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自由/박장대소拍掌大笑

어느 '은퇴男'에게서 온 항의 편지

好學 2012. 1. 25. 20:57

 

어느 '은퇴男'에게서 온 항의 편지

 

 

 

은퇴만으로도 우울한데 산업 역군더러 ‘三食이’라니?
알고 보니 여자의 권력은 음식 부엌을 점령하니 살길 보여
이제부턴 못다 이룬 꿈 일궈가야지 내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아

안녕하시오. 나는 송아무개, 조선일보 30년 애독자올시다. 얼마 전 귀하가 쓴 기사의 제목이 퍽 당돌하여 이렇게 펜을 들었소이다.

"놀아줘, 밥 좀 줘, 은퇴 남편들 애걸하니 아내들 속이 터진다"고요. 그림은 또 왜 그리 처절합니까. 마누라 발차기에 늙은 남자가 집 밖으로 러닝만 입은 채 쫓겨납디다. 처음엔 노여웠다오. 뿔이 나더라고. '삼식(三食)이'라니요. 저희는 안 늙나? 섭섭하고 분하더이다. 끝까지 읽어보니 무작정 열불 낼 일은 아니었소만, 펜을 든 김에 내 얘기 몇 자 적어볼까 하오.



집사람은 내가 월남전에서 다쳐 돌아왔을 때 극진히 돌봐주던 간호사였소. 인물은 별로여도 말수 적고 손끝이 야무진 데다 냉면 마는 솜씨가 일품이었지. 봉급쟁이긴 하나 나 또한 성실함과 회사에 대한 충성도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 나이 오십에 임원으로 승진한 바, 3남매 밥 굶기지 않고 대학까지 보낸 가장(家長)이라오.

'위기'가 찾아온 건 은퇴한 직후였소. 몸은 아직 펄펄한데 나이 탓에 현업(現業)을 떠나야 하니, 충격과도 같은 허탈감이 찾아오더이다. 나 없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가니, 입맛도 없고 우울해지더이다. 일없이 서성이다 선잠이 들어 깨어보면 태양이 막 사라지고 난 뒤의 하늘빛은 어찌 그리 처연한지.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다"는 노랫말, 딱 내 처지더란 말이오.

그러다 문득 아내를 돌아다보았소. 상냥했던 웃음은 간데없고, 말끝마다 냉기가 흘러요. 밥상 차려주는 표정은 왜 그리 퉁명해. 현역 시절 지은 죄(罪)가 많으면 홀대를 당한다더니만, 내가 뭐 대단한 죄를 지었다고. 무식하다고 몇 번 소리지른 거, 주식 하다 얼마 손해 본 거, 잠시 한눈 판거…, 그게 다예요. 대한민국 사내라면 누구나 거치는 통과의례!


그 영화를 보게 된 건 집에서 가까운 영상자료원에 소일 삼아 다닌 지 두어 달 만이었다오. 기회 되면 꼭 가보고 싶었던 북유럽이 배경인 데다, 어쩐지 야릇한 로맨스가 있을 듯해 집어든 영화 '오슬로의 이상한 밤'. 젊어서 봤으면 초장부터 졸았을, 로맨스와는 하등 상관없는 영화인데, 주인공이 평생 열차 기관사로 일하다 은퇴식을 맞은, 그러니까 나와 처지가 비슷한 사내라 그의 말로(末路)가 어떨지 자못 궁금해지더이다.

늙은 몸을 보이기 싫어 불 꺼진 수영장에서 벌거벗은 채 혼자 헤엄치는 노인의 모습이 어찌나 애잔하던지. 이웃집 여자의 창틈으로는 케이크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데, 남자의 냉장고엔 차가운 술병만 가득합디다. 낙(樂)이라고는 파이프 담배 태우는 것뿐. 나는 마누라도 없는 이 노르웨이 은퇴남이 고독을 견디다 못해 엉뚱한 짓을 할까봐 가슴을 졸였다오. 천만다행히도 그는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합니다. 쳇바퀴 돌듯 사느라, 한편으로는 겁이 나서, 일생에 단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스키점프에 도전하지요. 캄캄한 밤, 가파른 슬로프에서 그가 뛰어내릴 때 나 또한 두 눈을 질끈 감았다오.

내가 그 영화를 보고 깨달은 건 세 가지였소. 세계 최고의 복지 국가에서도 나이 든 남자들은 외롭고 쓸쓸하다는 것, 북유럽의 겨울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게 가장 중요한데, 여자의 권력은 음식에서 나온다는 거였소.



영화를 본 다음 날 내가 요리학원에 등록했다면 믿으시겠소? 부엌을 점령해야만 내 인생이 구질구질해지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지요. 근데 의외로 재미납디다. 멸치 국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스무 가지가 넘는다는 것을 기자 양반은 아시오? 무슨 화학 방정식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료들이 불에 들어가 융화되니 천국의 맛이 탄생합디다. 요리솜씨보다도 혼자 밥상을 차려 먹어도 주눅 들지 않는 자신감이 생겼다오. 따끈한 밥에 얼음물 말아 고들빼기김치를 얹어 먹어도 왕후의 밥상이 부럽지 않단 말이지. 냉장고 속 남은 반찬으로 만들 수 있는 요리가 열 가지가 넘어요. 조리사 자격증 따면 분식집 하나 차리려고요. 목돈이 생기면 오슬로와 베르겐을 잇는 그 설원(雪原)의 철도를 나, 거침없이 달려볼까 하오. 사내의 깊은 슬픔 몰라주는 야박한 마누라 보란 듯이 금발 미녀와 뜨거운 로맨스도 엮어보리다. 그때 가서 내 바짓가랑이 잡기만 해보라지.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 첫눈처럼, 꽃보라처럼 왔는가. 나의 사랑, 나의 주군(主君)이라며 고백하던 여인은 어디로 갔는가. 천하를 호령하던 계백은 정녕 어디로 가고 없는가.

미안합니다. 꼰대의 주책이 늘어졌소이다. 다만 은퇴한 남자들에 대해 기사 쓸 일이 다시 있거든, 하루하루 천금(千金)같이 사시라, 부엌부터 장악하시라, 가족 먹여 살리느라 꾹꾹 눌러뒀던 꿈 보자기 찾아 펼치시라, 기차는 달리고 우리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고, 꼭 써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