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교육 3/(국어사전)國語辭典

충효사상[ 忠孝思想 ]

好學 2012. 9. 8. 10:13

 

충효사상[ 忠孝思想 ]

 

 

충효사상은 중국·한국·일본 등 아시아 유교 문화권이 전통적으로 매우 중요시 한 도덕 관념

 

〔충효사상의 비평적 인식과 본래적 취지〕

중국의 영향으로 유교 문화가 발달하였던 한국의 경우, 이른 시기부터 충효사상이 사회 통합과 국가 의식을 공고히 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한국이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고, 특히 8·15 광복 이후 자유·평등을 기치로 하는 민주주의적 사고 방식이 지배함에 따라 재래의 전통적 윤리 규범은 전근대적 봉건 도덕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삼강오륜(三綱五倫) 가운데 특히 부자·군신의 관계를 규정하는 덕목인 ‘효(孝)’와 ‘충(忠)’은 민주주의 정신에 반하는 가부장적 봉건 도덕(家父長的封建道德)으로 타파의 대상이 되다시피 했다.

그렇지만 충효사상은 그 시행 과정에서 일정한 역기능적 요소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자기 일신의 이해 관계를 떠나 부모와 국가에 헌신하려는 자세는 민주 시민 사회의 공동체를 위해서도 여전히 중요한 덕목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대에 들어 충효사상은 전근대 사회에서 개인이 집단에 예속된 존재로서 자주성을 상실한 노예의 덕목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효는 가부장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그리고 충은 같은 문맥에서 군주에 대한 무조건적 헌신을 뜻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런 비합리적 사례가 있다. 중국에서 특히 군주와 지배 체제에 대한 충성은 특히 전국 말기에서 진(秦)·한(漢)의 통일 제국에 이르면서 군권(君權)을 옹호하고 국가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정신적 기반으로 강조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요 이상의 강요와 억압이 자행된 것 또한 숨길 수 없다. 또한 불합리한 지배 체제에 항거하여 정의를 실현하려던 선비들을 역모(逆謀)로 몰아 희생시켰던 사화(士禍)는, 충성이 역모가 되고 술수가 충성이 되기도 하는 충효사상의 역기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경우, 충효사상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인들을 강제로 ‘일본 천황’에게 배례하게 하고, 일본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헌납하게 하면서, 이를 진충보국(盡忠報國)이니 충효일본(忠孝一本)으로 미화하고 장려하려 했던 야만적 작태를 통해 더욱 증폭되었다.

충효사상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헤겔(Hegel, G. W.)이나 베버(Weber, M.)같은 서양의 철학자나 사회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동양 사회를 일인 전제 국가로 규정하고, 무한한 복종을 뜻하는 효 사상이 그대로 군주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진 것은 충효의 윤리를 정치 교육과 교화의 맥락에서 도구화한 것이라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충효를 이처럼 부정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서양인들의 일반적 동양관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각은 자기의 전통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 서양인의 관점을 일방적으로 교육받은 현대의 동양인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다.

요컨대, 전통 사회는 전반적으로 권위주의적 요소가 짙었으며, 그러한 체제를 용인하여 방조하고 합리화하였던 가장 대표적인 요인을 충효사상에 돌렸던 것이다.

충효사상이 상하 계층의 신분 질서를 기초로 한 과거 가부장적 봉건 사회의 지배·복종 관계에 기반해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일방적인 지배와 맹목적인 복종 관계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충효는 부(父)에게 효도하고 군(君)에게 충성하라는 뜻이지만, 그것은 부당한 처사에 불복하고 비합리적 명령에 항거하는 정신을 핵심적 내용으로 포함하는 것이었다.

≪효경 孝經≫ 간쟁장(諫爭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적에 천자가 쟁신(爭臣) 7인이 있으면 비록 무도하여도 천하를 잃어버리지 않았고, 제후가 쟁신 5인이 있으면 비록 무도하여도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며,……아비로서 쟁자(爭子)가 있으면 그 몸이 불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의를 당해서는 자식이 아비에게 다투지 않을 수 없으며, 신하가 임금에게 다투지 않을 수 없다. 불의를 당해서는 다투는 것이니 아비의 명령을 좇으면 어찌 효라 할 수 있으랴?”

부모뿐만 아니라 천자나 제후라 하더라도 불의(不義)에 대해서는 다투어 간하고 말려서 그것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정치적 억압에 맞선 역대의 충신·열사들은 충효의 이름으로 이를 감당해 왔던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법가의 선구로 인식되는 순자(荀子)의 경우도 외적 권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충효에 입각한 비판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효를 대·중·소로 나누어 설명하여 “들어가 효도하고 나가서 공경함은 소행(小行)이요, 윗사람에게 순종하고 아랫사람에게 독실히 함은 중행(中行)이요, 도(道)를 좇고 임금을 좇지 않으며, 의(義)를 좇고 아비를 좇지 않음은 사람의 대행이다.……효자가 복종하지 않는 까닭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명령을 좇으면 어버이가 위태하고, 명령을 좇지 않으면 어버이가 안전한 경우이니, 효자가 명령을 좇지 않음은 충심(衷心)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 명령을 좇으면 어버이가 욕되고, 명령을 좇지 않으면 아버지가 영예롭게 되는 경우이니, 효자가 명령을 좇지 않음은 의(義)인 것이다. 셋째, 명령을 좇으면 금수가 되고, 명령을 좇지 않으면 닦여진 군자가 되는 것이니, 효자가 명령을 좇지 않음은 어버이를 공경함이다”라 하였다.

순자는 이를 요약하여, 복종할 수 있는 것을 좇지 않으면 자식이 아니며, 복종할 수 없는 것을 복종함은 충심(衷心)이 아닌 것이니, 복종할 일과 복종하지 않을 일을 밝히 알아서 능히 공경과 충신(忠信)과 성실을 다해 삼가서 행한다면 대효(大孝)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인신(人臣)을 바람직한 공신(功臣)과 성신(聖臣), 그렇지 못한 태신(態臣)과 찬신(簒臣)으로 구별하고, 충을 대충(大忠)·차충(次忠)·하충(下忠), 그리고 불충(不忠)한 국적(國賊)으로 구별하면서, 신하의 충성은 능히 임금을 감화시키고 보완해야 하는데, 최소한 그 잘못을 간하여 노(怒)하게 할 수는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개인의 자발적 도덕성보다 사회의 제도적 규율을 강조하는 순자조차 권위주의적 상명하복의 몰아적(沒我的)이며 맹목적인 개념이 아닌 주체적 판단과 저항적 자세로서의 신도(臣道)를 강조했다.

순자보다는 다소 앞선 사상가로 유교의 정통으로 추앙받는 맹자(孟子)는 그 자신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매우 중시하면서도 그것을 부모에 대한 일방적 순종이나 군주의 권위에 대한 맹목적 추종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은 귀하고, 사직(社稷)은 다음이며, 임금은 가볍다”라든가, “여러 번 간해도 듣지 않으면 임금을 바꾼다”라든가, 은(殷)의 마지막 왕 주(紂)에 대해서도 “한낱 필부(匹夫)를 죽였다 함은 들었으나 임금을 죽였다 함은 듣지 못하였다”라 하였듯이 오직 합리적으로 인정된 권위에 대해서만 충실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맹자가 제창한 오륜 가운데 부자유친(父子有親)이나 군신유의(君臣有義)가 권위주의의 옹호나 인권에 대한 억압의 논리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고찰한 유교의 비판적 충효정신은 전국시대 말기에 들어 변질되기 시작한다.

순자의 제자이며 법가의 대표적 인물인 한비자(韓非子)는 맹자가 제창한 “덕으로 사람을 복종하게 함(以德服人)”이 아니라, “힘으로 사람을 복종하게 한다(以力服人)”는 논리로 전제 군주에 의한 국가 통제적 노선을 정당화해 나갔다. 한비자는 사람을 통치하는 세 가지 수단으로 법률적 통제(法)와 위세(勢)와 통치 기술(術)을 필수적으로 요구하였다.

그 후 진(秦)·한(漢) 이래 통일 제국의 정치 현실은 한편으로 유교의 인도주의 사상을 이념적으로 표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법가적이며 전제적인 방법을 채용하게 되었다. 이 현실적 요청으로 하여 충효사상 또한 유교의 기본 정신을 잃고 정치 권력의 요청을 수용하여 타협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맹자의 오륜에 한(漢)의 마융(馬融)에 의해 제시된 삼강이 결합한 삼강오륜은 바로 그런 역사 현실적 절충의 산물로서 오랜 세월 동안 동방 사회에 있어서 가정 도덕과 사회 윤리의 기본이 되어 왔다. 우리는 여기에 포함된 이념과 현실, 본질과 기능의 제 요소를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충효사상의 본질과 의미

한국의 옛 기록으로서 충효에 대한 기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는 신라 화랑도의 정신적 근원인 풍류(風流)를 설명하면서 “들어가서는 가정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국가에 충성한다(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고 가르쳤고, ≪삼국유사≫는 진흥왕 때에 화랑도를 중흥시킬 때 “무리를 모아 선비를 선발하되 효제충신으로 가르쳤으니 이는 나라 다스림의 대요(大要)였다”라면서 화랑의 이념을 충효에 두었다.

후자의 효제충신(孝悌忠信)은 충효의 본래적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인간 관계의 기본 도덕이라 할 애경심(愛敬心)과 성실성을 원형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사랑과 존경이 없는 친자관계(親子關係)와 성실성이 결여된 인간관계에는 어떠한 도덕성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봉건사회나 민주사회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타당한 정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자의 ‘가정에서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한다(孝於家 忠於國)’는 가르침은 특히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어려운 시기에 개인들의 단결된 힘과 공동체 의식을 촉구하기 위해 가정 도덕과 국민 윤리로써 강조되던 바였다.

원래 ‘효제충신’은, ≪논어≫에서 공자가 제시한 가르침이다. 즉, 공자는 “들어가서는 효하고, 나가서는 공경한다(入則孝 出則弟)”고 하고, 또 “오로지 충(忠)과 신(信)에 힘써야 한다(主忠信)”고 하였다.

효도란 사랑(仁愛)에 근본하고 있는데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자(慈)’를, 자식은 부모에 대해서 ‘효(孝)’를 다하는 것이니 이는 모두 어진 마음(仁)의 나타남이라는 것이다.

동양 사회는 고래로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다. 공자의 말로는 “자식이 세상에 태어나서 3년이 지나서야 부모의 품을 면하는 것”이다. 자녀는 실제로 부모의 자애와 엄한 교훈 속에서 양육된다. 그러므로 의무나 예법이 주어지기 전에 생활 속에서 부모의 사랑을 체험한다.

만남으로써 기쁘고 헤어짐으로써 슬픈 것은 인간의 상정(常情)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오직 병으로 앓지 않을까를 근심한다”고 하는 것이며, 자식을 잃어버린 이상의 슬픔이 없다면서 이를 참척(慘慽)이라고 불렀다. 그런 부모에 대해 자식이 정성과 효도를 다해 모시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지내는 삼년상을 일 년으로 줄이자고 하는 제자 재여(宰予)의 주장에 대해 공자는 “군자가 상을 입는 동안에는 좋은 음식이라도 맛이 없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거처가 좋아도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차마 줄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네 마음이 편하면 그렇게 하라”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어버이의 자녀에 대한 사랑과 자녀의 부모에 대한 효도는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인간성의 발로이며 가장 건전한 사랑의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떠나서는 인간은 허탈에 빠지며 삶의 의의를 상실하기 쉽다.

그리하여 유교는 자식을 사랑하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정신이 곧 겨레를 사랑하고 국토를 지키는 애국충정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충과 효는 하나로 연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례의 전형적 예로서 임진왜란의 위기를 구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전진(戰塵) 중에 골몰하던 이순신은 3년 동안 어머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잠시라도 휴가를 얻어 가서 뵙고자 하여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게 탄원하는 글을 썼는데, 그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즉, “자식이 아침에 나가 돌아오지 않아도 어머니는 문 밖에서 기다린다 하거늘, 하물며 뵈옵지 못한 지 3년이 되어서이겠습니까? 요즈음 어떤 인편에 편지하시기를, ‘노병이 날로 심하니,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죽기 전에 네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오죽 좋으랴!’라고 하셨습니다. 아아! 다른 사람이 들어도 눈물을 흘리겠거늘 자식된 사람이야 어떠하겠습니까?”라고 썼다. 위난을 당하였을 때 희생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전란의 와중에 아들이 전사했다는 통보를 받고 통곡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저녁 때 천안에서 집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뜯기도 전에 골육(骨肉)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흔들린다. 모르는 새 담이 떨어지고, 목놓아 통곡하고 또 통곡하였다. 하늘은 어찌 이다지도 불인(不仁)하신가! 간과 담이 떨어지고 또 찢어지는구나!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마땅한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게 무슨 이변이냐! 하늘과 땅이 캄캄하고 백일(白日)도 빛이 변하였구나! 슬프다, 내 어린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를 갔느냐? 너의 영특함이 비범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 않았더냐! 내가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쳤더란 말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누구를 의지하랴! 너를 좇아 함께 죽어 지하에서 같이 울고 싶다마는, 너의 형과 너의 누이와 너의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 살아서 목숨을 연장하겠지마는, 마음은 죽었고 몸만 남아 있다. 소리쳐 통곡할 뿐이다. 소리쳐 통곡할 뿐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년 같구나!(丁酉 10월 14일)”

길게 인용했으나, 여기에서 우리는 성웅(聖雄) 이순신이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한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그의 충무 정신은 한 사람의 아들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길을 충실히 걸었던 인간의 모습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이는 부자자효(父慈子孝)의 순수한 인간애가 사회적으로 승화되고 확충된 바라 하겠다.

다음, ‘충신(忠信)’에서 충은 “자기의 마음과 뜻을 진실하게 다하는 것(中心盡己)”, 즉 자기 성실을 말한다. 이러한 충이 인간 관계의 구체적 사실로 나타날 때 신(信)이라 일컫는다(朱子曰 忠是心上說 信是忠之發).

충은 실심(實心)이고 신은 실사(實事)이다. 그러므로 충과 신은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기초적 덕목이었다. 주체적 성실성과 사회적 공신력이 없는 사회는 곧 혼란과 무질서로 빠져들어 이윽고 붕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충과 신은 개개인이 자주 정신을 가지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공민의식(公民意識)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효제충신이란 옛날 신라 화랑들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특히 현대가 요구하는 교육 내용으로서 필요 불가결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화랑의 풍류를 가르치면서 “들어가서는 가정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魯司寇之旨)이었다”라 하는 것도 가정과 국가에 대한 개인의 책임 의식을 일깨운 말이었다. 신라는 이 같은 정신을 바탕으로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충효사상은 대내적 결속과 대외적 저항의 차원을 함께 갖고 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위압과 침략도 물리치고 국가의 주권을 수호하는 자주 정신의 바탕이면서 동시에 가족과 화목하고 조상을 받들며, 나아가 민족과 인류를 향한 인도주의적 사랑으로 확장된다.

이처럼 친자 관계에서 형성된 효성은 횡적으로 형제애와 동포애로 나아가며, 종적으로는 조상에 대해 보본(報本)하는 정신으로 상승한다. 그것은 다시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상제(上帝)’ 또는 ‘천(天)’에까지 이어져서 유교는 윤리적 차원으로부터 종교적 세계에로 확장되는 것이다.

이황(李滉)은 그의 ≪성학십도 聖學十圖≫ 제2 서명도(西銘圖)의 주해에서 〈서명 西銘〉이 “사람이 천지의 자식”임과, “사람이 천지를 섬김이 마치 자식이 부모를 섬기듯이 하여야 한다”는 것을 밝혔다고 말했다.

동양 사회는 사회적 질서의 유지와 발전이 인위적이며 타율적인 규범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본질이자 보편적 덕성이라 할 효제충신을 연마하고 교화시킴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무리를 모아 선비를 선발하였으되, 효제충신으로 가르쳤으니 또한 나라 다스림의 대요였다”는 기술에서 그러한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충효를 같이 존숭하면서도 그 중에 효를 ‘백행의 근원(百行之源)’이라 하고 “죄는 불효보다 큰 것이 없다(罪莫大於不孝)”고 하여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역사적으로 보면 나라가 태평할 때에는 가정에서의 효를 더욱 중시하다가, 내우외환으로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국가에 대한 충의 비중이 높아졌던 것을 볼 수 있다.

 

한민족의 전통정신과 충효사상

한국은 아주 오랜 시기부터 충효사상을 정착 발전시켜 왔다. 물론, 충효라는 개념은 중국에서 전래한 것이지만 그 정신적 기초는 상고 이래의 습속과 전통의 바탕 위에 마련된 것이었다.

고대의 지석묘(支石墓)나 적석총(積石塚)같은 유물 유적을 보거나, 부여인(夫餘人)들이 상사(喪事)와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는 기록,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가 삼년상(신라는 일년상)을 입었다는 기록을 보면, 한국인이 고대로부터 효를 숭상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오경(五經)·삼사(三史)·≪삼국지 三國志≫·≪진춘추 晉春秋≫ 등을 위시하여 글읽기를 좋아했다 하니, 그 속에 담긴 중국 문화의 풍부한 내용과 더불어 유교의 충효사상 또한 깊이 각인되고 습득되었을 것이다.

고구려가 국력을 신장하고 외적의 침입에 대항하여 지혜와 용맹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대륙적 기질에 유교적 충효정신이 결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열전에 볼 수 있는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온달(溫達)의 경우에서 고구려인의 성향과 기질을 전형적으로 읽을 수 있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은 북방계가 남하하여 건국한 나라로서, 영토는 작지만 일찍부터 강국(强國)으로 성장하였다. 백제가 중흥 발전하여 뚜렷한 독립 국가로 성립되기까지는 정치·군사·외교 등 여러 부문의 도전을 극복해야 하였다. 백제는 특히 해운의 발달로 국제적 무대로 진출해 중국의 선진 문화를 흡수하고 활용하여 국가 발전을 촉진할 수 있었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에는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고 왕자 아직기(阿直岐)와 박사 왕인(王仁)을 일본에 보내 경전과 한문(漢文)을 전수해 주었다.

백제의 풍속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말타고 활쏘기를 중히 여기고, 경전과 사서(史書)를 좋아하였으며, 그 중 뛰어난 이는 자못 한문을 해독하여 글을 잘 지었다”라는 것을 보면 백제의 문화가 이른 시기부터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과 그 문화의 기반에 충효사상이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문화 의식이 백제의 국가적 성장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뒷날 백제가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파멸될 때에 충신 성충(成忠)의 충간(忠諫)과 장군 계백(階伯)의 장렬한 죽음은 호국순의(護國殉義)하는 백제인의 충렬정신(忠烈精神)을 나타내는 마지막 불꽃이었다.

성충은 의자왕의 실정을 간하다가 옥에 갇혀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상소하기를, “원컨대 한 말씀드리고 죽고자 하오. 신이 일찍이 시세(時勢)의 변화를 살펴보니,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겠습니다. 대개 군사를 부림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지세(地勢)를 가려야 될 것이오니, 상류에 머물러서 적병을 지연시킨 다음에라야 능히 보전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외국의 군대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넘어 오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 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험준하고 협애한 곳에 웅거하여 방어하여야만 할 것이오”라 하였다.

억울한 죽음에 이르러서도 나라와 군주를 위해 진언하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사사로운 도생을 꾀하지 않는 성충과 계백의 충혼(忠魂)은 불멸의 정신이 되어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기리는 바 되어 역대로 뒷날의 충신·열사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역사는 길지만 비교적 늦은 시기에 국가적으로 흥성했다. 6세기 초인 진지왕대 이후, 고유한 토속 문화의 틀에만 머무르지 않고 중국 문화를 도입하여 고구려·백제와 맞서 급속히 성장했다. 진흥왕 대에 이르러서는 국력을 신장시키고 국경을 확충하고 경계를 분명히 하였는 바, 이를 네 곳에 세운 이른바 ‘진흥왕순수비’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비문에는 ≪논어≫의 구절인 “제 몸을 닦음으로써 백성을 편안히 한다(修己以安百姓)”는 문장이 인용되어 있고, ‘충신정성(忠信精誠)’·‘용적강전(勇敵强戰)’·‘위국진절(爲國盡節)’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데 이는 모두 충효사상과 직결되는 용어들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술되어 있는 진흥왕대의 ‘풍류(風流)’ 또는 ‘풍월도(風月道)’에 관한 기록은 신라 화랑도들의 정신적 무장으로서 도불사상(道佛思想)과 조화된 충효사상을 선명히 보여 주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화랑의 무리들이 “혹은 도의(道義)로 함께 연마하고, 혹은 음악(音樂)으로 서로 즐겼으며, 산수(山水)에 노닐어서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 가운데서 훌륭한 사람을 관찰, 선발해 조정에 천거하였다고 하였다.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는 “현좌(賢佐)와 충신(忠臣)이 이로부터 배출되었고 양장(良將)과 용졸(勇卒)이 이로 말미암아 나오게 되었다”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삼국 간에 충돌과 갈등이 보다 심화되고 침략과 전쟁과 빈번해짐에 따라 각 나라는 국가 의식을 강화시키고 충효사상을 더욱 고취시켰다.

신라의 경우 ≪삼국사기≫는 열전에서 ‘설씨녀(薛氏女)’와 ‘지은(知恩)’의 경우처럼 비천한 집안의 여성들이 행하는 지극한 효성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효녀 지은의 경우 눈 먼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한 효성을 기려 그 지방을 효양방(孝養坊)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한 사실을 국제적으로 당에까지 알렸는데, 이 같은 사례는 당시 사회가 일반적으로 효를 얼마나 중시하였는가를 알게 한다.

삼국이 통일될 무렵에는 충효 가운데 가족 윤리로서의 효보다는 국민 윤리로서의 충이 더 강조되었다. 이른바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를 보더라도 유교 본래의 오륜의 순서와는 달리 ‘사군이충(事君以忠)’ 다음에 ‘사친이효(事親以孝)’가 있는 것, 또 ‘임전무퇴(臨戰無退)’처럼 불교적 사고에서는 용납하기 힘든 조목이 강조된 것은 당대의 당면한 전쟁의 위기 상황에서 효보다는 충에 더 무게를 둔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김유신(金庾信)이 젊었을 때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있었는데, 낭비성의 싸움에서 신라 군이 고구려 군에 패하여 크게 인명 손실을 입었을 때, 그는 아버지인 서현(舒玄)에게 나아가 갑옷을 벗고 아뢰기를, “제가 평생을 충효로써 기약하였사오니, 싸움에 임하여 용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개 옷깃을 정돈해야 갑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겨야만 그물이 펴진다고 하였사오니,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될까 합니다”라 하고 적진으로 들어가 장수를 베어 옴으로써 그 기세로 큰 승리를 거두고 적의 항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화랑을 비롯한 신라의 젊은이들이 충효정신으로 수련되어 있었음을 알리는 또 다른 자료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 있다. 1934년 경주 부근에서 발견된 이 조그마한 돌의 명문에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글이 소박한 한문으로 적혀 있다.

즉,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맹세하고 적노라. 하늘 앞에서 맹세하고 적노라. 지금부터 3년 후에 충도(忠道)를 지녀서 잘못됨이 없을 것을 맹세하노라. 만약 이 일을 실패하면 하늘에서 대죄를 얻을 것을 맹세하노라. 만약 나라가 크게 불안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모름지기 실행할 것을 맹세하노라. 또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으니, ≪시경≫·≪서경≫·≪예기≫·≪춘추전≫을 차례로 3년에 습득하기를 맹세하였노라”라는 내용이다.

‘충도(忠道)’라는 표현을 써서 하늘 앞에서 맹세하는 엄숙한 모습을 보여 주며, 다시 유교 경전을 습득할 것을 돌에 새겨서 맹세하고 있다. 신라인의 충효정신은 비단 이른바 신민(臣民)에 그치지 않는다.

축생(畜生)으로 태어남을 염려하는 지의법사에게 문무왕은 “내가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 지가 오래 되었다.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맞는 일이다”라고 일축하였다. 드디어 문무왕이 죽으매 불교 식으로 화장하여 동해의 바위에 장사지냈다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전한다.

과연 문무왕은 바다의 대룡이 되어 동해를 수호한다는 신앙이 생겼고, 동해변의 감은사(感恩寺)는 부왕인 문무왕을 위해 신문왕이 창건한 원찰(願刹)이 되었다. 여기에서 신라인들이 서인에서 제왕에 이르기까지 충효의 정신에 충만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충은 일반적으로 “임금은 신하를 예(禮)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 섬긴다”는 공자의 말처럼 신하가 임금에 대해 가지는 도리를 지칭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춘추좌전≫에는 “임금이 백성을 이롭게 하고자 생각하는 것이 충이다(桓公 六年)”라 하고, “사(私)로써 공(公)을 해치는 것은 충이 아니다(文公 六年)”라 했다. “사(私)가 없음이 충이다(成公 九年)”라 하여 충을 제왕에게도 해당되는 공적인 책임 의식으로 인식했다.

이 기준에서 보면 신라는 상하군민(上下君民)·남녀승속(男女僧俗)을 가릴 것 없이 일치단결하여 충효를 실현하여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를 이어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이질적인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규모와 체통을 세워야 하였고, 이민족으로부터 고려를 수호하고 유지, 발전시키는 데 귀감이 될 이념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했다.

그는 고려 창업의 반석을 다지기 위해 유·불·도 3교 및 재래의 토속 신앙을 폭넓게 포섭하여 정치 안정과 민심 수습을 기하라는 뜻을 유훈인 〈십훈요 十訓要〉에 남겼다.

이 글에서 그는 고려의 건국이 삼한산천(三韓山川)의 음우(陰佑)에 힘입었다는 것을 밝히고, 선종과 교종의 사원을 짓고 연등 팔관을 행하도록 하며, 도교적 풍수설을 원용하고, 대통(大統)의 계승을 요순(堯舜)의 선양 정신(禪讓精神)으로 하되, 세습을 시킬 때는 적자에게 나라를 맡기되, 경우에 따라 형제에게 물려줄 수도 있으며, 중화의 예악 문물을 받아들이지만 지역과 인성이 다르니만큼 구차스럽게 꼭 같이 할 것은 없으며, 그리고 거란과 같은 야만적인 나라는 풍속과 언어가 전혀 다르므로 결단코 본받지 말라는 등의 정책 강령을 제시했다.

그는 또한 위정의 요체가 언로의 개방과 민본의 시행에 있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말했다. “임금으로서 인심을 얻는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 마음을 얻고자 할진대 그 요령은 간언(諫言)을 듣고 참언(讒言)을 멀리하는 데 있다. 간언을 들으면 성군이 된다. 참언이 꿀과 같을지라도 믿지 않으면 저절로 그칠 것이다”라 경계하였다.

위정자는 인심을 억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며, 충성과 간사를 구별하여 바른 말을 열어 주고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제10조에서는 ≪서경≫의 무일편(無逸篇)을 들어서 위정의 귀감으로 삼았다. 그 내용은 “나라를 둔 자는 무사시를 경계해야 한다. 널리 경전과 사적(史籍)을 보아 옛 것을 거울삼아 오늘날을 경계하라. 주공(周公)과 같은 대성(大聖)도 ‘무일(無逸)’ 한 편을 지어 성왕(成王)에게 진계(進戒)하였으니, 마땅히 그것을 써 붙이고 출입할 때마다 보고 살피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일’이란 나라에 일이 없다 하여 나태해지고 안일해지는 마음을 깨우쳐 경계하는 말이다. 이는 태조가 나라를 세워 민심을 수습하고 위정의 근본을 다지면서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민족의 수난에 앞선 원려(遠慮)요, 환란을 예비할 수 있는 강령으로서 제시한 바라 하겠다.

주공의 ‘무일편’은 본디 은의 중종(中宗 : 太戊)·고종(高宗 : 武丁)·조갑(祖甲)과 주(周)의 문왕(文王)의 행적을 들어 귀감을 삼았던 바로서 그 내용은 서민의 간난(艱難)을 깊이 이해하고 힘없는 홀아비와 과부조차도 함부로 함이 없이 애족애민함으로써 안녕과 평화를 이룩하였다는 사연이다. 본디 제왕의 자리가 패도적 특권일 수 없고 민본적 책무임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글이다.

이런 사적들을 고찰해 볼 때, 고려의 창업 정신은 패도가 아니라 왕도에 입각하였다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고려 시대 500년을 통해 고려 인민이 고려 국을 사랑하고 향모(向慕)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하겠다.

고려가 내우외환이 거듭되었던 어려운 시대를 헤쳐갈 수 있었던 것은 창업 정신이 건실하였을 뿐 아니라, 역대로 이를 실현해 감으로써 그 기반과 지층이 상당히 두텁고 튼튼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록 고려 후기 정치는 와해되고 사회는 혼미했지만, 500년 사직이 무너질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애통해마지 않았으며, 정몽주(鄭夢周)를 포함해 ‘두문동72현’과 같은 ‘충절지신(忠節之臣)’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가 창업기를 지나 성종대의 수성기(守成期)에 이르면서, 충효의 덕목은 더욱 깊이 존숭되었다. 성종은 “회재포기(懷材抱器)하여 군왕을 섬김은 충의 시작이요,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를 드러냄은 효의 완성인 것이니, 충효를 일컬을 만하면 어찌 총영(寵榮)을 아끼겠는가(6년)”라 하였다.

또 “무릇 국가를 다스림에는 반드시 먼저 근본을 힘써야 하나니, 근본을 힘쓰는 것은 효보다 더한 것이 없다. ……법도는 육경(六經)에서 취하고 규범은 삼례(三禮)에 의거하여 한 나라의 풍속으로 하여금 모두 오효(五孝)의 문으로 돌아가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일찍이 신라의 국학에서 오경을 교육의 중심으로 하고 ≪논어≫와 ≪효경≫을 필수 과목으로 한 바 있었는데, 고려조에서도 인종은 국자감의 성묘(聖廟)에 나아가 석전(釋奠)을 행하고 경학을 강론하도록 하였으며, ≪논어≫와 ≪효경≫을 여항(閭巷)의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어 읽도록 하였다.

충효사상은 유가뿐만 아니라 불가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인식되었는데, 대각국사(大覺國師)의 경우 “천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봉양함에 게을리하지 않았고, 돌아가심에는 지극히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다하여 공덕을 기리는 의식을 행함이 소비(燒臂 : 팔뚝을 불사름)에 이를 지경이었으며, 후에 기일(忌日)을 당하여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비문에 기록하였다.

이처럼 그 효성을 칭송하고 있거니와, 거란과 몽고의 외침을 받아 국란을 당했을 때에도 대장경의 조판 등 호국 불교로서의 몫을 다한 것은 한국 불교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말 주자학의 전래와 더불어 유교사상은 이론적 체계를 갖추면서 국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충효사상도 여말선초를 거쳐 조선조를 통해 뚜렷한 덕목으로 확립되어 사회 전반을 규율하게 되었다.

주자학은 도불사상을 비현실적이며 반인륜적이라 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현실적 사회적 토대 위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와 더불어 유교가 가장 중시하는 가정 도덕으로서의 효와 국민 윤리로서의 충은 일층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었다.

고려 후기에 100년 동안 고려를 지배해 왔던 원(元)의 세력이 명(明)의 건국과 함께 쇠미해지자, 유교의 충효정신은 춘추 의리의 사상과 결합되어 고려 말의 신진 사류(士類)들을 격동시켰다.

주자의 ≪통감강목 通鑑綱目≫은 이미 사류들에게 읽혀졌거니와 그들은 무력으로 고려를 복속시켰던 원을 배척하고 인의예악의 인도주의를 표방한 명을 승인하고 연합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며 태조 이래의 전통정신에 합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당시에 죽음을 각오하고 충분(忠憤)을 지극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으니, 박상충(朴尙衷)은 친원 세력에게 몰려 귀양가는 도중에 죽었고, 정몽주는 유배되었다.

그러나 주자학파인 신진 사류들은 역사관과 정치관의 차이로 인해 두 갈래로 나눠지게 되는데, 고려조를 존속시키면서 경장(更張)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정몽주의 계통은 고려 유신으로 충절을 지켜 의리파(義理派)로 남았고, 혁명을 일으켜 조선조를 창건하였던 조준(趙浚) 등은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새 나라를 건설하는데 매진하였다. 그 둘은 서로 방향은 달랐지만 나름대로 충효를 실현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한편, 고려의 백성으로 군주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반역이었지만, 또 한편 군주에게 탕무(湯武)의 덕이 없다면 혁명을 해서라도 나라를 바로세워야 하는 것이었다.

역사는 의리파가 아니라 사공파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 건국의 주역인 정도전(鄭道傳)은 그의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의 첫머리인 정보위(正寶位)에서 “임금의 지위가 높다면 높고, 귀하다면 귀하다. 그러나 세상은 지극히 넓고 민중은 지극히 많으니 한 사람이라도 그 마음을 얻지 못하면 크게 걱정스럽다. 하민(下民)이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겁탈해서는 안되며, 지극히 어리석으나 꾀로 속이면 안 된다. 그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고 그 마음을 얻지 못하면 제거하는 것이다”라 하였다.

조선조가 유교를 국시(國是)로 한다 할 때 그것은 인정(仁政)을 펼쳐야 한다는 뜻이며, 조선조에서 충효를 강조한다고 할 때 만약 그것이 인도주의 정신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이 말로도 충분히 살필 수 있다.

세종은 “가정에서는 충효를 전하고, 세세(世世)로 인경(仁敬)을 지킨다”는 친서를 남겼다. 가정과 사회·국가에서 행해야 할 국민 교육의 이념으로서 충효와 인경을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한 이념은 ≪삼강행실도≫와 ≪효행록≫의 간행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권채(權採)가 찬한 ≪삼강행실도≫에는 다음과 같은 세종의 전교(傳敎)가 실려 있다. “삼대(三代)의 다스림은 다 인륜을 밝히는 것이었다. 후세에 교화가 무너져서 백성들이 친하지 못하며, 군신·부자·부부의 대륜(大倫)이 모두 본성에 어두워 항시 각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탁행(卓行) 고절(高節)이 습속에 흔들리지 않고 감화받을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그 특출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림과 찬사를 짓게 하노니, 모름지기 안팎의 우부우부(愚夫愚婦)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쉽게 보고 느껴서 흥기하는 바 있게 한다면, 또한 화민성속(化民成俗)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세종같은 성군이 집현전을 중심으로 이같은 편찬 사업을 맡김으로써 충효의 정신은 국가적 규모에서 선양되고 권면되었던 까닭에 유식 무식을 막론하고 충효사상이 조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훈습되고 당연한 생활 풍습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삼강행실도≫ 등의 간행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쉽도록 순치(馴致)하기 위한 시책이라는 비판도 있겠으나, 세종은 이 모든 일을 백성을 위해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임금의 덕은 생명을 사랑하는 것일 뿐”이라 하고, “임금으로서도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 하물며, 노비는 비록 천하지만 이 또한 하늘백성(天民)이거늘 어찌 무고한 자를 함부로 죽일 수 있겠느냐”라 하였으니, 이는 당시 주인이 노비를 죽이는 사례에 대해 반드시 관에 고하지 않고 죽이면 엄단할 것이라는 교시였다.

이러한 언명은 당시에 있어서 도덕성의 고취가 단순히 정치적인 배려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궁극적으로 세종의 소망은 인간이 인간을 죄주고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감옥이 비도록 하는 것(致囹圄之一空)’이었다.

세종 조의 ≪삼강행실도≫나 정조 조의 ≪오륜행실도≫는 당시의 실정에 따른 것으로, 그 내용과 세목이 모두가 진선진미하게 편찬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니 현대적 관점에서 적합하지 않은 것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근본 취지는 힘을 앞세워 인권을 유린하는 전제적 무단 정치를 버리고 인권을 존중하며 경애와 성실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세종의 황금 시대를 지나 세조의 왕위 찬탈이라는 변란으로 조선조를 금가게 하는 사변이 일어났다. 이는 당시의 가치관에 비추어볼 때 도저히 합리화할 수 없는 역사적 오욕이었으니, 이에 대응하여 발휘된 사육신·생육신 등 절의파(節義派)의 기개와 의리는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것으로 충효사상의 정화로서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

단종을 폐하고 등극한 세조는, 기능적으로 치적을 이룬 바 있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조선조를 통하여 탄식과 통한을 자아내게 하였다.

조선조 도학파의 태두(泰斗)인 조광조(趙光祖)는 젊은 기예로 중종대에 출사하여 도학 정치를 펼치다가 곧 기묘사화로 희생되었다. 조광조는 출사 기간 지치주의 이념(至治主義理念)을 실현하여 사습(士習)과 민풍(民風)을 바로잡고 국맥(國脈)을 쇄신하고자 했다. 그는 학문과 정치의 목적과 수단을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그는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을 하는 것은 생민(生民)에 도움이 되고자 할 따름”이라 하고, 또 “무릇 군신(君臣)이란 것은 백성을 위해 베풀어 놓은 것”이며 “상하(上下)가 이 뜻을 알아서 백성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으면 치도(治道)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진계(進啓)하였다.

임금과 신료(臣僚)는 백성을 위해 존재할 뿐이므로, 정부는 백성을 위한 시책을 펴서 “백성이 생업에 편안하면 근심이 없을 것”이며 “조정이 바르게 되면 아랫 사람들이 자연히 심복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언로(言路)를 개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고충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로의 통색(通塞 : 통하고 막힘)은 국가에 가장 관계되는 것이니, 통하면 다스려져 편안하고 막히면 난망(亂亡)한다. 그러므로 임금이 언로를 넓히기를 힘써서 위로는 공경백관(公卿百官)으로부터 아래로는 여항 시정지민(閭巷市井之民)에 이르기까지 말해야 하는 것이다.”

조광조는 국가 지도자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사리사욕을 취하는 습성이 굳어지면 국가의 고질적 병이 되어서 나라의 장래를 보장할 수 없으므로 무엇보다 ‘의리지변(義利之辨)’, 즉 사적 이익과 공적 가치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를테면 중종 반정 이후에 남획(濫獲)된 정국공신(靖國功臣) 중 4분의 3에 달하는 76인이 잘못 책봉되었다 하여, 그 자신 이를 취소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그 뒤 불만을 품은 세력들의 반발로 인한 모함으로 하여 조광조 등의 뜻 있는 신진 사류들이 희생되고 말았다.

그는 절명시(絶命詩)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근심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네. 백일이 땅 위에 내려와 밝히 단충을 비추도다((愛君如愛父 憂國若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이러한 우국애민의 정신은 조선조 일대를 통해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근세의 이항로(李恒老)는 평소에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라는 여덟 글자를 선비된 이들이 힘쓸 표적(標的)이라 하여 문인들에게 역설하였다 한다.

도학정신에 비추어 본다면 충효의 실상은 안으로 나라의 실정(失政)을 비판할 뿐 아니라 생민(生民)을 위한 선치(善治)를 적극적으로 도모하며, 밖으로는 외침에 대비하여 신명을 바쳐 국권을 구호하는 데 있었다.

이황의 경우, 그는 만년에 선조에게 제왕지학으로서의 ≪성학십도≫와 임금이 행할 바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려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나타낸 바 있거니와, 일찍이 〈예안향약 禮安鄕約〉에서도 “선비라는 것은 반드시 가정에서 수련하고 향촌에서 드러난(修於家 著於鄕) 다음에 나라에 천거되어 쓰이는 법”이라 고 하였다. 이는 ‘효제충신’이 인륜의 대본이며, 가정과 향촌은 그것을 행하는 기초적 장소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황은 효제충신에 대해 따로 약조(約條)를 정해 놓지 않았는데 그것은 인간이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일 뿐 아니라 학교를 세워서 교육함이 모두 그것을 권도(勸導)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이(李珥)는 도학(道學)을 학술적으로 밝혀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편찬했을 뿐 아니라 실제 국사에 진력하여 경륜을 펴고자 하였다.

그는 수많은 시폐를 광정하는 수많은 상소문을 올렸는데 임종에 이르러서까지 ‘육조계(六條啓)’를 구술하는 등 나라를 위한 우국충정을 다한 바 있다.

그는 〈해주향약 海州鄕約〉과 〈사창계약속 社倉契約束〉에서 먼저 덕업을 일컬으면서 ‘나라에 충성함(忠於國家)’과 ‘부모에게 효도함(孝於父母)’을 머리에 놓아 기본 강령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충효사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십분 발휘되었고, 그 뒤 한 말에 이르기까지 국가를 위난에서 구해내는 운동의 원동력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 때마다 일어난 의병들과 충국 열사들의 의기(義氣)는 매우 장렬하였다.

 

현대적 전망

끝으로, 충효사상의 본질과 의미를 다시금 돌이켜 보고 그 전망을 더듬어 보기로 하겠다.

첫째, 인간 관계에 있어서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天倫)이라 하여 가장 절실한 인륜으로 꼽는다. 어버이와 자식은 선택이 아닌 운명인 것이다.

그것은 육친(肉親)으로서 피로 맺어진 무조건의 세계이다. 이러한 사랑의 바탕 위에 인격(人格)이 연결되는 것이며, 그리하여 문화적으로 개명된 높은 수준의 도덕성으로 승화된다.

효란 부모의 사랑에 대해 나타내는 자식된 자의 자각적 행위이다. 그것은 자발적이며, 진실한 인격에서 솟아나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무가내(無可奈)한 심정의 발로이다.

사랑의 체험을 느끼는 경우와 관념적인 의무와는 그 내용이 상이하다. 보편적 인간애를 말할 수 있지마는, 그것은 가장 가깝고 절실한 것으로 ‘확충(擴充)’해 갈 때 비로소 실질적 의미를 띤다.

맹자는 “어버이를 친함으로부터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며,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다시 만물을 애호하게 되는 것이다(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라고 하였다.

인간 관계의 보편성을 지향하되 개개의 특수한 상황을 동시에 고려할 수 있다면 나의 부모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천하가 일가(一家)요 나랏 사람이 일인(一人)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유교는 특수한 개별자의 입장을 중시하더라도 사해동포(四海同胞)로서 인간적인 보편성을 이해할 수 있다면, 비록 친소(親疎)의 실정이 다르고 인격적으로 귀천의 등급이 다르다 하더라도 자기 개인의 사사로움에 얽매이지(爲我) 않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朱子, 西銘註).

특수한 개별적인 행위는 그 자체로 제한되지 않고, 보편성을 지향하여 연결, 성장될 때, 비로소 보편성과 특수성이 괴리하지 않고 서로 조화되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이것이 가족에서 민족으로, 그것이 다시 인류로 이어지는 연속적 유기적 통로가 열리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폐쇄적 가족주의와 민족주의로 기우는 것은 올바른 충효사상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 효란 충으로 연결되고 있으니, ‘내 집’과 ‘내 나라’를 수호한다고 하는 충효사상은 민족을 오랜 역사를 통해 내우외환으로부터 보존해 온 근원적 사상이자, 민족 문화를 유지, 발전시켜온 근원적 동력이었다. 혈연적인 혈통과 문화적인 전통의 결합은 민족적 차원에서 효의 이념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할 것이다.

≪중용≫에 의하면, 공자는 “효란 사람(父母, 祖上)의 뜻을 잘 계승함이요, 사람의 일을 잘 행하는 것(繼志述事)”이라 하였다. 신안 진씨(新安陳氏)는 이것을 풀이하여 “조(祖)·부(父)가 행하고자 했으나 미처 행하지 못한 것을 자손이 그 뜻을 잘 계승하여 성취하며, 조·부가 이미 행한 것으로서 본받을 만한 것이 있으면 자손이 그 사업을 토대로 하여 좇아서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전통 정신을 계승하여 발전적으로 수행해 가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서산 진씨(西山眞氏)는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켜 가는 것도 ‘뜻을 받들어 잇는 것’이려니와 마땅히 변경할 것을 변경하는 것도 또한 ‘뜻을 받들어 잇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효 사상의 해석에는 조상의 것이라 하여 맹목적으로 목수함이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시대적 상황에 알맞게 대응 처리하여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효는 민족적 차원에서 국권을 수호하고 민족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이념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전통 사회에 있어서 충효사상은 실제적 운용에 있어서 개인보다는 집단을 중시하고, 사회적 개방성보다는 가족적 폐쇄성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현대 시민 사회에 있어서는 개인의 자주성 및 평등한 인간 관계가 주창된다. 그러나 지나친 개인주의에서 오는 인간 관계의 냉각과 고립화, 원자화 현상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며, 여기에 친애의 정으로 결합되는 부자자효(父慈子孝)의 도덕성에 대한 성찰이 다시금 요망되고 있다.

친자 관계의 불실(不實)은 왜곡된 인간상을 산출하고, 그것은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편적 인간애를 지향하더라도 인간애의 근원으로서의 혈연적 유대를 망각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본심을 매개로 한 것이 아니므로 영속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현대적 의미에서 충효사상은 개인적으로 자주 의식을 지닌 각성된 인간 주체가 어떻게 자발적으로 협동하고 상호 부조할 수 있으며, 공공 정신을 발휘하여 공동체 의식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어떻게 민족적 역량이 내부로부터 성장 성숙해 갈 수 있겠는가를 묻고 고민해야 할 줄 안다.

가정에 있어서의 효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숭경심으로서의 종교적 정신에까지 승화되고 형제간의 우애는 대인 관계에 있어서 사회성과 세계성으로 확대되는 방향에서 성찰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好學의 교육 3 > (국어사전)國語辭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회사상[ 社會思想 ]   (0) 2012.09.08
교육사상[ 敎育思想 ]   (0) 2012.09.08
충[ 忠 ]   (0) 2012.09.08
중용사상[ 中庸思想 ]   (0) 2012.09.08
인본사상[ 人本思想 ]   (0) 2012.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