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참변[ 庚申慘變 ]
1920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해 무고한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한·만국경지대에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어 활발한 독립 전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독립군 부대는 만주로 망명해 오는 애국 청년을 포섭해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국내외에서 모금된 국민들의 의연금으로 시베리아로부터 대량의 최신식 무기를 구입함으로써 급속히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그 결과 독립군 부대는 부단히 한·만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입, 일본 군경과 전투를 전개하고, 또 일본의 식민 통치기관을 습격, 파괴함으로써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1920년에 들어서면서 독립군의 국내 진입 작전이 더욱 활기를 띠자 일본은 중국 정부를 위협해 공동으로 독립군 토벌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일본은 정규군 대부대를 만주에 투입해 일거에 한국 독립군을 소탕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1920년 10월 일본은 일본군의 만주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혼춘사변(琿春事變)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를 빙자하여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전멸시키려는 소위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만주 침략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재만 독립군은 이미 일본군의 추격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속이나 중·소국경지대로 부대 이동을 단행함으로써 일본군의 작전은 처음부터 차질을 가져왔다.
더욱이 청산리에서 한국 독립군에 의해 대패를 당한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차별 한인 학살 작전을 감행하였다. 3, 4개월 동안 벌어진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로 수많은 동포가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일본군은 한국인 마을을 포위, 습격한 뒤 모든 남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총이나 창으로 학살했고, 부녀자들은 보이는 대로 겁탈하고 살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든 민가를 소각하고 가축을 약탈함으로써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화룡현 장암동(和龍縣獐巖洞)에서는 28명의 기독교인을 세워 놓고 소총 사격 연습의 과녁으로 만들었으며, 연길현 의란구(延吉縣依蘭溝)에서는 30여 호의 전 주민을 몰살하고 어떤 4형제를 불타는 가옥 속으로 밀어 넣어 태워 죽이기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연길현 와룡동(延吉縣臥龍洞)에 거주하는 교사를 붙잡아 얼굴 가죽을 모두 벗기고 두 눈을 빼내어 누구인지 식별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또, 어린아이를 칼로 찔러 죽이고 시체를 태워 버렸으며 어린 소녀를 폭행한 뒤 죽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은 만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생생하게 폭로되었다. 일본군의 학살 장면을 목격한 미국인 선교사는 “피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개탄하고 있으며, 선교사 마틴(Martin, S.H.)과 푸트(Foote)의 수기에서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다.
또, 당시 이와 같은 일본군의 만행을 취재하기 위해 현지에 갔던 동아일보 기자 장덕진(張德震)을 일본군이 암살한 사건도 일본군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다.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한국인은 3,469명이었다. 그렇다면 3, 4개월 동안 계속된 일본군의 학살로 희생당한 한국인의 수효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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