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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승리이다 [설교]

好學 2012. 4. 7. 22:53

부활은 승리이다


      고전 15:50-58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는가?'
         이것은 인류의 최대의 관심사(關心事)이었고,
         인간 이성(理性)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영원한 숙제이기도 합니다.
         많은 종교들이 자기 나름대로 부활 신앙을 가졌지만,
         기독교의 부활 신앙처럼 역사적(歷史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사실 위에 세워진 종교는 없었습니다.
      
      2000년동안 기독교를 박해하고, 기독교 신앙을 와해(瓦解)하려든 각색 이단들이 제아무리 부활 신앙을 부정하려고 했어도, 오늘까지 부활 신앙은 건재하여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짓과 허위는 결국 드러나고 끝장이 나고야 마는 것이라면, 부활 신앙은 세월과 함께 점점 더 널리 펴져 나가고 있으니, 이 하나만 보아도 부활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문자 그대로 역사에 있었던 하나의 사실(事實) 그 자체이지, 이성과 지성으로 이해되고, 안되고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란 말씀 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신학자들 중에는 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이성적 합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면서, 부활은 자기들이 생각대로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부활 사건을 사실적 바탕 위에서 해석하려 하지 않고, 단순히 윤리적으로, 또는 이념과 사상으로, 정신적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애국 지사들의 죽음이 영원히 그 민족의 가슴속에 살아남아 있듯이, 예수의 부활도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부활 신앙의 확립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지적했듯이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17-19)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설득으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믿음은 지식으로 설명되지도 않고, 다만 자기 스스로의 결단입니다.
      남이 무어라 해도, 내게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받아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substance)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evidence)'라고 하였습니다.

      실상(實相)이란 무슨 뜻입니까? 실상은 허상(虛想)의 반대 개념입니다.
      부활은 결코 사람들 마음속에 <허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 위에 나타난 실상이요 실제적 사실에 대한 증거(證據)란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실제적 증거가 무엇입니까?

      1. 부활은 죽음(死亡)에 대한 정면 도전이요 승리(勝利)입니다.

      아담 이후 인류의 최대의 적은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종이었습니다.
      죽음은 인류의 최대의 폭군이었고,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어떤 영웅 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죽음의 횡포는 인간의 양심마저 빼앗아 거짓 증거를 하게 하였고,

      죽음의 형틀에서 모든 인간은 벌벌 떨며 한 번만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 서 죽어 갔습니다. 참으로 인간은 죽음 앞에 모두 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2:15절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 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지금도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이 두려워서, 아예 병원에 가지도 않고,
      진찰도 받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 정작 병마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면, 절망하여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무서워하는 죽음의 도전을 정면으로 받아 승리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었습니다. 사망이라는 폭군의 도전을 피한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죽음을 그대로 수용하고 승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정면으로 대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아무런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망의 쏘는 것은 죄라고 했는데, 이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값을 지불하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망의 지배하에서 해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노예 생활로부터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신자들의 신앙을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저들은 박해 속에서도, 온갖 고초와 형벌 속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초대 기독교인들도 그러했습니다.
      천주교의 박해 사를 보던지, 일제 36년동안의 철권 통치하에서, 그리고 공산치하에서 순교한 많은 성도들을 보면, 죽음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죽음과 맞서 승리하였음을 봅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2. 부활은 거짓(虛僞)과 불의(不義)와 죄(罪)에 대한 승리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왔고, 그 사망 권세는 오늘까지도 죽음의 위력을 앞세워 거짓과 불의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모두 거짓됨으로 오염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가 누굴 탓할 수 없도록 모두 거짓으로 물들여 졌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10-12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세력 앞에, 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존재들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선과 악의 갈등에서 그는 언제나 악의 세력에 굴복하며 너무나 무능하게 산다고 고백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였습니다.(롬7:24)

      어찌 이것이 바울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뜻 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뜻 대로 살기로 했네' 라고 찬송을 힘차게 불러도 정말로 주님뜻 대로 살았는가? 항상 반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죄책감에서 해방 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어디에 가서 그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게 하고, 죄를 음페하기 위하여 불의를 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자들의 행위였습니다.
      인류 역사는 이러한 거짓과 불의의 죄의 세력들이 도리어 참(眞)을 윽박지르고 의(義)를 매장시키려는 세력으로 등장하여 역사를 지배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부활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선언을 얻게 되었습니다. 옛 사람, 죄의 지배하에 있던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톨스토이의 유명한 작품 [부활]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카츄사라는 한 여성의 기구한 일생을 그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카츄사는 귀족 네흘류도프의 집에 하녀로 있으면서, 네흘류도프의 의하여 더럽혀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유형 수가되어 시베리아로 갔습니다. 눈으로 덮인 시베리아 들판에서 부활절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자기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찾아온 네흘류도프와 함께 복음서가 말해 주는 진리의 부활의 길을 찾아낸다는 것이 그 작품의 내용입니다.

      "주는 실로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죄의 얽매였던 카츄사의 영혼이 부활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죄의 종으로 사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부터의 해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부활에서 찾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죄의 세력을 부수고 살아나신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3. 부활은 미움과 증오(憎惡)의 갈등을 이긴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무리들, 저들은 승리자 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저들은 자신들이 승리한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교권주의(敎權主義)자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백성을 미혹케하던 자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자부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이 모든 증오와 미움의 갈등을 승리하였습니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시었던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부활은 총검의 증오를 사랑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못난 제자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세 번씩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한 번도 책망하지 아니했습니다. 도리어 사랑을 확인하는 말만 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자기를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한 번도 책임 추궁의 말 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만 반복해 물었습니다.
      이 사랑 앞에 그는 녹아졌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우리는 이 베드로의 대답에서 통곡하며 한없이 회개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모두 남들과 비교된 믿음이었고,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인간중심의 사랑이었지만, 그래서 언제나 그는 "남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노라"고 장담했던 신앙이었지만, 이제는 남과 비교된 신앙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확인하려고, "시몬아! 이제도 너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나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주여! 내 어찌 다른 사람들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은 주님께서 아시지 아니합니까" 라고.....
      보다 깊어진 사랑의 성숙을 보게 됩니다.

      부활은 승리입니다. 미움과 증오에 대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원수가 없는, 원수를 모르는 사랑!
      이 사랑 앞에, 모든 증오와 미움과 갈등은 살아졌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으면서까지 원수를 위하여 용서를 빌었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당해 낼 자가 없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가르침, 그 사랑 앞에 로마제국의 총검도 녹아 버렸습니다.

      이 사랑의 힘으로, 젊은 집사 스데반이 돌로 몰매를 맞으며,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고, 그 포악한 무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힘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늘 보좌 위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놀라운 사랑의 근원이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검은 대륙 아프리카로 들어간 프란시스나, 문등이촌으로 들어간 다미엔이나, 그리고 미개한 지구촌의 곳곳마다 들어가 지금도 자신을 불태우는 많은 주의 종들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랑의 녹아진 사람들이 지금도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