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 바람 내 방에 들고
가을 달이 내 휘장을 비춰
내 마음 이리도 설레나니
어느덧 계절의 갈마듦이여!
옷 추어 입고 문을 나서니
손에 든 건 으레 대지팡일다.
산 정기야 저녁이 본디 맑지만
날 위해 새단장을 하였음에랴?
혼자 즐기기 넉넉하거니
동자는 딸려 무엇하리?
만물이 잠들어 고요한 밤을
이슥토록 우두커니 서 있어라!
돌아와 빈 침상에 누웠노라니
그윽한 꿈, 소회를 달래어 주네.
요점 정리
작자 : 이행 / 손종섭 옮김
갈래 : 한시, 오언 고시
성격 : 감상적, 자연친화적, 서정적
주제 : 가을밤의 산거 정취
출전 : 옛 시정을 더듬어서
내용 연구
西風 : 가을 바람
秋月 : 가을달
照我 : 내 방의 휘장을 비춤
我懷 : 나의 심회
不能定 : 가을밤의 정경으로 인해 나를 안정할 수 없음
天運 : 하늘의 운수이나 여기서는 계절이 바뀌는 자연의 이치
自相差 : 저절로 서로 다름, 계절 따위가 갈마듦
攬衣 : 옷을 추어올려 옷자락이 끌리지 않게 입음
竹杖 : 지팡이
仍手持 : 항상 손에 쥐여 있음
夕固佳 : 본디 저녁 때가 좋음
爲我 : 나를 위하여
獨賞 : 홀로 가을의 저녁을 완상함
有餘興 : 넉넉한 흥취가 있음
安用 : 어찌 ~을 쓰리요?
兒輩 : 아이들로 여기서는 심부름하는 동자
群動 : 뭇 동물. 또는, 움직이거나 소리나는 모든 것
一已靜 : 한결 같이 이미 고요함
佇立 : 우두커니 서 있음
多時 : 긴 시간, 장시간
臥空榻 : 빈침상에 눕다는 말로 '탑'의 음에 유의할 것
幽夢 : 그윽한 꿈
慰所思 : 생각하는 바를 달래줌, 모든 번거로운 생각들을 잠재워 줌.
이해와 감상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계절이 있는 곳의 가을은 항상 사람을 설레게 하나 보다. 마리아 릴케는 가을날의 시에서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라고 노래했지 않는가? 그리고 시인 박재삼도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라고 가을의 깊은 맛을 노래했다. '김소월'은 '가을 저녁에'이라는 시에서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도 없건마는!/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라면서 가을의 설레임을 노래했다.
시적 화자는 산거(山居)에서 가을밤의 정취를 흠뻑 느끼고 있으며, 가을밤은 시인에게 자연과 교감하는 시심(詩心)을 불러 일으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물이 잠든 시간에 홀로 깨어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런 때 지우(知友)가 한 병의 술을 들고 찾아온다면 도리어 분위기가 깨질까? 아니면……
이해와 감상1
가을밤의 산거 정취다.
서늘 바람, 가을달의 정겨운 손짓, 눈짓에 이끌리어, 모든 것이 한결같이 아름답고 평화롭고 정답기만 한 산마을길을 이슥토록 거닐며, 자연가 교감하는 맑고도 흐뭇한 시정이다.
(중략)
만물이 잠든 가장 고요하고 투명한 시간에, '긴 동안 홀로 우두커니 서서' 무엇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침실에까지 스며들어 유인해 낸 맑은 바람 밝은 달에 매료되어서였던가? 새 단장으로 상냥하게 맞아 주는 가을 산의 염용(艶容)에 혹해서였던가? 또는 진선진미(盡善盡美)한 자연과 순진(純眞)무구(無垢)한 인간과의 만남에서의 서로 흉금을 터놓은 흐믓한 통정이었던가? '佇立亦多時(저립역다시)'의 이 우두컨한, 긴 시간 속에 무한한 함축을 느끼게 하고 있다.
늙으면 잠이 적고, 그러자니 사념만 많아, 늘 잠타령하게 마련이건만, 사념이 육신과 함께 안온한 꿈길로 자연스럽게 암전(暗轉)되어 가는 이 끝구에는, 복된 늙은이의 평화로운 잠자는 매무새와 그 숨결을 듣는 듯하다.
용재의 시는 일반적으로 침중(沈重)하고 아정(雅正)하며, 담박하고도 평화로우며, 명쾌하고 쇄락하여 광풍(光風) 제월(霽月)인 양 기품이 있고, 시어도 고박 간결하여, 화려와 멋을 꺼리고 있다. 허균은 '성수시화'에서, '용재는 정각을 얻어 선문에 들었다.'고 평했는데, 이는, 그의 시사(詩思)가 완미(完美)의 경에 들어, 현세적인 고뇌 따위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탈속(脫俗)의 경지임을 기림이었다. (출처 : 손종섭 편저 '옛 시정(詩情)을 더듬어')
심화 자료
이행(李荇)
1478(성종 9)∼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水)·청학도인(靑鶴道人). 지돈녕부사 명신(明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추(抽)이고, 아버지는 홍주부사 의무(宜茂)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교리(敎理) 희(熺)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예문관 검열·봉교,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수찬를 거쳐 홍문관교리까지 올랐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사간원헌납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고, 이어 함안으로 옮겨졌다가 1506년 초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홍문관교리로 등용되고, 이어 부응교로 승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재능있는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하였다.
1513년(중종 8) 다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가 이듬 해 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사섬시정(司贍寺正)을 거쳐 1515년 사간원사간이 되고, 이어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신진 사류인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어 첨지중추부사·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에 내려갔다. 이듬해 병조참의·호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좌참찬·우찬성으로 승진하고,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으로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축출되면서 복관되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었으나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新增東國輿地勝覽, 國朝榜目, 武陵雜稿, 容齋集, 白軒集, 再思堂逸集, 燃藜室記述, 大東奇聞.(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