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이나 4 · 19혁명, 그리고 5 · 16군사정변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기독교는 대개 자책과 고발의 복잡한 종교적 변혁을 경과하였다. 민족상쟁이나 그 전환의 가혹한 파괴, 정치적 불안과 군사정치의 힘의 통치에서 교회는 역사적 사명이나 윤리적 행위에 대한 자책을 심각하게 느꼈다. 무엇인가 잘못이 우리 안에 있었다는 참회였다. 그런데 그것이 필경 고발로 연결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교회 분열이 대개 이 시점에서 진행된 소이(所以)가 바로 그것이다. 정통의 훼손, 소명(召命) 불이행, 종교적 가치 추구에서의 미완, 그런 것 때문에 저러한 격변과 참화가 왔다는 죄의식이 결국 순결 수호의 명분으로 분열에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각 교파를 망라하였던 이런 분열은 1959년 예수교 장로회의 합동파와 통합파의 분파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註1] 교회론에서 이런 일들은 부실이고 불미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한편 교세 확장의 다른 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신앙적 심각성을 주축으로 한 교세의 내실적 확장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또 그런 과정을 통하여 교회일치의 긴요성이 감지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교회일치, 곧 에큐메니칼(Ecumenical)정신은 1960년대 초기에 신 · 구 양교의 협력관계 형성의지에서 강력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註2] 1966년 3월, 서울의 기독교 장로회 초동교회에서는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신 · 구교가 합동하여 연합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968년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NCC)가 마련한 교회일치주간 행사로 시내 각 교단이 서로 강단을 교환하여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이것은 카톨릭교회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에큐메니칼 율령의 정신에 힘입은 바가 컸다. [註3] 이러한 협력정신이 마침내 1971년 부활절을 기해서 신 · 구교의 성서공동번역(신약성서)의 간행으로까지 진전되었다. 세계에서는『예루살렘 성서』이후 두번째가 되는 쾌거였다. 이러한 교회협력 기운은 신교내(新敎內) 여러 교단에 미치기 시작하였다. 감리교도 1959년 1월 '무조건 합동'하였으며, [註4]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로 분열하였던 성결교회도 1965년 7월 합동선언을 공포하였던 것이다. [註5] 신학교육에서는 대학원 수준의 연합신학교육이 WCC(세계교회협의회)의 TEF(Theological Education Fund) 기금 제공으로 연세대학교 안에 설립된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이 연합신학대학원에는 국내 유수교단의 교역자 재교육을 위한 '지도자 연구과정'을 설치하여 대대적인 고등신학교육과 에큐메니칼정신 함양에 크게 공헌하고 있는데, 1980년부터 시행하는 '하기목회자 신학세미나'로 매해 여름 두 주일간 조석으로 집중적인 신학교육과 협력의식을 높이고 있고, 한 회에 대개 국내 교파 전부가 망라된 교역자 평균 7백여명의 참여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註6] 1965년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기치를 내건 전국 교회 대거 참여의 캠페인은 시련과 분열을 겪은 한국교회의 재일치가 민족복음화의 사명에 있다는 의식으로 NCC계와 비(非)NCC계 교단들의 대거 참여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註7] 1973년 5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 그래함 초청 전도대회에는 51만여명의 신도가 참집하여 '5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란 표어를 외쳤다. [註8] 1965년 전국복음화운동의 한 연장 형태인 이 대회는 전국 교회들의 단합된 힘으로 모든 계층의 동포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민족성회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註9] 1970년 중반에서부터 교세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영락교회의 경우 1974년 세례신청교인 중 청년층이 70%, 1975년에는 73%가 20대의 젊은 층이었다. [註10] 명동성당의 경우도 90%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한 일간지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이는 젊은이들의 가치추구와 현실에 대한 긍정적 반응의 배경에는 절대자에 대한 의지와 함께 자기실존에 대한 엄격한 비판을 행하려는 태도가 역력함을 뜻하는 것이다. [註11]」
청년층은 실망과 혼란에서 희망과 기약과 미래를 선포하는 강력한 힘과 그 실천이 교회에 있다고 본 것이다. [註12] 교회는 차고 넘쳤다. 문공부 조사로서는 1976년 10월말 현재 한국 종교인구가 전인구의 76%로 2,161만명이었다. 그 중에 개신교는 465만 8,700명, 천주교가 105만 2,691명이다.『한국일보』갤럽조사로는 1980년 개신교가 15.1%, 천주교가 3.7%로, 기독교는 전인구의 18.8%에 육박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종교인구의 증가는 1970년부터 1980년까지 무려 5백만명으로 연평균 40%의 성장이었다. [註13] 교회의「대형화」,「상업화의 풍조」에 대한 비판이 없지 않았다. [註14] 교회가 '축복보급소(祝福普及所)'였다는 것이다. [註15]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그 물량적 정신이 종교심리의 틈에 차 들어 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회의 영성(靈性)은 차 있었다. 1970년대 순복음중앙교회의 놀랄만한 성장은 한국교회사의 한 장으로 특기할 만하다. 크리스찬 · 아카데미의 강원룡(姜元龍)은 1970년대 한국교회의 새로운 양상이 둘 있는데, 하나는 "거의 기적적이라고 볼 수 있는 한국교회의 급성장인데, 이것은 성령운동, 삼박자(三拍子) 축복, 안수치료(按手治療)와 축귀(逐鬼)를 통한 치병운동 등을 내용으로 하는 운동으로 요원의 불길같이 전국으로 번지고 한국인이 살고 있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게 된 일" [註16] 이라 보았다. 그것이 순복음중앙교회 조용기목사의 성령운동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민중신학'이다. 조용기의 순복음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로 부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의 삼박자 메시지이다. [註17] 그것은「요한3서」2절에 근거한 것으로 '영혼의 잘됨', '모든 일의 잘됨', '육신의 건강'이다. 이런 삼박자 축복이 실현되는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의 권능을 획득함에서 오는데 성령세례를 받으면 방언의 은사(恩賜)를 받고 또한 신유(神湘)의 권능을 얻게 된다. 이 성령 세례, 방언, 신유, 이것들이 곧 순복음교회 신앙의 푯대가 되는 것이다. [註18] 사회적으로 억압되고 완전히 무력화된 민중들 소외층들에게 이런 영적 권능과 신유의 은사는 큰 매력이요 자기확인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한 구원일 수 있었다. [註19] 그러나 이 교회의 메시지는 현실적이면서 정치적으로 탈사회적(脫社會的)인 내용을 가지고 있고, 개인구원이 강조되고 있었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이러한 신앙이 민중신학의 부성적(父性的) 성령운동과 달리 모성적 성령운동, [註20] 천년왕국설적이면서도 탈사회화시켜 사회변혁 잠재력을 거세시키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註21] 그러나 순복음교회의 사회적 메시지의 동력은 실제로 막대하였다. 그것은 성서 중심, 하나님 중심, 복음 중심, 사도교회적 운동, 성령 중심의 운동으로 그 종교적 순수성을 발전시켜 나가는 운동이라고 자평(自評)하고 그 신학적 위치를 체계화하고 있었다. [註22] 거기에 그들 메시지의 힘이 있었다. 냉혹한 부조리의 현실 속에서 시달린 민중들이 이 삼박자의 축복과 성령의 권능을 얻어 자아의 모습을 확인하여 정체의식을 가지며 공동체의식을 회복하여 준 데에 순복음중앙교회의 역사적 소임이 하나 있었다. 이 시대의 한국교회 역사는 이 교회의 발전을 무시하고서는 기록될 수 없다. 1958년 5월 12일 서대문 대조동에서 5명의 교인으로 시작한 순복음중앙교회는 1979년 현재 교인 10만 2,162명, 교역자 114명의 초대형 교회로 성장하였다. [註23] 한국교회 성장의 전반적 흐름을 상징하고 있었던 대형교회로는 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의 충현교회, 통합측의 소망교회, 영락교회, 감리교의 광림교회, 금난교회, 성결교의 중앙교회, 충무로교회 등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의 서울지역 교세확장 상황을 보면 <표 : 1962∼1979년간 서울지역 교세확장>과 같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교세변동 상황은 <표 : 1972∼1970년간 개신교 10개 교단별 교인수>, <표 : 개신교와 천주교의 교세 상황>과 같다. 그리고 서울의 교세를 살피면 <표 : 서울교세일람(1967)>, <표 : 교파별 서울 교세>와 같다. 이 기간의 교인수 급증에 대한 한 사회조사의 분석에 의하면, 첫째 불안한 정치현실 속에서 국민들은 계속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북한의 남침위협과 그 공포분위기에 시달려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註24] 둘째로는 1960년대 일기 시작한 산업화 추진의 영향으로 경제의 급성장은 이룩하였으나 반면 물가 앙등, 분배의 불균형, 권력형 금융특혜, 관 주도적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에 의한 대재벌 중점 경제구조 편성과 중소기업의 위기 등으로 생활안정감에 동요가 왔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경제성장에 따른 배금사상의 팽배, 한탕주의, 과정 생략 결과주의, 요행심리 등으로 이른바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 민심이 정의와 영생의 종교적 메시지, 특히 그 예언자적 도전에 깊은 정신적 · 심리적 공감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장로교회의 시대적 호소에 그 의미가 잡히고 있었다.
「이 시대 우리 교회와 교단의 책임과 사명이 중차대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물량적 부강한 나라가 되기 전에 선량한 나라가 되어야 하며, 정치적 군사적 국방의 대비보다 앞서 의(義)의 자유민으로서의 국민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와 세계만방의 인정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註25]」
셋째로는 보수주의계 경건주의계 교단들의 전도열의와 그들 메시지의 대국민 호소력이다. 이들은 성령 강조, 순수한 성서적 신앙에의 회귀를 강조하면서 내세와 내적 평화에 대한 복음을 외쳐 방황과 좌절, 소외와 불안의 영혼들을 인도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