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주일예배]

삭개오의 회개 (눅19:1-10) [원고]

好學 2009. 8. 9. 20:35

 

삭개오의 회개 (눅19:1-10)



회개한 죄인 삭게오를 통해서 회개하는 법을 배운다. 삭개오의 회개는 말씀에 속히 순종하는 회개였다. 즉 회개는 빠를수록 좋다. 삭개오의 회개는 주님의 말씀을 즐거이 행하는 회개였다. 즉 죄 회개로 끝나지 않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에 돌아와야 한다. 삭개오의 회개는 주님이 관심하는 곳에 자신도 관심하였다. 이처럼 우리가 서야 할 곳은 주님의 마음이 머문 곳이어야 한다. 삭개오의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갚는 일이었다. 즉 남에게 피해 주며 살았다면 이제는 남은 여생 몇 배로 갚음의 삶이 되어야 진정한 회개인 것이다.

(설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주님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삭개오입니다. 그 사람은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착취의 대명사일 만큼 사람들에 의해서 죄인으로 불리어졌습니다. 즉 세리는 = 죄인(7절)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요 착취의 수단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삭개오의 죄인 됨을 여러 면에서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7절에 사람들이 그를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비록 세리지만 평소에 잘했다면 이러한 멸시를 받았겠습니까? 그리고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세리의 우두머리입니다. 세리로서 로마에 상납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착취하지 않았다면 그 지역만큼은 세금 문화와 원성은 조금은 바꿀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부자였습니다. 이게 그의 행악된 증거입니다. 로마의 식민 치하에서 정상인으로서는 결코 부자일 수 없는 시대에 부자였다는 점 이런 여러 면에서 그의 비행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죄인 삭개오가 예수님 만나 용서 받고 하나님의 구원 받는 자녀 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죄인들의 회개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회개란 우리가 힘써야 할 부분도 있다는 점에서 그의 회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게 만듭니다. 오늘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 참 회개의 사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삭개오의 회개는 어떤 회개였을까요?

1. 말씀에 속히 순종하는 회개였습니다.

5절에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 없어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인파속에서 삭개오를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주님도 속히요 삭개오도 급히입니다. 여기 “속히” 라는 말씀과 “급히”라는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나무에 올라가 위험할 텐데 속히 내려오라고 한 것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속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중요한 기초입니다. 회개란 미루어야 할 성질이 아닙니다. 큰 죄를 지었어도 즉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징계하지 않고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미루면 미룰수록 그것은 징계감입니다. 사람도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사과를 했는데도 용서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사람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즉시 회개하면 너그러이 용서하실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엡4:26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나의 회심”이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5년 전 나는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로 받아 드렸다. 그러자 나의 생애가 바뀌었다. 이전에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오히려 이전에 바라지 않던 것을 바라게 되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이 좋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전에 재미있던 것이 재미없어 지고 말았다. 전에 대수롭지 않던 것들이 중요하여 졌다. 인생관과 가치관이 달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진실로 속히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의 말씀에 즐거이 행하는 회개였습니다.

6절에 “즐거워하며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밖에서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비난하며 험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데 삭개오는 즐겁고 기쁨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 박해가 삭개오에 때문에 온 박해라는 점에서 죄인은 예수도 맘대로 못 믿겠구나 하는 자괴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이처럼 참 회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피하는 정도로는 반쪽 회개도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반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에 즐거워함입니다. 그래서 요리문답에도 죄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거나 그 뜻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순종에 부족한 부분까지 고쳐야 합니다. 신학적으로도 회개란 용어의 '메타노니아'가 죄를 뉘우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완전히 돌아서는 것까지를 의미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1편에도 역시 양면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러면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고 나아가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기쁨에 넘치는 자원함의 순종을 말씀하셨습니다. 마5:39-44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는 죽이지만 않아도 큰 아량을 베푼 것인데 사랑하고 축복까지 하라니 하나님의 뜻에 즐거운 마음이 아니고 어찌 이 말씀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중국의 어느 성도는 농번기에 자기 논의 물을 빼간 아랫논 주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화가 나도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넘치던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랫논부터 물을 채우라고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대로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평안의 임재가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이 실화를 통해서 우리의 회개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3. 주님이 관심하는 것에 관심하는 회개였습니다.

8절에 보면 삭개오가 물질을 드립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식민 치하에서 너무도 가난했습니다. 유대를 정복한 로마 군인들도 피복이 부족하여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다면 당시 유대인들의 빈곤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부자 아닙니까?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었습니다. 여기 절반이란 분량으로 볼 때 아깝지 않는 분량입니다. 왕들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장담할 때는 마음이 다 팔렸을 때 하는 소립니다. 이처럼 주님이 관심하는 것을 나도 관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드리되 “서서” 그랬습니다. 아주 중요한 행동인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서야 할 위치를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불쌍한 이웃과 함께 하는 그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주님이 서신 자리요 우리들이 서야 할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서지 않고 나의 안일만 추구한다면 아직 주님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한 참 회개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웃을 사랑함이 곧 하나님을 사랑함이 됩니다. 나 혼자 선하게만 살겠다는 것은 결코 선이 아닙니다. 주님의 관심 따라 이웃과 더불어 살려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나라에 훌륭한 명의가 많았는데 그들은 출세하는 것보다 의사가 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의사는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심정을 안다면 우리는 주님의 관심이 머물러 있는 그 현장에 서 있어야 합니다. 가진 것이 있든지 없든지 프랜시스와 같이 고통 받는 자와 고락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관심 자리까지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4. 그는 자신의 잘못을 갚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다시 8절에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했습니다. 본래 모세 율법은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원금과 함께 5분의 1을 더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자만 쳐서 더 주면 됩니다. 그러나 출 22장을 보면 공적으로 도적으로 인정이 되었을 때는 원금의 2배나 4배를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4배를 갚겠다는 것은 철저한 그의 회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범죄했을 때 진실로 인정하고 회개하면 용서 받지만 회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않도록 해야 할 뿐 아니라 남을 괴롭혔거나 무관심했다면 그것을 회개하여 봉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갚을 것은 당사자에게 이자 쳐서 갚으시고 갚을 대상이 없다면 불특정 고난 받는 다수에게 봉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단에 속해서 많은 사람을 어그러진 길로 가게 했다면 이제는 그들을 구원해 내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변화된 모습입니다. 이것이 4배로 갚는 생활입니다. 여기 4배란 꼭 숫자적인 4배라기 보다 가장 큰 피해를 준 죄인이라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선을 행하지만 교만할 수 없어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의 모습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갚음의 삶에 하나님의 상이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상 주실 일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상을 주셔요.

이 시대의 신앙작가 김성일 씨의 [성경과의 만남]이라는 책에서 “지난날의 고통은 죄의 값이라 하더라도 이제 세상의 과거를 청산하고 홍해를 건너 왔는데 계속 되는 저주의 재난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율법에서 죄의 갚을 갚는 부분을 깨닫고 금요일만 되면 병원을 찾아 환자들에게 성경과 과일을 나누어 주며 베풀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삶은 변화를 거듭하여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 값을 갚으셨지만 내가 피해를 준 대상들에 대해서는 이제는 갚아가며 살아야 합니다. 그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도 역시 피해를 준 것이니 이웃을 위해 갚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느 수준의 회개에 계십니까? 죄인 삭개오가 회개한 것처럼 속히 회개하십시다. 다시는 범죄하지 마십시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십시다. 주님의 관심에 마음을 주고 봉사하십시다. 그리고 일생 갚음의 삶을 실천하는 사랑하는 회개의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