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상[ 社會思想 ]
사회 문제에 대한 관점과 사상체계.
우리민족의 사회사상은 고대에는 종교사상의 껍질 안에서 형성 발전되었고, 중세에는 종교사상과 철학사상의 틈 속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후기 실학사상이 대두할 때부터 독자적으로 사회사상 본래의 모습과 내용 표면에 드러내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고대 고조선시대부터 1945년까지 한국민족의 사회사상을 형성·발전시킨 기본 흐름만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시대 사회사상의 특징으로는, ① 천신(天神)숭배-태양숭배사상, ② 영혼숭배-조상숭배사상, ③ 선교사상(仙敎思想), ④ 〈8조금법 八條禁法〉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초기 규범사상 등을 들 수 있다.
고조선사회의 사회성원들은 원시 농업의 시작과 함께 자연의 거대한 위력과 태양의 은혜로운 위력에 감복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천신(하느님)과 태양을 숭배하는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은 세계가 천신에 의해 창조되고 천신의 의사와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사회의 최고통치자인 임금은 천신의 아들로서 천신의 의사를 대변하여 사회를 통치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천신의 가장 위대하고 분명한 실체는 태양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서는 천제인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지상으로 내려와 고조선을 세우고, 최고 통치자인 단군으로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바탕으로 고조선을 통치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부여의 해모수(解慕漱)나 고구려의 주몽(朱蒙),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가 모두 태양의 아들로서 햇빛과 관련하여 출생한 신화를 가지고 있는 것도 모두 천신·태양 숭배사상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모두 천신과 밝은 태양을 숭배하는 공통적인 사상을 정립하였다. 그들은 천신과 태양신은 그들의 생활에 필수적인 농작물의 풍흉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들 종족의 생명도 수호해 주는 전지전능한 최고의 신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생활에서 천신과 태양신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을 형성·발전시켰으며, 제천의식(祭天儀式)은 임금이 집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지배양식을 수립하였다.
부여족의 영고(迎鼓), 고구려족의 동맹(東盟), 예족의 무천(舞天) 등은 모두 천신·태양신 숭배사상에 바탕을 두고 추수에 대해 감사하는 제천의식과 축제였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사회의 사람들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융합으로 구성되었으며, 인간이 죽으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육체만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불멸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영혼숭배사상이 널리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가족생활의 계승체계가 확립되고, 약간의 재산이 축적되자 조상의 영혼에 대한 숭배사상이 형성되었다.
또 조상의 영혼은 후손의 복을 돌본다는 사상도 형성되어 조상의 영혼을 잘 모심으로써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조상의 영혼을 숭배하며, 조상을 후장(厚葬)하고 그가 사용하던 많은 부장품들을 함께 묻는 관습이 성행하였다.
고대사회의 무덤들이 씨족 또는 가족 묘지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여기서 많은 부장품이 발굴되는 것은 영혼숭배사상과 조상숭배사상이 고조선시대 사회성원들의 보편적 사상이었음을 나타내 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또 고조선시대의 사회성원들도 다른 지역의 고대인과 마찬가지로 일월성신(日月星辰)이나 산천초목에 정령(精靈)이 있다고 보는 애니미즘(animism)을 공유하였다.
또한 그들은 선사상(仙思想)도 형성하였다. 고대인은 건강하게 오래 생존하기 위하여 마음을 위로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만주의 자연에서 풍부하게 나오는 좋은 약재를 발굴, 복용함으로써 이러한 생각을 더욱 강하게 형성, 발전시켰다.
중국 고대의 ≪산해경 山海經≫이나 ≪해내십주기 海內十洲記≫ 등에서 고대 우리 나라 여러 종족들의 나라를 ‘선약이 많이 나서 사람들이 오래 살고 병들지 않고 늙지 않는 나라’, ‘선인이 많이 살고 있는 나라’로 기록한 것은 고조선시대의 고대인들 사이에 선교사상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의 선인(仙人)이나 선가(仙家)들은 인간의 수명과 건강은 귀신이나 정령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섭생과 선약(仙藥) 같은 좋은 약재를 복용하는 데서 얻는 것임을 강조하여 고대 한의학과 약학을 형성 발전시키는 데도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
고조선시대 사회성원들은 또한 일정한 법규범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고조선사회에서 통치자들에 의해 〈8조금법〉으로 제도화되었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3조뿐이다.
그 3조는 ①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②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③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 단, 자속(自贖:금품을 내고 죄를 면함)하려는 자는 1인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 등이었다.
부여의 법률도 현재 4조가 전해지고 있는데, ①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 ② 절도를 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한다. ③ 간음을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④ 부인의 투기(妬忌)를 특히 미워하여 사형에 처하되, 그 시체를 서울 남쪽 산 위에 버려서 썩게 한다. 단, 그 여자의 집에서 시체를 가져가려고 하면 우마를 바쳐야 한다 등이다.
이 법률조항들은 고조선이나 부여 등의 고대사회가 사유재산제도, 가부장제적 가족제도, 노예제도를 근본으로 한 사회였음을 나타내 주며, 이를 보호하기 위한 법규범사상이 정립되어 있었음을 알려 주는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생활규범과 관련하여 중국의 고대 기록인 ≪산해경≫에서는 고조선을 ‘군자의 나라’라고 하고, “서로 사양하여 다투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위서 魏書≫에서는 부여에 대하여 “그 사람들이 근면하고 온후하여 침범하지 않는다.”고 하고, 예족에 대해서는 “백성들이 문을 열어놓고 살아도 사람들이 절대로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삼국지≫ 〈위서〉 변진조에서는 “사람들이 길에서 행인을 만나면 누구나 걸음을 멈추고 길을 양보한다.”고 했으며, ≪신이경 神異經≫에서는 “사람들이 언제나 공손하게 앉아 서로 범하지 않으며 서로 칭찬은 하되 헐뜯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서 漢書≫에서는 “고조선의 부인들은 정신(貞信:정절과 신의)하고 음탕하지 않다.”고 하였으며, ≪후한서 後漢書≫에서는 “예족의 부인들은 정숙하고 믿음직하다.”고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의 이러한 상무사상은 고구려가 중국의 한·위·연·수·당 나라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발전하는 데 커다란 사상적 힘이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그때까지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오던 선교사상 외에 372년(소수림왕 2) 전진(前秦)에서 승려 순도(順道)가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들어와 불교사상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불교는 고구려 왕실에서 백성을 교화하는 통치사상으로 널리 보급되었으며, 주로 대승불교의 하나인 삼론종(三論宗)이 널리 퍼졌고, 이 밖에 열반종(涅槃宗)과 법화종(法華宗)도 유포되었다.
또한 372년에는 수도에 태학(太學)을 세우고 지방에도 경당을 세워 유교사상을 가르침으로써 유교의 충효사상(忠孝思想)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삼강오륜의 유교도덕사상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유교사상의 보급과 함께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도 들어와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신봉되었다.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 보이는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의 사신도는 왕이나 귀족의 영혼을 잡귀신의 침범으로부터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생각하여 그린 것이며, 음양오행사상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백제에서는 일찍이 중국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유교사상과 음양오행사상을 받아들여 오경박사(五經博士) 등 박사제도가 있었으며, 경(經)·자(子)·사(史) 등의 서적이 있었다. 백제가 한문 경전과 유학을 일본에까지 전해 준 사실에서도 백제에서 유교사상이 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음양오행설에 대해서는 역박사(易博士) 또는 음양박사(陰陽博士)를 두어 모든 자연현상과 사물현상을 다섯 가지 요소인 수(水)·화(火)·토(土)·목(木)·금(金)의 결합과 조화로 설명하고, 음과 양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사상을 보급하였다.
또 384년(침류왕 1)에는 동진(東晉)에서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불교를 전하자 왕실이 앞장 서서 이를 수용하여 보급하였다. 백제에서 성행한 불교는 소승불교의 하나인 계율종(戒律宗)이었다.
특히, 탁월한 불교사상가인 겸익(謙益)은 529년(성왕 7) 인도에 가서 5년간 계율종을 연구하고 돌아와 28인의 고승들과 함께 계율종 불교를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계율종은 주로 불교도들의 생활방법에 대한 규율과 규칙을 연구하는 종파로서 기본 경전인 ≪사분율≫에는 무려 250여 가지의 계율이 설명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생물을 죽이지 말 것,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 것, 음란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술 마시지 말 것 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계율을 강조한 것은 백제 왕실에 의해 통치와 교화의 수단으로도 널리 보급되었다.
백제 후기에는 이 밖에도 성실종(成實宗), 삼론종, 열반종 등이 보급되었다.
신라에서도 왕실과 귀족들이 처음에는 부족적 전통을 지닌 선교(仙敎)와 무격사상(巫覡思想)에 의존했으나, 417∼457년(눌지왕대)에 고구려를 거쳐 온 아도(阿道)에 의해 불교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방에서 개인이 전도하는 정도로 박해 속에 끝나고 말았다.
그 뒤 양(梁)나라의 사신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해 왕실에 불교가 전해지고, 왕실은 불교를 수용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527년(법흥왕 14)에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하였다.
이것은 왕실의 패배요 귀족의 승리였지만, 이차돈의 순교를 전환점으로 왕실은 귀족의 반대를 누르고 불교를 공인하였다. 왕실이 불교를 수용하고 보급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던 것은 지방 부족의 영향력을 줄이고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을 수립하면서 하나의 왕을 받들고 하나의 불교사상에 귀의하는 동일한 신도라는 신념을 불어넣는 국가통합 이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라의 불교는 처음부터 특히 호국호왕불교(護國護王佛敎)의 특성이 강했으며, 백제와 마찬가지로 계율종이 주종을 이루었다.
국왕은 국통(國統), 주통(州統), 군통(郡統) 등 승관(僧官)을 두어 승려를 통제하면서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보급하였으며, 불교 승려들도 적극적으로 국왕의 통치에 봉사하였다.
따라서 호국경(護國經)으로 유명한 《인왕경(仁王經)》 같은 경전이 지극히 존중되었으며, 백좌강회(百座講會:仁王會)나 팔관회(八關會) 등 국가의 평안을 비는 의식이 행해졌다. 수많은 불사 중에서도 황룡사(皇龍寺)와 같은 것은 모두 호국의 도량으로서 규모를 크게 한 것이었다.
불승들은 황룡사9층탑이 9개국을 정복한 후 그 조공을 받은 상징이라고 국민들을 교육하였다. 또 화랑에 대해서도 미륵불이 환생하여 화랑이 되었다는 신념을 불어넣었으며, 전쟁에 임하면 특히 용감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승려들은 특권을 가지고 국왕의 정치적 고문 역할도 수행했는바, 〈걸사표 乞師表〉를 쓴 원광(圓光), 대국통으로서 황룡사9층탑 건축을 건의한 자장(慈藏) 등 대표적인 승려였다.
원광은 화랑도를 위하여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① 임금에게 충성할 것〔事君以忠〕, ② 부모에게 효도할 것〔事親以孝〕, ③ 친구간에 신의를 지킬 것〔交友以信〕, ④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을 것〔臨戰無退〕, ⑤ 살생을 함에 택하여 할 것〔殺生有擇〕 등이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세속오계에는 불교사상뿐만 아니라 유교사상이 강력하게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신라에는 유교사상도 들어와서 불승들에 의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혼합되어 채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원측(圓測)을 대표적 승려로 하는 유식종(唯識宗)도 보급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오면 불교는 지배적 사상으로 더욱 성행하였다. 통일신라 시기의 불교사상에서는 5개종이 두드러졌는데 열반종(개종자 普德), 계율종(개종자 慈藏), 해동종(海東宗 또는 法性宗, 개종자 元曉), 화엄종(華嚴宗, 개종자 義湘), 법상종(法相宗, 개종자 眞表) 등이 그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국왕에서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국민들이 불교를 존중하였으며, 당나라나 또는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불교사상을 연구한 고승이 많았다.
특히 의상(義湘)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귀국한 뒤 화엄종을 개종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여 이를 화엄종의 중심 도량으로 삼았다. 그 후 10대 사찰을 지어 전도하고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골품 귀족들에게 가장 두터운 신앙과 지지를 받았다.
경덕왕 때 진표(眞表)는 유가론(瑜伽論)과 유식론(唯識論)을 주요 경전으로 하는 법상종을 개종하여 신도들이 크게 깨우쳤다. 그러나 통일신라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불교사상가는 역시 원효(元曉)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법성종 계통의 사상뿐만 아니라 화엄종을 비롯한 반야(般若)·법화(法華)·열반(涅槃)·미륵(彌勒)·무량수(無量壽)·아미타(阿彌陀)·금강삼매(金剛三昧) 등의 경전 내용에 해석을 붙인 주소(註疏)를 달았으며, 어느 한 경전과 한 학설에 의하지 않고 모든 경전과 학설을 연구한 뒤에 여러 종파의 모든 모순과 다툼을 융화·통일시키는 새 학설과 사상으로서 ‘일심(一心)’사상을 창안하였다.
그의 ‘일심’은 인간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사회와 인간을 초월하면서도 세계의 시원을 이루며, 동시에 세계를 지배하는 일원적인 절대적 정신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통일사상으로서 신라의 통일과 걸맞는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원효는 이례적으로 당나라에 유학하지 않고 국내에서만 연구하여 매우 자주적이며 독창적인 새 불교사상을 창안하였다. 또한 그는 불교개혁을 주장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는 정토교(淨土敎)를 보급하였다.
정토교는 글을 배우지 못하고 읽을 줄 몰랐던, 당시 압박받는 민중들에게 불경의 깊은 교리를 터득하지 못하더라도 아미타에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염불만으로 아미타불이 사는 서방정토(극락)로 왕생할 수 있다는 단순한 신앙 중심의 교리를 주창하여 큰 환영을 받았다.
원효는 파계한 뒤 신라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민중불교로서의 정토교를 널리 보급하여 백성들에게 불교사상을 전파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통일신라 말기에 오면서 선덕여왕 때 들어온 선종(禪宗)이 성행하였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오도(見性悟道)를 주창하면서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9개파가 성립하여 보급되었다.
통일신라 시기의 새로운 경향 가운데 하나는 유교사상의 정치 이념을 채용하여 전제적 왕권을 확립하려고 시도한 사실이다. 통일신라는 682년(신문왕 2) 국학(國學)을 설립하고, 성덕왕 때는 당나라에서 공자(孔子)와 그의 72제자 화상을 가져다 국학에 안치하였다.
이어 경덕왕 때는 국학을 태학감(太學監)이라 개칭하고 박사(博士)와 조교를 두어 15세부터 30세까지의 귀족 자제들에게 3과로 구분하여 유교경전과 유교사상을 교육하였다.
이러한 교육기관 정비를 기초로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는 관리채용 국가시험제도를 수립하여 합격자들을 3등급으로 나누어 관리로 채용하였다.
그러나 통일신라는 골품제사회였기 때문에 골품귀족들의 반대로 독서삼품과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강수(强首)와 설총(薛聰) 등 유학의 대가가 나왔으며, 설총은 이두(吏讀)로써 경서를 훈독하는 방법을 창안하였다. 8세기 초 김대문(金大問)은 독자적으로 신라의 역사와 풍토에 관한 많은 저술을 하였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최치원(崔致遠)이 독자적인 유학사상을 정립하여 사물의 시원으로서 태극설(太極說)을 주장하였다. 또 생지설(生知說)을 부정하여 사물을 인식하는 데 중요한 것은 배워서 알게 되는 후천적인 경험지식이며, 배움에는 존귀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골품제도를 비판하고 과거제도 시행 등을 주장한 10개조의 시무책을 제안하였다.
한편, 통일신라 말기에는 도선(道詵)이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창도하여 지방호족들 사이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사회사상의 큰 특징은 그때까지 불교사상의 지배와 함께 유교사상이 크게 성장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성리학(朱子學)이 도입되어 불교와 유교 사이에 사상적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초기의 불교는 신라불교를 그대로 계승하여 화엄종을 중심으로 한 교종(敎宗)과 지방호족과 연관된 선종이 대립하고 있었으며,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확립된 뒤에는 문벌귀족들 사이에서 법상종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고려 불교가 독자적인 사상적 특성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의천(義天)이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지양한 교선일치를 주장하면서 ≪법화경≫을 기본경전으로 하는 천태종(天台宗)을 널리 폈을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불교, 유교, 도교를 공부하고, 또 송나라에 유학하여 화엄과 천태를 연구하였다. 귀국한 후에는 불교의 혁신을 주창하면서 삼체원융설(三體圓融說)과 지관(止觀)에 의한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적극 추구하여 한때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또한 “외계에서 받은 그릇된 인식을 없애 버리면 모든 사람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성론(佛性論)을 주창하여 한때 민중 사이에도 천태종을 널리 보급하였다.
무신정권이 수립된 뒤 선종이 최씨 무신정권(武臣政權)과 제휴하여 다시 성행하고 타락 양상을 보이자 선종 내부에서 지눌(知訥)이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지눌은 진심(眞心)이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여 이를 우주의 본체로 보는 사상을 전개하고, 조계종(曹溪宗)을 성립시켜 종풍을 크게 떨쳤다.
지눌의 사상은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고〔先頓悟〕 이를 바탕으로 수련을 계속해야 하며〔後漸修〕, 이 수행을 위해서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아야 한다〔定慧雙修〕는 것이다.
지눌은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먼저 선종을 통합하고, 이어서 선종을 위주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으며, 불교계의 일대 혁신을 도모하여 신앙결사로써 수선사(修禪社)를 조직하고, 이곳을 통하여 불교를 기층사회에 널리 확산시키려고 하였다.
지눌의 뒤를 이은 혜심(慧諶)은 무심(無心)의 개념을 정립하여 선사상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무신정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몽고의 침략에 대한 항쟁에서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왕실과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수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여러 종류의 불교행사를 거대한 규모로 개최하여 왕실의 통치에 대한 지지를 시위했으며, 대장경을 조판하여 왕실의 이념적 지도력을 과시하였다.
원래의 고려대장경은 현종 때부터 문종 때까지 4대에 걸쳐 만든 것인데 몽고 침입 때 소실되고, 현재 해인사에 남아 있는 팔만대장경은 고종 때 강화의 피난처에서 다시 새긴 것이다. 이것은 내용의 정확함과 자체(字體)의 아름다움, 판목 제작의 정교함이 세계에서 으뜸으로 인정되고 있다.
또한 과거제도를 시행함에 따라 승과제도를 창설하여 합격한 승려들에게는 법계(法階)를 주고, 고승은 국사(國師)나 왕사(王師)로 삼아 왕의 자문역을 맡겼으며, 승려들에게는 토지를 나누어 지급하고 역(役)의 의무를 면제해 주는 특권을 주었다.
이에 따라 왕자와 귀족들도 승려가 되는 일이 많았고, 사원(寺院)은 거대한 면세 혜택을 받는 사원전(寺院田)을 소유함으로써 매우 부유해졌다. 사원들은 토지에서 들어온 수입으로 불보(佛寶)나 장생고(長生庫) 등의 고리대를 비롯하여 온갖 방법으로 부를 늘려 나갔다.
사원들은 이처럼 증가된 부를 지키기 위해 무력이 필요하게 되자 승명(僧冥)까지 두어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고려 말기에 오면서 사원의 부패와 타락이 만연하고 국민들과의 사이에 모순이 첨예하게 격화되었다.
고려시대는 유교가 통치이념의 하나로 채택되어 크게 발달하였다. 광종이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유교경전이 시험과목이 되고, 성종이 유신 최승로(崔承老)의 보필을 받아 숭유정책(崇儒政策)을 실시함에 따라 유교가 정치사상체계로 성립되고 학문적으로도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성종 때는 종합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을 창설하고 경사육학(京師六學)이라 하여 국자학(國子學), 태학(太學), 사문학(四門學), 율학(律學), 서학(書學), 산학(算學)의 단과대학을 두었다.
국자학, 태학, 사문학에서는 ≪주역≫, ≪시경≫, ≪서경≫, ≪예기≫, ≪춘추≫, ≪효경≫, ≪논어≫ 등 유교 경전을 주로 교육하고, 산수와 시무책 등을 겸하여 배우게 함으로써 유학사상을 발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학 설립자는 대개 문종 때의 과거시험관 경력을 가진 사람이 많았으므로, 과거시험을 공부하는 귀족 자제들이 다투어 입학하여 유교경전을 배움으로써 역시 유학사상을 발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고려의 유학자들은 과거 준비에 치중하여 유학의 사상과 이론면에서는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새로이 지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체계가 불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대표적 유생인 최승로는 28개조의 시무책(時務策)을 지어 유학사상을 정치 개혁에 도입하였다. 또한 그는 귀족들이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매혹되어 속죄를 해서 내세의 복을 구하겠다고 귀중한 재화를 탕진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불교행사를 벌이는 것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정치제도와 지방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중앙집권적 정치·행정 제도를 수립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최승로는 불교를 부정하지는 않고, 불교는 자신을 수양하는 기본이요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라고 하여, 유교와 불교의 병립을 설파하였다.
2세기 후 대유학자인 이규보(李奎報)는 그의 저서들을 통해 귀족 관료들이 농민을 착취하는 것을 날카롭게 비판했으며, ≪동명왕편≫에서는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高朱蒙)의 역사를 서사시로 정리하여 민족적 자부심과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그도 불교는 마음의 수양에 유익하다고 하여 불교와 유교의 병존을 강조하였다.
고려시대 유학사상의 한 특징은 성리학(性理學, 朱子學)이 도입되어 성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리학은 송나라의 주자(朱子)가 체계화한 것으로 우주의 근본원리와 인간의 심성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신유학이었다.
고려에 도입된 초기의 성리학은 본래 송나라의 주자학이 원나라에서 한 차례 걸러진 것으로 형이상학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이기론(理氣論)에 대한 사변적 연구보다는 일상생활에 관계되는 실천적 덕목이 강조되어, 당시 불교와 결합한 권문세족들의 횡포와 불교의 타락에 분개하고 있던 신흥사대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이색은 사물의 기원과 변화를 무극·태극설로 설명하면서도,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見性)과 유교에서 말하는 양성(養性)은 같은 뜻과 근원을 가진 것이라고 하여 유교사상과 불교사상의 타협을 모색하였다.
정몽주도 사원의 폐해를 비판했으나 이론적으로 불교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도전은 성리학과 시무론에 대한 저술뿐만 아니라 ≪심기리편 心氣理篇≫, ≪심문천답 心問天答≫, ≪불씨잡변 佛氏雜辨≫ 등 직접 불교를 배척하는 저술을 하였다.
정도전은 우주 전체를 논할 때는 이(理)가 우선됨을 말했으나 불교를 비판할 때는 사물의 본질이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여, 사람이 죽는 것도 육체의 기가 흩어짐에 의한 것이요, 육체가 소멸되면 정신도 소멸된다고 지적하고, 불교의 영혼불멸론에 기초한 인과응보설이나 극락지옥설을 황당무계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백성이 예절을 갖추려면 먼저 생업을 갖고 풍족해야 함을 강조하고, 가장 중요한 생업으로서 농본사상(農本思想)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당시 대토지 소유자들이 토지겸병을 자행함으로써 부자는 수천 수백을 연하고,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어 부자들의 땅을 소작하니, 경작자는 하나인데 소유자는 둘이 되어 부익부 빈익빈하고 나라가 피폐해지며, 농민은 유민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토지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불교를 인륜에 어긋나는 도라고 하여 이를 배척하고 유교로 교체할 것을 주장했으며, 불교와 결합된 귀족과 대토지 소유자를 모두 비판하였다.
고려시대는 이 밖에도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도교가 불교와 하나가 되어 국가의 의식과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신봉되었다.
또한 참위풍수설(讖緯風水說)이 주로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했으며, 음양오행설도 지식층에 성행하여 한때 조정에서는 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史局)을 두어 순시, 법회, 혼인, 제사 등의 길흉과 풍수 사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새 왕조를 수립한 신흥사대부들은 불교를 철저히 배척·탄압하고, 유교(특히 성리학)에 의한 새 왕조의 체제를 확립하는 데 진력하였다.
태조는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승려가 증가하는 것을 방지했으며, 태종은 대탄압을 가하여 전국에 242개의 사찰만 남겨 두고 그 밖의 수많은 사찰들을 폐쇄하고 그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를 모두 몰수하였다.
불교는 세종과 세조 때는 왕의 개인적 신앙으로 탄압이 완화되었으나, 그 뒤 최후의 보호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은 후 탄압을 받고 완전히 몰락하여 승려는 천민 계급으로 떨어졌으며, 불교는 부녀층의 신앙 대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반면에, 도교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하여 소격서(昭格署)라는 관청을 두고 도교행사를 관장하게 했으며, 일부 선비들 사이에서 신봉되어 자주적인 사상의 한 흐름이 되었다.
조선왕조의 개창으로 정권을 장악한 신흥사대부들은 유교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하였으나 주자학의 이기론보다는 실용(實用)적인 측면을 특히 강조하였다. 통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를 간행하고, ≪가례 家禮≫를 가족제도 운영의 규범으로 준수하도록 하여 충·효를 백성을 교화하는 최고 목표로 추구하였다.
실용적인 사상의 팽배는 모든 문화와 학문과 사상 부문에 미쳐, 세종 때는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라는 민족문화사의 획기적인 업적이 성취되었다.
또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國朝寶鑑≫, ≪동국통감 東國通鑑≫, ≪팔도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삼강행실 三綱行實≫, ≪농사직설 農事直說≫, ≪칠정산 七政算≫,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 ≪의방유취 醫方類聚≫, ≪동국병감 東國兵鑑≫, ≪병장도설 兵將圖說≫ 등을 비롯한 다수의 서책 간행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매우 실용적인 학문과 사상이 보급되었다. 비단, 사회·정치 사상뿐만 아니라 과학, 문학, 예술, 음악 등에서도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유교사상가 가운데 권근은 주리론(主理論)을 펴고 김시습(金時習)은 주기론(主氣論)을 폈으나, 이러한 성리학의 사변적 주장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고, 신왕조 건설을 위한 실용적 유학사상이 사회를 널리 지배하였다.
15세기 말 사림들이 중앙정계 진출을 기도할 시기에도 이 학풍은 여전히 이어졌다. 대표적 사림인 조광조(趙光祖)는 변법(變法)을 강조하고 훈구파를 겨냥하여 토지겸병을 반대하고 한전론(限田論)을 주창했으며, 신분차별과 조세수취도 경감하여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몇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은 뒤 성리학과 사상계는 이기론을 주제로 한 존재론적·사변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진 채 이 방향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이 시기의 성리학은 주리론(主理論, 理一元論), 주기론(主氣論, 氣一元論),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주리론은 이언적(李彦迪)이 본격적으로 주장하여 이황(李滉)을 통해 대성하였다. 이황은 이(理)를 우주의 기원과 최고지배자로 보고, 기(氣)와의 관계에서 이는 기의 주재자이며 기는 이의 재료이고, 이는 기의 장수이며 기는 이의 병졸이고, 이는 귀한 것인 데 비해 기는 천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천리(天理)로부터 받은 본연지성(本然之性)의 도덕인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출발점인 4단(四端:惻隱之心·羞惡之心·辭讓之心·是非之心)은 인간을 항상 선(善)한 행동으로 이끌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적 기질에서 나오는 7정(七情:喜, 怒, 哀, 樂, 愛, 惡, 欲)에 의해 항상 장애를 받아 악한 행동이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은 수양을 통하여 본연지성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여 내면적 수신(修身)을 극력 강조하였다.
그는 사회·정치제도에 대해서는 인왕(仁王)을 이의 최고 체현자라고 받들었다. 신분제도와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인간·사회 관계는 불변의 이를 발현한 것이므로 이 질서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여 보수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황 문하에서는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등을 비롯한 다수의 유학사상가들이 배출되어 퇴계학파(일명 영남학파)가 형성되었다.
한편, 주기론의 대표적 사상가는 서경덕(徐敬德)이었다. 그는 우주와 모든 사물은 물질적 기(氣)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는 종말도 소멸도 없는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기는 그 안에 양과 음을 포함하고 있어 이것의 생극(生克)에 의해 사물이 운동하고 변하는 것이라는 주기론(기일원론)을 전개하였다.
이이는 이황과 서경덕의 이론을 다 같이 비판하면서 이와 기는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양자가 다 같이 우주와 사물의 시원을 이루고, 이와 기에는 선후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다.
이이는 또한 인간이 이에서 받은 본연지성의 도덕항목인 인·의·예·지의 4단과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나온 7정을 구분하는 이황의 학설에 반대하여, 인·의·예·지의 4단도 모두 인간의 육체적 감정의 작용으로서 7정 밖에 따로 4단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이는 사회·정치 문제에 대해서도 제도와 법은 오래되면 반드시 폐해가 생기고, 폐해가 생기면 마땅히 고쳐야 한다고 하여 변법사상을 주창하였다.
그는 당시의 벌열(閥閱:공로가 많고 벼슬을 많이 지낸 집안)과 양반관료들의 가렴주구를 날카롭게 비판했으며, 그의 변법사상에 기초하여 토지소유제도, 서얼차별제도, 노비제도, 조세제도, 인재등용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남쪽의 일본과 북방의 호족이 침범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위험한 시기에 양반관료들이 가렴주구만 일삼으며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음을 개탄하고, 시급히 무기를 생산하고 산성을 개축해야 10만 정병을 양성하여 외국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이의 학설은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과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 정엽(鄭曄) 등을 비롯한 많은 유학사상가들에게 계승되어 율곡학파(일명 기호학파)가 형성되었다.
이황과 이이의 학설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전파되어 일본 유학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사림들은 이러한 여러 학풍들을 계승하고 공부하면서 16세기부터는 각 지방에 서원(書院)들을 설치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17세기부터 붕당정치(朋黨政治)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붕당정치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17세기에 집권한 사대부들은 사회 자체가 변화·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조화된 성리학에 집착하여 이기논쟁, 예절논쟁이나 하면서 국민의 현실생활과는 동떨어진 공리공담을 일삼았다.
이러한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도 교조적 성리학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시도되어 명나라의 양명학(陽明學) 도입이 추구되었다. 양명학은 주로 정권에서 배제된 경기지방의 소론 학자들에 의해 도입되었고, 처음에는 주자학을 완전히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완하여 둘 사이의 조화를 이루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양명학자 중 점차 주자학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그로부터 완전히 절연한 채 양명학의 독자적인 정립을 추구한 사상가들이 나타났으며, 특히 정제두(鄭齊斗)는 조선의 양명학을 학문사상적으로 체계화하였다.
더욱 획기적인 것은, 17세기에 성리학의 공리공담성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방법으로 부국유민(富國裕民),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할 수 있는 실용지학(實用之學)을 추구하는 실학사상이 대두되어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실학사상의 형성과 발전에 의하여 한국의 사회사상은 그때까지 유지되어 온 종교·철학 사상의 껍질을 벗어 버리고 전면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수광은 그의 저서인 ≪지봉유설 芝峰類說≫에서 실용지학을 주장하고 균전제(均田制) 실시, 수공업기술 발전, 화폐주조와 화폐유통, 화포·조총 등의 신무기 수용, 거북선의 대량 조선과 수군의 강화 등을 주장하였다.
그는 세 차례나 중국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서양문명과 접하게 되자 서양의 과학기술과 서학(西學)을 전하고,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소개하기도 하였다.
한백겸은 우리 나라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고, ≪동국지리지≫ 등을 저술하여 한국의 역사지리에 관한 여러가지 새로운 고증을 제시하였다.
김육은 신역법(新曆法)을 채용하고 수차(水車)제도와 용차(用車)의 이익을 주장했으며, 화폐주조와 대동법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학은 아직 체계화된 학문과 사상으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가 유형원에 이르러 체계화된 새로운 사상과 학문으로 확립되었다.
유형원은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농촌에서 현실을 체험해 가면서 오로지 학문연구에 전력하여 실학사상에 바탕을 둔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각 부문에 걸친 포괄적인 사회개혁안을 그의 저서 ≪반계수록 磻溪隨錄≫을 통해 제시하였다.
유형원은 당시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를 왕족과 양반층의 대토지겸병에 따라 일반 농민이 소작농으로 몰락하게 되는 토지문제라고 보고, 토지 개혁이 모든 개혁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그가 제시한 토지개혁안의 기본원리는 공전제(公田制)로서의 토지균분이었다.
그는 대지주의 겸병된 토지를 수용하여 신분에 따라 일반 농민에게는 1경, 선비와 관리에게는 직급에 따라 2∼12경의 토지를 나누어 지급하고, 토지를 분배받은 자가 죽으면 그 토지를 국가에 반납하여 다른 사람에게 다시 분배하도록 하였다. 또 지세는 생산량의 20분의 1로 통일하는 토지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세습노비제도를 궁극적으로 폐지해야 할 천하의 악법이라고 비판하고, 우선 노비에게도 농민과 동일하게 1경의 토지를 분배하였으며, 무예를 시험하여 우수한 자에게는 면천(免賤)의 특전을 주어 노비를 줄여 나가다가, 고용 노동자 또는 머슴제도가 일반화하면 노비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폐단이 많은 과거제도를 영구히 폐지하고 공거제(貢擧制)를 채택하되, 관리가 될 선비를 양성하기 위해 군·현 단위, 도 단위, 전국 단위의 3단계 학교를 세워 국비생으로 교육한 다음, 문벌이나 신분에 전혀 상관없이 능력 위주로 선발하는 등용의 선발방안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원칙으로 해서 농민은 4경에서 1병(兵)을 내고 나머지 3병은 보부(保夫)로서 출병자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며, 노비제도가 폐지되기 이전까지는 노비도 속오군(束伍軍)을 편성하면 정병 31만 명, 속오군 62만 명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군의 편성에는 지휘관을 고정시켜 주고 부모와 가정이 있는 향토와 결합해서 배치해 주면 전투력이 배가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유형원은 이 밖에도 봉급제도의 개혁, 군현제도의 개혁, 도량형의 통일, 복식제도의 개혁, 교량 건설 등 다수의 개혁안을 내놓았다.
실학의 사회사상은 18세기에 와서 그 연구 범위와 깊이가 확대되고 더욱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실학사상가들 속에서 사제관계를 중심으로 학파도 형성되었다.
이익(李瀷)은 유형원의 실학사상에서 영향을 받고 많은 연구를 더하여 독자적인 실학사상을 수립했으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성호학파(星湖學派)를 형성하였다.
성호학파에 속하는 실학사상가로는 역사의 안정복(安鼎福), 지리의 이중환(李重煥)·윤동규(尹東奎)·정상기(鄭尙驥), 산학의 신후담(愼後膽) 등을 들 수 있다. 정약용(鄭若鏞)과 우하영(禹夏永) 등도 이익의 실학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중엽에는 또 실학파인 북학파(北學派)가 형성되었다. 북학파에 속하는 실학사상가로는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을 들 수 있다.
성호학파의 특성은 농업개혁과 토지개혁을 매우 중시하고 제도개혁을 강조한 점이다. 이에 비해 북학파의 특성은 대부분이 도시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북방에 전파된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 배워 도입하려 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상공업의 발전을 강조한 점에 있었다. 그러나 그 뒤 두 학파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사상에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 밖에도 18세기의 실학사상가로는 유수원(柳壽垣), 신경준(申景濬), 이긍익, 한치윤(韓致奫), 위백규(魏伯珪), 이종휘(李鍾徽), 성해응(成海應), 유희(柳僖) 등이 있었다.
이익은 당시 양반부호에 의한 토지겸병의 폐해를 통감하고 토지 소유의 하한을 영업전(永業田)으로 정하여 이를 매매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이상의 토지는 자유 매매를 허락함으로써 일정기간이 지나면 농민의 영락(零落)을 방지하면서 토지겸병을 막을 수 있는 한전제(限田制) 토지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익은 또한 놀고 먹는 양반이 많아서 나라가 빈곤하게 됨을 개탄하고, 양반도 농업에 종사하게 하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을 주장하였다. 노비제도도 세습제를 폐지하고 매매를 금지하며, 소유 상한을 100명으로 우선 제한했다가 당대가 지나면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고, 문벌제도와 서얼차별제도도 폐지할 것을 주창하였다.
뿐만 아니라 붕당(朋黨)이 형성되고 당쟁이 벌어지는 원인은 제한된 관직 수에 비해 과거의 합격자 수가 너무 많은 데 있다고 지적하고 과거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 선비들이 우리 나라 역사는 읽지 않고 중국사만 읽는 폐단을 통탄하고, 과거시험 과목에 우리 나라 역사를 포함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한편, 홍대용은 화이사상(華夷思想)의 가장 견고한 이론적 기초가 되고 있던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과 지정천동설(地靜天動說)을 지원설(地圓說)과 지구자전설(地球自轉說)로 비판하면서, 중국만이 세상의 중심인 정계(正界)가 아니라 조선도 서양도 모두 정계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나라, 사람, 습속, 군왕이 중국이나 다른 나라나 모두 차별이 없는 균등한 것임을 논증하여 화이사상을 무너뜨리고, 조선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정립하였다.
홍대용은 또한 사민(士·農·工·商)의 세습제도를 반대하고, 사민의 본질적 평등을 주장했으며, 사민개학(四民皆學)을 주창하였다.
그는 면 수준까지 전국의 행정단위 구역에 학교를 하나씩 설립하여 사민의 자제들을 모두 공부시켜서, 그 중 우수한 자들을 선발하여 인재 본위로 관직에 임명할 것을 제안했으며, 교과목은 효·제·충·신과 함께 서(書)·산(算)·농·상·무예·병(兵) 등 실용지학을 가르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매 장정마다 토지 2결을 분배하는 토지개혁의 기초 위에서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철저히 실시하고, 그때까지 병역을 지지 않던 양반·관료(郎廳 이하)·아전·노비들에게도 모두 병역의 의무를 갖게 하는 등 만민개병(萬民皆兵)을 실시해서 100만 명의 군대를 편성하여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제안하였다.
박지원은 ≪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에서 토지겸병과 지주제도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가호별 토지소유의 상한을 정하는 한전제의 토지개혁을 주장하였다.
또 ≪과농소초 課農小抄≫에서는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영농방법의 개선, 농기구의 개량, 수리관개시설의 확장 등을 상세히 연구하여 주장했고, 서울 근교에 모범농장을 설치하여 농사기술을 보급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비생산적인 양반 신분을 풍자 비판하고, 서얼차별제도와 시노비(寺奴婢) 폐지 등 신분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선박을 이용한 국내상업과 대외무역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차제(車制)를 이용한 교통, 은화 주조를 비롯한 화폐제도의 정비를 제안했으며, 상업과 공업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농·상·공의 발전을 위해서는 오랑캐라 하여 거부하지 말고, 북방 청나라의 선진 과학기술과 생산기술을 배워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박제가는 ≪북학의 北學議≫에서 특히 그때까지 상업을 천시해 오던 사상과 정책을 신랄히 비판하고, 자유로운 상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산업발전의 요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유로운 상업이 발전하면 그에 따라서 농업과 수공업도 더욱 발전하게 된다고 보고, 비생산적 양반들을 상업에 종사하게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차(車)를 사용하는 교통·운수의 발전을 주장하였다. 즉, 차를 사용하면 상품유통이 활발해지고 물가의 평준화가 이루어지며 전국적인 시장이 형성되고, 시장이 확대되면 생산물의 수요가 증대되어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농업과 수공업이 다 같이 발전한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국내상업뿐만 아니라 대외무역도 크게 벌여 처음은 중국과, 다음은 안남(安南)·류큐(琉球)·대만(臺灣) 등 모든 외국과 활발하게 통상무역을 하는 것이 국가이익을 증대시키고 선진기술을 도입하며, 고루한 관습을 고쳐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대외무역에서도 수출을 강조하고, 은의 해외 유출과 중국상품의 수입은 규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중상주의적 사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제가는 이 밖에도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서 병력수만 증대시킬 것이 아니라, 우수한 무기를 발달시키고 말을 잘 기르며 수레를 발전시키고 군사훈련을 철저히 강화하는 정병주의를 주창했으며, 이러한 정병 7만∼8만 명만 얻을 수 있으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 성행하던 풍수지리설과 산송(山訟:묘지에 관한 송사)의 폐해를 통렬히 비판하고, 대책으로 공동묘지제도를 제안하였다.
유수원은 그의 ≪우서 迂書≫에서 사·농·공·상의 사민 평등을 주장하고, 사민이 모두 신분의 장애 없이 배우고 능력과 선택에 따라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민이 모두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상인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상인이 있으면 자연히 장공인(匠工人)이 있으며 육지와 바다의 물산이 통하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상인 자본의 결집과 합자에 의한 동업조합 또는 합자체 상업의 발전을 강조하고, 양반도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평시서(平市署)를 폐지하고 상업의 보다 자유로운 발전을 주장했으며, 상인자본(물주)이 은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적극 장려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광업발전의 촉진을 적극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17세기 이래의 실학을 그의 방대한 저작집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에서 집대성하였다. 또한 〈원목 原牧〉이나 〈탕론 湯論〉에서 태고에는 백성만 있었을 뿐 통치자는 없었는데, 백성들의 생활상 필요하다고 합의하여 아래로부터 백성들의 자발적인 추대에 의해 수령·국왕·천자를 추대했는바 이것이 순리이며, 따라서 백성들은 수령·국왕·천자를 당연히 교체하고 개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신민본사상(新民本思想)을 전개하였다.
그는 국왕의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를 강조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때까지 천자천명설이나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고 천자중민추대설(天子衆民推戴說)과 왕권중민추대설(王權衆民推戴說)을 주장했으며, 군주세습제를 부정하고 백성의 군주교체권 및 군주개선권을 승인한 사실에서 그의 신민본사상이 가지고 있는 민주사상의 맹아를 볼 수 있다.
정약용은 또한 당시의 사회신분제도·문벌제도·지방차별제도·적서차별제도·당파차별제도 등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분차별 등 각종 차별제도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기 때문에, 우수한 인재의 8, 9할을 버리고 있다고 통탄하고, 오직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개혁을 단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당시 지방관(감사·수령)과 향리들이 농민을 수탈하는 것을 먹이를 찾는 굶주린 호랑이와 솔개에 비유하고, 향리를 작은 도둑, 감사를 큰 도둑이라고 비판하면서, ≪목민심서≫에서 지방행정에 관한 개혁안을 상세히 제시하였다.
또한 토지겸병·지주제도의 폐해와 농민이 착취당함으로써 겪는 빈곤을 통탄하고, 〈전론 田論〉에서는 여전제(閭田制) 토지개혁안, ≪경세유표 經世遺表≫에서는 정전제(井田制) 토지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여전제 토지개혁안은 농사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하에, 약 30호의 마을 단위로 토지 소유를 공유로 하여 공동경작, 공동수확한 다음 가족별 투하 노동량에 의거하여 분배한다는 방안이었다.
그는 이 여전제 토지개혁에 의하여 지주제도를 철저히 폐지하고 놀고 먹는 양반사족을 농업생산이나 농업기술 연구에 종사하게 하여, 농촌문제를 해결하고 나라의 부를 증대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삼정(전세·환곡·군포세)의 개혁을 추구하여 전세를 대폭적으로 절하하고 잡세를 없앴으며, 환곡제도를 크게 개혁하고 군포법을 호포법(戶布法)으로 개혁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는 상공업도 중시하여 금속화폐 주조와 조세의 금납화를 주장했으며, 수공업 발전과 이용후생을 위해서는 선진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채용하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고, 이를 위한 중앙관서로 이용감(利用監)을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또한 그는 〈민보의 民堡議〉에서 백성들 스스로 나라를 지키는 민보의 방안도 제시하였다. 즉, 모든 주민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자기 고을에 보루를 쌓고 16∼55세의 남자는 정병(正兵)이 되고 부녀자와 노인, 어린이는 보급을 담당하여, 보장(堡長)의 지휘하에 관군과 협동하는 민간방위 조직을 편성해서, 외적의 침략을 백성들의 힘으로 막아내고 나라와 자기 고을을 방위한다는 방안이었다.
한편, 이규경은 우리 나라의 훈민정음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라고 설명하고 훈민정음 연구와 그 보급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국사(國史)를 새로이 자주적으로 체계화하여 전사(全史)를 편찬, 보급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국토지리에 대한 연구도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조사하여 적극 개발하고, 선진적 제련기술을 도입하여 제련공업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또 당시의 쇄국정책을 비판하고 외국과의 개국 통상을 주장했으며, 서남쪽의 여러 나라들과 개국 통상하여 무역을 진행하고 선진 과학기술을 도입, 채용하는 것은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라고 강조하였다.
최한기는 사민평등을 주장하고 인재등용 문제가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기본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인재의 개념을 그때까지 실학사상가들처럼 정치행정가에 국한시키지 않고 과학기술과 산업 실무의 인재로 확대·발전시켜 그 양성과 선발방법을 제안하였다.
또한 전제군주 한 사람의 통치는 옛날 제도라고 지적하면서, 국민들이 인재를 함께 선거하는 공선(公選)과 국민의 여론인 공론(公論)에 의한 인재 평가, 그리고 온 나라의 국민이 함께 하는 공치(公治)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민주주의 초기적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부유한 양반관료들이 국민들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것을 비판하고 빈곤한 국민들에 대한 동정을 표시하면서 박애와 인도주의를 강조하였다.
또 교육에도 신분에 구애받지 말고 실용성 있는 학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여, 특히 서민교육·과학기술교육·실업교육·직업교육을 주창하였다.
최한기는 박제가·이규경을 이어 가장 적극적인 개국통상론을 주창하였다. 그는 당시의 쇄국정책을 자기 나라의 앞길을 좁히고 망치는 길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나라의 부강·발전을 위해서는 외국과 개국통상(開國通商)하여 그 나라의 발전된 기계·기술산업·교육 등을 우리의 것과 비교해서 취사선택한 다음 활발한 교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현재 세계 여러 나라들이 내왕하는 세계정세하에서는 마땅히 변(變:개혁)으로써 변을 막을 수 있지 불변(不變)으로써 변을 막을 수는 없다고 지적하였다.
또 개국한 뒤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발달된 외국의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서양의 화력과 수력 이용기술, 증기기관, 방직기계 등을 적극 도입할 것과, 우리에게 유익한 서양 서적과 법제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세계 인류가 서로 ‘평등’하게 ‘인도(人道)’를 존중하여 ‘평화’를 유지하고 과학기술을 상호 지원하여 공동의 번영을 이룩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세계공통어도 만들고 동양의 인의(仁義)에 관한 도덕과 서양의 과학기술 학문을 결합시켜 세계적 종교로 만들어서 대동세계(大同世界)를 이룩하자는 구상도 제시하였다.
이 밖에도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와 ≪종저보 種藷譜≫를 저술하여 농업과 임업과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구와 방안을 내놓았다.
김정호는 30년간 전국 각지를 답사하고 연구한 성과인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를 1861년에 완성하였으며, ≪대동지지 大東地志≫(1864)를 출판하여 우리 나라의 산업지리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실학의 사회사상은 19세기 초엽에 들어와 근대 지향성을 명확히 보이며, 이규경과 최한기에 이르면서 개국통상을 실현하고 시민사회를 성립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자 우리 민족과 조선사회는 두 방향에서 커다란 도전을 받게 된다. 그 하나는 외부에서 들어온 도전으로서, 선진 자본주의 열강들의 침입이었다. 이 도전은 개항을 요구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점유해 버리려는 도전이었다.
또 서양문명이라는 이질 문명의 도전일 뿐만 아니라 산업혁명을 거친 근대체제의 전근대체제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사상 최대의 민족적 위기를 조성한 위협적인 도전이었다.
다른 하나의 도전은 조선사회 내부에서 나온 것으로, 농민층을 선두로 한 하위 신분층의 가렴주구 폐지와 양반 신분제도 폐지 등 체제개혁을 요구하는 도전이었다. 이러한 내부로부터의 도전은 더 이상 해결을 미룰 수 없도록 폭력운동화하는 경향이 보였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전환점으로 그 뒤 해마다 끊임없이 대소규모의 민란이 일어났으며, 1862년의 진주민란은 체제개혁을 요구하며 아래로부터 일어난 대표적인 농민폭동 사례였다.
민족적 위기를 자각하기 시작한 19세기 중엽의 우리 나라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1860년 영·프랑스 동양함대 연합군의 북경점령사건(北京占領事件)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라고 생각했던 중국이 서양의 총력도 아닌 두 나라 동양함대의 공격 앞에서 수도를 점령당했다는 사실은 곧 서양의 무력이 조선에도 닥쳐 와 식민지를 노리는 공격이 시작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19세기 중엽의 우리 나라 선각적 지식인들은 이 새로운 도전들을 적절히 극복하고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려면 지금까지와 같은 전근대적인 응전방법으로는 불가능하고 새로운 응전방법을 고안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 열강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19세기 중엽에 우리 민족이 만든 사상이 한국의 근대 사회사상으로, 그 세 가지 큰 흐름은 ①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 ② 동학사상(東學思想), ③ 개화사상(開化思想) 등이었다.
이 중에서 위정척사사상은 양반 유생들이 주자학의 화이사상에 입각하여 공자(孔子)·맹자(孟子)·정자(程子)·주자(朱子)의 학통을 잇는 주자학의 유학사상을 정(正)이라 보고 서양과 서양화한 일본의 사상과 학문을 사(邪)로 보면서, 사(邪)=서양과 일본을 배척하고 그 오염으로부터 정(正)=조선과 중국을 지키려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주자학 일존주의(朱子學一尊主義)’를 고수하여 고려 말기 주자학을 수용한 이래 성립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양 열강의 도전을 받고 송시열의 학통을 잇는 이항로(李恒老)를 선두로 기정진(奇正鎭)·임헌회(任憲晦)·이진상(李震相) 등과 이항로의 문인들인 김평묵(金平默)·양헌수(梁憲洙)·유중교(柳重敎)·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 등과 그 밖에 수많은 유생들에 의하여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재정립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서양 열강의 도전에 대응하여 위정척사의 이론을 확고하게 재정립하고, 그 뒤의 위정척사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상가는 이항로였다.
그는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당하여 위정척사를 주창하고, 저들을 싸워 물리쳐야지 저들과 화평수교하면 우리가 금수의 영역에 떨어진다는 전수척화론(戰守斥和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서양의 힘의 원천인 과학기술도 기이하고 교묘한 재주일 뿐이라고 규정하고 그 선진성을 부정하면서 주자학의 정도(正道)로써 통하지 못하게 만들어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와 같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그에 기초한 서양 상품의 도전을 극복하는 방법은 서양이 개국통상을 요구해 오더라도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엄격히 금지하여 서양 물품이 나라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본 및 서양과 통상하여 그들의 물품이 국내에 통용되면 풍속을 문란하게 할 뿐 아니라, 세계(歲計:한 회계 연도 내의 총 세입과 세출)인 농산물로써 일계(日計)인 공산물과 교역하게 되므로 조선은 날로 빈곤해지고 서양이나 일본은 날로 부유해진다고 지적하고 일본·서양과의 통상을 단호히 배격하였다.
그는 주자학의 주리론 입장에서 조선과 중국을 이(理)로, 서양과 일본을 기(氣)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주리론에 의하면 이가 언제나 기를 제압하고 기는 이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므로, 기로 이루어져 있는 서양의 도전은 현상적으로는 우세한 듯하지만, 본체에서는 이로 이루어져 있는 조선과 중국이 우세하므로 서양과 일본은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 전제군주에 의한 왕도정치와 양반 신분사회를 가장 천리(天理)에 합당한 체제라고 보고, 모든 다른 사상과 학설을 이단으로 척결하여 주자학에 바탕을 둔 사상의 통일과 구체제 기강의 해이를 바로잡아 내부 단결을 이루어서 서양 및 일본의 도전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밖에 다른 위정척사사상가들의 이론도 이항로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였다. 이러한 위정척사사상은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에서 서양 세력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정신적인 힘과 이념으로 동원되었다.
1876년 개항 이후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 다녀오면서 청국 참찬관(參贊官)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사의조선책략 私擬朝鮮策略≫을 가져와 보급한 것을 계기로 1881년에는 전국 유생들의 반개화(反開化) 위정척사 상소운동이 일어났다.
이만손(李晩孫)을 우두머리로 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비롯하여 홍재학(洪在鶴)·한홍렬(韓洪烈)·신섭(申0xF66B)·고정주(高定柱) 등과 그 밖의 수많은 유생들이 위정척사 상소를 올림으로써, 뒤이어 개화정책을 요청하는 초기 개화파들과 이른바 척사·개화 논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위정척사사상은 1895년 10월 민비시해사건(閔妃弑害事件)과 뒤를 이은 단발령에 격분해서 일어난 을미의병운동의 사상과 이념이었다.
또 일제가 1904년 2월 한반도에 불법 침입하여 러일전쟁을 일으켜서 제1차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고, 뒤이어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 등 국권을 박탈할 때, 1904년 여름부터 다시 의병 봉기를 시작했는바 이때도 위정척사사상이 의병 무장투쟁의 사상과 이념이 되었다.
1907년 8월 1일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명했으나 이에 불복한 대한제국 군대의 봉기와 의병들의 합류를 계기로 전국에서 각계각층의 국민이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의병운동의 지도이념은 비단 위정척사사상뿐만 아니라 애국계몽사상 등 다른 이념도 들어가 융화되지만, 이 시기에도 위정척사사상은 항일의병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배경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위정척사사상은 대내적으로는 주자학을 상징체계로 한 구체제 유지를 추구했으나,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서양의 침략에 대항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의병 무장투쟁의 사상으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한편, 동학사상은 몰락한 양반의 서자(중인) 출신인 최제우(崔齊愚)에 의해 1860년에 창도(唱導)된 민족 종교사상이었다. 최제우는 1860년 영·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 민족적 위기를 절감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하고 광제창생(廣濟蒼生)하는 새로운 사상과 종교로서 동학을 창도하였다.
그는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동학을 포교하는 것과 동시에 ≪동경대전 東經大全≫과 ≪용담유사 龍潭遺詞≫의 가사들을 지어 보급하였다.
그의 사상은 지기일원(至氣一元)을 주장하고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기초로 정립했으며, 그때까지의 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을 새로이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시천주사상(侍天主思想)과 인시천사상(人是天思想)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특한 구조의 평등사상을 형성하여 양반신분제도를 폐지하는 사상을 만들고,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시작을 설파하였다.
그의 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모두 똑같은 한울님을 각각 마음속에 모시고 있다고 한다. 즉, 양반도 한울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고, 평민·천민도 똑같은 한울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으므로, 양반·평민·천민은 모두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한울님이 지고지귀하신 것처럼 한울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는 인간도 똑같이 지고지귀한 존재라고 설파하였다.
동학의 이러한 평등사상과 격조 높은 휴머니즘은 당시 사회신분제도를 폐지하고 평등이 실현되기를 바라던 농민층에게 큰 환영을 받아 교세가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러나 동학의 성황을 불온하게 본 조선 왕조는 그에게 혹세무민이라는 죄명을 씌워 1864년 3월 대구에서 처형하였다.
최제우의 뒤를 이어 제2대 교주가 된 최시형(崔時亨)은 사인여천(事人如天:한울님을 공경하듯이 사람도 똑같이 공경하고 존중하는 일)을 주장하고 ≪내수도문 內修道文≫과 ≪내칙 內則≫을 지어 평등사상을 부녀층과 어린이층에도 확대하면서 성실하게 포교에 힘쓴 결과 교세가 삼남지방을 비롯하여 전국에 확대되었다.
동학 농민들은 전봉준(全0xF555準)을 지도자로 추대하여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고 호남 일대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 농민들이 희구하는 폐정개혁을 스스로 단행했으며, 일본군이 한반도에 불법 침입하여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내정간섭을 자행하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제2차로 봉기했다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눌려 패배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은 구체제의 뼈대인 민비 수구파 정권과 사회신분제도를 폐지하는 데 큰 성과를 내고 갑오경장을 시행하는 데도 원동력이 되었다.
최시형에 이어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된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사상에 개화사상의 요소를 도입하여 문명 진보를 통해 보국안민을 달성하기 위한 사상으로 도전(道戰)·재전(財戰)·언전(言戰)의 삼전론(三戰論)을 제기하였다. 또한 1905년 12월 동학의 정통을 계승하는 교단으로 천도교(天道敎)를 선포함으로써 동학은 종교로 귀결되었다.
개화사상은 1853년부터 1860년대에 걸쳐 중인 출신 및 양반 출신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계승·발전시켜 형성된 사회사상이다.
북학파의 실학을 계승한 중국어 역관 오경석(吳慶錫)은 1853∼1858년 동지사(冬至使:중국으로 보내던 사신)의 통역관으로 네 차례나 북경에 갔다가 서양 열강의 침입으로 중국이 위기에 빠진 것을 보고, 조선도 멀지 않아 위기에 빠질 것임을 자각하여 귀국할 때 서양 각국의 실정과 중국의 서세동점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한 신서(新書)들을 구입해 가지고 돌아왔다. 그것을 연구한 결과 1853∼1859년에 최초로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오경석은 1860년 영·프랑스 연합군의 북경점령사건에 충격을 받고 더욱 절박하게 민족적 위기를 의식하여, 그가 북경에서 구입해 온 신서들을 그의 절친한 친우 유홍기(劉鴻基)에게 주어 나라를 구할 방책을 연구하도록 권했으며, 그 결과 유홍기도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는 영·프랑스 연합군의 북경점령사건에 대해 1861년 1월 조선 왕조가 위문사절단을 파견할 때 부사(副使)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서양의 막강한 힘 앞에 중국이 붕괴된 것을 보고, 조선의 민족적 위기를 절감하였다. 그래서 귀국할 때 역시 서양에 관한 신서들을 사가지고 돌아와 연구한 결과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 개화사상의 세 시조는 합의하여 1869년 말∼1870년 초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김윤식(金允植)·김홍집·김옥균(金玉均)·박영교(朴泳敎)·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유길준(兪吉濬) 등 양반층의 영민한 자제들을 상대로 개화사상에 대한 교육과 학습을 시작하였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이들이 학습한 것은 오경석·유홍기·박규수 등이 형성한 개화사상, ≪연암집≫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각종 저서, 오경석·박규수 등이 북경에서 구입해 온 신서 등이었다.
이러한 학습을 통하여 김옥균의 세대도 개화사상을 갖게 되고, 1874년경부터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결사로서의 초기 개화파(개화당)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초기 개화파들은 아직도 그 세력이 미약하여 1876년 개항 때는 별다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화도조약(1876)이 체결되고 부산(1876)·원산(1880)·인천(1883)의 3항이 개항되자 조선 왕조는 세계의 정세를 아는 새로운 관료들을 긴급히 필요로 했으며, 이에 따라 초기개화파들이 정부조직에 진출하여 개화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 시기 초기 개화파의 지도자는 김옥균이다. 그의 개화사상은 ① 근대국가의 건설, ② 대경장(大更張)개혁 실시, ③ 완전 자주독립, ④ 입헌군주제 지향, ⑤ 조선 중립화, ⑥양반신분제도와 문벌제도 폐지, ⑦ 근대 산업개발, ⑧ 경제개혁과 조세재정제도 개혁, ⑨ 신교육 실시와 학교 설립, ⑩ 자주무력(自主武力) 양성, ⑪ 근대적 경찰제도 수립과 형정제도 개혁, ⑫ 도로 개수, ⑬ 위생제도 개혁, ⑭ 기독교 허용 등이었다.
초기 개화파는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국이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키고 속국화하려는 간섭정책을 펴자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 때 개화당 정부 혁신정강 14조에는 ① 조공제도 폐지와 완전 자주독립 공포, ② 양반신분제 및 문벌제도 폐지와 인재 등용, ③ 내각제도 수립과 정부조직의 개혁, ④ 재정 통일과 경제개혁, ⑤ 근위대 창설과 군사제도 개혁, ⑥ 양반문화제도 폐지와 근대 교육문화 수립, ⑦ 근대적 경찰제도와 행형제도 수립, ⑧ 국가에 해독을 끼친 자에 대한 처벌 등을 골자로 하는 대경장정책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실패함에 따라 실현되지 못하였다. 초기 개화파의 대경장개혁정책은 10년 후 온건 개화파가 집권하여 갑오경장(1894∼1895)을 단행할 때 계승되어 마침내 실현되었다.
개화사상은 서재필(徐載弼)·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남궁 억(南宮檍) 등이 주도한 독립협회·만민공동회(1896∼1898)에 이르러 한층 더 발전하였다.
독립협회는 열강의 이권 침탈에 강력히 저항하면서 자주독립사상을 강화하여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구 민주주의사상을 적극 도입하여, ① 생명(신체)과 재산의 자유권, ②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권, ③ 국민평등권, ④ 국민주권, ⑤ 국민참정권 등 민주주의사상을 정립하여 보급하였다.
독립협회는 선거제도를 도입하여 지방 인민의 투표에 의한 선거로 관찰사·군수 등 지방관을 선출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중앙에서의 의회설립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여 중추원 개편에 의한 상원(上院)의 개원 직전까지 도달하였다.
독립협회는 공식적으로 의회를 설립하여 전제군주제를 입헌대의군주제(立憲代議君主制)로 개혁하자는 방안을 추구했으며, 만민공동회의 일부 청년들은 공화정(共和政)을 수립하자는 주장을 펴기 시작하였다.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고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국권이 박탈되자, 개화사상은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사상과 운동으로 바뀌어 전개되었다.
애국계몽사상과 운동은 국권 회복을 위한 강렬한 애국주의와 개화사상이 결합한 것이다. 이 시기에는 비록 국권을 잃고 나라가 식민지가 되기 직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개화사상은 청소년과 일반 국민에게 널리 보급되어 민족의 실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특히, 애국계몽운동의 핵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는 국권 회복 후 아예 모든 종류의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체(共和政體)의 신민주공화국(新民主共和國) 수립을 민족운동의 목표로 정립함으로써 우리 나라 근대 사회사상의 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형성·발전된 3개의 사회사상에서 동학사상과 개화사상은 성립 당초부터 근대 민족주의로 형성·발전되었다.
위정척사사상은 주자학의 중세적 체제를 고수하려 함으로써 전근대적 민족주의 범주에 들었으나, 1907년 8월 이후의 의병운동 기간에 개화사상과 애국계몽사상의 심대한 영향을 받아 사상 내용이 크게 변화함으로써 점차 근대 민족주의 범주 안에 연합, 융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10년 8월 일제강점 이후 개화사상·동학사상·위정척사사상에 기원을 두고 그들이 융합한 민족주의사상이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사회사상이 되었다.
우리 민족과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주의사상에 바탕을 두고 1910년대에 줄기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은 민족주의사상을 근거로 전민족이 봉기한 독립운동이었으며, 민족주의사상이 독립운동 부문에서 이룬 정상의 성취였다.
3·1운동의 사상은 민족주의였으며, 이 운동에는 신분·계급·지역·종파·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민족 전체가 참가하여 전민족적으로 봉기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초기 조직 세력을 보아도 동학사상의 흐름인 천도교와 개화사상·애국계몽사상의 흐름인 기독교 및 학생단과 전통 종교의 흐름인 불교가 민족대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민족주의의 이념 아래 단결했음을 볼 수 있다.
3·1운동 사상으로서의 민족주의는 그 내용이 민주주의 및 공화주의와 융합된 것이었다.
이 사실은 3·1운동의 성과로 수립된 노령(露領:러시아의 영토)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임시정부나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서울에서 국민대회의 절차를 거쳐 조각(組閣)된 한성정부가 모두 헌법에 기초한 민주공화정(民主共和政)을 수립했으며, 1919년 9월에 수립된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세한 민주헌법과 의회로서의 의정원(議政院) 및 민주공화정체제로 수립된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3·1운동 후 사회사상의 변화로는 사회주의사상의 도입을 들 수 있다. 한국인이 사회주의단체를 최초로 조직한 것은 1918년 4월 이동휘(李東輝)가 위원장으로 추대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이 노령(露領) 하바로프스크에서 창당되었고,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이르쿠츠크공산당 한인 지부를 분리시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이 성립되었다.
1922년에는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이 명칭을 바꾸어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성립되었다. 국내에는 이 두 계보에 속하는 사회주의 정당들의 직·간접의 영향하에 1919년 여름부터 사회주의사상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조선노동공제회(1920)·서울청년회(1921)·공산주의자신인동맹(1922)·무산자동지회(1922)·조선노동연맹회(1922)·북성회(北星會, 1923)·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이듬해 화요회로 개칭, 1923)·조선노동총동맹(1924) 등이 결성되었다가 1925년에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성립함으로써, 그 후 해체와 재건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사회주의사상이 점차 보급되었다.
이 시기에는 사회주의사상과 공산주의사상이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있던 것이 큰 특징이었다. 이 밖에 가느다란 흐름이지만 무정부주의사상도 도입되기 시작하여 흑도회(黑濤會, 1921)·흑기연맹(黑旗聯盟, 1925)·흑우회(黑友會, 1928)·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1924)·남화한인청년동맹(南華韓人靑年同盟, 1929) 등이 조직되어 활동했으나 그 세력은 미약하였다.
3·1운동 이후 사회사상과 민족운동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분화와 분열이 나타나자, 두 사상의 협동전선 형성이 추진되어 1927년에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신간회는 민족독립사상 고취와 민족교육 등 많은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분열공작과 코민테른의 영향에 의한 사회주의 계통의 해소 주장으로 1931년에 해체되었다.
민족주의사상은 이후에도 꾸준히 발전하여 국내에서는 안재홍(安在鴻)·손진태(孫晉泰) 등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신민족주의가 대두되었으며, 국외에서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조소앙(趙素昻)의 삼균주의(三均主義)가 형성, 발전되었다.
삼균주의는 김구(金九)가 주석으로 영도(領導)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념이 되어 1941년 11월 삼균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이 채택되고, 이 노선에 따라 연합정부로서 각 파가 참가한 임시정부의 민족독립운동이 전개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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