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들을 용서한 김준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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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遊星) 김준곤 목사님(1925.3.28~2009.9.29, 한국대학생선교회 설립자)은 민족의 수난과 개인의 고난이 겹쳐 있고, 민족의식과 예수의식이 하나 된 민족을 꿈꿨던 분입니다. 이를 위해 유성은 대학생 선교와 함께 국회조찬기도회(1966년 2월), 국가조찬기도회(1966년 3월 8일), 전군신자화운동(1969년), 춘천성시화운동(1972년), 엑스플로 ’74대회(1974.8.13~18, 여의도광장), ’80 세계복음화대성회(1980년 여의도광장) 등 줄기차게 민족 복음화의 산을 오르기 위해 진액을 쏟으셨습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굶주림에 처한 무리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막 6:37)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자고 호소하면서 북한옥수수보내기, 사랑의옷보내기, 젖염소보내기운동 등에 참여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신앙의 힘으로 녹여낸 용서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난처가 될 것으로 알았던 고향은 이미 공산당이 들어오면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은 빨갱이로 변신하여 민청이니 여맹원이 되어 빨간 수건으로 머리띠를 하고는 죽창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머슴을 두고 농토를 갖고 산 지주였다는 이유로 유성의 부친과 주일학교를 했다는 죄목으로 유성의 사모를 학살했습니다.
1950년 10월 3일 밤이었습니다. 그 섬의 인구가 18,000여 명인데 그 산에서 그날 밤 현장에서 60여 명이 죽었고, 전체로는 2,000여 명이 죽었습니다. 유성은 공산좌익들에게 폭행을 당해 거반 죽게 된 상황에서 목포경찰서 지도서 김곤근 서장의 지휘와 11명의 경찰과 해병대 1개 소대의 상륙작전으로 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17일 오후 1시 살육과 광란의 폭풍은 잠잠해졌습니다.
그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지서에 잡혀온 120여 명의 공산좌익들과 400여 명의 유가족들 앞에서 그들을 용서하는 대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상륙 이틀 후 김준곤 목사님이 젖먹이를 데리고 지도서로 찾아와 그들을 양떼들이라고 부르면서 용서해 주자고 부탁을 했어요." 결국 주동자급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람답게 살라고 훈계를 하고 놓아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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