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중세敎會史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好學 2009. 6. 11. 10:52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Ⅰ.서  론
 
 
1. 연구의 목적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계의 언론이 지적한 바와같이 세계적인 사건이요. 역사적인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말할 때 루터의 종교개혁만을 이야기한다면 종교개혁의 참된 이해를 할 수는 없다. 물론 16세기에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제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외에도 우리가 주목할만한 종교개혁이 있으니, 그것은 칼빈의 종교개혁이요,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이다. 또한 각처에서 발생한 뮌쳐 등의 소종파 그룹의 좌경화 종교개혁을 들 수 있다. 이들 모두를 이해할 때 종교개혁의 전체적인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진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을 지양하고 스위스에서 루터와 비슷한 시기에 종교개혁을 일으켰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루터나 칼빈보다는 소외되어온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연구함으로 종교개혁의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한다.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뮌쳐 등의 소규모 종교개혁 운동에 대한 연구를 병행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일을 기약하며 본고에서는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추구하기로 한다.
 
2. 연구의 방법과 범위
 위에서 언급한 연구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본 고는 다음과 같은 연구 방법을 택한다.
 첫째, 그 전체적인 서술은 쯔빙글리의 신학적 논점을 택하지 않고 그의 생애와 사상을 전반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쯔빙글리에 대한 이해에 접근하고자 한다.
 둘째,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 범위는 먼저 종교개혁의 배경을 조명함으로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이전과 유럽의 종교개혁, 특히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살펴보고, 쯔빙글리의 생애와 사상을, 그리고 그의 신학을 중심으로 서술하여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이해하기로한다. 특히 결론에서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하기로 한다.
 
 
Ⅱ. 쯔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1. 시대적 배경
  
1). 다양한 종교개혁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독일에서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이 종교개혁은 1517년의 95개조항 공포를 발화점으로하여 인쇄술의 힘을 입어 급속히 유럽에 확산되어 1520년대 이르러서는 성공이 확실시 되었다. 다음은 스위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취리히의 쯔빙글리(Zwingli), 그 밖에 스트라스 부르그의 부쳐(Bucer), 제네바의 칼빈(Calvin) 등 소위 개혁교회의 종교개혁이 있었다. 이들 역시 루터의 복음 이해와 루터의 복음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름의 신학 특징은 교회정치와 예배의식, 성화의 강조, 기록된 말씀과 하나님의 주권 강조, 교회와 국가의 독립 등을 보여주었다. 또 한부류의 빼놓을 수 없는 종교개혁은 소종파 개혁 움직임으로 루터가 종교개혁을 중단하고 발트부르크 성에 피신하여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을 하는 동안 비텐베르그에서는 쯔비가우(Zwickau)형제들과 칼슈타트(Karltadt)가 보다 과격하게 카톨릭 교회를 개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 1525년경 농민들의 지도자로 등장하여 혁명적 개혁을 부르짖던 뮌쳐,뎅크(Denck), 슈벵크펠트(Schwenckfeld), 프랑크(Franck)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기록된 성서 말씀이나 기성의 모든 제도와 기록으로 남은 모든 전승을 거부하고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서 들리는 영혼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특히 스위스 취리히에서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국가 공직자들과 야합으로 표현될 수있었고, 유아세례를 통하여 기독교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비난하고 출발한 그레벨(Grebel), 만쯔(Manz), 스타우록(Staurock), 허브마이어(Hubmajer) 등의 재세례파 계통의 종교개혁도 있었으며, 이 전통이 화란으로 올라가 메노나이트 전통을 형성하였다. 
   
2). 종교개혁의 여명
이러한 종교개혁들을 당시의 갑작스런 한 사건으로 치부하려는 유혹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인류의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 그렇듯이 종교개혁의 배후에는 말틴루터가 비텐베르그 정문 앞에 95개항의 조건을 내어 달기 훨씬 전에 이미 그 기운은 싹텄다. 16세기는 종교개혁을 위해 준비된 사실들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교황청의 부패, 수도원의 금욕생활, 스콜라 철학의 쇠퇴, 신비주의 대두, 새로운 학문의 부흥 ,희랍어 신약성서의 출판, 자유사상의 대두를 들 수 있고 이들은 종교개혁을 위한 준비 뿐만이 아니라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있끄는 데도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특히 르네상스는 16세기 종교개혁을 위한 강력한 뒷받침이 되었다. 르네상스는 학문의 부흥은 물론 과학과 철학, 교육, 예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쳤으며 종교에는 막대한 영향을 가져왔다.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1484-1531)의 시대는 독일과 스위스를 중심으로 개혁운동이 퍼져나가던 시기였다. 이 운동은 전유럽으로 확장되어 나갔고, 유럽은 혼란과 고통의 와중에서도 신음하고 있을 때 로마카톨릭은 부패가 극에 달래 온전한 사명을 감당치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16세기에 걸쳐 일어난 르네상스의 여파는 종교개혁에 큰 박차를 가하였다. 특히 르네상스의 여파로 휴머니즘의 영향이 강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타난 기독교 인문주의 학자들은 성서본문과 교회 교부들의 저서를 연구하는데 깊은 관심을 갖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에라스무스는 대표적 인문주의자로, 북부의 경건주의 전통과 이태리 르네상스의 학문을 종합시킨 가장 적절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더 정확하고 기본적인 성서 본문을 찾는데 힘씀으로 종교개혁을 위하여 위대한 공헌을 남겼다.
 이러한 사상은 종교개혁을 위한 뒷받침이 되었고, 말씀에의 복귀, 인간 가치의 재발견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이 사상은 개혁을 위해 숨져간 존 위클리프(Wycliffe)와 후스(Huss)의 신앙과 더불어 종교개혁의 여명을 형성하였다.
  
3). 유럽에서의 종교개혁
유럽의 종교개혁에서 루터를 제외시킬 수는 없다. 1517년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거대한 혁명의 거보를 내 디딘 해 였다. 천년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절대주의 끝에서 영적 문제 뿐만아니라 세속적인 문제까지도 좌우되어 왔고 교회 밖에서는 생존자체가 불가능하던 중세말엽에 종교부흥운동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 당시야 말로 종교의 암흑시대로 종교부흥의 필요성이 가장 중대한 시기였다. 이때 루터는 그 시작을 95개 논제에서 출발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기독교 재발견 운동이었으며, 하나의 신학운동이기도 했다. 교회는 긴역사를 통하여 만들어진 가지 가지의 전설과 사람이 만들어 낸 학설과 교훈을 따라 외형적 장식에 치중했다. 결국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로마교황의 교서와 명령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자 종교개혁은 발생한 것이다. 또 종교개혁은 잃었던 성서를 발견하였고 하나님의 은총에 관해 다시금 강조하며, 우리들로 하여금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종교개혁이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칼쉬타트와 쯔빌링을 중심으로한 과격주의의 행동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난관에 봉착하는 원인이 되었다. 루터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고 그들에 반대했다. 그 결과 자체내의 분열은 시작되었다. 그 첫 분열은 에라스무스를 중심한 인문주의자들과의 절교였고, 칼쉬타트, 뮌쪄등의 과격주의자들과의 분리였다. 루터는 이들을 광신자라하여 극렬반대하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농민 반란으로 인한 제3분리였다. 독일 농민은 오랫동안 불안과 곤궁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여 이웃 스위스의 나은 생활을 부러워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계속하여 카톨릭의 다수파와 역사적인 루터파와의 관계는 적대관계로 치달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단순히 사도적 상황으로의 복귀로만 특징지우는 것은 잘못이다.그것은 기독교 교리의 한걸음 전진한 발전이다. 따라서 유럽의 종교개혁이 발생할 중세기에는 단연 교리적 발전의 첫 단계였다. 15세기의 여러 개혁회의의 목표는 교황청으로부터 모든 교회에 이르기 까지 전반적 개혁이었던 반면 루터에 이르러서는 비판의 방향이 단연 교리적 근거로 향하여지게 되었다. 또 중세기는 영적 관심과 세속적인 관심의 끊임없는 결합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는 시대로 르네상스나 순리주의, 인문주의는 모두 낡은 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에 영합할 만한 내적인 힘을 갖지 못하였던 반면에 새로운 발전은 루터에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에 의존하였다. 그 주된 특징이라면 구원론에 관한 논의라고 하겠다.
  이상에서 나타난 바와같이 종교개혁은 말씀에서 떠나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에 중점을 두려는 노력에 대해서 소수의 무리들이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하여 진리 중심의 생활을 하려고 하는 운동이 바로 유럽의 종교개혁이라고 할수 있다.
  
4). 스위스의 종교개혁
  루터가 비텐베르그에서 그의 활동을 계속하는 동안 스위스의 취리히에는 또 다른 개혁작업의 시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사람은 성경이 그리스도인 지식의 유일한 근원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그리고 둘다 의인의 교리를 받아들였고 ,만인제사장을 받아들였다.그러나 그 둘 사이의 불협화음은 넓어지기 시작했다. 스위스에서 쯔빙글리의 최대목표는 성경적 신앙과 생활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면에 있어서는 루터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루터는 성경에 상치되는 한 모든 구체적인 보장 없는 일체의 관습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참된 개혁운동은 기독교인에게는 성서만이 유일한 권위로서의 구속력을 가진다는 관심에서 싹튼 것이었다.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궁극적 권위는 기독교공동체에 있으며, 그 권위는 성서에 입각하여  시행하는 정당하게 조직된 민간 정부에 의하여 수행된다고 믿었다. 즉 성서가 명령하는 제도에 대한 그의 태도는 루터보다 훨씬 과격한 편이었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원인으로 스위스 연방제도를 들수 있다. 중세후기 스위스의 발전은 연방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쯔빙글리는 스스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스위스에 선포한 스위스인이라고 여겼으며 연방이 "조국"이라고 여기는 삶에 대한 일반적 태도를 반영해 보여준다. 13개 자치주 가운데 하나인 취리히는 연방내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연방의 결점은, 취리히가 프랑스에 우호적인 외교정책을 버리고 교황에 기대거나, 정치경제의 후퇴, 시정부의 간섭 등은 성직자들과 교회기관들의 예외적인 신분이나 위치를 제한하기에 이르렀고, 교회 내부의 문제조차 이 간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스위스의 인문주의 또한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쳤다. "참된 인간"을 추구했던 에라스무스의 보편적 인문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스위스의 민족주의적 애국적 인문주의는 조국의 갱신을 지향했다. 개혁에 있어서 이러한 노력은 한편으로는 좀 더 협소했다. 이러한 노력이 스위스적 배경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좀 더 광범위했다. 스위스 인문주의자들은 개인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쯔빙글리 자신의 개혁 목표들 역시 지속적으로 이러한 인문주의적 이상들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2. 쯔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쯔빙글리의 삶과 사역에 대한 소개에 있어서의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쯔빙글리는 스위스에서의 종교개혁 제1세기를 지배하였을 뿐만아니라 그는 또한 남부 및 서부 독일의 개혁자들에게 의미있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 중 마틴 부쳐는 가장 중요하다. 쯔윙글리와 그의 생도들의 영향은 네덜란드 신학에서 그리고 영국 국교회 조직 속에서도 엿볼 수 가 있다. 그의 활동은 독일 및 그 시대의 국제정치에 까지 확장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리히 이전 그가 무엇을 공부했는지 그에게 영향을 끼친 원생들은 누구인지, 그가 쓴 몇 안되는 자료들을 가지고는 쯔빙글리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루터나 칼빈처럼 대작을 남기지 못했고 많은 문서를 남겼으나 그의 글은 시적 영감들이 흐르고 있지만 학문적 깊이가 결여되어있다는 평을 받는다.
  게불러는 그의 생애를 두 시기로 구분한다. 첫째는 청소년기, 학생시절, 그리고 글라루스 산간지역과 순례지인 마리아 아인지텔른에서 12년동안의 목회생활들 취리히 이전시기, 둘째는 취리히에서의 시기로 나눈다.  
  
1). 쯔빙글리의 성장
  성장은 주로 취리히 이전시대에 속해 있으나 이 시대의 쯔빙글리를 다루는 자료는 극히 빈약하다. 교육에 관한 피상적인 자료를 빼면 그가 교육받고 형성되었던 전 과정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다.
  울리히 쯔빙글리는 스위스 동부에 토겐부르그의 빌트화우스에서 1484년 1월 1일 태어났다. 그는 바젤과 비엔나의 대학들에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후에 성직을 임명받고 글라루스에 목사로 임명받아 목회를 시작했다. 글라루스에서의 10년동안 그는 계속해서 인문주의적 탐구를 했으며, 그의 우상인 에라스무스와 더불어 관계를 가졌다.
 1518년 후반 쯔빙글리는 취리히 대성당의 시민사제직에 선택되었다. 그의 신학적 능력과 인문주의자이며, 에라스무스적인 개혁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고되었다. 1591년 1월 1일부터 쯔빙글리는 마태복음 강해부터 시작했다. 이것은 특정 주일의 복음서 일과표에 기초하여 설교하던 당시의 관례를 깨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사도행전, 디모데전서 등을 강해했다.
  1520년 이후 쯔빙글리는 에라스무스적 사상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쯔빙글리 자신의 신학적 틀을 보여주는 새로운 개념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루터가 쯔빙글리의 "개혁에로의 전향"에 결정적 역활을 했다는 주장과 대조적으로 루터의 신학은 쯔빙글리의 발달에 있어서 단지 주변적인 역활밖에 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다. 문제는 그와함께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게 된다. 종교개혁시대에 인문주의적 이념들로부터 이탈하는 데 어거스틴이 큰 영향력을 끼쳤다.
  1520년 말에 그는 교황수당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그리고 이러한 용병으로의 봉사를 장려하였던 그의 이전 친구요 후원자인 추기경 쉬너를 공격함으로 그의 결별은 1521년 표면화 되었다. 그의 설교들을 통해 쯔윙글리는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준비하였고, 1522년 이후 그것을 도입해 들였다.
  
2). 쯔빙글리의 개혁
  에라스무스의 기독교인문주의에서 개혁자 진영으로 쯔빙글리를 인도한 발전의 열매들은 1522년에 명백히 나타난다. 그해 초 취리히 성직자 쯔빙글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소세지를 먹은 인쇄업자 프로샤유어를 변호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개혁 첫번째 저작「음식물의 선택과 자유에 대하여」에서 금식과 관계된 교회법의 불법적 성격을 확신하게 된다. 또한 교회의 독신제도가 성경적 기초를 갖지 않음에 대해 알게 됐다. 그리하여 1522년 은밀하게 과부와 결혼하고, 콘스탄스 주교인 호헤란덴베르크에게 11명의 동료들이 서명한 청원서를 보내 사제들의 결혼 자유권을 요구했다. 결국 1522년 여름「 처음과 나중을 옹호함」을 출판 하였는데 이책에서 그는 취리히 참사회를 시켜 "무질서"를 막아내기 위해 자신을 부른 주교의 교서를 거부하고, 오직 유일한 권위인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겠다고 선포했다.
  같은 해 11월 쯔빙글리는 취리히 대성당의 사제직을 사임하였다. 1523년 1월 29일 6백명의 청중들 앞에서 최초의 공개적인 카톡릭 교회 논박이 행하여졌다. 이 논쟁에 대비해서 쯔빙글리는 토론의 기초로 사용하게 될 67개 논제를 작성했다. 여기에서 쯔빙글리는 그의 종교개혁 프로그램 및 그 신학적 전제들, 그리고 그 프로그램에서 형성될 실제적 결과들을 제시하였다. 이 67개 결의는 루터의 95개 조항과 비교되기도 하나 쯔빙글리는 신앙이 말씀의 중재 없이 성령의 직접적 주입으로 인간에게 생겨난다고 가르친 일종의 영성주의적 색체를 가진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어 구분된다. 한편 쯔빙글리는 65개 결의를 발표한지 몇달 뒤에 광범위한 「결의들 또는 신조들의 주석 및 증명」을 출판했다.
  시의회도 합세하여 67개 결의를 위반할 경우 혹심한 처벌을 내린다는 경고를 내리고 모든 성직자가 성서에 일치하여 쯔빙글리의 교훈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명령했다. 1523년 가을 대성당 소속 수도회는 종교개혁에 착수했고 10월 26-28일에는 제2차 토론이 화상들과 미사를 폐지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1524년 가울 취리히 수도원들이 해산되었고 1525년 5월에는 결혼법령이 공포되었다. 이러한 급속한 추진은 독일의 종교개혁과 비교할 때 두드러진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그는 다수의 설교자들과 시민들의 지지를 받게되었다. 종교개혁이 도입된 이후 쯔빙글리는 정부를 장악하게 되었고, 반면에 적대자들과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그의 이러한 개혁운동은 제네바의 칼빈 통치를 위한 길을 예비해 주었고 이런 식으로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으로 연결되게 되었다.
  
3). 쯔빙글리의 특성
  쯔빙글리를 루터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는 루터가 겪었던 영적 시련(Anfechtung)을 겪지않았다. 그들은 기질과 정신적 유형과 수련이 전혀 다른 대조적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개성은 동일한 표준으로 측정될 수 없다. 그럼에도 비교해야 한다면 그의 종교적 정치적 활동에 있어서는 사보나롤라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일부 기본적인 철학적-신학적 원리에 있어서는 칼빈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특성을 5가지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첫째, 쯔빙글리는 인문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다. 그의 인문주의적 철학적 개념은 그의 체계적 저작들을 통해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루터의 이해가 주로 그의 종교적 체헙에 근거를 두고 있는 반면에 쯔빙글리의 성서이해는 주로 그의 인문주의적 수련에 근거를 두고 있다.
  둘째, 쯔빙글리의 개혁범위는 루터보다 광범위했다.그는 국가와 정부까지도 그의 개혁활동의 범위에 포함시켰고 신권정치의 이상을 따랐다. 루터와는 달리 국가와 교회의 통일을 옹호했던 것이다. 루터는 복음이 세속적 무기를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 반면 쯔빙글리는 1531년 카멜의 싸움터에서 군복을 입은채 쓰러졌다.
  셋째, 루터의 사상에서 쯔빙글리가 영향을 받았는가? 의 문제로 앞에 언급한 바 있다. 쯔빙글리는 자기가 루터와는 상관없는 독자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신학 전반에 루터의 사상이 깊숙히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특히 그의 성서 해석에 있어서 시종 그를 인도해 준 것은 루터의 사상이었다.
  넷째, 쯔빙글리의 종교적 입장에 있어서 루터의 경우와는 달리 그의 종교적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운동의 추진력이 된것은 그의 신개념, 예정론, 교회개념, 구원론 등에 표현된 바와 같이 종교적 사상이 었다고 말할 수 있다.그는 단지 신학적 체계를 세우는 데 루터와 달랐던 것이었다.
  다섯째, 종교개혁에 있어서 쯔빙글리가 차지하는 의의는 무엇인가? 쯔빙글리는 루터와 달리 영도적 위치에 있지 못했다. 쯔빙글리는 독자적인 신학자요 사상가로 자처하였다. 문서적 공헌도 칼빈, 루터와 비교될 수 없다. 그의 저작에는 시적 영감이 흐르고 있으나 학문적 깊이는 결여되어있음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최근에 와서 자유주의적 역사가들은 쯔빙글리를 개혁자들 중에서 근대주의적 관념을 가진 선구적 인물이었다고 찬양하였다. 그러한 특징으로는 진리의 표준으로 합리성을 강조함이라거나 현세적인 일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을 들 수 있다.종교개혁자 루터와의 비교는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여기 소개할 수는 없다.
 
3. 쯔빙글리의 신학 
  
1). 신관
  쯔빙글리의 신학에서 근본적인 출발점은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들 사이의 절대적인 구별이다. 1523년 7월 쯔빙글리는 67개 조항 해설에서 피조물보다는 창조주를 택했다. 그는 신 중심적이었다. 하나님이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교리는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 신학의 상식이라하더라도 그에게 있어서 인류의 커다란 죄는 하나님의 유일한 것을 피조물에게 돌리는 우상숭배이다. 쯔빙글리의 경우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우상숭배로부터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의 운동이었다. 인간의 존재는 우리가 피조물인 한 오직 하나님의 재량으로 그리고 그 분의 선의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에 의하여 모든 만물을 있게하고 다스리는 제1동인이요. 절대적 원인으로서 루터와 같이 창조와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의 거대한 사견들만이 아니라 생활의 사소한 일에도 역시 관련되어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섭리는 삶의 선하고 즐거운 측면들만 아니라 역시 어둡과 고통스러운 부분도 다스린다.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쯔빙글리의 가장 자세한 서술은 1529년 10월에 열렸다. 발부르그회의에서 설교를 통해 나타났고 그것은 그 후에 철학적인 논문인 "섭리론"속에 개정되었다. 여기서 그는 신적인 섭리와 인간 구원의 문제를 가장 밀접한 방식으로 조화시켰다.
  이와같이 쯔빙글리 사상적 체계의 핵심은 하나님에 관한 교리였고, 그의 사상적 체계 전쳬의 출발점을 이루었다. 또한 쯔빙글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건드리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쯔빙글리는 로마교회의 이교적인 성해(聖骸)숭배와 성상숭배에 대한 환멸로 인하여 이러한 입장에 이르게 되었고 그의 반발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그의 모든 사상의 중심으로 삼게 만들었던 것이다.
  
2). 성경관
  성경은 쯔빙글리 종교개혁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 사실은 종교개혁 과정에서 있었던 네가지 중대한 계기에서 발견되는데, 첫째는 성경원리에 대한 자신의 결정적 회심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깨달음이며, 둘째는 1519년 1월 1일 취리히 대성당 강단에 들어갔을 때 시작한 급격한 새 형태의 설교였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설교했고 성경이 직접 그 회중에게 말하도록 허용하고 있었다. 셋째는 도시 당국자들에 의한 성경 권위의 수용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1523년 1월에 열린 1차 취리히 논쟁에서 확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예언의 모임에서 성경연구의 진전이었다. 취리히에 있는 모든 목사들과 대학생들이 성경의 강도높은 주석과 해석을 한 시간 동안 하기 위해 대성당에 모였을 때 이 모임은 훗날 개혁주의 아카데미와 신학교를 위한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에 대해 간파하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율법은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비하신 의지의 계시였다. 이것은 루터의 개념과는 아주 다른 것이 었다.
  「하나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에 관하여」라는 논문은 도미니크 수도회에서의 설교들 중의 하나로 개괄적 형태로 성서원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명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이해에 있어서 출발점은 인간학적인 전제들로부터 취해진 것이었다. 즉 말씀과 신자의 내적 감정과의 긴밀한 유대를 들 수 있다. 이는 쯔빙글리가 그토록 격렬하게 교회의 계급체제를 반대했는가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즉, 교회지도자들의 행위는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가르침을 받지못했는지 증명해줄 뿐이기 때문이다.
  
3). 성례관
 쯔빙글리의 성례관은 국내에 가장 많이 소개되어있는 신학 사상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쯔빙글리의 성례관과 말틴 루터의 성례관은 종교개혁에 있어서 중요한 논쟁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쯔빙글리의 어거스틴 요한 복음 해석 사본에 난외주를 통해 밝힌 견해가 최초 성례언급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에라스무스를 모방하여 성례의 교제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어거스틴을 논박하며 요6:53-56의 말씀들은 영적인 먹고 마심이라고 정의했다. 1522년 발견된 주교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미사의 집전이 죄에 대한 형벌을 소멸시킨다는 주장을 부정했다. 즉 예수의 유일회적 십자가 상의 죽음 이후 어떤 희생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후 1524년 쯔빙글리는 성만찬이해에 본질적인 통찰을 획득했다. 그는 요한복음에 근거하여 루터의 실재설과는 다른 영적 성격을 확신했다. 그는 또한 성례가 구원의 수단이라는 견해를 배척했다. 성례전은 공식적 선서에 의한 단합과 충순의 표시이다. 즉, 그것은 내적으로 이미 성취된 것을 나타내는 외적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쯔빙글리는 다음 몇 가지에 비추어 루터의 "실재적 임재"의 교리를 거부하였다. 첫째, 성서의 선언에 의하면 육은 무익한 것이다. 둘째, 그의 세계관은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것 사이에 어떠한 밀접한 결합은 인정할 수 없었다. 셋째, 그의 기독론에 의하면 예수의 인성은 하늘의 일정한 장소에 제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제한되 인성이 성만찬에 참여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세례는 단지 내적 신생의 표시와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쯔빙글리의 세례교리는 2가지 전선에 대항하여 형성되었다. 즉 재 세례자에 의한 유아세례의 배재와 로마카톨릭과 루터파 실시의 성례적인 객관주의가 그것으로, 세례에 관한 쯔빙글리의 서술은 거의 배타적으로 후자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세례가 원죄의 죄책을 제거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세례는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대속하는 죽음에 의해서 단번에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중세의 도구적인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중세의 림보에 대한 관습에 완강히 반대했다. 쯔빙글리의 경우 물세례보다는 성령세례가 개인들의 신적인 구원의 궤도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수단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례는 사람들이 어떤 직책이나 직분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공식적으로 얽매이는 입회하는 의식이나 서약으로 정의했다.
  
4). 교회관
  "그리스도의 몸이요 믿는 자들의 단체인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예정된 선택된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선택된 자들의 교회는 홀로 하나님께만 알려져 있다. 신앙은 선택된 자로 하여금 자기가 이러한 교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다른 권속이 누구인지는 알지못한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고백하는 모든 자들로 구성된 '보이는 교회'와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포함한 '보이지 않는 교회'가 그것이라며 루터는 교회의 가시적인면과 불가시적인면을 강조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이러한 두 교회사이에 어떠한 밀접한 관련도 확립하지 못했다. 이것은 그의 선택교리와 철학적 세계관에 기인하는 것이다. 
  
5). 교육관
  쯔빙글리의 교육관에 대해서는 1523년에 쓰여진 그의 짧은 논문"청년 교육론"(of the Education of Youth)에서이다.그곳에 나타난 그의 교육관은 첫째, 학생과 하나님의 관계이다.쯔빙글리는 인간은 스스로 신앙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이 주셔야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은 교육으로 한계가 있으며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청년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양육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가르쳐야 하는데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며, 이것은 곧 인간이 받아야 할 교육의 내용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며 가르칠 때에는 정확하게 가르쳐야하고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둘째는 학생 자신의 문제이다. 젊은이들을 교육 할 때 신앙으로 성장하도록 하며 자신의 성장을 위하여 성경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또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교육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젊은이들은 성경을 바로 배워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아야 하고 성경을 자신의 행동의 진정한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셋째는 학생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다. 이것은 크리스찬 생활의 본질적 관계이며 진정한 성도의 교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교제를 통하여 성숙한 인간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쯔빙글리의 교육 배경은 인문주의적 바탕 속에 이루어져있다. 그러므로 그의 교육관도 인문주의적 경향을 띤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복음주의적 크리스찬이기 때문에 인문주의와 복음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색이다.

 
Ⅲ.맺는 말
 
본 연구는 쯔빙글리의 생애와 그의 신학 사상을 조명하면서 종교개혁애 나타난 쯔빙글리의 위치를 조명 해 보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의 사상, 특히 그의 신학에 대해서는 많은 평가들이 내려져왔다. 성만찬에 대한 부적절한 일부의 언급만을 가지고 그를 평가하는 사람들을 별개로한다 하더라도 그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견해의 차이를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그의 전체적인 사상 세계와 그의내적인 구성요소 들은 루터의 것보다 더 중세적인것"이라고 말한다. 반대의 입장에서는 "루터는 자신의 위치를 라틴교회가 이미 차지했던 자리에 잡았다. 그가 여망했던 것은 단순히 정화시키는 것이었다. 즉 교회의 교리와 복음 사이에 모순 대립점들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쯔빙글리는 가능한한 원시적이고 가장 단순한 기독교회의 상태를 회복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완벽한 혁명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쯔빙글리는 성서주의 영향 때문에 그가 주도했던 종교개혁은 보다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인문주의자요, 성서학자이며, 프로테스탄트요, 진보주의자였으며, 애국자였던 쯔빙글리는 그에게 유리한 환경에서 조차도 신기원을 이룩하는 개혁을 철저히 수행하는 중심인물이 될 수 없었다. 그는 루터가 지녔던 열성적 성실성과 추진력을 결여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활동의 도움으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독일이나 제네바에서의 개혁 보다도 더 많은 매력을 느끼는 하나의 개혁을 이루었다.
  본고에서는 쯔빙글리의 생애 이전에 종교개혁의 배경을 밝혀 보고자 하였다. 다른 종교개혁이 그렇듯이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그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의 개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그의 생애에 대해서 연구한 바 있다. 그것은 그의 성장 배경을 이해함으로 그가 다른 종교개혁자들과는 달리 특색있는 종교개혁을 실행하고 용병으로 나가서 전사하기까지의 이해를 돕는다. 본고에서 목적하고자 했던 그의 신학 사상을 계속해서 다루었다. 이는 그의 신학이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매도되고 격하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쯔빙글리의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신학적 요소가 루터나 칼빈에 비해서 뒤진다 해도 그의 개혁정신은 오늘날에도 계속되어야하며 그의 숭고한 이념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도 높이 사, 교회의 개혁을 위해 일익을 담당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가 지녔던 인문주의적 정신이며, 1522년부터는 거의 변하지 않은 그의 신학적 초점이랄 수 있는 기독론이다. 그의 신론과 사회적 윤리적 관심이 바로 거기서 나왔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죽음을 루터는 폭력적 수단으로 종교개혁을 성취하려는 그의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혹평했으나, 그는 예언자였고 조직가였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봉사하면서 쯔빙글리는 순수한 성서적 가르침을 재확립하고, 기독교로부터 모든 미신적 부산물을 제거했다. 그는 17세기와 18세기 정통 개혁파에서 평했듯이 요시아, 모세, 엘리야와 견줄만한 훌륭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