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원수들을 용서한 김준곤 목사님

好學 2012. 2. 4. 06:36

원수들을 용서한 김준곤 목사님

 

 

 

유성(遊星) 김준곤 목사님(1925.3.28~2009.9.29, 한국대학생선교회 설립자)은 민족의 수난과 개인의 고난이 겹쳐 있고, 민족의식과 예수의식이 하나 된 민족을 꿈꿨던 분입니다.

유성은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격문을 걸고 민족의 심장 같고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을 복음으로 변화시켜 어머니처럼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내 조국이 지구상 유일한 완전 복음화된 민족으로 하나님께 바쳐지기를 소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유성은 대학생 선교와 함께 국회조찬기도회(1966년 2월), 국가조찬기도회(1966년 3월 8일), 전군신자화운동(1969년), 춘천성시화운동(1972년), 엑스플로 ’74대회(1974.8.13~18, 여의도광장), ’80 세계복음화대성회(1980년 여의도광장) 등 줄기차게 민족 복음화의 산을 오르기 위해 진액을 쏟으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유성은 북한 동포를 돕는 일에 앞장 서셨습니다. 1990년 중반, 북한동포가 기근으로 300만 명이 아사(餓死)를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자 “생존권이 소유권보다 우선한다.”며 북한 동포 돕기에 발 벗고 나섰습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굶주림에 처한 무리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막 6:37)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자고 호소하면서 북한옥수수보내기, 사랑의옷보내기, 젖염소보내기운동 등에 참여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신앙의 힘으로 녹여낸 용서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성 김준곤 목사님은 1950년 6.25가 터지자 경기도 파주 금촌의 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있다가 초등학교 교사이셨던 아내 인정진 사모와 네 살 된 어린 딸과 함께 고향인 전남 신안군 지도읍 봉리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피난처가 될 것으로 알았던 고향은 이미 공산당이 들어오면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은 빨갱이로 변신하여 민청이니 여맹원이 되어 빨간 수건으로 머리띠를 하고는 죽창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머슴을 두고 농토를 갖고 산 지주였다는 이유로 유성의 부친과 주일학교를 했다는 죄목으로 유성의 사모를 학살했습니다.

 

1950년 10월 3일 밤이었습니다. 그 섬의 인구가 18,000여 명인데 그 산에서 그날 밤 현장에서 60여 명이 죽었고, 전체로는 2,000여 명이 죽었습니다. 유성은 공산좌익들에게 폭행을 당해 거반 죽게 된 상황에서 목포경찰서 지도서 김곤근 서장의 지휘와 11명의 경찰과 해병대 1개 소대의 상륙작전으로 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17일 오후 1시 살육과 광란의 폭풍은 잠잠해졌습니다.

유성 김준곤 목사님은 당시의 상황에서 부친과 아내를 학살한 공산좌익들에게 자신도 거반 죽게 된 상황에서도 “보복은 안 하겠습니다. 또 내 마음속에 평화를 주시고 주님을 찬송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가족을 죽인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이름을 들어가면서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지서에 잡혀온 120여 명의 공산좌익들과 400여 명의 유가족들 앞에서 그들을 용서하는 대선언을 하셨습니다.

“썰물 밀물에 몰려다니는 고기떼처럼 이 비극이 이쪽에서 죽고 저쪽에서 죽고 이 치하에서 살았더라면 누구라고 부역을 안 하고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거예요. 여러분이 유가족이라고 살아남았으면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쳐보시오. 다시는 보복이 없어야 합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그때 상황을 김곤근 선생(1924~2005, 손녀가 ccc 활동을 했음)은 증언하기를 "사람을 죽인 120여 명 모두를 계엄사령부로 올려보내면 모두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는 중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상륙 이틀 후 김준곤 목사님이 젖먹이를 데리고 지도서로 찾아와 그들을 양떼들이라고 부르면서 용서해 주자고 부탁을 했어요." 결국 주동자급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람답게 살라고 훈계를 하고 놓아줬습니다.

훗날 파악한 바에 따르면 120여 명 중 대부분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중에는 장로까지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유성 김준곤 목사님의 6.25의 고난과 진정한 용서는 성령의 역사임을 보여 줍니다. 또한 원수까지 사랑한 믿음의 역사는 민족 복음화에 대한 간절한 열망과 비전을 품게 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 부자의 사악한 통치는 반대하면서도 굶주림에 처한 북한 동포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위대한 결단을 하게 만드는 능력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