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自由/박장대소拍掌大笑

안식년까진 안 바라니 월차를 달라

好學 2012. 6. 28. 21:48

안식년까진 안 바라니 월차를 달라

 

 

줌마씨, 안녕하세요?

일면식 없는 사람에게 불쑥 메일이 날아와 저으기 놀라셨나요?^^ 명절 넘기고 나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게 누구에게라도 편지를 쓰고 싶어져서요. 가을은 폐경과 함께 단풍색 홍조를 달고 사는 오십 대 여인의 계절이기도 한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명절은 잘 쇠었나요? 그나마 연휴가 3일 뿐이라 얼마나 다행이던지요. 새벽 별 보며 일어나 보름달 휘영청 꺾일 때까지 일해야 하는 7대 종가 시댁에서의 중노동도 올해는 다섯 동서들의 명랑한 수다 덕분에 비교적 가뿐하게 견뎠답니다.

썰렁한 자식 자랑, 공포의 돈 자랑으로 이어지던 대화가 올해 대변화를 맞이한 건 세계 증시의 폭락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건망증' 덕분이지요. 칠순의 시어머니께서 송편에 넣을 녹두고물 봉다리를 잃어버려 집안을 한번 뒤집었다 엎는 바람에 근로시간 내내 건망증 무용담이 속출했답니다. 들어보실래요?

"목욕탕 갔다 오는데 멀리서 웬 남자가 반갑게 인사를 해. 낯익은 얼굴인데 수퍼 총각인지, 세탁소 총각인지 도통 생각이 안나. 궁금해서 물었지. '근데 누구시더라?' 그러자 남자가 그래. '희경이 담임입니다…'"

"저는 굴러가는 차만 타면 제정신이 아니에요. 남대문 가려고 분명히 4호선을 탔는데 내렸다 하면 동대문인 거 있죠. 언젠가는 친정 가려고 광주행 고속버스를 탔는데 터미널에 내리니, 세상에! 동대구더라고요."

"난 신문에 날 뻔했지. 소족 달이던 가스불을 안 끄고 왔다갔다 8시간이 걸리는 시골 친척 결혼식에 갔다 오지 않았겠어? 이게 다 시간 없다며 영감탱이가 크락숀을 빵빵 울려대서야. 아파트 전체가 난리가 났지. 중앙밸브를 잠가 온 주민이 저녁 밥도 못해먹고 우리 오기만을 도끼눈 뜨고 기다리고 있는데, 쫓아내지만 말아달라고, 집집이 다니며 머리가 땅에 닿도록 빌었어."

"저는요, 준희 아범이랑 모처럼 한 이불 덮기로 해놓고 샤워를 하러 갔었어요. 머리 감으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타일 바닥에 물때가 새까만 거예요. 습관처럼 솔로 박박 문지르기 시작했죠. 바닥을 닦다 보니 벽도 문지르게 되고. 그렇게 30분이 지났을까. 화들짝 놀라 욕실 문을 열어보니 이 남자 팬티만 입은 채 곯아떨어진 거 있죠. 히히!"

저야말로 그 놈의 건망증 때문에 허구한 날 남편에게 "머리가 나쁘네" "애들이 공부를 못하네" 갖은 타박을 듣고 살았죠. 처음엔 고민이 심하게 되더니, 나이 오십 먹으니 알겠어요. 치마 입을 때 허리춤에 차곡차곡 개어 넣어야 들어가는 뱃살들, 그리고 이 건망증이야말로 대한민국 여자로 태어나 요령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훈장이란 걸요.

그래서 남편에게 선포했지요. 이제부터라도 한 달에 한 번 '월차'를 쓰겠노라, 건망증은 뇌 자체보다는 심리적 불안감이 더 큰 원인이라 하니 나도 나만의 시간을 갖겠노라, 누구처럼 안식년 내놔라 않는 게 어디냐, 그러면서.

아, 녹두고물은 어찌 되었냐고요? 현관 밖 음식물 쓰레기통 안에서 발견되었지요. 그나저나 월차 내서 광화문 가면 커피 한 잔 사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