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절기행사,예배자료

고난 주간 묵상 기도문

好學 2012. 4. 7. 22:23

고난 주간 묵상 기도문

 

 

고난주간 동안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여정을 뒤따라가기 위해 이 자료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날 그날의 성서본문에 나오는 사건을 묵상하고 읽어볼 시와 기도문을 명상한 후에 고난 중에 있는 자매와 형제를 기억하며 그리고 성문밖교회와 이 민족과 인류를 위해 마음을 모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어 고난주간이 지나고 나면 부활주일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하여 부활주일 아침에 묵상할 자료도 함께 실었습니다. 부활주일 예배 참석 전에 묵상하고 오시면 유익할 것입니다.

■ 월요일
1)사건: 무화과 나무 저주(막11:12-14), 성전청결(막11:15-29)
2)읽어볼 시 한편
사랑의 모습
사랑은 넘어지고 외로운 이를 일으켜 주는 손을 가졌습니다.
사랑은 우리 중에 가장 불쌍한 자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사랑은 소외받은 자와 어린아이들의 신음소리를 듣는 귀를 가졌습니다.
사랑은 패배하고 아픈 사람들을 격려하고 응원해주는
목소리를 가졌습니다.
사랑은 고통받고 슬픈 이를 감싸안아 주는 팔을 가셨습니다.
사랑은 힘들고 지친 사람을 치유하는 환한 미소를 짓는 얼굴을 가졌습니다.
사랑은 도움과 격려를 필요를 하는 사람들에게
빨리 갈 수 있는 발을 가졌습니다.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랑은 바로 당신의 모습입니다.

3)기도제목: 자신을 위하여


■ 화요일
1)사건: 유대인들과 논쟁(막11:27-12:40)
예루살렘을 보시고 한탄하심(마23:37:-39)
감람산에서의 예언적 강론(마24-25장)
예수의 머리에 향유부음(막14:3-9) 가룟유다의 흥정(막14:10-11)
2) 읽어볼 기도문

피곤에 싸여

주님, 오늘은 이렇게 종이 위에 무언가를 끄적이며 당신 곁으로 가고 싶습니다. 인생은 이처럼 짧고 당신께 드려야 할 것도 이렇게 많건만 겨누고 있는 과녁이 분명치 않아 노력에 비해 그 결과란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쓸데없는 일에만 마음을 쓰고 그래서 이렇게 지쳐버렸습니다. 공연한 걱정만 해서 그런가 봅니다. 있는 그대로 매일을 받아들이면 좋을 것을 드러나는 성과를 염주 마냥 이어 모아 누구에게 바쳐야만 할 것 같은 그런 기분입니다. 주님, 제게 힘을 주십시오. 보다 값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해 가며 살아가도록.


3)기도제목: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 수요일
1)사건: 베다니에서 휴식
2)읽어볼 글 한편

왜 우리는 서로 모른 체하며 갑니까?
우리에게 있는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왜 그렇게도 깊이 감춥니까? 걸인에게 동전을 건네주며 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합니까? 식당에 가면 혼자 앉아 식사하는 사람과 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왜 아는 사람만 찾으려고 합니까? 문을 두드리거나 전화를 걸어 그저 안부를 묻거나 서로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왜 알리지 않습니까? 따스한 미소와 위안의 말을 듣기가 왜 그처럼 어렵습니까? 선생님에게는 감사의 표시를, 학생에게는 칭찬을, 요리사,청소부,정원사에게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가 왜 그렇게도 어렵습니까? 왜 우리는 더 중요한 사람을 만나거나 더 중요한 일을 하러 가기 위해서 서로를 모른 체 지나쳐 가야 합니까? 아마도 우리는 자신이 이웃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생각에 몰두해있어서, 자신을 겹겹이 싸고 있는 껍질을 벗고 결함이 있는 사람끼리 서로 가까워지도록 마음을 열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의견,생각,신념 등이 꽉 차 있어 이웃에게 귀를 기울여 그들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울 자리가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3)기도제목: 성문밖교회와 교우들을 위하여


■ 목요일
1)사건:유월절 잔치(막14:12-26)
세족식(요13:1-15)
겟세마네기도(막14:32-42),겟세마네에서의 체포(막14:43-52)
전임대제사장 안나스 앞에서의 야간재판(요18:12-14)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의 야간 재판(막14:53-65)
2)읽어볼 시 한편
작은 거룻배

난, 오늘
주님을 태운 작은 거룻배이고 싶네
주님이 내 안에 앉으시어
많은 군중을 가르치시고
차례차례 하나하나 따뜻이
어루만지시고 치유해 주실 수 있도록
잔잔한 호수에 떠있는
작은 거룻배이고 싶네
여기저기 구멍난 곳을 땜질한
초라하고 낡은 거룻배이지만
오늘만은 나,
주님이 편하게 내 안에서 일하시고 말씀하시도록
기쁨의 물결 위에서 출렁거리는
거룻배이고 싶네
그분의 넓은 바다 위에서
그분과 함께 노래하며 춤추는
작은 거룻배이고 싶네
나,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3)기도제목: 고난과 고통 중에 신음하는 노숙인 자매, 형제를 위하여


■ 금요일
1)사건 묵상:산헤드린(의회)에서의 아침 재판(눅22:66-71)
빌라도의 심문(눅23:1-5), 헤롯안티파스의 심문(눅23:6-12)
빌라도의 마지막 심문과 선고(눅23:13-25)
십자가에 달리심(막15:16-41,금요일 오전9시-오후3시)
무덤에 매장됨(막15:42-47)
2) 읽어볼 기도문
어느 곳에 계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어디 깊은데 아니면 높은데 숨어 계십니까? 아무리 만나려고 이길 저 길을 헤메어도 아무데도 안 계십니다. 가느다란 바람 소리만 들려도 소스라쳐 깨어나는 날들입니다. 하나님! 다 잃어버린 거지가 되어서 행길가에 나앉아 있어도 당신의 발자국 소리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구름을 따라 동쪽 하늘에서 서쪽하늘로 노닐어도 당신의 모습은 잡히지가 않습니다. 하나님! 어느 곳에 계십니까? 아아, 어느 곳에 계십니까? 잠깐만이라도 보여 주십시오. 당신의 얼굴과 비밀스런 평화를 당신의 힘없는 정의와 아름다운 사랑을 우리가 힘겹게 이 지구상의 한쪽 귀퉁이에서 가난한 생활을 꾸려가면서 하나님은 안 계시다고 쉽게 배신의 말을 내뱉을 때에도 당신은 아무 말이 없으셨습니다. 침묵속에서 말하시고 침묵 속에서 충고하는 당신의 그 깊고 오묘한 진실을 감히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하나님, 내일의 하나님이시여! 선한 것, 참된 것은 오히려 자기의 모습을 감추려고 합니다.
당신의 진리도 크게 떠들어대기를 꺼립니다. 밤처럼 조용하게 모든 고뇌를 다 포용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를 즐기십니다. 저희가 고통의 절정에 놓여질때에, 기쁨의 한가운데서 웃고 있을 때에, 당신은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한 날개로 품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안간사는 모두가 고통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고요한 평화가 없나이다. 당신만이 영원한 평화이십니다. 하나님.

3)기도제목: 전쟁의 참화속에 고통당하는 이라크의 어린이와 백성들을 위하여


■ 토요일
1)묵상할 사건:무덤속에 계심
2)읽어볼 기도문

기도
오늘은 가장 깊고 낮은 목소리로 당신을 부르게 하소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당신을 떠나 보내야 했던
마리아의 비통한 가슴에 꽂힌 한 자루의 어둠으로 흐느끼게 하소서
배신의 죄를 슬피 울던 베드로의 절절한 통곡처럼
나도 당신 앞에 겸허한 어둠으로 엎드리게 하소서
죽음의 쓴잔을 마셔 죽음보다 강해진 사랑의 주인이여
당신을 닮지 않고는 내가 감히 사랑한다고 뽐내지 말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했기에 더 깊이 절망했던 이들과 함께
오늘은 돌무덤에 갇힌 한 점 칙칙한 어둠이게 하소서
빛이신 당신과 함께 잠들어 당신과 함께 깨어날 한 점 눈부신 어둠이게 하소서

3)기도제목: 땀흘려 일하는 이 땅의 노동자, 농민들을 위하여


■ 부활주일
1)사건: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심(막16:1-18)
2)읽어볼 기도문
예수, 모자람 없는 생명으로 부활하시다.

죽은 지 사흘만에 예수께서는 다시 살아나시어 모자람 없는 인간의 신성한 생명을 누리셨다. 이제 모든 것이 우리들 희망의 의미와 참된 정의의 본질과 하나님이 누구 편이신가가 분명해졌다. 부활은 생명과 정의와 선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명백하고 단순한 실현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예수의 편이심을 부활로써 증명하신다. 부활은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한 유다의 정의와 로마의 법에 대한 항거이다. 그것은 이 세계가 속에 지니고 있는 경건과 율법에 대한 항거다. 세계는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지지하시는 바로 그분을 거절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이 참된 정의인지를 드러내시고 공공의 기성품 정의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기신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억압받는 자의 권리와 약한 자의 정의에 승리를 안겨주신다. 그 부활은 우리들이 품고 있는 희망의 중대성과 의미성을 명백하게 한다.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을 갈망한다면 왜 우리는 죽는가?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가 쓰러지는 자들의 죽음에 무슨 남는게 있는가? 누가 있어 과연,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일어섰다가 권력자들에게 살해당하고 만 자들-농부,노동자,인디언, 그리고 흑인들-이들 이름없는 자들이 흘린 피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이 회피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을 주는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삶은 죽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죽음에 삼키우지는 않는다. 그것은 죽음을 통하여 완성되고, 승리한다. 인간은 죽기위하여 태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부활하기 위하여 죽는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 사실을 거듭 확인해 주신다. 인간의 성숙을 향한 우리의 갈망은 좌절로 끝나지 않는다. 부활은 인간존재가 그의 몸과 영혼이, 하나님 나라의 현실 안에서 완전히 성숙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 아닌 삶이 최후의 발언권을 가진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에 세계 역사상 일어난 가장 중대한 사건이다.
다시 살아난 그분은 권력자가 아니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린 패배자였다. 예수의 운명을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가 자기 자신을 세상의 가난한 자들, 불의한 대우를 받는 자들과 일치시킴으써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 의하여, 보다 우애있고 덜 악한 사회를 만들려다가 거절당하여 저주받은 사람에 의하여 실현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같은 목적으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장래는 약속된다. 그들은 부활한 생명의 충만함을 즐길 것이다. 살인자는 희생자 위에 군림하지 못한다.
죽음아, 너의 이김이 어디 있느냐? 억압아, 너의 권세가 어디 있느냐?
죽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에게 삼키우고 말았다. 억압은 희생을 통한 해방에의 좁은 길로 변하고 말았다. 새 생명의 눈부신 빛줄기가 이제 세상의 어두운 구석 구석을 비춘다. 우리는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의 동이 트는 첫 징조를 본다.

아멘, 할렐루야!

3)기도제목: 부활의 승리를 위해, 세상을 이겨낼 믿음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