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대한민국第一號)

서운관 書雲觀

好學 2012. 9. 10. 23:26

서운관 書雲觀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천문(天文)·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

 

천변지이(天變地異)를 관측하여 기록하고, 역서를 편찬하며, 절기와 날씨를 측정하고 시간을 관장하던 곳이었다. 서운관은 1308년 고려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처음 설치되었다. 고려 초기에 천문 등을 관장한 관청은 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史局)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태복감은 1023년(현종 14)에 사천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1116년(예종 11)에 사천감(司天監)으로, 다시 1275년(충렬왕 1)에 관후서(觀候署)로 바꾸어 부르다가, 다시 사천감이라 불렀다. 이어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태사국과 사천감을 통합하여 서운관을 만들었다. 그후 1356년(공민왕 5) 서운관은 다시 사천감과 태사국으로 분리되었으나, 1362년 통합되었고, 다시 1369년 분리되었으나 1372년 병합하여 서운관이란 이름으로 조선시대에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관제를 그대로 이어 서운관으로 부르다가 1466년(세조 12)에 그 이름을 관상감(觀象監)으로 고쳤다. 서운관이란 이름은 〈좌전 左傳〉에 "분지계폐 필서운물"(分至啓閉 必書雲物)이란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고려시대 서운관을 처음 설치할 때에는 제점(提點:정3품)·영(令:정3품)·정(正:종3품)·부정(副正:종4품)·승(丞:종5품) 각 1명, 주부(注簿:종6품) 2명, 장루(掌漏:종7품) 2명, 시일(視日:정8품) 3명, 사력(司曆:종8품) 3명, 감후(監候: 정9품) 3명, 사진(司辰:종9품) 2명을 두었다. 관직의 이름에서 역법·시법·기후관측·태양관측 등을 나누어 맡았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서운관은 관측 시설로 개성에 첨성대를 두고 있었으며, 일식과 월식, 5행성의 움직임, 혜성과 유성의 출현 등을 관찰하여 상당한 양의 기록을 〈고려사〉 천문지에 남기고 있다. 조선 건국 후에도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1392년(태조 1)에 서운관을 설치했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이 관청은 주로 천문·재상(災祥)·역일(曆日)·추택(推擇) 등의 일을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1818년(순조 18) 천문학자로 관상감에 근무하던 성주덕(成周悳)이 편찬한 〈서운관지 書雲觀志〉에는 보다 자세하게 천문·지리·역수·점주(占籌)·측후·누각 등의 업무를 관장했다고 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다. 특히 점주는 길흉을 점치는 것인데, 당시 천문이나 지리현상을 해석하는 한 단면을 보여준다. 또 〈서운관지〉에 의하면 세종 때는 금루(禁漏)의 일을 천문에서 분리했었는데 나중에 중국의 흠천감(欽天監)을 본받아 금루를 다시 천문에 합속시켰다고 하며, 세조 때에 명칭을 관상감으로 바꾸면서 금루를 다시 천문에서 분리했다고 한다. 세종에서 세조 때까지 많은 변화가 서운관에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운관은 영의정의 책임 아래 제조(종2품 이상) 2명, 당상(堂上:정3품 이상) 무정원, 정(정3품) 1명, 검정(종4품) 1명, 판관(종5품) 1명, 주부(종6품) 1명, 직장(直長:종7품) 1명, 봉사(奉事:종8품) 2명, 부봉사(정9품) 1명, 참봉(參奉:종9품) 2명, 이외에 천문학교수 1명, 지리학교수 1명, 천문학훈도 1명, 지리학훈도 1명, 명과학훈도 1명, 체아교수(遞兒敎授) 2명 등을 두었다. 관측 시설로는 경복궁과 북부광화방(北部廣化坊)에 간의대(簡儀臺)를 두어 많은 천문현상을 관측했으며, 그 기록들을 〈실록〉에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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