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절기,헌신예배]

둘 다 내려가

好學 2012. 3. 31. 21:03

제직 헌신예배
<제 목> 둘 다 내려가
<본 문> 행 8:26-40
<찬 송> 362장


4복음서의 마지막 장인 요한복음 21장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로 제자들을 찾아가시어,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에게 주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시는 것으로 복음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고, 청춘남녀가 사랑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부모자식 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사랑이 동일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엔 이처럼 구별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사랑의 역사가 지극히 짧다는 반증입니다. 하기야 우리 윗 세대 어른들만 하더라도 한 평생 동안 배우자에게나 자식에게 사랑한단 말 한 마디도 않고 살았을 정도이니 두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랜 사랑의 역사를 지닌 헬라어-바로 신약성경을 기록하는데 사용된 그리스어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그 대상에 따라 구체적으로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먼저 가족들간에 주고받는 혈연적 사랑을 스톨게(stolge)라고 합니다. 남녀간의 이성적인 사랑은 에로스(eros)입니다. 그리고 친구간이나 동료간, 혹은 스승과 제자간에 교류되는 사랑은 필리아(philia)입니다. 스톨게, 에로스, 필리아-이 세 종류의 사랑은 분명히 구별되지만 그러나 거기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모두는 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성이든 친구든 내 마음에 들거나 혹은 내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같은 형제지만 친한 형제가 따로 있는가 하면 부모가 장성한 자식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것 등은, 가족간의 사랑 역시 따지고 보면 조건적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전혀 다른 사랑-즉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말이 있으니 곧 아가페(agape)입니다. 상대의 태도나 상황에 개의치 않고, 아무런 대가나 전제조건 없이 그냥 베푸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갈릴리 호수 가에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Simon Jona, agapas me?'(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님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Nai kurie, su oidas hoti philo se'(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필리아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베드로는 이 순간까지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료애 혹은 스승을 섬기는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의 사랑-즉 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노라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 두 번째 다시 물으셨습니다.

'Simon Jona, agapas me?'(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첫 번째 질문과 똑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Nai Kurie, su oidas hoti philo se'(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필리아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베드로는 이번에도 동일한 대답을 반복했습니다. 무려 3년간이나 주님을 좇아 다녔지만 아가페의 수준에는 아직까지 근접도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째로 물으셨습니다.

'Simon Jona, phileis me?'(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필리아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는 아직 아가페의 수준에 턱없이 미달한 베드로를 꾸짖거나 외면치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주님께서 필리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셔서,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고백을 받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요, 주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수준미달인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 주셨지만, 그러나 베드로를 그 수준에서 안주케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필리아의 수준에 있는 베드로를 친히 품으시고 아가페의 수준-곧 주님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그 아가페 사랑에 힘입어 베드로 역시 그 이후로, 주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는 아가페의 삶을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의 수준으로 먼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를 품은 뒤 함께 올라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 늘 생명의 역사를 수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은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거지가 베드로를 만나 주님의 치유를 받은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날도 미문 앞에 쪼그리고 있던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가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적선을 요구했습니다. 베드로와 앉은뱅이의 눈이 마주쳤을 때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그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이 말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이 말을 하는 것만으로 그쳤더라면 그날 아무런 생명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과 동시에 무엇을 했었는지를 사도행전 3장 7절-8절이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베드로는 말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았습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서있던 정상인이 앉은뱅이의 손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앉은뱅이에게로 자기 몸을 굽혀야만 합니다. 앉은뱅이의 수준으로 자기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베드로는 그처럼 앉은뱅이 수준으로 내려간 것만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앉은뱅이에게로 내려간 그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고 자신을 향해 일으켜 올렸습니다. 그리고 일어난 앉은뱅이와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앉은뱅이의 수준으로 내려가 그를 품고 자기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함께 올라왔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로부터 배운 대로 실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와 똑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빌립 집사가 성령님께서 지시하는 곳으로 갔을 때 그곳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위관리인 내시가 병거를 탄 채 가고 있었습니다. 정통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내시는 경멸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인간 이하의 존재였습니다. 그는 이방인 중에서도 저주받은 함의 후손인데다 흑인이었고 더구나 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수준의 사람이라면 대면조차 불가능한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9절-30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빌립 집사는 성령님의 명령을 좇아 내시에게 달려 나아가 그가 구약성경 이사야서를 읽는 것을 보고서, 그 말씀들을 깨닫는 지를 먼저 물었습니다. 상대의 요청이 있기도 전에 그를 도와주겠다는 자발적인 제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 순간, 빌립 집사의 마음은 이미 상종조차 불가능한 내시의 수준으로 내려가 있습니다. 뜻밖의 원군을 만난 내시는 기쁨으로 빌립으로 하여금 자기 병거에 타도록 청했습니다. 빌립은 내시와 함께 병거를 타고 가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내시에게 소상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복음을 받아들인 내시는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지체없이 세례를 받기 원했습니다. 이에 본문 38절-39절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과 내시가 둘 다 함께 물에 내려갔습니다. 빌립은 믿음의 선배요 내시는 초신자라고 해서 내시만 물 속으로 내려가고 빌립은 땅 위 높은 곳에서 세례를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빌립은 내시와 함께 물 속으로 같이 내려갔습니다. 빌립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내시의 수준으로 함께 내려가기를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물 속으로 내려가 내시의 수준에서 함께 노닥거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세례가 끝난 뒤 빌립은 내시와 함께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함께 내려갔다가 함께 올라온 것입니다. 경멸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내시의 수준으로 기꺼이 내려가 그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품고 주님을 좇는 자신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그를 끌어올렸습니다. 빌립 역시 주님께서 행하신 아가페를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그날에도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세례를 받고 빌립 집사와 함께 다시 뭍으로 올라온 내시는 흔연히 자기 길을 갔노라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흔연하다는 동사 kairo는 내적 기쁨이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빌립 집사가 베푼 아가페의 사랑에 의해 참 생명을 맛 본 내시의 마음속에 새 생명으로 인한 기쁨이 흘러 넘쳤던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하늘나라 보좌에 앉으신 채로 인간을 향해 주님 계신 곳으로 올라와 구원을 얻어라 하셨다면, 누가 감히 자력으로 하늘나라에 이르러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친히 죄인의 세상, 죄인의 수준으로 내려오시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품으시고 하늘 위로 오르셨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오늘도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을 본 받아 나와 다른, 혹은 나보다 못한 상대의 수준으로 기꺼이 내려가 그를 품고, 길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향해 함께 올라오는 아가페의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앉은뱅이의 수준으로 자신을 낮춘 베드로나 내시와 함께 물 속으로 내려간 빌립이나 모두 아름다운 본을 보이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외형상 똑 같아 보이는 이 양자간에는 실은 큰 차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 수준까지 내려갔지만, 그러나 그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똑 같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 앉은뱅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수준으로 내려가 그들을 주님 앞으로 끌어올렸지만, 그러나 그 대상은 아직까지는 한결같이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본문에 이르기까지 이제껏 베드로는 유대인이 아닌, 다시 말해 자신과 다른 인종을 위해 상대의 수준으로 자진하여 먼저 내려간 적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빌립 집사 역시 상대의 수준으로 먼저 내려가되 그 대상은 베드로와는 달리, 자신과 전혀 다른 사마리아 사람이거나 상종조차 불가능한 에디오피아의 내시였습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만 다가가 그의 수준으로 내려가 주는 베드로, 도저히 다가갈 수조차 없는 인종의 수준까지 내려가는 빌립-이 두 사람의 행위가 본질적으로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요, 더 신실한 주님의 종이겠습니까? 주님께서 마태복음 5장 46절-47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자신과 전혀 다른 인종을 마다치 않았던 빌립이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요, 더 성숙한 주님의 종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명색이 사도였습니다. 사도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시던 동안 주님을 모시고 다니며 주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에 대한 호칭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직계제자가 아니고서는 이 호칭으로 불릴 수가 없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이 이후에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 유일합니다. 따라서 인류역사상 사도라 호칭되는 사람은 주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주님의 직계제자 11명, 가룟 유다를 계승한 맛디아 그리고 바울을 포함하여 오직 13명뿐입니다. 사도란 그만큼 존귀한 직분이었습니다. 반면에 빌립은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들을 보좌하기 위해 선출된 집사들 중의 한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사도 베드로가 빌립 집사보다 훨씬 성숙하고 더욱 신실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실상은 정반대였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 해답을 작년 8월 둘째 주일 사도행전 6장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은 초대교회가 7명의 집사를 세운 기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당시는 바울이 사도로 부르심을 입기 전이었으므로 사도의 수는 12명이었는데, 그들의 특징은 전원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대대로 이스라엘 땅에서만 살아온 국내파였습니다. 반면에 처음으로 선출된 7명의 집사는 예외 없이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즉 오래 전 이스라엘 땅을 벗어나 외국으로 이주한 조상의 후예들로서 외국에서 태어나 외국말을 하며 살아오던 해외파 출신들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존귀한 사도이긴 하였지만 그러나 히브리파 유대인이었던 고로 자신과 다른 인종을 수용하는데 전혀 익숙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주님을 본받

아 상대의 수준으로 기꺼이 내려가긴 했지만 그 대상은 아직까지는, 모두 자신과 같은 유대인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사도와는 신앙경력상 비교할 수조차 없는 집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헬라파 유대인으로 태어날 때부터 외국인 틈에서 살아온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역시 베드로처럼 상대의 수준으로 먼저 내려갔지만 그러나 사도 베드로와는 달리, 그 대상은 사마리아 사람이거나 에디오피아 내시와 같은, 모든 면에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종들이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파 유대인인 사도들이 자신들과 똑 같은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삼느라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 명령을 주님께로부터 직접 들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 수용하기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던, 빌립 집사와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온 세계로 퍼져간 것은 사필귀정이었고, 이것이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직 헌신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제직이라면 집사를 연상하지만, 제직(諸職)의 본뜻은 문자 그대로 교회 내 모든 직분의 사람들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이를테면 집사는 물론이고 권사 장로 전도사 목사 등 직분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다 교회의 제직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바람직한 제직이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가장 성경적인 제직이 된다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헬라파 유대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 안팎에서 나와 전혀 이질적인 에디오피아 흑인 내시와 같은 사람까지도 기꺼이 수용하며, 도리어 그의 수준까지 내려가 그를 품고 올라오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헬라파 유대인이 되어야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바른 제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땅 끝이란 도대체 어디입니까? 아직도 문명과는 거리가 먼 아프리카나 브라질 아마존의 밀림입니까? 지구의 양극인 남극이나 북극입니까? 혹은 여전히 철의 장막 속에 가려져 있는 북한입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 발 딛고 서 있는 곳이 곧 땅 끝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구는 둥급니다. 그러므로 내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면 지금 바로 나의 등뒤가 곧 땅 끝입니다. 만약 오른쪽으로 계속 향한다면 지금 나의 왼쪽이 바로 땅 끝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모든 면에 걸쳐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바로 그곳 그 현장이 땅 끝입니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가 유대인들이 경원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났을 때, 바로 그곳이 땅 끝이었습니다. 그가 유대인들이 상면조차 꺼려하는 에디오피아의 흑인 내시와 마주했을 때, 바로 그 광야가 땅 끝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그는 그 땅 끝에서 그들을 온전히 품으므로 진정한 땅 끝의 증인, 초대교회의 참된 제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가 있는 곳에는 흔연한 기쁨이 차고 넘쳤습니다. 사마리아에서도 그랬고 내시를 만난 광야에서도 그랬습니다. 참 제직이었던 그를 통해 주님께서 당신의 영원하신 생명으로 역사하신 결과였습니다.

사랑하는 제직 여러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인류의 역사도, 오직 나와 다른 사람을 품을 줄 아는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서만 새로워지고 거듭나게 됩니다. 사랑이란 더불어 사는 힘을 의미하는 반면에 그 사랑은, 나와 다른 사람을 품고 더불어 함께 살아갈 줄 아는 헬라파 유대인이 되지 아니하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주님을 믿는다는 교회가 찢어지고, 교인들의 가정이나 삶에 분열이 일어나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곳의 사람들이 아직까지 스스로 헬라파 유대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기능적인 제직은 양산하면서도 본질적 의미의 제직을 배출치 못하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를 새롭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힘은 제직의 외적 기능이 아니라 본질에서 나온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제네바 한인교회의 기능적인 제직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하지 말고, 지금부터 다 함께 본질적인 제직이 되십시다. 나와 용모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며 수준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주님 안에서 함께 살아갈 줄 아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되십시다. 우리가 두 발 딛고 있는 제네바를 위한 제직이 되십시다. 유럽을 위한 제직이 되십시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를 위한 제직이 되십시다. 사마리아 사람이든 에디오피아의 흑인 내시이든, 지금 내가 마주친 사람의 형편과 수준으로 내려가 그를 품고 진리를 향해 함께 올라가십시다. 그때 우리의 삶은 사랑과 평화의 경작지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 바로 그곳에 흔연한 생명의 기쁨이 흘러 넘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아가페가 바로 거기에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에게 귀한 직분을 맡겨 주시고 제직의 본질적인 의미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이 되지 않고는 바른 제직도, 바른 그리스도인도 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품을 수 있느냐로 결정되는 것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헬라파 유대인이 되지 아니하고서는 우리 사회나 교회, 아니 우리 가정의 미래에 소망이 있을 수 없으며, 타인은 고사하고 가족마저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주님!
이 시간 이후로 헬라파 유대인이 되게 하옵소서. 진정한 땅 끝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마주친 사마리아 사람도,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주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상대의 수준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게 하시고, 그와 함께 진리를 향해 비상하기를 주저치 않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각자가 빌립 집사처럼 이 시대를 위한 주님의 참된 제직들이 되게 하옵시고, 우리가 두 발 딛고 서 있는 곳에 늘 사랑과 화해 그리고 일치와 조화가 꽃피게 하옵소서. 그와 같은 우리의 삶으로 인해 이 시대에 참 생명의 흔연한 기쁨이 넘치게 하옵소서.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