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民族主義 ]
민족의 구성원이 민족국가를 형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투쟁과정에서의 의식과 운동. 민족주의는 그 속에 이념과 운동을 동시에 포용하고 있다. 민족이념으로서는 단일적인 민족구성원이 독립적인 민족국가를 형성하여 민족정치·민족경제·민족문화를 전개하려는 욕구를 그 본질적인 성격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정치는 전체 민족구성원이 제국주의적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독립국가를 구성하여 구성원 모두가 대등하게 정책결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수립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민족경제는 민족국가가 독립적인 경제권을 형성하여 민족구성원의 물질적인 욕구와 그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경제적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경제적인 자립체제를 의미한다.
한편, 민족문화는 그 민족구성원이 전통적으로 지속시켜 온 문화적 성격을 현대적으로 합리화하여 민족구성원의 통합의식과 발전의지를 승화시킬 수 있는 문화양식을 의미하게 된다.
이처럼 민족주의의 이념은 자연히 민족정치·민족경제·민족문화 등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그 민족 나름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가지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민족주의는 어떤 일률적인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민족주의를 이렇게 개념규정할 경우, 여기에는 자연히 그것의 전개가 대체로 근대적인 시민사회의 등장과 시기를 같이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즉, 민족주의는 대체로 서구사회에서는 프랑스대혁명을 계기로 하여 표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다음의 4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쳐왔다.
제1기는 프랑스대혁명에서 나폴레옹전쟁에 이르는 기간으로, 여기에서는 주로 중세적인 카톨릭체제에서 벗어나서 민족 단위의 민족국가를 분리, 형성하려는 성격을 보여주었다.
제2기는 1870년대에서 제1차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였던 1914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유럽사회에서는 각 민족국가가 자본주의에 의한 세계발전을 추구하여 제국주의적인 영토분할에 치중하였던 기간이었다.
제3기는 1914년에서 시작하여 대체로 제2차세계대전의 시기였던 1940년대 초반까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특징은 후발산업화국가로서 제국주의적인 패권장악을 위한 경쟁에 참여하였던 파시즘체제의 국가가 선발자본주의국가가 점유하고 있었던 국제사회에서의 기존이익권을 잠식함으로써 새로운 제국주의적인 패권장악을 위한 경쟁을 보여주었던 시기였다.
그 다음 제4기는 대체로 1945년의 제2차세계대전의 종전에서부터 시작하여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던 이른바 국제관계에서의 동서냉전시기였다. 특히, 이 기간에는 유럽이나 미국의 식민지국가로 있었던 아시아·아프리카의 수많은 신생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였던 이른바 비서구의 신생국 민족주의가 팽배되었던 기간이었다.
이들 비서구 신생국 민족주의는 대체로 정치적으로는 반제국주의적인 비동맹 중립노선에 의한 독립국가의 발전을 추구하였고, 경제적으로는 반자본주의적인 민족경제체제의 수립에 치중하였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반백인문화적이며 반기독교적인 고유 전통문화의 승계, 발전에 치중하였다.
현재는 민족주의의 제5단계로서, 이는 대체로 제3세계주의의 저항과 그것을 제압하려는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제국주의적인 다국적 기업의 대응이라는 경제적인 갈등이 중심이 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전의 식민지였던 오늘의 제3세계에 대하여 제국주의 국가는 그들이 식민지시대부터 구축하였던 매판적 지배세력을 지원함으로써 신식민주의적 영향력을 지속하려 하며, 이것에 맞서서 이들 제3세계에서는 민중적 민족주의의 강력한 대두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가 한국에서는 대체로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하여 이른바 식민지민족주의적인 범주로부터 구체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
즉, 당시 제국주의 세력으로서 미국·영국·프랑스 등은 물화(物貨)의 교역을 내세운 약탈외교와 종교적 포교를 내세운 명분논리를 중심으로 하여 식민화에 주력하였고 이들에 의한 병인·신미 양요는 조선왕조를 위기 속으로 몰고 갔다.
특히, 이들 제국주의적인 세력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일본의 강압적인 침탈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국가위기에 대응하려는 의식을 고양시켰다. 여기에서 나타난 움직임으로는 보수적인 지배세력의 일부로부터는 척사위정론이 대두하였다. 이들은 강력한 화이관(華夷觀)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문물의 배척을 주장함과 동시에 주체적인 왕조사직의 보전을 주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일부 지배세력은 서양의 문물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서 부국강병의 자주개명 국가를 발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 중 전자의 경우가 주로 그 뒤 일본의 제국주의자에 저항하는 의병투쟁의 핵심세력으로 활동하였으며, 후자의 경우에도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하는 성격을 보여주었다.
한편, 피지배계급에 속하였던 농민층에서는 식민지 민족운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반제·반봉건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당시의 부패한 지배체제와 제국주의 세력을 공격하는 농민전쟁을 전개함으로써 한국민족운동의 기본적인 성격을 주조하게 되었다.
이들 세 갈래의 민족운동이 1919년의 3·1운동에서 합일됨으로써 마침내 국권을 회복하려는 본격적인 민족운동의 성격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서부터 한국민족주의는 이념적인 면에서나 운동사적 의미에서 일정한 논리성을 부여받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한국민족주의는 그 이념적인 성격으로, 첫째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자주독립국가를 이룩하려는 민족국가의 형성을 들 수 있다. 둘째, 발전적이고 문화사회로 지향할 수 있는 근대적인 시민사회로의 발전을 들 수 있다. 셋째, 민족의 전체구성원의 대등한 인간적인 가치를 실현하려는 공동체의 확립을 들 수 있다. 넷째, 국제사회에서 민족국가로서의 일정한 기여를 통하여 세계평화를 수립하려는 참여의지를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민족주의적인 운동은 3·1 운동 이후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동시에 이 시기에서부터 한국의 민족운동은 전통적인 명망가 중심의 보수적인 계보를 한편으로 하고, 새로이 등장한 청년층의 진보적인 세력이 중심이 된 진보적 민족운동으로 양분되기 시작하였다.
전자는 주로 국내에서 단계론적 관점에서 국권을 회복하려는 애국계몽운동에 치중하였으며, 그 중 해외에서는 전체 민족의 단일적 국가기관으로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일면으로는 무력투쟁으로 일면으로는 외교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만주와 중국 등지에서의 항일투쟁적인 군사활동도 격렬하게 보여주었다.
한편, 후자의 경우 국내에서는 1930년대부터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적인 성격으로 기울어졌으며 이들은 코민테른의 지도하에서 활동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그 뒤 광복 이후 국제관계의 동서냉전체제에 의하여 민족운동은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국제사회의 특정 강대국의 지원을 받았던 공산주의자와 자본주의자에 의한 민족분단으로까지 전락되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그 뒤 민족주의는 한국에서는 1960년대 이후 국가민족주의적인 성격으로 발전하였고, 그 결과 경제성장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한편, 북한에서는 1970년대부터 김일성(金日成)의 통치적인 지배이데올로기의 관념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이른바 ‘주체사상’으로 정립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갈등은 사실상 한국민족주의의 가장 심각한 위기로서, 이것에 대한 극복 여부가 한국민족주의의 미래를 설정하게 되는 기반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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