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 개론 1
▣ 요한 계시록 서론
▣ 배경: 사도 요한은 주후 70년 경에 에베소의 목회 사역을 이어받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교회들, 즉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로마 황제 네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으나 베드로가 약속한 “불시험“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자(주후 81-96년) 박해는 맹렬해졌다.
도미티아누스는 역사의 어떤 페이지에서도 볼 수 없는 냉혹한 살인마였다. 그는 “황제 숭배“를 장려하였으며, 그의 포고문은 “우리의 주시요 하나님이신 도미티아누스가 명령하노니...“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그에게 말하는 모든 사람은 그를 “주시요 하나님“이라고 인사해야 했다. 그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혹독하였으며, 요한을 밧모섬에 유배시킨 것도 그의 명령이었다.
밧모섬은 에게해에 있는 바위 섬으로서 길이가 16km였고 너비는 약 10km였다. 로마는 죄수들이 광산에서 노역했던 그 곳에 유배 주둔지를 두었다. 요한은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친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고립된 이 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이루고 있는 환상들을 받았으며, 본 서는 주후 95년 경에 기록되었다.
▣ 특성: 요한계시록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지닌 독특한 책이다.
예언적이다-예언의 책이다(1:3/10:11/19:10/22:7/22:10/22:18-19).
그리스도 중심적이다-이 책은 단순히 예언적 계획에 관한 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1장에서는 부활하신 제사장이자 왕으로서 2-3장에서는 교회를 진단하시는 분으로서, 4-5장에서는 창조의 권리 증서를 받으시는 분으로, 6-19장에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며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분으로서 20-22장에서는 영광과 능력 가운데 통치하시는 분으로서 나타난다.
공개적이다-“계시“라는 말은 “베일을 벗긴다“는 뜻이다. 다니엘은 그의 책을 인봉하라는 말을 들었으나(단 12:4), 요한은 “인봉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22:10). 계시록은 어려운 예언을 모아 놓은 책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죄와 세상의 체제에 대해 최종적으로 승리하실 것에 대하여 합리적이고도 질서있게 벗겨가는 책이다.
상징적이다-“하나님이... 보내어 지시하신“(1:1)이란 말은 이 책이 그 멧세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징표와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어떤것들은 설명되어 있고(1:20/4:5/5:8/12:9) 어떤 것들은 설명되어 있지 않으며(4:4/11:30 어떤 것들은 구약과 관련되어 설명된다(2:7/2:17/2:27-28). 이러한 신령한 상징은 이 책을 받아 들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확했겠으나 그들의 로마 박해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상징들은 실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예를 들자면, 국기란 그러한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1장 12-16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의 뜻은 아니지만, 각각의 이러한 상징들이 신령한 진리를 전하고 있다.
구약에 근거하고 있다-이 책은 구약 성경들을 계속해서 참고하지 않고는 연구할 수 없는 책이다. 요한계시록의 404구절 중에서 278구절은 구약에 대한 관련 구절을 포함한다. 요한계시록에는 구약에 대한 관련 구절이나 암시가 500개도 넘는다고 집계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시편, 다니엘, 스가랴, 창세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요엘 등이 가장 빈번히 언급되고 있다.
숫자로 나타낸다-성경의 어떤 다른 책에서도 이처럼 상징적인 숫자를 많이 사용한 곳이 없다. 이 책에는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촛대 등 일곱이란 숫자가 계속 나온다. 또한 일천 이백 육십(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마흔 두달, 11:2-3/12:6/13:5)이라는 숫자와 십 사만 사천의 인맞은 이스라엘자손, 열두별(12:1), 열두 문(21:12), 열두 기초석(21:14)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우주적이다-요한계시록은 온 세상을 다루고 있다! 요한은 열국, 백성, 무리를 본다(10:11/11:9/17:15 등). 이 책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자기 백성을 위한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 대한 요약이다.
장엄하다-이 책은 “보좌의 책“이며, 4장으로부터 마지막 장까지 왕과 그의 통치에 관하여 읽게 된다. 보좌라는 말이 44회, 왕, 왕국 또는 통치라는 말이 37회, 능력과 권위는 40회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며 우주의 절대 주권자이신 그리스도를 본다.
동정적이다-이 책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과 땅에 있는 백성에 대한 하늘의 동전을 본다. 요한은 유배되어 있고(1:9), 안디바는 순교를 당하였으며(2:13), 서머나는 투옥될 위기에 처해 있었고(2:10),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이 하나님의 신원하시는 심판을 호소하였다(6:9). 시련의 때가 임하고 있으며(3:10), 큰음녀가 성도들의 피에 취하였다(17:6/18:24/19:2). 이제 머지않아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10) 절정적이다-요한계시록은 성경의 절정이며, 우주에 대한 하나님에 계획과 목적의 성취를 보여 준다.
▣ 해석 방법: 이 책의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달리하고 있으나, 넓게는 네 가지 다른 접근 방법이 있다.
과거적 해석 방법-이 접근 방법은 이 책에 있는 모든 일들이 1세기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주장하며, 로마와의 싸움을 다룬다고 한다. 요한은 성도들이 박해 중에 있을 때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가 예언을 적고 있다고 일곱 번이나 말한다! 물론 이 책이 로마의 박해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가치가 있었지만, 그 가치가 사도 시대의 종국과 더불어 종식된 것은 아니다.
역사적 해석 방법-이 부류에 속하는 해석자들은 계시록의 상징들을 통하여 교회사의 성취를 본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 책이 사도 시대로부터 세상 끝까지의 역사의 과정을 요약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은 계시록에 있는 것들과 병행하는 사건들을 찾아내려고 역사서들을 탐구하지만 그 결과는 종종 비참하다.
어떤 해석자는 한 상징에서 루터와 종교개혁을 보는데 다른 연구자는 그 부분을 인쇄기의 발명으로 생각한다! 만일 계시록이 미리 기록된 세상의 역사에 불과하다면 요한 당대의 신자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영적 해석 방법-이런 학자들은 완전히 예언이라는 생각을 배제하고서 계시록을 다만 그리스도와 사단, 선과 악의 대결을 상징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본다. 이들은 요한이 실제적인 사건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그가 다만 기본적인 영적 원리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은 그가 예언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계시록에 많은 기본적인 영적 원리들이 상징의 형식으로 분명히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책은 어느 날 세상에 발생할 실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도 용인해야만 한다.
미래적 해석 방법-이 학파는 요한계시록이 예언임을 강조한다. 4장부터 계속해서 우리는 교회가 휴거된 뒤에 땅과 하늘에서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예언을 본다. 그리고 또한 2-3장에 교회에 대한 예언의 역사가 나온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 책의 영적인 교훈들을 기꺼이 인정하면서도 또한 미래 역사에 있을 실제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
만일 계시록이 예언으로 해석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세상의 미래, 역사의 과정, 교회의 승리, 죄의 심판, 구약에서 발견되는 약속들과 예언들의 성취 등을 설명할 한 책을 신약 성경에 주시지 않는 셈이 된다! 이러한 생각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계시록은 바로 그러한 책이다. 이 책을 교회가 휴거된 이후에 발생할 사건들을 예언한 책으로 경건하게 접근하는 연구자는 그의 수고로 인하여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 창세기와 요한 계시록: 성경의 최초의 책과 마지막 책은 상호 보완적이다.
창세기 요한 계시록
천지의 창조(창 1-2 장) 새하늘과 새땅의 창조(21-22 장)
땅을 다스리는 첫아담(창 1:26) 영광중에 다스리는 마지막아담(계 21:5)
밤과 바다의 창조(창 1:5/창 1:10) 밤도 바다도 없음(21:1/21:25)
아담에게 데려온 신부(창 2:18-25) 그리스도를 위하여 단장한 신부(19:7-)
에덴에 있는 생명나무(창 2:9/창 3:22) 새창조에서의 생명나무(22:2)
죄가 죽음과 저주를 가져옴 더 이상 저주나 죽음이나 눈물이 없음
(창 3:14/창 3:17-19) (22:3)
그리스도와 사단의 대결(창 3:15) 사단의 마지막 운명(20:10)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람들이 영광중에 주님의 얼굴을 봄
쫓겨난 인간(창 3:23/창 4:16) (22:4) 신자들이 믿음으로 한 성을 영광중에 나타날 거룩한 성(21:10)바라봄(히 11:13-16)
“어린양은 어디있나이까?“(창 22:7) 어린양이 보좌에 계신다(22:3)
사단이 첫 거짓말을 함(창 3:1) 거짓말하는 어떤 것도 그 성에 들어가지 못함(21:27)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인간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요약하고 있다. 오래 전에 첫 창조에서 시작된 일들이 궁극적으로는 새 창조에서 완성될 것이다. 이 책은 “축복을 담고 있는 책“이다(1:3/14:13/16:15/19:9/ 20:6/22:7/22:14 절에서 여섯 개의 다른 “축복들“을 찾아보라).
이 책은 “역사(history)가 주님의 이야기“(His story)인 것, 곧 인간사는 승리자이신 그리스도의 손 안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책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그가 다시 오시는 때를 예비하기 위해 격려를 받아야 하며, 섬기도록 영감을 받으며, 정결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받아야 한다."
▣ 네가 본 것 - 요한계시록 1장
▣ 서론:1장 1-3절
여기서 우리는 이 책의 특징들을 보며 이 책이 어떻게 씌어졌는지를 알게 된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 책의 내용을 그리스도께 주셨으며, 주님은 이것을 그의 천사에게 주어 사도 요한에게 주도록 하셨다. “그의 천사“는 “그의 사자“라고 번역되어도 된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앙겔로스(천사)가 “사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22장 16절을 읽고서 22장 8-9절은 이 특별한 사자가 구약 예언자들 중의 하나일 수도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데에 유의하자.
“지시하다“는 말은 이 책이 신령한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징표나 상징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사실상 그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책의 내용을 실제로 보았다. 육체적으로 그는 밧모섬에 있었으나(1:9)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이런 사건들을 목격하고 우리를 위해 그것들을 기록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를 하늘로(4:1), 광야로(17:3), 산으로(21:10) 옮기셨다.
이 책을 소리내어 크게 읽는 자들과 마음을 기울여 경청하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다. 그러나, 3절은 요한계시록이 공연한 호기심으로 연구할 책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이 말씀들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순종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가까움“과 “속히 될“이란 말은 이러한 예언들이 요한의 시대에 당장 성취되어야 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들이 성취되는 때의 신속함을 나타낸다. 오늘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이들을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들이 임할 날이 올 것이며, 더이상 연기되지 않을 것이다."
1. 요한이 아는 그리스도(1:4-8)
요한은 11절에서 명령을 받은 대로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그의 안부를 보낸다. 그는 삼위일체의 위(位)를 각각 언급하면서 신성의 경이로움을 개관한다.
성부-“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란 뜻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뜻한다(1:8/4:8).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하여 계시며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성령-“일곱“이란 완전을 나타내는 수로서, 성령의 충만함을 뜻한다. 4장 5절에서 우리는 일곱 영이 일곱 등불로 상징되는 것을 본다. 또한 5장 6절에서는 일곱 눈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일곱 영을 가지고 계시며(3:1) 영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성자-그리스도는 선지자(충성된 증인), 제사장(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나신 자, 즉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난 자 중 가장 높은 자), 왕(땅의 임금들의 머리)이라는 삼중 인격으로 제시되어 있다. 다음으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삼중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찬양한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를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도다 ! 아담에게서 잃었던 통치권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획득하였다 !“
7절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일곱 구절들 가운데 첫번째 것이다(2:25/3:3/3:11/22:7/22:12 /22:29 참조). 이 재림은 공개적이며(단 7:13/행 1:8- ) 교회의 은밀한 휴거는 아니다(살전 4:13-). 이방인들은 그로 인해 애곡할 것이며 유대인들은 그들이 찌른 자를 볼 것이다(슥 12:10-12/마 24:27-30)."
2. 요한이 들은 그리스도(1:9-11)
요한은 그가 소아시아 교회들을 보살피고 있었던 에베소에서 약 110 km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에 유배되어 있었다. 마가복음 10장 33-35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보좌에 대해 질문하였었는데, 그 수년 후에 이들 둘에게 환란이 닥쳐왔다.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했으며(행 12 장), 요한은 유배되는 고난을 겪었다. 요한은 그가 전파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배되었다.
요한이 바다를 25회나 언급하고 있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섬에... 성령에“, 참으로 경이로운 국면이다! 우리의 지리적인 위치가 우리의 신령한 축복들을 결코 빼앗아 갈 수는 없다.
요한은 나팔 소리 같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 요한계시록에서 나팔은 중요하다. 4장 1절에서 나팔 소리가 요한을 하늘로 불러 올렸는데, 이는 휴거를 표상한다. 또한 8장 2절 이하에서는 나팔을 불자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에 쏟아졌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은 총회로 모이는 때, 전쟁을 알리는 때, 특별한 날을 선포하는 데에 나팔을 사용하였다. 하나님의 나팔은 교회를 본향으로 불러갈 것이며(살전 4:16), 이스라엘을 모을 것이고(마 24:31), 세상에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계 8:2-).음성은 요한에게 이 책을 기록하라고 말했고, 그것을 그와는 떨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라고 했다. 지도에서 이 교회들의 위치들 확인해 보라. 이 지역에는 일곱 개 이상의 교회가 있었으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영적인 필요를 묘사하기 위하여, 그리고 장차 올 교회들의 신령한 역사를 개관하기 위하여 이 일곱 교회들을 선택하셨다."
3. 요한이 본 그리스도(1:12-20)
요한은 더이상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 수 없었다(고후 5:16). 그리스도는 이제 부활하시고 높이 올리우신 왕인 제사장이시다 ! 요한은 일곱 촛대 사이에서 계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하였다(1:20). 우리는 세상의 빛이며 교회는 그 빛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붙들고서 그것을 비치게 한다. 우리는 거대한 등불 하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따로 따로 있는 일곱 촛대를 갖는다.
여기서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상징들을 연구하려면 관주를 이용하면 된다. 그의 옷은 제사장으로서 왕의 옷이다. 흰 머리는 그의 영원성을 말한다(단 7:9). 그의 눈은 빠짐없이 두루보며 그 본 대로 심판한다(단 10:6/히 4:12/계 19:12). 교회들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는 진행되고 있는 일들을 보며 심판하신다. 주석으로 된 발은 심판을 나타내는데, 죄가 심판받았던 장소가 놋제단이었다.
“많은 물소리와 같은“ 그의 음성은 두 가지 것을 암시했는데, 곧 바다와 같은 주의 말씀의 능력과, 그리스도 안에 모여진 신적 계시의 “시냇물“인 것이다(시 29편/ 겔 43:2 참조). 그는 손에 일곱 별을 쥐고 계시는데, 이 별들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 또는 사자들(목회자들)이다. 이 교회들로부터 요한에게로 온 사자들이 이 계시록을 그에게서 개인적으로 받아갔을 가능성이 있다. 별들은 사자들이다(1:20). 그리스도는 자기의 종들을 그의 장중에 붙드신다(단 12:3).
이 입에서 나오는 검은 심판하는 그의 말씀이다(사 11:4/사 49:2/계 2:12/계 2:16/계 19:19-21). 해같이 비취는 그의 얼굴빛은 그의 영광을 말한다(말 4:2 참조). 22장 16절에서 그는 광명한 새벽별로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직전인 가장 어두운 때에 교회를 위하여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요한은 그의 가슴에 기대었으나(요 13:23)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린다(단 8:17/계 22:8 참조). 오늘날 성도들은 그들의 언어와 태도에서 그리스도와 “격이 없는“ 것처럼 된 듯한 것을 삼가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권위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을 안심시키시고 그의 두려움을 평온케 하신다. 그리스도는 처음이요 나중이시다(1:8/22:13). 따라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 그는 음부, 곧 죽은 자의 영역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음부는 어느 날 잃어버린 영혼들을 내놓고 텅비게 될 것이다(20:13-14).
그리스도는 1장 19절에서 우리를 위하여 요한계시록을 개관하신다(개요 참조). 다른 개요를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보다도 이 책에 관하여 우리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가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2-3장에서 그리스도는 일곱 교회들을 다루신다. 그는 그 한복판에 서서 그의 불꽃같은 눈으로 그들의 영적 상태를 살피신다. 주님은 오늘날도 이 일을 행하고 계신다. 사람들이나 교파들이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당신은 13-16절에 있는 그리스도의 묘사에 대한 각기 다른 부분들이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반복되는 것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교회에 적용시킬 그리스도의 속성이 언급된다. 교회들에 대한 위험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증거를 옮기시는 것이다!(2:5) 그는 그의 신적 의지를 벗어나 있는 촛대를 가지시기보다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한 성읍을 가지려 하실 것이다 !
본 장에 나오는 많은 상징들이 이 책의 후반부에 반복되어 나온다. 연구할 때 관주를 살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는 없다."
▣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만일 요한계시록 1장 19절이 영감된 이 책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면 2-3장은 “이제 있는 일“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특정한 멧세지를 전하기 위하여 소아시아의 많은 교회들 중에서 일곱교회를 선택하셨던 것이다. 확실히 다른 교회들에게 죄들이 있었지만 이 일곱편지들에서 논의되는 문제들은 가능한 모든 상황을 망라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이 일곱 교회들을 택하여 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있을 수 있는 교회의 형편들을 예증하며, 사도 시대로부터 세상 마지막까지의 예언적 교회사를 예증한다. 일곱은 그저 아무렇게나 정한 숫자가 아니다. 교회들이 관련된 한에 있어서 일곱이란 역사의 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예언적 교회사에 나타난 일곱 단계를 보게 된다.
에베소: 사도시대-그리스도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기 시작함.
서머나: 초기의 박해받는 교회(주후 100-300년)
버가모: 교회가 로마와 결탁함-국가 교회가 됨(주후 312년).
두아디라: 로마 카톨릭 시대-간음과 우상 숭배
사데: 개신교회-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어 있음.
빌라델비아: “형제 사랑“-이 마지막 시대의 선교하는 교회
라오디게아: 마지막 시대의 배교하는 교회-미지근한 교회이며, 그리스도는 밖에 있음.
이 일곱 교회들은 교회사를 요약하고 있으며, 고백의 2대 주류인 로마 교회와 개신교의 발전을 요약한다.
에베소-사도적교회
서머나-로마가 교회를 박해함
사데-교회들이 로마에서 이탈함
버가모-로마가 교회를 받아들임
빌라델피아-현대의 선교운동
두아디라-로마가 교회를 조정함
라오디게아-미지근한 거대한 교회
결과-로마 카톨릭
결과-무기력한 개신교회각 교회의 “이기는 자“에 대해 특별한 말씀을 하고 계심에 유의하자(2:7/2:11/2:17/2:26/3:5/3:12/3:21). 이 “이기는 자“들은 각 교회에 있는 “초월적인 성도들“로서 그리스도로부터 특권을 부여받게 되는 특별한 부류인가? 아니다. “이기는 자“란 이러한 각 교회들에 있는 참된 신자들이다. 우리는 역사의 매 시대의 각 지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이라고 섣불리 믿을수는 없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이기는 자들“이다(요일 5:4-5).
역사의 매 시대에서 고백 교회 내에 참된 성도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로마 카톨릭 주의를 나타내는 두아디라 교회 내에서조차 그러했다 ! 그리스도께서는 각시대에 사는 그들에게 격려하는 특별한 말씀을 하시기도 하며, 또한 우리는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 이 말씀을 적용할 수도 있다.
사단도 네 교회와 연관되어 언급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는 서머나 교회를 박해하는 배후에 있으며(2:9), 버가모에 그의 “보좌“(거하는 곳)를 두고 있고(2:13), 두아디라에서 그의 “깊은 교훈“을 가르치며(2:24), 그리고 빌라델비아에서 구령 사업에 전력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하여 거짓 그리스도인들의 “회“(회당)를 사용한다(3:9).
그리스도는 이런 교회들에게 몇 가지 위험을 지적하신다.
니골라당(2:6/2:15)-이 말은 “하층 계급을 정복하다“란 뜻이며, 교회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분리를 암시한다. 이것은 에베소에서 “행위“로 시작하여 버가모에서 교훈으로 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사람들이 교회에 거짓 활동들을 소개하고 오래지 않아 이러한 활동들은 용납되고 즐거워하게 된다.
사단의 회(2:9/3:9)-이것은 아마도 신자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마귀의 자녀들인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총회를 말하는 듯하다(요 8:44). 회(회당)라는 단어는 단순히 “함께 모이다“란 뜻이며, 그것이 사람들의 총회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단도 교회를 소유한다 !
발람의 교훈(2:14 /민 22-25 장)-발람은 이스라엘이 이교도와 혼합되어도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민이므로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죄 가운데로 인도해 갔다. 그는 그들을 저주할 수는 없었으나, 육으로 유혹할 수는 있었다. 그러므로, 이 교훈은 교회가 세상과 짝할 수 있다는 사상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로마의 황제가 박해를 중단하고 기독교 신앙을 공식적인 로마의 종교로 받아 들인 시기에 나타난 것임에 유의하자 ! 교회와 세상이 결합했고 거짓 선지자들이 가르친 발람의 교훈이 이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세벨(2:20)-이 구절은 우리를 열왕기상 16장에서 열왕기하 10장까지를 회고케 한다. 이세벨은 아합왕의 이교도 아내였으며 이스라엘을 사악한 바알숭배로 인도해간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거짓 가르침으로 이스라엘을 타락시켰다. 신약에서는 이세벨이라고 하면 거짓 가르침을 소개하는 여인을 말한다. 이세벨은 로마 카톨릭 주의가 발전하고 있던 시기에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으로, 그리고 우상들에 관하여 강조함으로써 나타난다.
▣ 개인적인 멧세지
우리는 이 일곱 편지들에서 교회의 예언적인 모습을 보는 것도 중요하고 우리의 지교회들이 거짓 교훈의 희생물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 서신들에서 개인적인 멧세지를 보아야만 한다. 교회는 사람들로 구성되므로, 회원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이런 교회들에 있었던 영적인 문제들을 살펴보자.
에베소-주님을 위하여 분주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를 향한 진지한 사랑은 없다. 열정이 없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 이런 교회는 통계는 훌륭하지만 그리스도로부터 표류하는 분주한 교회이다.
서머나-주님으로부터 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았으나 위험은 역시 존재한다. 이 교회는 가난하고 고난받는 교회였다. 타협하며 부요하게 되며 박해를 피하게 되기란 참으로 쉽다 ! 라오디게아 교회 만큼 “부자“가 아니어서 얼마나 용기를 잃었겠는가 !
버가모-이 교회는 그리스도를 고백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죄의 삶을 살기에도 쉽게 했던 거짓 교훈을 붙든 회원들이 있는 교회였다! 또한 이 사람들은 주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선전하고 있었던 영적인 독재자들의 수중에서 견디기 힘든 상태에 있었다.
두아디라-한 여인이 교훈하는 과정에서 자기 위치를 떠났다. 그녀의 교훈은 백성의 죄 가운데로 이끌었다. 여기서는 일차적으로 로마에 강조를 두고 있으나 어떤 지교회라도 이러한 오류에 빠질 수가 있는 것이다.
사데-생명이 없는 명성 ! 그 교회의 미래는 지나간 일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에는 명성을 떨쳤으나 오늘에는 아무런 사역도 없는 “시대에 뒤진“ 교회에 불과하다. 사멸되는 것만 남아있는 것이다 !
빌라델비아-문호를 개방하고서 복음을 세상에 가져가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말씀을 붙들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교회이다. 그러나, 사단의 회가멀리 있지 않아서 언제나 타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라오디게아-예산은 많지만 어떠한 복도 가지지 않은 미지근하고 변절된 교회이다. 이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하나 영적으로는 가난된 교회로서, 그리스도는 교회 밖에 계시며 그에게 순복할 단 한 사람이라도 초청하시고 계신다."
▣ 교회들에게 보내는 그리스도의 멧세지 - 요한계시록 2장
1. 에베소 교회-타락하는 교회(2:1-7)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여기서 강조되고 있다. 그는 별들(교회의 사자들)을 붙잡고 계시며 교회들(촛대들)을 심판하시러 다니신다. 그는 밧모섬에서 가장 가까운 에베소 교회로부터 시작하신다. 이곳은 거대한 상업 중심지로서 수로 및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다. 로마는 에베소를 자유 도시로 만들었으며, “아시아 제일의 대도시“라는 말을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대한 다이아나 신전이 있었던 것인데, 이것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길이 약 120미터, 너비 66미터, 높이 18미터쯤 되는 신전으로, 대문들과 127개의 대리석 기둥들이 있었고 이들 중의 더러는 금으로 싸여 있었다. 다이아나(아데미)숭배는 최악에 달해 있는 “종교적인 부도덕“ 그것이었다(행 19-20장 참조).
에베소 교회는 행위와 수고와 인내는 있었지만 사랑은 없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칭찬을 받았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행하는 일이 아니라 그 배후의 동기인 것이다.
이 교회는 분주한 교회였으며 표준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였다. 그 표준이 “무가치한 사람들“(악)을 용납할 수 없었고, 거짓 선생들을 경청치 못하게 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무기력하지는 않았다. 모든 면에 있어서 성공적인 교회였다. 오늘날, 줄잇는 각종 행사와 지친 일꾼들로 가득찬 분주한 교회들은 아마도 이 설명에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들 가운데 계시는 이는 무엇이 잘못인지를 보셨다. 이들은 첫사랑에서 떠났다(렘 2:2). “잃은 것“이 아니었다. 지교회는 그리스도와 결혼한 것이며(고후 11:2) 사랑이 점점 식어갈 위험도 항상 있는 법이다. 마르다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분주하게 일하다가 주님을 사랑할 시간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눅 10:38-42).
그리스도는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보다는 주님과 함께 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수고가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일반에게는 에베소 교회가 성공적으로 보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실패한 교회였다.그들에게 주는 주님의 권고는 세 마디였다.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우리가 처음 사랑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처음 행위를 반복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수고가 그리스도와의 처음 만남을 생각나게 하였다. 만일 교회가 그 중심을 바른 상태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촛대가 옮겨지게 될 것이다 ! 지교회는 세상에서 빛을 비춰야 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사랑이 없이는 그 빛은 꺼지고 말 것이다.
주님은 그들이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으로 인하여 그들을 칭찬하신다. 니골라당의 헬라어 어의는 “하층 계급을 정복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교회 내의 제사장 특권 계급(성직자)의 발달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일반 신자들이 외면당한다는 말이 된다. 교회 내에서 목사의 지도력은 있어야 하지만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구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에베소는 교회가 늘 분주했던 때인 사도 시대를 방불케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처음 사랑은 쇠미해지고 있었다. 이 일이 다른 실패의 길을 걸을 여지를 남겨 놓았다."
2. 서머나 교회-고난당하는 교회(2:8-11)
그리스도에 대한 각각의 서술이 1장 13-16절의 묘사를 어떻게 회고케 하는지 살펴보고, 또한 각각의 서술이 그 교회의 특별한 필요를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라. 서머나는 박해당하는 교회였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고난, 죽음, 부활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계신다(2:8). 서머나는 “씁쓸한“이란 뜻이며 “몰약“이란 말과도 연관된다. 어떤 이는 짓밟는 박해로 인하여 향기를 생각해 낸다. 교회는 언제나 고난의 때를 통과하고 있었을 때 가장 순전하고 향기로웠다.
이 교회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말이 없다 ! 고난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충성스러웠다. 이들은 그들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였으나 실상은 부요하였다. 이는 실상은 가난하면서 부자라고 생각한 라오디게아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3:7) 성도들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사단의 회, 마귀의 자녀들, 요 8:44/빌 3:2)로 말미암아 모독을 받고 있었다(중상을 받고 있었다). 사단은 모든 박해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으며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에서조차 그렇다.
그리스도는 더 많은 박해가 오고 있음을 그들에게 약속하시는데, “십 일“이란 초기 교회에 있었던 열 가지의 큰 박해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서머나는 주후 100년으로부터 300년에 이르기까지 박해받는 교회를 나타낸다. 사단은 삼킬 자를 찾고 있는(벧전 5:8) 사자와 같이 달려왔으나 박해는 교회를 더 강하게 했을 뿐이다.사람들은 몸을 죽일 수는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둘째 사망 곧 지옥(20:14/21:8)을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두 번 태어난 사람들은 한 번만 죽으면 된다. 그러나,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을 것이다!"
3. 버가모 교회-세속적인 교회(2:12-17)
버가모는 “결혼한“이란 뜻이며 이 교회는 국가와 결혼한, 곧 로마 제국과 결합했던 시기인 주후 312년 이후의 시기를 묘사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십자가 환상을 보고 기독교를 채택하였으며, 제국에 이 새로운 믿음을 받아 들이도록 강요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충성된 교회에 대한 파국의 시작이었다! 버가모에는 중대한 세 가지 잘못이 있었다.
사단의 보좌가 있었다-이것은 바벨론의 “비밀 종파“가 그 곳에 총본부를 두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또한 이런 이교 도시에서 핵심 역할을 한 황제숭배를 포함한다.
발람의 교훈이 있었다(민 22-25장)-발람을 그가 받은 부와 특권의 답례로 이스라엘 백성을 죄 가운데로 인도해간 삯군 선지자였다. 그는 이스라엘이 이방 우상들을 섬기게 하여 간음에 빠지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유익을 얻으려고 세상과 짝한 교회를 본다. 로마제국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부와 세상의 권력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매수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일들이 있다!
니골라당의 교훈이 있었다(2:6)-“행위“에서 정착된 교훈에로 점차 나아간다. 우리는 이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로 분리된 교회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주의의 시작이다."
4. 두아디라 교회-회개하지 앉은 교회(2:18-29)
로마 카톨릭이 이제 완전한 성장을 보여 주는 때이다. 불꽃같은 눈과 주석으로 된 발이 보고서 심판하러 오신다. 그러나, 사악한 교회는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이 교회는 사업과 섬김과 인내를 가지고 있었으나(병원과 학교 등 로마교의 활동을 잘 묘사하고 있다!), 죄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일곱 편지들 중 유일하게 언급되는 여자의 이름을 보게 되는데, 이는 아합왕의 아내인 사악한 왕비 이세벨을 가리키고 있다(왕상 16-왕하 10장). 그녀는 이방 여인으로 바알 제사장의 딸이었으며 이스라엘에게 바알숭배를 소개하였다. 그녀는 우상 숭배, 살인, 사기 사제술(司祭術)과 마찬가지로 매음과 마법의 죄를 지었다(왕하 9:22). 오늘날 로마의 모습이 아닐 수없다!
교회의 이 거짓 여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키기 위해(속이기 위해) 거짓 교훈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에 주목하자. 그녀는 그들에게 죄를 지어도 되는 면허를 주었다! 로마교 이상으로 거짓 교훈과 우상과 죄의 면허를 가진 종교 제도가 어디 있겠는가? 로마교 이상으로 여인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제도가 어디 있겠는가 ? 이들은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이라고 한다!
오늘날 로마는 배교자라 부른 신교 교회를 향해 우정의 손짓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21절에서 로마가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계신다. 예배에서의 몇 가지 것들을 고칠지는 모르지만 그 불경건한 제도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그 결과로 로마는 요한계시록 6-19장에 나오는 대환란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이 땅을 타락시킨 큰 음녀로 나타나고 있다.
그녀는 자기의 교훈을 “하나님의 깊은 것들“이라고 부르지만 그리스도는 “사단의 깊은 것“이라고 부르신다(24절). 하지만 24-29절은 카톨릭주의 안에서조차 참된 신자들(이긴 자)이 일을 것을 분명히 밝힌다. 로마의 자녀들(22-23절/ 이 제도로 말미암아 태어난 자녀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교회의 참된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굳게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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