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의 민주화운동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으로 총괄되는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은 1970년대에 이르러 그 절정기에 이르렀다. 한국교회는 당시 민중신학의 발생과 함께 한국 신학계에 큰 물결을 이루었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신학에 체험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그것은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그 선교의 대상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이라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세계에 증거하고, 그 나라의 평화(Sharom)를 확립한다는 것이었다. [註118] 이러한 이른바 정치신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였던 것이 1972년 12월 WCC 주재 아래 방콕에서 모였던「오늘의 구원」협의회였다. 그 주제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1.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에 항거하여 경제적 정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 안에서 구원의 사업은 행해진다.
2. 동족에 대한 정치적 압제에 항거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세우기 위한 투쟁 안에서 구원의 사업은 행해진다.
3.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결속시키는 운동 안에서 구원의 사업은 행해진다.
4. 인간의 삶에서의 절망에 항거하는 희망의 투쟁 안에서 구원의 사업은 행해진다. [註119]」
이러한 선언은 세계교회가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회의 저항에 공감 협력한다는 증거였고, 따라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관심과 주목 속에서 기독교의 예언자적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WCC계와의 협력은 대단하였다. 김종필 국무총리가 1974년 11월에 "교역자나 성직자 신분으로 남의 나라 정치문제에 관여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일탈한 행위"라고 [註120] 공박한 까닭이 이런 배경에 있었다. 실제 이런 혐의로 강제출국 명령을 받았던 선교사가 조지 · 오글(한국명 오명걸)이었다. 그는 산업선교에 종사하던 중 1974년 12월 14일 퇴거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오글목사의 직접적인 퇴거명령 발동이유는 그가 1974년 증대하는 구속자들을 위한 목요기도회에서 인혁당사건(人革迲事件)에 대한 이의 제기가 군사정부를 격동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註121] 그의 추방에 대해서 전국 도시산업선교 실무자 일동과 구속자 가족협의회는 12월 13일, 19일, 그리고 기독교 장로회 총회장 인광식이 1975년 1월 6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1974년 12월 24일 각각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박세경, 이병린, 이세준, 한승헌, 이태영 등 변호사 12명은 1975년 1월 오글목사에 대한「행정처분취소 등 청구의 소」를 서울고등법원에 제출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7월 5일 기각되었다. [註122]
이처럼 1973년의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에서의 소위 내란음모사건, 1974년 오글목사의 추방 등 긴박한 사태를 배경에 두고 NCC에는 그 기구 안에 인권위원회를 설치하고, 구속과 석방을 위한 목요기도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註123] 그 때 NCC총무 김관석(金觀錫)은 "1970년대 반유신운동을 기도회로써 시작했다는 것이 대단히 의미 깊은 일"이라 보았다. [註124]
한편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생시위가 1973년 10월부터 더욱 격렬해지기 시작하였고, 때를 같이하여 NCC 국제문제분과위원회는 1973년 11월 연구회를 가지고 그달 24일에 NCC 인권문제협의회 명의로 신앙과 인권 협의회 인권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학원에서의 인권과 여성, 노동자, 언론인의 인권을 확립한다는 사명감으로 다음과 같은 각오를 다졌던 것이다. 곧,
「우리는 세계교회와 함께 인권확립을 위해 투쟁할 것이며, 이 투쟁은 세계의 평화와 인간회복의 꿈이 실현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기까지 지속할 것을 우리는 신앙공동체로서 선언하는 바이다. [註125]」
운동의 지속 다짐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1975년 4월에 이른바 수도권빈민선교사건이 터져 NCC 총무가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당일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위원장 박형규, 실무자 권호경,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사무총장 조승혁이 추가로 연행되었다. 혐의 사실은 서독의 세계급식선교회(BFW: Bread for the World)로부터 받은 203,000마르크(시가 2,700만원)의 원조자금을 항목 외 변태지출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기금 일부가 실상 구속된 수도권 빈민 선교 실무자 가족들에게 전달되었던 것이었다. [註126] 그러나 그 사실이 일간지에는 "횡령"으로 대서특필 보도되었다.
NCC는 그것이 선교활동에 대한 사찰행위, 그리고 교회 특히 NCC에 대한 사회적 불신감 조장을 위한 방책이라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註127] 김관석은 6개월 후 풀려났다.
한국교회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케냐 · 인도네시아 · 남미 등에 대한 해외선교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국내에서는 1972년 4월 중부전선에서 3,478명의 장병(將兵)이 합동세례를 받았으며, 1973년 5월에는 여의도 광장에서 빌리 · 그래함목사 초청 전도대회가 열려 36,122명의 결신자(決信者)가 나서며, 그해 6월에는 극동방송국(아세아 방송국)이 개국되고, 광복 후 최초의 한일교회협의회가 7월에 개최되는 등, 그 급속한 성장과 발전이 일제히 추진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박정희정부는 1974년 1월 긴급조치를 발포하고 그해 8월에는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여사의 피격 서거사건이 겹쳤다.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활동이 강화된 것이 바로 이 때였다. 서울에 도시산업선교의 협의체가 구성된 것은 1968년 5월의 일이다. 그 때 도시산업선교에 종사하고 있는 인사나 기구사이에 정보교환 및 정책연구의 필요성에 따라 범교단적으로 한국도시산업선교연합회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권한 · 정하은 · 조승혁 · 오글 등이 중심이었고, 천주교의 김요한주교도 동참하였다. 이들은 오랜 사업경험과 연구 끝에 종래의 전도에만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회구원의 구조적인 문제에 파고들기로 한 것이다. [註128] 이들은 1968년부터 산업전도라는 용어 대신에 도시산업선교(UIM: Urban Industrial Mission)이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헌신적으로 섬겨야 할 그리스도가 근로대중임을 명심하고 십자가의 경험을 근로대중을 위한 행위를 통해서 경험하는 데까지 교회는 나와야 한다. [註129]」
이 운동체는 1971년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를 결성하여 빈민선교에 나섰고, 같은 해 한국산업문제협의회를 구성하였으며, 9월에는 크리스찬 사회행동협의체를 발족시켰다. [註130] 여기에는 천주교 4개 단체와 개신교계 7개 단체가 가입하고 있었다. 이것이 1975년 2월 8일에는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로 발전하였다가 1976년 9월 25일에는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로 출범되었던 것이다. 이들 선교정책은 노동현장에의 직접 관여였다. 그동안 이 협의체 운동의 실무 책임을 맡았던 감리교 목사인 조승혁은 여러 차례의 감금, 검거를 당해 왔다.
그런데 산업전도를 처음 시작하였던 예수교장로회(통합)의 도시산업선교중앙위원회는 1975년 3월 도시산업선교의 기본 자세를 다음과 같이 밝혀 그 선교방향을 천명하였다. 그 일부는 이러하였다.
「1. 우리는 노사분규가 일어났을 때 근로자의 입장을 중요시하며 기업가들의 어떤 부당한 처사로부터 근로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1. 우리는 노동조합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노동조합이 근로자의 권익을 대별하기 위해 정치나 기업주로부터 절대적인 자주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1. 우리는 경제성장에 따른 이익을 균등하게 분배함으로 이익의 편중을 방지하며,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해소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1. 우리는 도시산업사회에서 발생하는 제반 인권 유린 사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며 이의 시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1. 우리는 이것이 복음선교는 물론이려니와 반공과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는다.
1. 우리의 이러한 행동은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이 아니라 복음선교운동으로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믿는다. [註131]」
예수교장로회 산업전도나 도시산업선교가 그 과격성에서나 민중의식에서 강력하다고 할지라도 민중신학계의 민중 그리스도 동일화와 같은 것은 없었다는 것이 여기서 밝혀진다. [註132] 어쨌든 교회는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군사정부의 강력한 탄압과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하나가 교회사회운동을 공산주의 아니면 용공적 이데올로기로 매도하는 일이었다. 홍지영이란 인물이 쓴『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가 그 전거(典據)였다. 산업선교가 계급투쟁을 고취시킴으로써 민중운동을 통한 사회변혁을 역설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와 같은 이론이란 것이었다. [註133] NCC는 즉각 가맹 6개 교단장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도시산업선교 용공시(容共視)에 반발을 하고 성명서를 공표하여 도시산업선교가 다양한 선교영역의 하나일 뿐, 공산주의라고 보는 것은 왜곡이요, 탄압이라고 공박하였다. [註134]
출저:서울 6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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