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8. 시장경제는 비정하다?

好學 2012. 9. 8. 09:33

 

8. 시장경제는 비정하다?

 

시장경제는 이기적인 경쟁을 전제로 한다. 이 때문에 시장경제는 비정하고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경쟁이 없는 사회는 더 많은 비정함과 부도덕을 낳을 수 있다.
 

 

사람들은 시장경제를 철저한 경쟁,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냉엄한 현실, 약육강식의 법칙, 극도의 이기주의 등과 연결지어 생각한다. 이는 시장경제에 대해 비정하고 비도덕적이라는 좋지 않은 감정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의 인식처럼 시장경제가 그렇게 비정한가? 시장경제는 자유로운 경쟁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효율(Efficiency)이라는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없다. 경쟁은 이처럼 시장경제의 핵심적인 구동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은 시장 경제가 비정하다는 인상을 주는 원흉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경재은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패자들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장경제에서 경쟁의 원리를 제거 혹은 완화한다면 이러한 고통이 없어질까? 예상되는 불행의 정도를 안다면 오히려 경쟁이 있음을 감사할 일이다.
 
이제 경쟁이 없는 사회를 상상해 보자. 하나의 일자리를 가진 회사와 두 명의 구직자가 있다. 경쟁이 있었을 경우라면 경쟁력 있는 구직자와 그를 고용한 회사는 승자가 된다. 즉 '승자2' '패자1'인 상황이 된다. 경쟁이 없다면 제비뽑기를 하거나 생년월일순 등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경쟁력있는 구직자가 탈락한다면 승자는 경쟁력이 뒤진 구직자만 된다. '승자1'에 '패자2'인 상황이 된다. 비정함을 느끼는 사람(패자)이 증가하며 사회적 효율성도 저하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혹시 두 개의 일자리(회사)에 두 명의 구직자가 있는 여유로운 사회를 가정하면 경쟁도 비정함도 없을 것으로 생각할 지 모른다. 하지만 일자리와 구직자에게 완전한 동질성이 없는 한 사회는 적재적소에 필요한 자원을 배분할 수 있는 기능을 필요로 한다. 경쟁이 없는 사회는 적절한 자원배분의 기능을 상실하고 두 개의 일자리를 둘러싼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혹자는 경쟁은 필요하지만 패자에게 가혹하므로 그 결과를 비밀로 한다든지 혹은 결과의 의미를 축소하고자 한다. 유사한 사례가 우리나라 교육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최근 교육인적자원부는 공부 잘하고 못한 것을 성적표에 기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학력평가는 하되 공표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경쟁에서 아이들을 해방시켜 아이들의 기를 살려준다는 명분을 갖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아이들의 기는 학업능력과 노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실현되고 그 평가가 학생에게 되먹임(Feedback)되어야 살아나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비정한 경쟁의 고통을 피하게 해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자신의 경쟁력을 파악하지 못한 아이의 미래는 더욱 비참하지 않을까. 단지 비정함을 지연시키고 자칫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번에는 경쟁이 꼭 필요하다면 좀 봐주면서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100M 달리기 경주에 체격조건에 따라 출발점의 위치를 달리하는 것이다. 체격조건의 정의부터 시작해 수많은 논란이 일어날 것은 자명하다. 설사 합의를 이룬다 해도 결과는 체격조건이 불리한 사람들만의 경기로 변질될 것이다. 결과의 평등의 연연하다가 기회의 평등을 희생시킴으로써 더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시장경제가 비도덕적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흔히 사람들은 부정부패, 환경파괴, 불량식품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시장경제의 도덕성 부재 탓으로 돌린다. 개인의 이기주의에 기초한 시장경제가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부도덕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1776년에 발간된 <국부론>에서 아담 스미스는 시장경제체제에서 모든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목적에 기여하게 된다고 했다. 사익의 추구가 결국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공공이익에 기여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기주의가 필연적으로 부도덕을 낳지 않고 사회적 이익의 증대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담 스미스의 말을 다시 한번 인용해 보자.
 
"거의 모든 사람은 그 본성상 우선 스스로를 돌보도록 권유받는다. 그리고 사람은 타인을 돌보는 것보다 자신을 돌보는 것에 좀더 적합하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적합하고 올바르다. 만약 사람이 자신의 행위원리에 불편부당한 관객이 동감할 수 있도록 행동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 중에서 그가 가장 하고 싶어하는 것이라면, 다른 모든 경우처럼 이 경우에도 그는 이기주의(Self-Love)의 오만을 꺽어 타인이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불편부당한 관객은 자신의 위치에 나를 놓거나 특정힌 관점에서 나를 보면 나의 행동이 자신에게 어떻게 비춰질까를 고려하는 존재다. 양심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시장경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가로서, 노동자로서, 생산자로서, 소비자로서 재화와 용역들을 공급하고 수요한다. 이러한 행위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다.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하고 개인들의 이기심으로 혼탁해질 것 같은 시장경제가 질서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불편 부당한 관객'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단, 불편부당한 관객이 멀리 있거나 편견에 가득 찰 경우 앞에서 말한 사회적 폐해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로 시장경제의 비도덕성을 비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이같은 폐해는 시장경제가 형성되지 않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속되어 왔을 뿐 아니라, 다른 경제체제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시장경제가 비정하고 비도적인 시스템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는 노력을 먼저 하는 것이 순서일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