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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바른 삶

好學 2012. 8. 14. 22:44

부활과 바른 삶

 


    시편 73편의 시인은, 정직하게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선을 베풀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니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보다 적 당하게 거짓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잘사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몸에는 윤기가 흐르고 재산은 불어나며 하나님을 비방해도 그들은 아무런 재앙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런 악인들의 모습을 지켜본 시인은 낙담하여 회의에 빠졌습니다.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그는 이 고민을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을 해 보았지만, 스스로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올라가 기도하는 중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다 잘되는 것 같아도 결국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에는 그들은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확신을 가지고 그 성소를 내려올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명예를 탐하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려는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았던 사람들 입니다. 시편 73편의 시인과 같이 이들은 세상의 악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부러워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권력을 부러워했고, 그들이 가진 재물을 탐냈습니다. 그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들은 변화되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던 권력이나 명예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보다는 더 값있고 의미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깨닫고 그 복음을 전파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적인 삶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 율법이 지시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보다 더 중요한 가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부활은 제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부활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을 거슬려 살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부활은 제자들에게 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부활 이후 제자들은, 시편의 신앙인이 성소에 올라가 깨달은 참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었습니다.

    부활은 마침내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막혀 있던 담까지도 뛰어넘게 하였습니다. 부활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사건으로서의 부활

    오늘 우리의 부활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의 부활신앙이란 이 다음 예수님 재림 때 다시 살아나서 어린양의 잔치에 참여한다는 정도가 아닐까요? 우리의 부활신앙이 우리의 현재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부활이란 말이 왠지 공허하게 들리고 확신이 가지않는 것도 우리의 삶의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목사가 부활절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목청 높여 설교하지만, 왠지 모르게 부활에 대한 확신이 가지 않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아마도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삶이 변한 것처럼 변화될 자신이 없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부활 신앙이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졌다는 그리스도인이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나 그 삶이 별로 다를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요, 역사의 대전환점인데, 어째서 우리의 부활신앙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요? 결국은 우리의 부활신앙은 대단히 이기적인 것이어서 이 다음에 죽어서 다시 살아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욕심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진 부활신앙은 현재 이 땅에서 복을 받으며 잘살겠다는 욕심을 죽음 이후까지 연장시켜 주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부활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부활이라면 결국 이 다음에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재림 때에도 부활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부활하지 못한 사람은 재림 때에도 부활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부활한 사람만이 다음에도 부활할 것입니다. 오늘 영생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후에도 영생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은이 다음에 체험할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삶에서 체험되어야 하는 사건입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서 "아, 우리도 이 다음에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전처럼 안이하게 생활을 하였다면 초대교회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박해가 두려워 큰소리로 나가 복음을 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 물건들을 유무 상통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팔아 반만을 바친 것을 알았어도 대단히 칭찬을 해주고 축복하여 주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를 오라고 청했을 때에 아마도 베드로는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방인의 집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율법주의적 생각 때문에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데반 같이 열정적으로 전도를 하다가 순교를 당한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 분별없이 굴다가 그만 아깝게 죽었구먼' 하면서 더욱 몸을 도사렸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붙잡혀 공의회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전도하지 말라는 위협을 받고는 그러겠노라고 굽실거리며 대답을 하고는 풀려난 것만도 고맙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하면서 여러 곳으로 전도하며 다닌 바울에 대하여는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로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 아마도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으면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결정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사도행전을 다시 쓴다면 그 모습이 오늘의 교회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의 교회들이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오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면 오늘의 교회도 사도행전 교회처럼 힘있는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분열과 그리스도인들의 무기력함은 부활신앙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자세히 보면 이 다음에 죽었다가 예수님 재림 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 신앙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였고,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었음을 설교하였을 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의 부활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부활한 사람에게만이 다음의 부활이 기쁨이요 승리가 되는 것이지, 오늘 체험치 못한 사람에게는 이 다음의 부활이 오히려 심판이요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적당히 예수 이름을 부르며 살다간 사람이 이 다음에 선한 부활로 나오리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자기 편리한대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땅에서도 복을 받아 잘 살고, 죽어 천국 가서도 부활하여 영원히 행복하게 살겠다는 것은 대단히 이기적이요 욕심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국은 이런 욕심스러운 사람들을 받아 주는 곳이 아닙니다.

    자기 희생과 겸손으로 행하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그를 영화롭게 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오늘을 고민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

    그러면 오늘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될까요? 적어도 문제 의식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시편 73편의 시인처럼 악인들이 잘되는 것을 보면서나도 저들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하게 계속 살 것인가를 고민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솔직히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주께서는 온종일 나를 괴롭히셨으며, 아침마다 나를 벌하셨습니다"(시73:14). 온종일 괴로워할 만큼 이 시인은 고민을 한 것입니다. 그는 한때"에라 모르겠다. 나도 그들처럼 적당히 살자"라고 하고 싶은 충동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민 고민하면서 그 문제를 풀려고 성소에 올라가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한 끝에 그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악인들의 번성이란 일시적인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전에는 별로 고민스럽지 않던 것들이 고민스러운 문제로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저와 신학교를 같이 다니다가 중도에서 그만두고 유학하여 교육학박사가 된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대학교수가 되었고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부인도 상당히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이고 역시 신앙의 가정에서자란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고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교육학을 전공한 박사인데, 자기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비교육적으로 공부를 시킬것인가 아니면 자유롭게 그 인격을 자라게 할 것인가? 결국 그들은 대학입시에 낙방한 자녀를 재수시키지 않고 취직을 시켰습니다. 그들은 세상사람들이 모두 가는 그 길로 가기를 거부하고 바른 길이라고 확신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지금 이런 고민을 가진 분들이 많이 있을 줄 압니다.

    어느 글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두 딸을 데리고 어렵게 살고 있는 어느 여집사가 보험회사의 외무사원으로 일을 하였는데, 실적이 나빠 항상 상급 직원에게 꾸지람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당신은 너무 양심적으로만 일을 하니까 건수를 올리지 못하는 겁니다." 그 여집사는 그렇게 말하는 상급자의 꾸중이 옳은 줄을 알지만 자신은 절대 남을 속이거나 억지로 강요하면서 가입자를 늘릴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여집사는 정말 살기가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서는 절대 축복을 못 받아요"라고 말하며 한숨을 지었습니다. 결국 그는 남들이 누리는 넉넉한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살아있는 한 양심만은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심방을 하면서 의외로 우리 교인들이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환경보호 운동을 위해서 특히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방 안에 비닐 봉지를 넣어 가지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꺼내 쓴다던가 재활용 가능한 물품들을 철저하게 구별하여 모은다던가 하는 모습들을 대하면서 바른 삶을 위한 용기 있는 노력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농촌 살리기 운동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고민스러운 참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방법이 모색될 때까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라도 또 우리의 희생을 감내하면서라도 이 일을 위해 여러 모양으로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이런 일에 많은 교우들이 참여하신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신앙은 결코 이 다음 재림 때에 필요한 신앙이 아니라 오늘 필요한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현재의 삶이 변화를 이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오늘의 잘못된 삶의 흐름을 거슬려 바른 삶을 이룩해 가는 용기입니다. 부활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훗날의 일어날 사건 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이제까지 당연하게 받아 드렸던 이 땅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아니오' 라고 말하면서 바른 삶으로 전환하는 결단의 사건입니다. 부활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의 삶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 재림 때에도 부활에 참여하자 못할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바른 삶 속에 있습니다. 오늘 도도하게 흘러가는 불의하고 비도덕적이며 거짓된 모든 삶에 맞서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른 삶을 실천하는 용기 속에서 우리는 부활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모든 악의 물결을 헤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른 삶을 창조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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