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이기풍 선교사의 아내 윤함애씨

好學 2012. 2. 19. 20:20

이기풍 선교사의 아내 윤함애씨

 

 

I. 윤함애씨의 훌륭한 내조

이기풍은 본래 불량배였습니다. 그는 평양 거리에서 전도하던 한국 초기 선교사 마포삼열의 턱을 돌로 때린 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이기풍은 그때부터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동만 트면 나가서 전도하는 한국의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는 권서활동과 선교사를 돕는 조사 직을 겸하면서 한국민중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또한 7명의 한국 초대목사 중 한사람이 되어 제주도 선교사로 13년 간 파송되었습니다. 그 후 호남지방의 시골교회들을 개척하던 중 신사참배 거부 죄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항상 기도할 때 "하나님 아바디, 나는 죄인중의 괴수외다" 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하던 분이었습니다.

윤함애 씨는 이기풍 목사의 아내입니다. 윤씨는 18살 때 지병인 말라리아로 죽을 자였습니다. 그런데 환상 중에 등불을 비추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이후 그녀의 지병은 깨끗이 치유받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의 역사후 그녀는 평생 여전도사로 결혼도 포기한 채 주를 위해 살고자 결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마포삼열 선교사가 그녀에게 결혼을 권하였습니다. "이기풍씨 부인이 애를 낳고 죽었으니 이씨가 신학을 마치도록 도와주시오." 그녀는 마음에 갈등을 느껴 금식기도를 하게 되었고 도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함애야, 네가 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 네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 이기풍을 훌륭한 주의 종이 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야한다."

윤씨는 주님께 순종하여 모든 전도활동을 중단한 채 전부인의 아이를 기르는 데 온 정열을 다 쏟았습니다. 윤씨의 내조로 남편은 제1회 평양신학교 졸업생이 되었고 제주도 선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남편이 선교사의 십자가 앞에서 갈등하자 윤씨는 "우리가 안가면 누가 그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겠소." 하며 남편이 떠나도록 강하게 푸쉬하였습니다. 윤씨의 내조는 남편이 고난당하거나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받으사 이 목사를 몇 번의 죽을 고비에서도 살리시며 그의 믿음을 연단하사 믿음이 강한 자로 빚어주셨습니다.

제주도로 가는 남편의 배가 난파했을 때도 하나님은 그녀의 간절한 기도를 받으사 남편의 생명을 보호하셨습니다. 또한 제주도 청년들이 남편을 죽이러 왔을 때도 하나님은 박영효 대감을 보내사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남편이 제주도 각 집에 모셔놓은 구렁이 때려잡기 운동을 하다가 두들겨 맞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에 직면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기도를 들으사 남편의 생명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셨습니다.

제주도 선교 초기에는 제주도 섬 특유의 폐쇄성과 배타성이 있는데다 천주교인 학살사건이 있은 후라 남편은 선교하면서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특히 말이 안 통해 답답하였습니다. 이목사가 전도하러 다가가면 "설러버려, 설러버려, 야가기 끊어지갠." (그만둬라, 그만둬라. 내 목이 달아난다) 하며 도망치는 바람에 그들과 대화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윤씨를 "귀신 닮았다" 고 하면서 놀려댔는데 이 말은 참 이쁘다란 뜻이었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내니 답장이 이렇게 왔습니다.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를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노력하시오." 이 편지는 남편으로 하여금 대성통곡하며 회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 남편은 새로운 힘이 생겨 다시 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이 목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내조하셨던 윤씨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몸에 짊어지고자 작정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녀는 썩을 육신을 위하지 않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헌신하였습니다. 그런 그녀에게서 항상 예수님의 생명력이 흘러넘쳤습니다.

윤씨는 선교사로부터 육아법, 위생법을 배웠습니다. 그 지식으로 무지몽매한 제주도민들의 해산의 수고도 덜어주고 각종 병도 고쳐주었습니다. 그래서 제주 도민 누구나 산기가 있거나 아프면 윤씨를 불렀습니다. 그녀는 머리맡에 약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그들을 돌봐주었습니다. 윤씨가 이 일보다 더 기쁘게 봉사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하였습니다.

또한 그녀는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이 많았습니다. 윤씨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환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귀챦아 하지 않고 다 섬겨주었습니다. 무엇보다 나환자 들을 제일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윤씨는 그들의 손을 잡아 앉게 하고는 부지런히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얼마나 시장들 했습니까? 마음 놓고 많이들 잡수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비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집은 천당에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습니다. 나환자들이 돌아 간 뒤에도 그녀는 이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윤씨는 젊었을 때 가정 핍박을 피해 거지분장을 하고 평양까지 보름동안 걸어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이들에게 '야, 거지' 라며 돌팔매질 받았습니 다. 윤씨는 그때 겪은 수모를 떠올리며 거지들을 자식처럼 돌봐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항상 딸의 도시락을 두 개 싸주고 등교 길에 보이는 거지에게 하나를 주게 하였습니다. 또한 장님 할아버지가 교회에 나오면 딸에게 집까지 모셔 다 드리게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날은 이 거지들을 위한 잔칫날이었습니다. 거지들에게 음식을 대접한 후 손수 만든 솜옷들을 입혀주었습니다. 그녀가 죽기 전 에도 틈만 있으면 찾아가는 곳이 거지 굴 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지들이 "어머니, 어머니"하고 찾아다녔고 이들이 교회에 오면 윤씨는 따뜻한 사랑으로 맞아주었습니다.

윤씨는 4남 2녀의 자식들 중 셋째아들과 넷째 아들을 거의 같은 시기에 전 염병으로 잃었습니다. 다섯 째 딸 사라는 윤씨가 전도에만 급급하여 딸이 아픈 것을 둘째로 제쳐놓았다가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변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녀 는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세상사람 들처럼 울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도 심방과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라 한가이 눈물 흘릴 새도 없었습니다.

고난의 연속이던 13년간의 제주도 선교가 끝나고 돌아올 때 이목사는 큰 교회의 안정적인 목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복음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시골의 작은 섬들을 개척하였습니다. 이런 남편을 뒷바라지해야 했던 윤씨였기에 가난한 교역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원망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주님을 절대 원망하지 않았으며 모두 주님의 뜻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옥에 있을 때에도 그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강직함을 보였습니다. 윤씨네만 쌀 배급을 못 받아 감자로 연명하면서도 감사 찬송을 부르며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윤씨는 자녀들을 영적으로 훈련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항상 오른손을 잡고 다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마귀는 항상 두 손을 벌리고 우리 옆을 따라다닌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이 났다 하면 마귀가 신이 나서 박수를 치려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자식들이 마귀에게 박수치는 시간을 주지 말도록 가르쳤습니다. 마귀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 '아-피곤하다'라는 말 이라며 아무리 피곤해도 열심히 주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고난을 당하고도 감사할 때 천당의 장미나무에서 큰 장미꽃이 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감사 훈련으로 윤씨의 자녀들은 만사에 감사함으로 생활하는 것이 몸에 배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기도에 관해서 자식들을 철저히 훈련시켰습니다. 그녀는 기도를 천당에 계시는 하나님께 직통전화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주님과 속삭이는 것이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주님께 갖는 마음자세가 확실해야 이 기도를 이루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마음자세는 꼭 이루어 주실 줄 믿고 하는 기도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응답이 늦으실 때 낙심하지 말고 어려운 고통을 잘 참고 견디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 도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8-10)

그녀는 항상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했고 말로는 못할 답답한 일을 겪었으며 무수한 핍박과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행한 환경 속에서도 언제나 밝게 웃으며 감사 찬송을 부르는 분이었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타인의 고통 에 동참하고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과 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영광과 감사함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은 죽고 예수께서 사시도록 하였습니다. 그녀는 진정 '산 예수'요 그늘진 영혼들의 '믿음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녀의 후예가 그분의 썩어짐으로 인해 훌륭한 목사들로 자랐고 따님은 윤씨의 유언대로 창녀들, 사형수들, 거지들의 어머니가 되어 그늘진 영혼들을 위한 전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II. 배운 점

제가 이 글을 쓰며 깊이 감동받은 한 가지는 윤씨의 고난에 대한 자세였습니다. 그녀는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게 된 이유로 감사히 여겼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고난 중에도 남을 위로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니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산파요 의사요 사모요 4남 2녀의 어머니로서 져야 할 십자가와 그에 따르는 고난을 생각하면 짜증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사실을 윤씨를 보며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결혼은 축복이라는 것만 영접하고 고난은 영접하기 싫었습니다. 그때 사단은 장래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두려움 등 여러 두려움으로 저를 사로잡고 십자가 앞에서 움츠러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조금이라도 늘면 짜증을 냈습니다. 또한 갑작스럽게 부모님 건강이 악화되고 남편이 잠시 휴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고난을 준비하지 않았던 저는 집이 떠나가라 울어댔습니다. '엉엉엉' 이런 제가 어떻게 윤씨처럼 많은 십자가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갑작스런 고난이 닥쳐와도 울지 않고 주님의 일에 계속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 길은 고난을 당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일로 영접하고 주님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저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고난이와도 이 세상과 짝하지 않고 천국을 소망할 때 울음을 그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요회의 동역자로서의 십자가를 적극적이고도 감사하는 자세로 감당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죽고 제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감사하신 주님, 훌륭하신 윤 사모님을 배우게 하시고 저를 이 시대의 어머니로 키우고자 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고난을 기쁘게 영접하고 주어진 십자가를 적극적으로 질 수 있도록 붙드시옵소서. 항상 제 위치를 자각 하고 십자가를 몸에 짊어지는 투쟁을 할 수 있게 도우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