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조직신학組織神學]

[펌] 무엇이 선교인가?

好學 2009. 7. 18. 21:54

 

무엇이 선교인가?



  예수님의 제자 중에
빌립과 나다나엘은 같은 고향 친구였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이었던 어느 날, 빌립이 헐레벌떡 나다나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오늘 내가 우리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던 그 메시아를 만났다네. 그분이 누군지 자네는 아는가? 이름을 예수라고 하더군. 나사렛의 유명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네."

  나다나엘은 빌립의 갑작스러운 말을 듣고 처음에는 약간 당황(唐慌)했다. 다른 한편으로 친구가 측은(惻隱)하고 가련(可憐)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조용히 웃음 띤 얼굴로 빌립을 바라보며, "이 사람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단 말인가? 정신차리게나."라고 위로하듯이 말했다.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이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기가 방금 만났던 예수는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예언했던 메시아가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여러 말이 필요없었다. 단순하게 "아, 이 사람! 아무 말 말게. 무조건 나를 따라 와 보게."라고 강권(强勸)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을 뿌리칠 수 없었다. 빌립의 말은 너무 진지(眞摯)했고, 어린시절부터 아주 가까웠던 친구였기에 더욱 그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나다나엘은 마지못해 빌립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렇지만 나다나엘은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나사렛에서는 도저히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다나엘을 가리켜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의아(疑訝)하게 여겨져서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고 곧바로 예수님께 엎드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다. 처음 만나본 예수님이다. 그런 예수님께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함으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다.

  나다나엘은 갈릴리 나사렛의 유명한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메시아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다. 오랜 친구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따라가서 만난 예수가 메시아라니....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그런데 나다니엘은 예수님을 만나 이야기 몇 마디를 나누자마자 그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이 터져나왔다. 이는 빌립도, 나다나엘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빌립과 나다나엘은 어려서부터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마음을 나누며,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고 아끼며 사랑하는 친구였다. 그래서 나다나엘의 상식으로는 빌립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친구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함께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친구따라 왔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그곳에서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났다. 그가 만난 예수님은 분명 이스라엘의 임금 곧 메시아였다. 정말 감격스러웠다.

  만일 빌립과 나다나엘 사이가 단순하고 평범한 관계였다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고 강권하는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도 분명하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 즉 메시아는 절대로 나올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찌 단순한 관계를 가진 이의 강권하는 말을 무조건 따를 수 있으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이 참 어수선하다. 내일이라도 당장 주님이 재림하실 것만 같다. 지금 지구촌 방방곡곡(坊坊曲曲)에서는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된 징조(徵兆)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과 재난, 사건과 사고가 헤아릴 수 없는 많이 일어나 이런 소식들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다. 미루어보건대 틀림없이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이 확실해지고 있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여러 가지 자료들을 찾는 중에 종종 아주 특별한 글을 접한다. '주님이 빨리 오시게 하려면 세계복음화(世界福音化)를 서둘러 달성
(達成)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일면 아주 그럴 듯하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증거되면 다시 오마고 약속하신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실 것이니, 세계복음화를 위한 기간을 빨리 단축(短縮)시키려면 서둘러 선교해야 한다는 말이 제법 그럴 듯하게 들린다.

  정말 그럴까? 서둘러 선교한다고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재촉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그래서 위험을 무릎쓰고 공격적
(攻擊的) 선교를 무리하게 감행(敢行)한다. 일사각오(一死覺悟)의 거룩한 결심(?)과 함께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저돌적(猪突的)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행위는 실상 주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는 경우가 왕왕(往往) 있는 듯이 보여지고, 느껴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잠잠
(潛潛)히 기다리지 못하는 것일까? 왜 하나님을 채근하여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려고 안달복달하는 듯이 여겨지는 것일까? 과연 저들이 절치부심(切齒腐心)하는 일들을 가르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혹여(或如)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을 대신(代身)이라도 할 듯한 기세(氣勢)로 자칫 하나님의 일을 월권(越權)하는 어리석음을 범(犯)하는 것은 아닐까?

  선교란 무엇인가? 특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교는 무엇인가? '선교'란 '복음을 전하여 널리 퍼트리는 것'이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이를 다른 말로 보충하여 설명한다면 '복음을 증거(
證據)하는 것' '복음의 증인(證人)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증거'란 '어떤 사건이나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根據)'요, '증인'이란 '어떤 사실을 증명(證明)하거나 증언(證言)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증명한다'는 것은 '증거를 들어서 어떤 사건이나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 또는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증언이란 '어떤 사건이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말로써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란 무엇인가를 증명하고 증언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선교를 위해 증명하고 증언해야 할 무엇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누가 그것을 증명하고 증언할 것인가?

  선교의 핵심(核心)은 복음(福音)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도에 대한 믿음이다. 그 믿음은 학습(學習)이나 훈련(訓練)으로 배양(培養)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체험(體驗)에 근거한다. 증인이 되어 무엇을 증명하거나 증언한다는 것, 그것은 항상 체험에 근거해야 한다. 학습이나 훈련을 통한 이론의 정립은 불확실하다. 그것은 언제가 다른 이론으로 변화(變化)될 수 있다. 그러나 체험은 결코 변화하지 않는다.

  복음의 체험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만남의 사실에 근거한다. 빌립이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에 그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는 확실한 체험을 했다. 그 체험이 나다나엘을 강권하여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함께 올 수 있게 했다. 체험하지 않은 복음은 살아 있는 복음이 아니다. 살아 있는 복음만이 증명되고 증언되어 선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 이론이나 논리가 아닌 실체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선교는 이루어진다.

  체험에 대하여 오해(誤解)하지 말라. 체험은 신부주의(神秘主義)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니다. 복음은 분명 신비(神秘)한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격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신비라는 점을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선교를 위한 체험은 비인격적인 신비주의의 신비가 아니라, 이미 계시된 성경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본 체험이 있는가? 그렇다면 직접 체험한 예수님을 친구에게 강권하라. 어찌 여러 말이 필요하랴. 복음은 단순(單純)한 것이다. 선교란 단순한 복음을 단순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학습과 훈련을 통해 배운 논리적인 이론에 근거하지 않고, 말씀을 통한 영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믿어지는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 선교다. 이 복음은 때때로 강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강권하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所重)하게 여겨라. 마음과 마음이 서로 소통(疏通)하게 하라.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과 서로 마음을 소통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라. 상대방과 눈높이를 맞춰라. 결코 상대방에 비해 자신이 우월(優越)하다고 여기거나 열등(劣等)하게 여기지 말라. 서로의 어깨를 나란히 하여, 눈과 눈이 마주치고, 입과 귀를 가깝게 하라. 그래야 서로가 말이 소통되고, 말이 소통되어야 마음이 소통될 수 있는 일이다.

  선교는 말의 소통으로부터 시작된다. 말의 소통은 마음의 소통에서 이루어지고, 마음의 소통은 좋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좋은 관계가 유지될 때, 자기가 체험한 복음을 상대방에게 강권할 수 있다. 빌립이 자기가 만난 예수를 나다나엘에게 강권하여 메시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하듯이 해야 한다. 참으로 이런 일들이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불길같이 일어나길 소망하며 기도한다. 내가 체험한 예수님을 증거하는 선교의 역사가!


  2009. 7. 12 (주일)


  
글/ 불꽃 石一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