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교독문]

[주석] 主祈禱文 (The Lord's Prayer)

好學 2009. 5. 5. 13:27

 

 

主祈禱文 (The Lord's Prayer)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 중에 주기도문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널리, 그리고 누구나 쉽게 암송하고 있는 기도문임에는 틀림없다. 공식적인 예배에서든지 비공식적인 어떤 모임에서든지 주의 이름으로 모인 자리에서라면 바로 이 주기도문으로 모임을 마감하는 때가 많다. 이렇듯 주기도문은 예배의식의 하나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기초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이, 자주 암송하는 주기도문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바르게 알고 제대로 기도하고 있을까? 이번 특집에서는 주기도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주기도문의 전반적인 ‘배경’과 ‘내용’을 짚어보고, 그리하여 어떻게 보면 가장 많이 알려지고 또 그만큼 쉽게 암송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과 가치와 의미가 퇴색되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보면서 우리에게 주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되새기며 주기도를 드리는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하나님 사상을 토대로 한 ‘주기도문’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문을 우리는 주기도문이라고 한다. 이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록한 네 복음서 가운데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11:2-4)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누가복음서의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서에 비해 짧게 구성되어 있고 기도문의 후반부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부분 이후가 생략되어 있다. 예수님이 가르친 주기도문의 전형(典型)이 서로 다르기는 해도 마태복음서가 자세히 언급 된 것으로 여겨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배 때에 이 주기도문을 낭송하며 기도한다.

당시 헬라 종교의 기도문은 기도를 드리는 신의 칭호를 가급적 많이 언급함으로써 신의 관심을 끌려고 했으며 신에게 드리는 제물이나 선행을 상기시킴으로써 기도의 효력을 얻어내려고 했다. 반면에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 문제는 기도하는 자의 마음이다”라 여기며 ‘마음’을 중요시했다. 예수님은 이 부분을 지적한다. 외식하는 자처럼 장황하게 기도하지 말고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하지도 말 것이며, 이미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므로 정성어린 마음의 자세로 은밀히, 그리고 간략히 구할 것을 아뢰라는 것이었다. 유대인의 신관과 헬라인의 신관은 서로 달랐는데, 유대교는 하나님이 사람의 생각을 속속들이 아시는 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유대인들의 기도문인 ‘카디쉬’에는 “그의 이름이 높아지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그의 나라가 속히 임하시길...”이라고 선포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뒤에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는 것이 유대인의 일반적인 이해였다. 이런 점을 미루어보면 예수가 가르친 ‘주기도문’도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기본적으로 낭송되던 기도문을 보다 새롭게 변형시킨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한 표현은 일상의 기본적 필요를 요구하는 고대 세계의 보편적 기도형태(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였다(잠 30:8). ‘죄의 용서’를 구하는 표현에서 ‘죄’는 하나님께 진 ‘빚’의 의미가 있다. 죄의 용서는 마치 부채탕감과도 같은 성격을 지닌다. 주기도문의 말미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축도 형식의 구절도 유대인들의 예배 의식 말미에 찬양의 고백으로 끝난다는 점과 유사하다.

하나님사상을 터득한 자는 주기도문의 말미에 나오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아버지께’ 겸손히 돌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사상을 토대로 한 ‘주기도문’은 은혜와 용서를 축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자기 비움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드리라는 점이다.


2. 내용이 서로 다른 <마태복음 6:9-13>과 <누가복음 11:2-4>의 주기도문

 주기도문은 성경에서 (마 6:9-13)과 (눅 11:2-4)에만 기록되어 있다. 학자들 간에는 주기도문의 원어가 아람어로 되어 있었다고 주장도 있지만 고대 아람어 역본으로 된 주기도문이 남아 있는 것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오직 수리아어 교정본이 최근의 것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마 6:9-13)과 (눅 11:2-4)을 펴서 비교해 읽어보면,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을 제외한 나머지 내용만이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암송하고 있는 주기도문은 (마 6:9-13)의 기도문이다.


3. <마태복음 6:9-13>과 <누가복음 11:2-4>의 차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학자들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의 내용이 서로 다른 이유를 각기 다른 시기에 쓰여 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학자들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이 일반적인 기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언급했기 때문에 마태복음의 것보다 짧게 기록된 것으로 그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그 이유로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는 송영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공중 예배 시에 시용하기 위하여 1세기경(A.D. 100년경)에 추가로 기록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누가복음의 것은 한 제자가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는 요청에 의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눅 11:1) 마태복음의 것은 그러한 표현이 전혀 없고 산상수훈(마 5:1)과 같이 연결하여 기록한 점에서, 학자들은 후대 사람들이 예배에 인용하기 위하여 누가복음의 것에 추가로 기록한 것이 마태복음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마태복음의 기도문은 후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누가복음의 기도문)에 추가로 보충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물론 비평학자들의 그러한 생각이 학문적으로는 일리가 있겠지만, 성경 상에서 체계가 잡힌 기록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이 추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비평하기 위한 비평일 뿐이다.


4. 제자들은 왜 예수님께 기도문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을까?

(눅 11:1-2)에서는 제자 중 하나가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는 요청에 의해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며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9시, 12시, 15시) 정해진 시간이 되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쉐마(Shema)라는 기도와 쉐모네 에스레(Shemoneh Esreh)라고 하는 두 가지의 기도를 의무적으로 암송했다. 뿐만 아니라 해가 뜨기 전과 해가 진후에는 집에서 반드시 이 두 가지의 기도를 암송해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루에 공적으로 세 번, 자기 집안에서 두 번 하루에 총 다섯 번씩 반드시 드려야 했던 기도문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몰라서, 또는 그 때까지 마땅히 기도드릴 만한 기도문이 전혀 없었기에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언제나 한적한 곳에서, 때로는 새벽 미명에, 또는 아직도 어두웠을 때 그리고 때로는 온밤을 지새우시면서 까지 하늘을 우러러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하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떤 내용의 기도를 그와 같이 하시는 것일까?’, 그러한 기도를 드리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마음에는 ‘나도 주님께서 드리는 저런 기도를 드릴 수는 없을까?’하는 간절한 열망이 제자들 간에 일어났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친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시면서 예수님께서 드리는 그러한 기도를 제자들 또한 반드시 드려야 한다는 것을 본으로 보이셨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필요성의 중대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광야로 가셔서 40주야의 기도를 마치신 후에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실 때에도(마 15:36) 빈들에 계시면서도 기도하셨다. 변화산상의 사건에서도 마태복음 17:1-2에는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변형되사’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누가복음 9:28-29에는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드리신 기도는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인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에 앞서 밤을 지새우시며 바위를 부여잡고 힘쓰며 피땀을 흘리신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기도이다(눅 22:39-44). 특히 (눅 22:39)의 ‘습관을 좇아’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마다 언제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운명하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를 드리시며 그 생애를 마치셨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눅 23:46). 또한 주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승천하신 이후, 이 시간에도 하늘의 지성소에 당신의 피를 드려 놓으시고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의 기도를 하신다고 히브리서 7:25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항상 습관을 좇아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세례요한이 가르쳐준 기도를 하고 있는데, 자신들은 아직도 유대인들의 고유의 전통적인 기도문만을 드리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주님께서 하시는 저러한 기도를 우리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열망의 동기를 가지고 한 제자로 하여금 주님에게 “주님,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요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5. 주기도문을 드릴 때 나의 자세는 어때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금도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권고하신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는 기도의 자세와 정신을 강조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더욱이 중요한 ‘그 나라와 그 의’(마 6:33)를 이루기 위한 절대 불가결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하루 다섯 번 ‘쉐모네 에스레’를 주문 외우듯 했던 그러한 형식적인 기도로 주기도문을 암송할 것이 아니라 ‘주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요청했던 그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열망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그 기도의 모범은 ‘은밀한 기도’였다. 예수님께서 가르친 기도는 외식(外飾)하는 자의 기도가 아니었다(마 6:5). 또한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라’(마 6:6)고 했으며,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식으로 많은 말을 하지 말 것(마 6:7)을 가르쳤다. 그러한 기도 모범의 전형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직접 가르쳐 주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성도들에게 주기도문은 예배의 마침도 아니요, 주문도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기도이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가 이루어진다. 주기도문이 입술의 고백이 아닌 삶의 고백이 될 때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주기도문은 기도의 근본이며 삶의 규범이 되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임하는 통로로 사용된다. 주기도문을 가슴에 안고 기도하면 인생의 나침반되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것이다.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감격을 누리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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