨이 막혀 죽는 이야기다. 이때 경련을 일으키면 배꼽 좌우측에 뜸을 뜨라는 '허방(許方)'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에서 허방(許方)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허준(許浚)과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의 허임(許任) 둘이다.

침과 뜸으로 유명했던 허임의 부친은 '광해군일기'에서 관노(官奴)라고 적고 있는 악공(樂工) 허억복(許億福)이고, 모친은 사비(私婢)였다. 임란 생활상 기록인 '쇄미록(鎖尾錄)'을 쓴 오희문(吳希文)은 임천(林川)군수 박춘무(朴春茂)의 소개로 허임을 만났다. 오희문은 "서로 인사하고 들어가서 마주 앉아 존칭을 썼는데 조금도 사양하는 빛이 없었다"면서 나중에 의녀에게서 그 부친을 알고 나서 "너무 지나치고 몹시 분하다"라고 쓰고 있다. 선조(宣祖)가 비망기(備忘記)에서 "침을 잘 놓는다고 이름을 떨친 사람"이라고 말한 허임은 2품 벼슬까지 올랐다. 임천군수 박춘무도 '선조실록'에 '임금을 진찰하고 침과 뜸을 놓아 효과가 있었다'라고 쓴 상민(常民) 출신이었다.


 

허임을 지방관에 제수하자 양사(兩司)는 출신을 문제 삼으며 극력 반대했는데 광해군은 재위 1년(1609) "하늘이 인재를 내리는데 어찌 귀천을 구분하겠는가"라며 임명을 강행했다.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 이경석(李景奭)의 부친 이유간(李惟侃)은 '우곡일기(愚谷日記)'에서 아들 이경석의 다리에 난 종기를 여러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했으나 허임만 치료했다면서 명불허득(名不虛得)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일부에서 신의(神醫)라고 부르는 구당(灸堂) 김남수(93) 옹이 침사(鍼士) 자격증만 가지고 뜸을 떴다면서 침사 자격을 정지시킨 서울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보도다. 한의학(韓醫學)의 이런 비방(秘方)을 제도권 내로 끌어들일 의료법 개정이 시급한데, 그 전에라도 이런 비방 보존에 힘쓰는 것이 행정관청 본연의 임무 중 하나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5.정약용이 쓴 묘지명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정약용이 여유당(與猶堂)이라 자호(自號)한 것은 정조 의문사 직후였다. '노자(老子)'의 "망설이면서〔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같이 주저하면서〔猶〕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정조가 급서한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예견대로 노론이 정권을 독차지하면서 정조의 24년 치세를 부정하는 폭정이 자행되었다. 막내 형 정약종은 사형당하고 다산과 함께 유배된 중형(仲兄)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죽어야 했다. 다산 홀로 18년의 유배 생활 끝에 살아남아 글을 남겼다.

그러나 노론 집권하에서 그의 글은 시대의 금기였다. 그의 글이 해금(解禁)된 것은 사후 50여 년 후인 갑신정변 이듬해(1885) 고종이 그의 글을 보고 싶다고 명한 것이 계기였다. 그러나 후손들은 고종에게 올릴 어람본(御覽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일부 글들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다산 자신의 '자찬(自撰)묘지명'과 형 정약전과 이가환·권철신·이기양오석충 등의 묘지명 등 비본(秘本)이 그것이다. 묘지명의 내용이 알려질 것을 두려워했다. 정약용은 매형 이승훈이나 형 정약종의 묘지명은 쓰지 않았다. 천주교 관계가 명백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노론의 정적 제거로 살해당했다는 생각에 묘지명을 썼다.

이가환에 대해 정약용은 "증거도 없고 감춘 것도 없는데(無證無贓) 곧바로 장살(杖殺)하고 기시(棄市:시신을 전시함)"한 것은 기축옥사(정여립의 옥사) 때도 없던 일이라고 서술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억울한 죽음임을 후세에 알리려고 묘지명을 남긴 것이다. 정조 사후 노론 일당독재도 모자라 노론 한두 가문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세도정치가 자행되면서 조선이 멸망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계 조류는 물론 조선 내부 사회발전과도 동떨어진 폐쇄정치가 자행되면서 국력은 약화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순조 11년(1811)의 서북민중항쟁(홍경래 난)이나 철종 13년(1862)의 삼남(三南) 농민항쟁(진주민란)은 이런 반역사적 폭정에 대한 민초들의 저항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가 개혁정치 시기였다는 희한한 주장이 노론 후예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다산이 이 소식을 들으면 '묘지명을 다시 감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6.여섯 유형의 벼슬아치

한(漢) 나라 유향(劉向: BC 77~BC 6)이 지은 '설원(說苑)'의 1권은 임금에 대한 군도(君道)이고 2권은 신하들에 대한 신술(臣術)이다. 그는 바른 벼슬아치를 여섯 유형으로 나누어 육정(六正), 그른 벼슬아치를 육사(六邪)로 분류했다. 서기전 1세기 때의 분류지만 군주(君主)만 국민으로 바꾸면 지금 만든 듯 생생하다. 육정 중

첫째는 어떤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알아채고 예방하는 벼슬아치로서 군주를 편안하게 하는 성신(聖臣)이다. 성신이 한둘만 있었어도 촛불시위 같은 것이 다 예방되었을 것인데, 유교사회의 성인(聖人)인 주공(周公) 같은 인물을 뜻하니 지금 정치가로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둘째는 사심 없이(虛心) 군주에게 장기적인 대책을 진언하고 성사시켜 군주를 착한 길로 이끄는 어진 양신(良臣)이다.

셋째는 새벽부터 밤까지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면서 현인(賢人)을 추천하고 옛날의 덕스런 정사(德行)를 군주에게 권하는 충신(忠臣)이다.

넷째는 성공할 일과 실패할 일을 일찍 간파해 잘못될 일을 예방하고 구제함으로써 화를 복으로 전환시켜 군주가 아무런 걱정이 없도록 하는 지신(智臣)이다.

다섯째는 법을 받들면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되 봉록(俸祿)과 하사품은 사양하고 의복과 음식을 절검(節儉)하는 정신(貞臣)이다. 봉급도 반납하고 절검하면서도 국가 예산은 아껴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벼슬아치란 뜻이다.

여섯째가 국가가 혼란에 빠졌을 때 아첨하지 않고 면전에서 군주의 잘못을 간언해 죽기를 사양하지 않아서 비록 몸은 죽어도 나라가 편안해질 수 있다면 후회하지 않는 직신(直臣)이다. 현 공직자 중에 이 여섯 유형에 하나라도 속하는 인물이 몇 명이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조선의 성종은 재위 6년(1475) 야간 경연(經筵)에서 '고려사(高麗史)'를 강독하다가 김심언(金審言:?~1018)이 고려 성종에게 육정(六正)·육사(六邪)의 내용을 담은 봉사(封事:밀봉한 상소문)를 올렸다는 사실을 알고 정부 각 관사의 청사 벽에 이를 써 붙이라고 지시했다. 지금 다시 써 붙여야 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뜻하는 말이 춘추필법(春秋筆法)이다. 공자가 춘추시대 노(魯)나라 역사서 '춘추(春秋)'에서 여러 사건들에 엄정한 비판을 가한 후 생겨난 말이다. 그러나 공자가 그런 비판을 도출하는 과정을 보면 엄격하기 그지없다. 공자는 첫째 근거가 있어야 믿는다는 족징(足徵), 또는 근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다는 무징불신(無徵不信)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 견해(opinion)는 사실(fact)의 바탕 위에서 도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7.비판적 지식인 공자
'논어' 팔일(八佾)편에서 공자는 "하(夏)나라의 예는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지만 기(杞)나라의 예는 실증하기가 부족하다. 은(殷)나라의 예는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지만 송(宋)나라는 실증하기가 부족한데,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헌이 충분하다면 내가 실증할 수 있다(夏禮, 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 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라고 말했다.

다음이 술이부작(述而不作)인데, '논어' 술이(述而)편에서 공자는 "나는 앞에서 말한 것을 뒤로 전할 따름이지 창작하지 않으며, 믿고 옛것을 좋아하니 속으로 나를 노팽에 비교한다(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고 말했다. 술(述)이란 앞사람의 말을 뒤 전하는 것을 뜻하고, 작(作)은 자신이 새로 창작하는 것을 뜻한다. 노팽은 상(商)나라 현인(賢人)으로 알려져 있지만 분명치 않다.

세 번째로 공자는 '술이'편에서 "괴이한 것, 힘, 어지러운 것,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不語怪力亂神)"는 것으로 실증할 수 없거나 자신의 인식 범위를 넘어가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논어' 옹야(雍也)편에서 공자가 "귀신을 공경하되 그것을 멀리하는 것이 지(知)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 이런 예이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정치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강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었으나 엄격한 사실 검증을 거친 후에야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우리 사회는 종종 견해가 사실을 압도한다. 견해가 앞서면 팩트는 설 자리가 없다. 그러니 대화가 곧 싸움이 된다. 상호 인정의 토대인 팩트가 무시되면 사회 통합도 설 자리가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