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강요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개혁주의 기본정신
<기독교강요> 초판이 1536년 세상에 나왔을 때, 기독교계를 뒤흔들고 역사를 움직였다. 당시의 로마교회는 <기독교강요>를 두려워했다. 또한 개혁교회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체계가 잡히고, 당당하게 참 교회를 향한 길을 갈 수 있었다. 이 책으로 죤 칼빈은 일류 신학자로 인정받았다. 1559년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의 초판을 내놓았을 때, 주님께서 무한한 은혜로 그와같은 성공을 거두게하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내가 더 분발하도록 격려해주신 여러분들의 열렬한 평가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여 미력이나마 보답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큰 배은망덕이라고 생각한다..."('독자에게 드리는 글' 중에서).
종교개혁에 있어서 <기독교강요>는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가장 영향력있는 교의신학의 지침서가 되었다.
1. 기독교강요의 중요 판들과 저술 배경 <기독교강요>는 1536년의 초판 이후, 계속 조금씩 증보되었다. 중요한 판은 1536, 1539, 1543, 1559년도 판들이다.
(1) 1536년 초판 초판의 사상이 거의 변함없이 최종판에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초판은 칼빈 신학의 정수요 핵심이라고 불리운다. 초판은 학계에서 역사적 가치에 있어 최종판 이상으로 많이 읽혀지고 있다. <기독교강요> 초판은 교리문답서인가 혹은 변증서인가? 칼빈은 교리문답서를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는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서한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저술 의도를 밝히고 있다 : "...오로지 본인의 목적은 종교적인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확실한 기본원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고 초보적인 교리의 형태로..." 칼빈은 박해받는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위하여 외국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려고 당시 공용어인 라틴어로 쓰기는 했으나, 불어판을 곧 속간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간단한 교리문답서를 만들려는 계획은 뜻대로 될 수 없었다. 당시에 칼빈과 그의 동포들은 프랑스의 정치 질서를 파괴하고자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프란시스 1세는 당시 프랑스에서 발흥하고 있던 모든 혁신적인 경향이 국가와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적인 것이라고 단정하는 소르본느 대학측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는 이단을 숙청함으로써 프랑스의 복음주의자들과 외국의 복음주의자들을 격리시키고자 했다. 이런 방안의 지지자들은 프랑스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을 재세례파로 몰아부치거나, 무식한 오합지졸로 보았다. 또한 그들의 운동을 국가의 내적 질서에 대항하는 무정부적 행동과 반란으로 정죄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독일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재세례파와 똑같아서 선동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칼빈은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기독교강요>를 펴냈다. 그는 신앙의 형제들을 위한 교리문답서의 필요성을 느꼈다. 동시에 박해의 중단을 위해 왕에게 탄원하고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동기가 <기독교강요>의 집필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기독교강요> 초판은 모두 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율법(십계명 해설 포함)
2. 믿음(사도신경 해설 포함)
3. 기도(주기도문 해설 포함)
4. 성례
5. 거짓 성례
6.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의 권능, 그리고 정치 조직
(2) 1539년 판 17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교부(특히 어거스틴)들의 글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또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성경 인용도 많아지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구약과 신약의 유사점과 차이점, 예정과 섭리 등의 장들이 추가되었다. 칼빈이 이 라틴어 판을 1541년 프랑스어로 옮겼다.
(3) 1543년 판 2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속 나타나는 명백한 목적은 가르침이다. 1539년 판에 비해서 이 판에 있어서의 개정이나 증보면은 훨씬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새로이 주요하게 다루는 문제는 수도 서약과 인간의 전통에 관한 것들이다.
(4) 1559년 판 이 <최종판>은 교리의 순서와 문맥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칼빈의 견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모두 8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436년도 초판의 교리문답 형식은 이제 사라졌다. 다음과 같이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 1 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제 2 부 그리스도 안에 계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
제 3 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제 4 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 <최종판>에서 예정 교리는 구원을 다루는 제3부에 자리잡고 있다. 섭리의 교리는 제1부에서 다루어 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것은 제3부에 배치되어 있다. 이 <최종판>은 기념비적인 걸작이다. 개혁교회의 신학적 총체라고 말할 수 있다. 칼빈 생존 당시에도 그 성공은 대단했으며, 그후에도 인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2. 칼빈의 경건주의와 칼빈의 주의 신학 칼빈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으로서 살면서 글을 썼다. 칼빈은 우리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그는 공동체와 이웃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관심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경건은 신학의 배경이며 목표이다. 따라서 그는 그의 책을 <경건대전, summa pietatis>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있어서 경건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선행조건이다. 신학은 단순히 하나님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칼빈에 의하면 신학은 마음의 문제이다. 신학은 신앙과 전적인 의탁 그리고 경건을 요구한다(faith, total commitment and piety). 신학이 단순히 머리의 학문(science of the head)이 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① 우리는 연구할 때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고있다. ② 우리는 전인격으로서 하나님을 대면한다. 따라서 지성뿐만 아니라 감정과 의지도 포함된다. 칼빈은 차갑고 지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열정과 따뜻한 마음으로 말한다. 최종판의 내용 가운데 주목할만한 내용을 살펴보면 매우 심오한 칼빈 신학을 만날 수 있다. 제1부는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고 있다. 칼빈이 말하는 지식은 정서적 따뜻함과 참여, 따라서 경건을 포함하고 있다(emotional warmth, involvement, piety). 그에 의하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의 현존에 의해 노출된 자기이해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 - 기독교적 전통에 입각한 자기이해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자가 이러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이 두 가지 지식은 경건(piety)과 종교(religion)에로 인도해 준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reverence)과 사랑이다. 종교는 신앙과 하나님 경외(the fear of God)이다. 경건은 섬김(봉사)으로 나타나고, 종교는 예배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중적이다. a. 창조주와 섭리자 (1부) - 만인에게 관계된다. b. 구속주 (제 2-4부) - 그리스도인과 관계된다. 하나님은 먼저 창조세계와 성경의 일반적 교훈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나타내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구속주(Redeemer)로 보여 주셨다. 특히, 칼빈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a. 우리에게 하나님 경외를 가르쳐주기 위해. b.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모든 선한 것을 구하고 받도록 하기 위해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신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 안에 뿌리 박혀 있다. 즉 하나님에 관한 어떤 관념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다. 이것이 <종교의 씨>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상숭배도 이러한 관념에 대한 증거이다.
<종교의 씨>가 암시하는 것은 두 가지 사실이다. a.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종교의 보편성). b. 인간은 무지해서라기 보다 타락해서 죄를 범한다. 칼빈에 의하면 모든 종교의 기원은 <종교의 씨>에 있다. 실제적인 불신앙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무지에 의해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악의로 말미암아 질식 혹은 부패되었다. 종교의 씨와 관련된 두 가지 죄가 있다. a. 미신 - 이 맹목은 거의 항상 거만한 허영 그리고 완고함과 결탁되어 있다. b. 위선 - 이것은 악의와 완고함을 포함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우리 주위의 세계는 가장 아름다운 극장이다.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 인체의 구조의 정묘함도 창조주의 솜씨를 반영해 준다. 따라서 옛 철학자가 인간을 가리켜 '소우주'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현이다. 그러나 자연신학만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우리가 창조세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도 성경은 필요하다. 인간이 성경을 떠나서 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성경은 우리를 참 하나님께로 인도해 준다. 성경은 우선 하나님을 창조주로 계시하고 있다. 성경에는 창조와 재창조의 두개의 축이 있다. 성경에서의 구속은 <창조주의 회복>이다. 이것은 개혁신학에서의 독특한 강조이다.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교회에서 온 것이 아니다. 말씀과 성령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학교>에서 <성경의 제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수 있게 한다. 성경은 안경이다. 이 안경을 쓸때 우리는 창조세계와 하나님을 바르게 볼 수 있다.
3. 칼빈의 삼위 일체관 개혁주의 정통성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매우 중요하다. 칼빈에 의하면, 삼위(Three persons)는 그 자신 안에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다. 칼빈의 삼위일체론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무엇인가? 위격(Person)과 본질(essence) 사이의 뚜렷한 구별이다. 본질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은 숫적으로 하나이다. 위격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은 숫적으로 셋이다. 위격(person)이란 무엇인가? 칼빈은 위격이란 용어에 의해서 실재(subsistence)를 의미하고 있다. 실재는 삼위의 각 위격을 구별시켜주는 고유성이다. 칼빈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 어거스틴의 경우, 삼위일체의 논리적 순서는 성부, 성령, 성자이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 그 순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다. 칼빈은 성경을 떠난 하나님의 관한 사색을 계속 경고한다 ! 관심을 선자에 두는 신학(바르트주의, 근본주의) 이나, 성령에 두는 신학(오순절주의) 과는 달리, 개혁신학의 전통은 삼위일체와 만물의 원천과 기원(fons et origo)이신 성부와 창조주에 대해 말한다. 따라서 개혁신학의 정통주의는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부류나 성부보다는 성령의 더 비중을 두는 오순절 개통은 정통 개혁신학주의라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개혁주의 정통성을 부르짖고 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우선주의가 무엇이냐는 진정 정통 개혁주의를 추구하고 있는지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는 단순히 앞 일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와 피조물을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성(the Fatherhood of God)은 섭리를 논의하는 배경이다. 섭리는 비인격적 능력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칼빈은 추상적 능력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에 따라 만사가 움직인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의 맹목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다. 태양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성적 은총을 새로이 기억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개개의 사건들을 지도하신다. 우연히 발생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개개의 사건들을 조정하시며 이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결정된 계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이 없이는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을 섭리로써 성취하신다. 섭리는 하나님이 그의 계획을 수행하시는 방편이다. 섭리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확신을 준다. 칼빈은 하나님이 죄의 저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죄인으로서 '필연적 결과로서'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가 하는 일을 한다. 그의 의지는 여전히 작용하지만, 이제 그것은 죄로 기울어진다. (참고) .칼빈- '필연적 결과' 을 강조한다. 의지가 속박되어 있다. .요나단 에드워즈- '자발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속박된 의지는 자유롭다. 칼빈은 결정론이나 우연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칼빈의 섭리론에서의 주된 강조점은 경건에 대한 관심 가운데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우리는 비참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있는 자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부성적 관심은 칼빈의 섭리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섭리는 신앙을 요구한다. 믿음없이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 어떤사건들은 우연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다. 순탄한 삶이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는 아니다. 재난과 불행은 변장을 한 축복일수 있다. 섭리를 믿는 신자는 신령한 위로를 경험하고, 감사의 심정을 갖는다. 그는 염려로부터 벗어나고, 역경과 불행중에서 인내한다.
4. <기독교강요> 제2부는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을 다루고 있다.
1) 인간론과 원죄론 칼빈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를 알아야 한다. 먼저, 본래의 존귀한 상태에서의 그 자신을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 죄인으로서의 자기를 알아야 한다. 제2부는 우리의 현재의 위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교만이 일차적인 죄이다. 이 죄가 다른 모든 죄들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불신앙이 일차적인 죄이다. 불신앙이 교만과 배은망덕(감사치 않음)을 초래하였다.고 역설하고 있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가 모방가 환경에 의해서 전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아담의 타락 속에서 우리는 모두 범죄하였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칼빈은 말하기를 원죄는 영혼의 모든 부분에 만연되어 있다. 타락한 인간의 부패성은 계속해서 새로운 열매(육신의 일)를 맺는다. 이는 뜨거운 용광로에서 불꽃과 불똥이 튀어나오며,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는 것과 같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선이 결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악을 생산할 능력이 풍부하다. 따라서 인간의 죄는 인간 전체를 전복시킨다. 죄는 영혼과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 지성과 의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칼빈은 죄의 결과로서의 의지의 속박 상태를 말한다. 인간의 의지와 이해력은 죄에 의해 전적으로 파괴되었는가? 아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다. 인간의 이해력은 <땅의 일>에 대해 여전히 기능을 갖고있다. 일반은총이 사회생활의 공정성과 질서와 예술과 과학과 관련이 있다 (Ⅱ. 2. 14). 칼빈에 의하면, 어느 한 방면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의지는 여전히 작용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선한 것을 따르고 싶어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영원한 복락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성령의 역사 없이는 아무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의지는 죄의 속박을 받아 노예상태에 빠졌으므로 선을 향하여 움직일 수 없으며 또한 선을 위해 전력을 다할 수도 없다. 사람은 죄를 짓는 필연성에 예속되어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내가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수 있는가?>이다. 루터는 죄와 용서를 깊이 인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루터는 율법의 도덕법의 이중적 사용을 말한다. a. 죄를 보여주는 거울(교육적 사용) b. 세상에서의 죄의 억제(시민적. 정치적 사용 ) 후자가 루터의 일차적 사용이고 주된 강조점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주요한 질문은 <어떻게 나는 나를 구원하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감사함으로 응답할 수 있는가 ?>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전체적 삶(total living of the Christian life)에 대해 강조한다. 또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일광성있게 강조한다.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승리(our victory in Christ)를 깊이 인식하고 있다. 율법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하여 계속 규범적이다. 원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은 이긴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작은 권투>가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머리(our Head)가 하늘에 있으며 우리가 그를 따를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칼빈의 도덕적 율법 3중적 사용과 그리스도론 a. 교육적 사용(죄를 깨닫게 함) b. 시민적. 정치적 사용(세상에서의 죄의 억제) c. 복음에 대한 감사(혹은 응답)의 규범. 이것이 칼빈의 일차적 사용이다(율법의 적극적 기능).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셨다. 루터는 영적 자유를 강조하고, 칼빈은 순종을 강조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순종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에 대한 감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과 결합되었다. 구약의 율법은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전조)였다. 그리스도는 새 율법을 가져오신 것이 아니라, 창조 이후로 있어왔던 율법을 명료하게 드러내셨다. 칼빈에 의하면 <율법>은 구약의 언약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이다. 개혁신학은 구약을 강조하고, 신구약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개혁신학에서 중요한 순간은 성육신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은혜언약 안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려고 오셨다(대속적 속죄). 그러나 그의 공로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존한다. 그리스도의 어떤 사역도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강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마치 우리 스스로 그 일을 한 것처럼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를 구속하시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직책을 다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셔야 했다. 이 은헤는 근본적으로 성부로부터 온다. 성부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강제되지 않으신다.
5. 제3부: 성령의 내적 사역(The Internal Work of the Spirit) 그리스도가 우리와 성부 사이에서 중보하신다. 믿음은 성령의 주된 사역이다. 믿음은 빈 그릇과 같은 도구적인 것이다. 믿음은 그 자체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가 이니다. 성령은 구원의 역사적 사역을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적용시킨다. 루터는 <전가된 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칼빈은 <관계>를 더 강조한다. 즉, 그는 신비적 연합을 강조한다. 완전히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결혼>과 같은 것이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가 앞뒤로 나란히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 점은 루터보다 두드러진 면이다. 루터는 성화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혜>에 대해 말했다. 칭의에서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처럼 완전하다. 성화는 현세에서 시작되기는 하지만 하늘에서 완성된다. 우리는 이 양자를 구별하지만, 그리스도는 자신안에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 이 양자는 서로 뗄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세 부분이 있다. ① 율법의 공포로 부터의 자유 ② 율법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자유 ③ 무해무익한 일에 관한 자유(예를 들면, 옷을 입는 문제, 육식의 문제등). 우리는 자유를 사랑 아래 두어야 한다. 또한 자유는 적극적이어야 한다. 칼빈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명백한 규칙은, 이웃의 덕을 새우는 결과가 될 때에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고, 이웃에 도움을 되지 않을 때에는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그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구속만 받는다. 엄격히 말해서 양심은 하나님만을 상대로 한다. 행동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과 같이, 양심은 하나님을 상대로 한다. 맑은 양심은 곧 심령의 내면적 성실성을 의미한다. 어떤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에 대해 아무 저항없이 그것을 허락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다른 사람이 나의 양심을 속박하도록 허락해서는 안된다. 칼빈은 기도에 관하여 실제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경건에 대한 강조와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다. 그는 기도의 유익과 위로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기도는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하늘 아버지 곁에 우리를 위하여 저장되어 있는 보물에 우리의 손이 닿으려면 기도의 힘을 빌러야 한다.
올바른 기도를 하려면 네 가지점을 기억해야 한다. 즉, 기도하는 자에게는 ① 하나님 경외, ② 회계하는 마음(진심으로 부족을 느낌), ③ 겸손(모든 자기 신뢰를 버림), ④ 확신있는 소망(두려움 극복,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이 있어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목적이 있다. 사기도와 공기도는 모두 필요하다. 칼빈은 특히 공기도에서 조심할 점을 지적한다. 기도하는 자가 유창한 말로하나님께 아뢰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위선자들은 기도에서 호화찬란한 외식을 보인다. 기도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는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6. 칼빈의 선택의 교리 칼빈은 선택의 교리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칼빈은 선택(혹은 예정)의 교리가 다른 어떤 교리보다 많은 공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한다. 제1부에서 섭리가 중요한 교리이듯이, 제3부에서는 선택이 그러하다. 칼빈의 접근 방법은 경험적이고 실존적이다. 그는 현재의 위치에서 시작하고 관찰한다. 그는 이 교리의 유익에 대한 일반적 관심을 따라간다.
이 교리에는 세 가지 유익한 점이 있다 : 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찬양하게 한다. ②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③ 우리로 겸손케 한다. 칼빈은 두 기지 위험을 알고 있다: 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에 대한 억측과, ②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말을 삼가는 것이다. 칼빈은 성령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곳에서만 말하고자 한다. "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히지 못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 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원하시는 사람을 거저 선택하시며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신다는 것이 이제 충분히 밝혀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의 영원하고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 주실 사람들을 오래 전에 확정하셨다고 말한다. 그들의 인간적인 가치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다." 선택하신 것은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지 거룩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신자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정만을 기초로 한 것이며, 이 은혜는 행위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부르심에 의한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말이다" " 하늘의 은혜에 의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그의 양이 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버림을 받은 자들에 대해서도 공정하시다. " 주께서 사망으로 예정하시는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본성의 상태에 의해거 그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어떤 불공평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숨은 결정을 찾아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공손하게 찬탄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극히 위대해서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 나는 깊음 앞에서 떤다. 그대는 이론을 말하라. 나는 찬탄하겠다. 그대는 변론하라. 나는 믿겠다. 나는 깊음을 본다. 그러나 밑바닥에는 미치지 못한다." 악인들의 멸망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존하되, 그 원인과 기회는 그들 자신 안에 있다. " 첫 사람이 타락한 것은 주께서 그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판단하셨는지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일이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충분히 나타나리라고 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가 정한 대로 넘어지지만, 자기의 허물 때문에 넘어지는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 아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무식한 것이 유식한 것" 이라고 했다. " 사탄이 신자들을 낙심시키려고 할 때에 사용하는 가장 중대하고 위험한 유혹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릇된 곳에서 선택을 탐구하겠다는 악한 소원을 일으킨다. 칼빈에 의하면,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다. 선택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구원과 생명과 천국의 영생을 구하려면, 그리수도 이외에는 다른 곳이 없다. 그만이 생명의 샘이며, 구원의 닻이며, 천곡의 상속자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보아야 하는거울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계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확고한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진정한 믿음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들이며, 그가 그들의 보호자와 목자가 되시므로,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요 3:16, 6:39 참조)" 성경은 맏는 자들을 위한 계시이다. 성경은 예정과 선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확실함 가운데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확신과 위로를 갖게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선택이 신비한 문제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계시된 진리에 속한다. 선택 교리는 복음의 일부이다. 선택 교리는 우리의 두려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위한 것이다. 의심이 아니라 위안과 찬송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선택 교리는 교회의 심장 (heart of the church)으로 불리어 왔다. 교회는 선택의 교리를 복음으로써 선포한다. 우리가 선택의 교리를 찬송할 때 우리는 그 교리를 바르게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에 의한 유기(reprobatidn) 를 말한다 (예. 롬 11:15). 이 하나님의 행위는 독단적인 것이 아니다. 그 행위를 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죄이다. 하나님의 유기는 인간 자신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과 별개의 일이 아니다.
7. 최후의 부활과 졸말론 최후의 부활에 관한 내용은 3부와 4부의 연결 부분이다. 최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완성한다. 영혼불멸을 말한 철학자는 많아도 육신의 부활을 인정한 사람은 적다. "우리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눈앞에 그려야 한다. 그는 ... 우리의 장차 올 부활을 보증하신다." 칼빈에게 있어서 종말론 (eschatology)은 소망과 확신과 기대와 성취 그리고 기쁨과 관련이 있다. 그는 천년왕국론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칼빈은 부활을 믿지 않는 이단들을 논박한다. 그는 부활의 모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선 우리는... 본체로 보면 현재 가지고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나, 그 성질이 다르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물로 바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는데 다만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다른 특성에 있어서는 탁월하였다." "사람과 짐승의 육체는 본체가 같으나 성질이 다르며 (고전 15:39), 모든 별은 같은 재료로 되었으나 그 광채가 다른 것과 같이 (고전 15:41), 우리는 우리의 몸의 본체는 보유하겠지만 변화가 생겨서 (고전 15:51-52), 이 나중 상태는 훨씬 더 훌륭하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하기 위해서 우리의 썩을 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썩는 성질을 버리고 썩지 않는 성질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고전 15:53-54)." 칼빈은 불신자의 부활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생명의 부활이 있고 심판의 부활이 있다 (요 5:29). 그리스도께서는 양과 염소를 분별하러 오시리라는 것이다 (마 25:32). 악인이 심판주 앞에 끌려가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멸망하는 것은 가벼운 벌이 될 것이다. 그들이 심판주에게서 완악한 죄로 벌을 받을 것이며, 끝도 한도 없는 이 벌은 그들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칼빈은 영원한 복에 관하여 말하면서, "최고선과 행복의 모든 요소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해서는 안된다"라고 했다. 하나님 나라에는 광채와 기쁨과 행복과 영광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희미한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선물을 분배하실 때 모든 성도에게 꼭 같이 빛을 비추시지 않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실 때에도 그 영광의 정도가 꼭 같지 않으리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해다 한다." 칼빈은 버림받은 자들의 처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악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의 중대성은 적당하게 형언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물질적인 비유를 쓰게 된다... 우리가 특별히 명심해야 할 점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완전히 단적된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냐 하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지옥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 ' 이다.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
8. 외적인 은헤의 수단과 교회론 제4부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 교회 회의 들과 그 권위, 교회의 권징, 맹세, 성례, 세례, 성만찬, 카톨릭의 미사와 다른 다섯 가지 의식 (성례) 그리고 국가 통치에 광하여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제4부는 교회론이라 할 수 있으며, 끝 부분에 국가론이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교회의 본질과 기능, 교직, 성찬론 등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칼빈은 이러한 제목들을 논할 때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교리와 신학적 견해들을 논박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참된 교회는 믿는 자들의 어머니이다.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신앙 성장을 위해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따라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선택은 교회의 기초이다. 우리는 교회를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시다.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교회를 아신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다. 참된 교회에는 두 가지 표식이 있다 : ①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함. ② 성례가 정당하게 베풀어짐. 칼빈에게는 세번째 표식이 없다. 세번째 표식은 후에 어느 정도 성례와 관련하여 나타나게 된다. 교회 분열은 칼빈에게 있어서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교회의 분열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부인이다. 교회의 참된 예배와 말씀의 전파가 완전히 붕괴되었을 때만이 분열이 가능하다. 칼빈에 의하면, 바른 교리와 바른 예배에서 떠난 로마 교회는 참 교회라고 할 자격이 없다. "진정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요 또 그 기초라고 한다면(딤전 3:15) 거짓말과 허위가 지배하게 되는 곳에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로마 교회의 경우, 말씀 대신에 거짓말을 섞은 패악한 조직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주의 성만찬은 가장 추악한 모독 행위로 대체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참을 수 없는 각종 미신으로 더럽혀졌다. 기독교는 교리를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음에도 교리는 완전히 매장되고 제거되었다. 공중 집회는 우상 숭배와 불경건을 가르치는 곳이 되었다." 칼빈에 의하면, 교황은 '사악하고 가증스런 왕국의 수령'이다. 교황은 그 교회들을 그의 모독적인 불경건으로 더럽히며 잔인한 지배로 괴롭히고 독약과 같은 악하고 치명적인 교리로 부패시키며 거의 죽였다. 그 교회들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거의 파묻혀 숨겨졌으며 복음은 타도되었고 경건은 추방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거의 말살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역을 사용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 복음선포의 직책은 특히 중요하다. 칼빈은 로마 교회의 교황 중심의 성직 제도에 반대한다. 그는 임시직과 항존직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교회 정치를 주관하는 사람들을 바울은 첫째로 사도, 다음은 선지자, 세째는 복음 전하는 자, 네째는 목사, 끝으로 교사라고 부른다(엡 4:11). 이 중에서 끝에 있는 둘만이 교회내의 평상직이요, 처음 셋은 주께서 그의 나라의 초창기에 세우셨고 필요에 따라 가끔 부활시키신다." 교사직은 성경 해석의 책임을 맡고 있다. 사도의 경우, 목회의 대상이 온 세상이었으나, 목사의 경우는 지역교회를 맡고 있다. 목사는 공예배에서 말씀을 설교화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권면도 할 수 있으며 치리(권징)권을 갖는다.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는 일정한 질서가 필요하다. 즉 목사는 각각 모든 일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를 진다. 일정한 임지나 목적이 없이 돌아다니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보다 목사 자신들의 이익을 생각해서 마음대로 교회를 버리고 함부로 한 곳에 모이는 것은 혼란을 일으킨다. 따라서 목사는 각각 자기의 한계로 만족하며 다른 사람의 영역에 침입하지 않는다는 이 결정을 될 수 있는 대로 전체적으로 준수하여야 한다." 만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유익하다 할 때에도 자기의 개인적인 결정으로 할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인정을 기다려야 한다. 집사는 두 가지 직무를 수행한다. 하나는 구제 물자를 나누어 주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빈민, 병자 및 과부를 돌보는 일이다. "디아코니아(섬기는 일)라는 말에는 더 넓은 뜻이 있지만, 성경에서 집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교회가 구제 물자를 분배하며 빈민을 돌보고 빈민 구제금을 관리하는 일을 맡긴 사람들이다... 사도들의 교회에는 이런 종류의 집사들이 있었고 우리도 그것을 본받는 것이 마땅하다." 칼빈은 교회가 교역자를 투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선 하나님의 선택의 증거들을 보고 하나님의 선택된 성도의 높은 표준에 의하여 투표로 선출한다는 것이다. "적당한 듯한 사람들은 일반 신도의 합의와 승인을 얻어서 임명해야 한다." 제6장에서 칼빈은 교회의 왕권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주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황의 수위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대리나 후계자를 필요라 하지 않고 홀로 친히 그 권리를 지키시며, 따라서 아무에게도 이양하시지 않는다." 칼빈에 의하면,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머리이시며, 우리는 모두 그의 지배 하에서 그가 제정하신 질서와 조직에 따라 서로 연합된다. 교회에 머리가 없을 수 없다는 구실로 세계 교회 위에 한 사람을 앉히려고 하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현저히 모욕한다. 교회의 대리는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1) 로마교회(카톨릭) 교리성 비판 제8장에서 칼빈은 로마 교회의 교리 결정권을 비판하고 있다. 이 권한에 의하여 로마 교회는 교리의 순수성을 심하게 타락시켰다. 칼빈에 의하면, 사도들도 말씀을 능가할 자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실한 사역자들은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복종하도록 하신 그 교리를 단단히 붙잡아야 할 뿐이라고 가르친다." "교회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어서는 안된다. 즉 주의 말씀에 계시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며 주장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교회회의 권위에 관하여 제9장에서 칼빈은 교회회의의 권위를 논박한다. 그는 어는 종교회의의 교리결정이든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며 그 회의가 언제, 어디에서 모였고, 무슨 문제로 모였으며, 누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무슨 말을 했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한다. 칼빈에 의하면 회의들도 인간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칼빈은 교리문제 혹은 성경해석의 문제로 교회가 싸울 때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결정하되 말씀과 성령을 따라 그렇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니케아 회의, 콘스탄티노플 회의, 에베소 회의 등의 존재의미와 존재이유를 인정하였고, 아다나시우스 등 많은 교부들의 역할을 칭찬하였다.
3) 권징의 필요성과 목적 제12장에서 칼빈은 권징의 필요성과 목적을 이야기하고 있다. "권징을 싫어하고 말만 들어서 뒷걸음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런 사람들은 교회도 하나의 사회란 것을 알아야 한다. 조그마한 가족 같은 사회에서도 규율이 더욱 더 필요하다... 그러므로 권징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반대해서 날뛰는 사람들을 억제하며 길들이는 굴레와 같으며, 나태한 사람을 고무하는 박차와 같고, 더 중한 타락에 빠진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영의 유화함으로써 부드럽게 징벌하는 아버지의 매와 같다." 그러면 권징의 목적은 무엇인가? 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② 악한 사람들 때문에 선한 사람들이 타락하는 일이 없도록. ③ 악한 자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그러나 사소한 죄악이 아니라 큰 범죄에 대하여는 출교시켜야 한다. 칼빈에 의하면, 수도원주의자들은 은혜와 신앙으로서만의 구원을 무시하고 율법주의에 빠져 빛 잃은 빛과 맛 잃은 소금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특권의식과 분리주의 및 이중적 도덕표준으로 말미암아 교회 내에 분열을 야기시켰다. "현대 수도사들이 사적인 제단을 따로 설치한 것은 단결의 유대를 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은 교회 전체와의 교통을 끊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 사이에 평화와 사랑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제정하신 일반 성직 제도를 멸시한다. 현재 있는 수도원은 모두가 분파주의자들의 소굴로서, 교회의 질서를 교란하며 신자들의 사회에서 분리되었다. 이 분리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여러가지 종파명을 취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대신에 베네딕트파라고 자랑하며, 어떤 사람은 프란체스코파, 어떤 사람은 도미닉파라고 하면서 교만하게 이런 이름들을 자기들의 종파에 붙이고는 보통 그리스도인과 다른 체하니 이는 그리스도께 대한 불법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이 온갖 추악한 죄악으로 더럽혀진 계급도 없으며, 파쟁과 미움과 당파심과 음모가 맹렬한 곳도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정욕을 억제해서 노골적인 추태를 부리지 않는 것을 성적 정결이라고 부른다면, 그런 정결한 생활을 하는 수도원이 몇 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홍등가가 아니라 정결한 성역이라고 할만한 수도원은 열에 하나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또 그들의 음식은 얼마나 검소한가? 그들은 우리에 있는 돼지들같이 뚱뚱하다. 내가 그들을 너무 혹평한다는 불평이 생기지 않도록 그만 말하겠다... 이 비난이 모든 수도사들에게 예외 없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거룩한 생활의 원칙과 규율이 수도원에서 아무리 훌륭하게 시행됐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아주 다르게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언제든지 있었다. 그와 같이 현대 수도사들은 거룩했던 고대에 비하여 타락하기는 했으나 그 무리 가운데 소수의 선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악한 사람들의 큰 무리 가운데 여기저기 흩어져 숨어 있다."
4) 카톨릭의 미사와 행위와 성만찬 의식행위에 관하여 칼빈에 의하면, 로마 교회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것을 말살하는 모독행위이다. "미사는 그리스도에게 큰 모욕을 가하고, 그의 십자가를 매장하고 은폐하며, 그의 죽으심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게 만들고, 그 죽으심에 대한 기억을 우리에게 전하는 성찬의 힘을 약화시키며 소멸시킨다." 미사는 성경에 없으며 원시교회에도 없었다. 미사는 더럽혀졌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신성모독이다.
9. 국가 통치론 제20장은 국가 통치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국가 통치에 지정된 목적은,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하며, 우리를 사회 생활에 적응시키며, 우리의 행위를 사회 정의와 일치하도록 인도하며, 우리가 서로 화해하게 하며, 전반적인 평화와 평온을 증진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 사회에서 정부가 하는 일은 빵과 물과 태양과 공기가 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사람들이 호흡하고 먹고 마시며 따뜻하도록 하는 이런 모든 활동을 포함한 생활 방도를 마련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한다"(우상숭배 억제, 치안 유지, 시민 재산 보호, 인간 상호간의 선한 교제를 가능하게 함). 정부에는 세 부분이 있다. 법의 수호자인 집권자와, 집권자가 통치할 때의 표준이 되는 법과, 법에 의한 통치를 받으며 집권자에게 복종하는 국민이 있다.(Ⅳ. 20.3).
'好學의 歷史,宗敎,哲學 > (역사)중세敎會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제국에서 일어났던 기독교 핍박 (0) | 2010.07.18 |
---|---|
기독교 박해의 역사 1 (0) | 2009.11.07 |
쯔빙글리의 67개조 (0) | 2009.06.26 |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0) | 2009.06.11 |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 (0) | 20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