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조직신학組織神學]

성경적 상징주의

好學 2012. 1. 21. 07:00

성경적 상징주의

 

.들어가는 글

성경은 성령으로 영감 되어 오류 없이 쓰여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독특한 구조와 진술이 나타내는 바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이 지니는 그러한 면에 대한 이해나 안목도 별로 없이 성경을 접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같다. 성격과 과학이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도 성격 본문이 과학적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나 우리 자신도 모르게 젖어 있는 세속적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성경을 대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사실 우리가 하늘의 해와 그리고 별을 때도 그런 같다. 성경은 이러한 광명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합"(signs and seasons, and for days;1:14) 삼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를 먼저 천문학적으로 생각지 않는가? 그리고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9:1)고하나 우리는 여러 가지 대기권,산소,오존층 물리적으로 먼저 생각하지 않는가? 아니 우리 가운데 하늘(heaven) 궁창(firmament or expanse) 구분하며 이에 관한 성경의 진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성경이 말하는 성경 지리는 '땅의 모퉁이(four corners of the earth)', 거룩한 (holy ground)'등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도 책을 중심으로 각종 지형,등고선,기후 같은 것에 먼저 관심을 두지 않는가? 그래서 교회에서 성경 지리를 가르치더라도 이런 차원에다 성경 역사적 사실을 보태어 다루지 않는가? 성경 역사적 사실을 보태어 다루지 않는가? 성경은 동물을 각기 '종류'대로 논하고, '부정'하고 '가증한'동물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동물을 접할 , 생물학적 차원에서 먼저 생각하지 않는가?

성경은 언약의 갱신,안식일,절기,희년,주의 등을 역사 진행의 주요 주제로 삼고 이것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성취되어 절정을 이룬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 하시고 십자가에 박혀 죽으시고,부활하심이 역사의 중심이요 축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적 역사관이란 단순히 세속 역사의 기본적 사실에다가 '거룩한(sacred)'요소를 첨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가? 그래서 역사란 오늘날 세속적 역사관에 맞추어 과거를 한갓 인본주의 적으로 이해하지 않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관점(perspective) 연관되는 주제이다. 성경 자체가 말하는 성경적 관점(Biblical wordview) 문제이다. 성경의 눈으로 보는 성경적 세계관은 성경을 바로 해석하게 하고, 올바른 성경 해석은 올바른 성경관을 가지게 강화한다. 이런 성경적 세계관은 심오하고 우리와 생소한 편인데, 성경적 상징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필자는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한 기초 작업의 일환으로 성경의 상징주의(Biblical symbolism) 본질과 특성을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그럼 성경적 셰계관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자.

 

.성경적 세계관

성경적 세계관이라 이것이 요즈음 자주 거론되는 기독교 세계관(Christian wordview)과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질문이 생기게 마련이다. 실제로 성경적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관과 근본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셰계관과 성경적 세계관을 일부러 구분하는 것은 전자를 과소평가 하자는 것이 아니고 보완하자는 입장이다.

 

1.기독교 세계관의 보완점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에 뿌리를 두었으나 철학적 색채가 농후하다. 기독교 세계관이 성경 신학적이라기 보다는 철학적임은 역사와 개념적 정의에서도 나타난다. 19세기 초엽에 시작된 세계관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카이퍼(A.Kuyper),바빙크(Bavink)도이베르(H.Dooyeweerd),볼렌호벤(D.H.T.Vollenhoven) 주로 화란 칼빈주의 학자들의 연구로 기독교 세계관으로 지위를 확고히 다진 셈이다. 그들은 기독교 세계관이란 철학이나 신학 체계는 아니고, 그러한 체계의 바탕 학문과 이론 이전의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세계관은 궁극적인 믿음에 뿌리를 두고,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삶을 지속시켜 나가며, 종말론적 비전으로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은 "세상 만사에 관한 신자의 기본 신념의 포괄적 골격(framework)"이라 말한 볼터(A.M.Wolters) 정의가 바람직하나 철학적임은 부인하지 못한다.

올두이스(J.H.Olthuis) 세계관을 어떤 실체의 현실적 그림(sketch)임과 동시에 이상적 청사진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관은 우리가 보는 것을 묘사하고 동시에 우리가 보아야 것을 규정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계관은 현재의 사실과 나아가야 이상을 동시에 표현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세계관에는 가지 초점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를 요약하여 세계관은 인생 세상의(of) 비전이라고 표기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인생의 삶의 가치와 방향을 결정하고 추진해 가는 본질상 철학적이라 하겠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철학적인 언어로 문제들을 논한다.

원래 독일어로 세계관(Weltanschauung)이란 말이 칸트이래 독일 이상주의와 낭만주의 세계에서 시작하여 주로 철학자들에 의해 인생 세상에 대한 총체적인 안목이란 뜻으로 철학과 비슷하게 쓰여 왔다. 키엘케골 이래 철학자들이 새로운 사상으로서의 세계관과 사상인 철학과의 관계를 생각할 정도로 자체가 불신 철학의 주제였다. 그런데 모든 영역의 기초가 성경이어야 한다는 칼빈주의의 특성과 함께 철학과 세계관도 기독교 학문이 되어진 셈이다. 카이퍼 시대에 이르러 관계는 "세계관이 철학을 내놓는다"라는 전형에 이르게 되었고, 자유대학을 중심한 칼빈주의 학자들에게는 이런 모델이 세계관과 철학 사이의 기본 구도를 이루어 왔다. 이러한 배경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실현의 주된 장벽이 헬라 철학에서 비롯된 이원론이었기에, '자연'에다 '은혜' 영향을 새롭게 하려는 칼빈주의자의 노력은 철학적일 밖에 없는 같다.

기독교 세계관이 철학적인 것에 비하면 성경적 세계관은 훨씬 신학적이라 있다. 그리고 성경적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보다 성경 자체를 성경이 밝히는 창조->타락->구원의 구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실현에 관심이 집중한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방대한 구약 정경과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된 종말론적 완성에 대하여 거의 언급을 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자연히 이론신학 내지 철학적이 되어 버리는데, 이는 성경적 세계관이 특히 구약성경신학 적인 점과 대조를 이룬다. 계시의 역사적 전진과 보다 새로운 언약으로 변혁된 내용이 결여된 것도 성경적 세계관과 차이점이라 있다. 이러한 차이는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고 보완적이다. 그러나 구별은 필요한 같다.

그런데 성경적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문제는 우리의 주제가 아니므로 주창자의 주장을 따라 대강 살펴보겠다.

 

2.성경적 세계관의 개요

성경적 세계관을 부르짖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출신인 조단(James B.Jordan)이다. 그는 1991년부터 플로리다 주에서 성경적 지평(Biblical Horizon)이라는 성경 연구소를 개설하고 사역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방면의 성경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원래 신율주의(theonomy) 매료되어 텍사스주 타일러에서 활발하게 사역하였으나 성경 해석상의 차이로 따로 나와서 문서 사역을 시작하고 있다. 그가 Through New Eyes:Developing a Biblical View of the World)(1988) 분야의 기본 이론서로 동안 연구한 것을 체계화한 것이다. 책의 제목이 말해 주듯이 그가 성경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안목을 계발하고 있는 초기 단계에 있다.

책에서 말하는 저자의 근본적 소신은 크게 가지로 나눌 있는데, 먼저 올바른 자연관과,올바른 역사관에 기초한 세계관을 가지되 이를 위해 성경이 쓰는 상징법을 바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챤은 성경적 상징주의로 자연에 대선 성경의 안목을 지녀야 하며, 역사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자연의 우상과 역사의 우상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다음 몇가지로 나눌 있다.

 

1)상징적 표현

먼저 그는 세상을 어떻게 것인가 하는 문제를 성경의 묘사대로 보여 주고자 한다. 기독교 세계관이 철학적 용어를 주로 많이 사용하는 점에 비하여 성경적 세계관은 성경 자체의 용어를 사용한다. 성경은 철학이나 과학을 논할 쓰이는 추론적이며 분석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성경은 한마디에 여러 가지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읽는이로 하여금 말의 실체를 가시적으로 머리에 떠오르게 하는 연상어를 많이 사용한다. 이러한 상징적인 표현과 반복적인 전형을 사용하여 성경적 세계관을,펼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의식과 건축은 물론 숫자와 수치.,지리적 방향,나아가서 나무와 별을 이용한 묘사에도 성경적 세계관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성경에는 현대인의 관습과 상식과는 생소한 표현들이 많아 우리가 이를 연구하여 익숙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등을 글의 주제로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2)창조 기사의 중요성

그가 말하는 성경적 세계관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와 에덴 동산에서부터 펼쳐진다는 점을 부각한 것이다. 점이 그의 독특한 주장이다. 창세기의 처음 서너 장에 나오는 것들의 상징적 의미와 연관성은 이수 성경 전체에 계시사적 변혁 맞추어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성경에 나오는 ,바다,,동물들,식물들이 지니는 상징적인 의미와 연관성들은 창세기 앞부분에서 보여 주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특히 그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분리와 채우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도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빛과 어두움이 나뉘고,물과 , 육지와 바다가 나뉘는 일이나 이렇게 나눈 적재 적소에 풀과 채소,과목, 광명, 물고기,육축,기는것,짐승,사람들을 채우는것 까지도 상징적 의미가 있으며 따라서 성경적 세계관의 기절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가 단순히 상징적이란 말은 아니다. 가시적인 연상어를 써서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 성경의 방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창세기 1장은 상징적인 목적을 위해 뒤에 나오는 성경에 쓰일 세계관의 기본 틀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창조의 연대에 관해서는 24시간으로 6일간의 창조를 믿는데, 가장 이유는 성경이 그렇게 확인하고 있고(20:11),성경 아무데도 창조 기사의 본문이 단순히 상징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3)자연 역사관

저자는 세상의 설계를 논하되 세상은 속에 포함된 인간은 물론 바위,,식물,동물은 하나님의 계시로 창조주를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가치는 하나님을 바로 증거할 진가를 발휘한다. 자연이란 따로 독립되어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음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성경의 상징적 표현인데, 크리스챤이 지녀야 올바른 성경적 세계관이란 성경이 말하는 상징적 세계관이라고 있다.

그리고 역사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간섭하심을 보여줌으로 과거의 사건들이 미래의 사건을 조명하고 있음을 그는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모형(예표)론을 성경적 역사철학의 근간으로 삼는다. 그는 역사의 의미를 푸는 열쇠는 천국의 예표적 청사진에서 있다고 한다. 천국이 점진적으로 위에 아로새겨져 천국 되어가며, 그리고 천국의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점진적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아로새겨져 그분을 닮아 가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역사는 "나라에 임하오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 기도대로 이루어 가는 과정이다. 역사 전지의 방향 표적과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요 원형은 그의 나라 천국인 것이다. 역사에 관한한 성경적 세계관은 성경이 쓰는 예표적 세계관이라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성경의 연속적인 언약을 통한 세상의 전진을 추적하고 있다. 이전 언약을 변혁하여 새로운 세계를 가져오는 새로운 세계를 가져오는 새로운 언약을 중심으로 시대의 발전적 전진을 추적하고 있다. 계시 역사상 세대는 세대에 맞는 상징적 모델로 특징 지워졌다. 예를 들자면 타락 전은 에덴 동산이요,모세 시대는 성막이었고, 다윗시대는 성전,신약시대는 그의 백성(교회), 나아가서는 예루살렘이 각각 세상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런것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천국의 식양대로 건설된 하늘의 모형이었다.

 

4)배경과 의의

조단은 모델을 연구함으로 성경이 말하는 세계관을 체계화하고 나아가서 역사적 변화와 전진을 고찰하여 오늘날 우리와 관련된 주요한 문제들에 적용시키고 있다. 세상 만물은 우리 주님을 상징하고 있고, 역사는 알파와 오메가 되신 우리 주님을 목표로 삼고 전진하며, 세상이 하늘화() 되어 가는데 참다운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세계관 연구는 성경 전체의 계시사적인 올바른 이해와 직결된다.

그의 이론은 구속사적이며, 언약적인 안목으로 성경을 보고, 개혁주의 변증학자 반틸등의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 적인 신학 사상과 보스(G. Vos) 원조로 클라인(M.G.KLine)등의 개혁주의적 성경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진정한 성경적 세계관은 세상 만물의 존재 자체와 역사의 진행이 그리스도 중심적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성경적 세계관은 성경의 상징주의에 근거하였다고 주장하고 이를 바로 해석해야 한다고 함으로 설득력과 신선미를 더하고 있다.

성경적 세계관을 체계화 것은 논란의 여지는 많으나 확실히 개혁주의 성경 신학의 발전적 적용이다. 그리고 성경 해석학 차원에서도 역사 비평이 지닌 부정적인 면의 지나친 횡포로 만신창이가 성경과 이로 인한 메시지의 고갈에 허덕이는 많은 교회가 동시에 치유되고 강단도 풍요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성경의 상징주의를 바로 이해하는데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성경적 세계관은 성경적 상징주의 성경신학과는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지만 초학자의 연구를 위하여 순서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적 세계관은 성경적 상징주의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경적 세계관은 참다운 계시사적인 성경신학 위에서 설립된다. 그리고 구속사적인 성경신학은 성경의 표현방식의 하나인 성경적 상징주의에서 비롯된다. 이런 점에서 성경적 상징주의가 나무의 뿌리에 해당된다면, 계시사적인 성경신학은 본체 줄기이며, 성경적 세계관은 열매라고 있다. 그럼 성경의 상징주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성경적 상징주의

 

우리가 논하는 성경적 상징주의는 매우 제한된 의미로 사용된다. 글에서는 인위적이고 전통적이며 인본주의적 상징주의보다도 하나님의 계시로서 성경에 나오는 상징주의를 지칭한다. 인간은 이를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이해한 잘못된 과거가 있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상징주의가 중세적인 것이거나 인위적인 상징주의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둔다. 우리의 관심사는 개혁주의 성경(신학) 세계관을 위한 상징주의이다. 성경 자체가 모든 변화와 진전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주로 논하는 것이 성경적 상징주의의 임무이다. 이점이 또한 자연계시론과 차이점이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 상징주의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자신을 나타낸 자연계시를 특별계시(성경) 따라 정리된 것이라 있다.

 

1.성경적 상징주의의 원리

성경적 상징주의의 기본 원리는 세상을 하나님을 난타낸다고 보는 점이다. 모든 피조믈은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을 나타낸다. 만물은 하나님이 지니신 성품의 면을 나타내는 형상들이다. 하나님의 성품이 모든 피조물에 그의 도장이 찍히듯 그의 성품이 서려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말은 세상 만물의 존재 의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의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된다. 피조물이 지니는 여러가지 가치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외의 다른 가치나 관계들은 이차적인 것이다. 만물이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1)성경적 근거

이에 대해 로마서 1:20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한 것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말씀은 우리의 주제에 관하여 서너가지를 말하고 있다.

①하나님은 신이시기에 원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보이지 아니한 것들' '분명히 보여 알게'되도록 하나님께서 주도하시었는데,

' 만드신 만물'에다(로부터)보여서 알도록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있도록 하는 근원 또는 원천이 만물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창조자의 특성을 반영하고 그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③역사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서 하나님을 보이고 있다는 점과

④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너무 분명하여 이를 거역한 사람들에게 오는 정죄를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시편191-2절도 하늘이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손을 하신 일을 나타내시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욥기서 127-9절도 동물계가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기록한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이와같이 성경의 상징주의는 성경 자체에서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지은이이신 하나님의 성품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예술가의 작품에 작가로서의 인격에 담겨진 철학이나 이상이 표현되듯이 세상 만물도 하나님의 만드신 것으로서 지은이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만물을 보고 하나님의 특성을 지적하기란 어렵다. 이유는 조단이 지적한 바와 같이 사실이 독특하고 유일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외에는 없으므로 이를 비교해서 알아 볼만한 다른 재료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음악가의 작품도 다른 음악가의 것과 비교해서 특징을 더듬을 있으며, 미술가의 작품과 견주어 작품을 지은이의 독창성을 알아볼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세상과 겨눌만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다가 인간의 죄악으로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연계시를 인간이 더이상 보지 못하는 것이라 있다. 인간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으며"(1:21),적극적으로는 '불의로 진리를 막고'(1:18)있는 것이다. 죄로 타락한 인간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인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기를 싫어한다. 이것은 세속적 철학자들이 세상을 그냥 중립적인 존재라고 우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2)신학자들의 증거

그러나 우리 신자들에게는 우주는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끊임없이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역사적으로 성경을 믿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만물은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위에 샘은 한가지라면 빛은 다른 한가지이다. 그대가 목이 마를 , 그대는 샘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낮이 아니라면 샘에 이르기 위하여 등에 불을 밝힐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샘이시기도 하고 빛이시기도 하다. 목마른 자에게는 샘이 되시고 눈이 어두운 자에게는 빛이시기도 하다. 눈을 떠서 빛을 보자. 마음의 입술을 열어 샘물을 마시자. 그대가 마시는것, 그대가 보는것, 그대가 듣는것, 하나님은 그대에게 세가지가 되실찌어다. 그대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대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리라.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작품에 자신을 나타내셨다 길게 논한 칼빈은 모든 피조물이 인간에게 하나님을 증거한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노래하는 작은 새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짐승은 하나님에게 소리지른다. 세상 만상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산들은 그의 이름을 메아리친다. 파도와 샘들은 그분에게 반짝거리며 풀과 꽃은 그분에게 웃음짓는다. 우리 속에 거하는 분의 능력으로 우리가 전적으로 떠받들리어 보호를 받는 , 우리는 분을 멀리서 찾으려 필요도 없다.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서 분을 찾을 있기 때문이다. (신약서문에서1535)

화란의 교의신학자 바빙크는 영원하시고 불가해하신 하나님에 관하여 의인화된 언어로 말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전부 의인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생물이나 무생물, 그리고 유기체나 무기체를 불문하고 모든 피조물로부터 이름을 이끌어 내어 하나님의 장엄하시고 영화로우신 특성을 나타낼 있는 의인법적 표현은 한없이 다양해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께 의인화된 언어로 피조물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우리 인간의 권리라고까지 주장했는데, 이유는 우주 만상이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중에서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의인법 적으로 표현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논할 없는데도 누구든지 이를 거부한다면 그는 원리적으로 피조물에 하나님이 계시될 없다고 하는 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주와 안에 있는 만물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과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시요 상징이라고 하겠다. 세상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중립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이점이 성경적 세계관의 기본이다.

 

2.성경적 상징주의의 특징

성경적 상징주의의 특징은 피조물이 상징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어느 면과 서로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1)피조물은 하나님과 유사함

우선 우리 사람이 하나님과 닮은 점을 살펴보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1:26)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설정하셨다. 인간은 개인적 존재로나 종족 전체로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특수하게 상징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특수하다는 의미는 신학자마다 다를 있지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이것이다. "인간은 상징을 만드는 자이기도 유일한 상징이다"(Man is the only symbol that is also a symbol-maker)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결정하고,창조하고,평가하며,이름을 붙이는 일을 인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처럼 엇비슷하게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사상을 생각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창조적으로 건설적인 성향을 가지시는데 우리 인간의 하는 일은 수용적으로 재구성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삶을 산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삶은 하나님을 형상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의미는 자신에게서 발견될 없고 하나님의 것을 닮아가는데서 발견된다. 인간의 삶도 하나님의 삶을 의미가 있다. 인간은 스스로 구명되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규명되어지는 존재다.

바빙크는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존재이기에 가장 고귀란 명칭인 '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이','하나님의 소생'(17:28)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표현들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소인간이란 하나님과 유사한 존재라는 점도 보아야겠다. 그러니까 인간의 사고,의지,행위는 하나님의 사고,의지,행위와 모든 점에서 유사하다 밖에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점은 바빙크와는 순서상으로 거꾸로 설명하나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을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인 기능과 행동처럼 표현한 점을 페이지 이상이나 그도 나열하고 있다.

여기서 바빙크는 하나님을 인간 외의 다른 피조물로 표현함으로 유사성을 확대하고 있다. 하나님 성품의 일면을 사자(31/4),독수리(32/11),(53/7),암탉(23/37),(84/11),새벽별(22/16),반석(32/4)피난처(9/9),그늘(91/1),방패(84(11) 그외 여러가지로 비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점은 확실히 앞에서 말한 의인법의 범주를 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유추적인 표현은 단순히 인간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영역에 두루 걸쳐 있다고 프레임의 말이 옳다. 범위는 인간의 영역 외에도 바람이나 문과 같은 무생물과 짐승,그리고 사랑,진리,,지혜와 같은 추상적 아이디어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2)상징주의의 본질적 성격

이러한 상징주의는 유추적이지 사실적이 아니다. 말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가지 연상적 표현은 범신론적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범신론은 만물이 신의 현현이기에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서로 같아 구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를 들어서,혼인 성약을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과 유사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고후11/2,5/22-33,19/7-9/21/9-11). 교회는 전통적으로 신부로서 교회가 신랑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에 유사한 것으로 보아왔다. 그렇다고 결혼이란 성례에 속한 것도 아니다. 무슨 구원의 도리가 결혼과 관계있다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도 아니다.

상징주의는 유추적 표현이지 형이상학적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구원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도 그렇다. 구원받고 새사람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법적인 선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지음을 이미 받았으며(과거),받아가고 있으며(현재),장차 완전히 지음받을 (미래) 말한다. 그래서 윤리적 변혁을 수반하여 형상을 본받아(8/29)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1/22,1/4)서게 것을 말한다. 그러나 구원받고 사람된다는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에 동참한다는 말은 아니다.

 

상징주의는 가리키는 대상, 내용 중심이지 의미 중심이 아니다.

상징은 발음기호 또는 글자로 쓰인 (나무, 오륙도등) 말하고 뜻은 상징을 보거나 들음으로 말미암아 머리에 떠오(상기된) 내용이며,대상 내용은 단어가 가리키는것, 또는 그와 관련된 것을 말한다. 상징 - - 대상을 학자에 따라서는 다르게 표현하나 중요한 것은 삼각형에서 상징과 뜻의 대조는 형식과 내용의 대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삼각형이 상징과 대상 사이의 간접적 관계를 강조한다는 뜻으로 점선으로 표시된 것이다. 어떤 말이 가리키는 내용은 말과는 아주 다른것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요점만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떤 상징(:오륙도) (의미:부산항 입구의 작은 바위섬) 변하지 않지만 말로 가리키는 내용은 여러가지일 있다. 오륙도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것이 있다. 다방,식당,당구장,문인클럽,학급신문,학교잡지등등 얼마든지 있을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부분은 한가지 상징(기호) 이와같이 여러가지 내용을 나타내는 점이다. 오륙도라는 단어를 썼지만 바위섬이라는 말과는 아주 다른 다방이나 무슨 클럽 같은 것을 나타내는 점이 우리의 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런 구분이 분명하지 않으면 성경적 상징주의를 앞에 말한 범신론과 비슷하게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상징주의의 포괄적인 장점

이와같이 상징적 표현은 여러 복합적인 사상을 한꺼번에 표현한다. 성경의 상징주의도 역시 이와같이 그림처럼 여러 생각이나 모습이 떠오르게 하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실 논술적이며 직설적인 용어를 쓰면 우리의 사고 방식에는 어울릴지 모르나 하나님의 풍부한 계시를 전달하는 데는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24/28)라는 상징적 표현에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명제적 표현으로 간략하게 설명이 안된다. 아주 길게 풀어써야 본래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표현할 있을 것이다.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는 상징적 표현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상징적 표현의 특징이요,장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징주의는 주관적인 일들을 분석하고 증명하기보다도 그것을 제시하는데 역점을 둔다. 상징법으로 말한다는 자체가 이상적인 것을 닮아가려는 포부가 서려 있고, 의도하는 실제 상태에 이르려고 애를 쓰는 열정이 담겨 있다. 따라서 상징적 표현 자체가 차갑지 않고 따뜻하다. 상징주의는 사실적 서사문이 아니라 그림같은 서정문에 친근하기 때문이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넓고 풍성함이 상징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높고 무한 극진하기에 상징주의의 사용을 정당화 시킨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 깊고 신비로워 상징적 표현이 요청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확한 서술문은 실상을 추상화하고 상징주의는 실상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어떤 신학자도 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들의 실상의 면만을 따로 분리할 없다. 정확한 서술은 실상을 전한다는 주장을 어리석은 교훈이라고 파러의 말에 동의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에 간한 우리의 지식은 성격상 유추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나타내신 유사성을 근거로 하나님을 있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징적이요 유추적인 지식은 우리가 의존할 만하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겠다. 상징을 통한 지식은 완벽하지는 않으나 거짓은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 만물에 상징된 하나님에 간한 지식은 완전한 것은 아니나 진실된 지식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제한되고 유한하지만 실제적이며 순수하다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님의 자의식이 원형이고 우주에 있는 그분 스스로의 계시가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3.성경적 상징주의의 해석원칙

 

1)상징주의에 대한 일반적 시각

우리는 추상적이며 철학적 언어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 있다. 우리의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의 표현방식도 그렇다. 용어의 정의를 하는 식으로 아주 논리 정연하고 명제적이라 무슨 법조문 같기도 하다. 사실상 상징적 표현이나 어떤 내용을 은연중에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은 거의 찾아볼 없다. 이런 글에 익숙한 우리는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표현이 나오면 추상적인 묘사로 그치려고 대든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 솔로몬의 잠언은 젊은이에게 교훈하기 위해 썼으나 우리가 쓰고 있는 요리문답식은 아니다. 성경은 역사나 이야기를 비롯하여 비유나 은유,상징 암시적 표현,예표(모형)론등이 많이 있다. 바울서신 외에는 추상적이고 명제적 표현이 적은 편이다. 그런데도 상징법은 인위적인 것이요 이차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발상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실로 상징주의야말로 인생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오늘날은 성경의 상징주의를 연구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는 시대라고 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성경적 상징주의가 중세의 인위적이고 전통적인 상징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지 오해를 받기 쉽다는데 있다. 그리고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과학의 발달에서 비롯된 성경 신학이 역사비평의 영향으로,성경에 쓰인 많은 상징과 연상적인 표현들은 무시하고, 기껏해야 문학비평의 수준 정도에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문의 원래의 의미를 석의하는데 그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학문의 풍토 때문에 모든 복음주의 성경주석도 석의 위주에서 만족한다. 만일 이상의 적용을 하려고 시도하면 오히려 무시 당하기 일쑤이다. 주석은 본질상 석의적이어야 함은 확실하다. 그러나 교회 강단을 위하여는 여기서 나가야 한다. 그렇다고 주석은 강해설교의 표본을 제시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설교자에게 성경의 상징과 연상적 표현을 계시사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학문적 길잡이를 주석이 제시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이 상징과 예표를 사용한 점을 최대한 살려서, 계시역사적 진전에 맞춘 구속역사적 의미를 파악함으로 성경이 보여주는 세계관에 입각한 삶을 신자들이 살아가도록 학문적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2)해석의 일반적 원리

이러한 시도를 위하여 성경을 해석하는데 '극소해석' 탈피하고 '극대해석' 취하여야 한다. 전자는 성경 해석할 있는 대로 문자적 의미에서 머물려고 함으로 상징적 차원을 무시한다면 후자는 상징적이며 예표적인 면도 중시하고 확대하고자 한다. 전자는 성경 해석이 본문의 문맥차원 정도에서 맴돈다면,후자는 계시역사적 진전에 따른 변혁 차원에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본문이 연상케 하는 면을 밝힌다. 예를 들어서 어떤 본문에 나오는 ''이라는 말을 규명하면서 전자는 문맥 속에서의 의미를 찾는다면,후자는 성경 전체에 흐르는 계시역사 차원에서 비쳐진 상징적 연상적 의미를 찾는 것이다.

다른 예는 조단의 사사기 9/53 해석에서 있다. 성령으로 영감된 성경이 "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던져 두골을 깨뜨리니"라고 것은 "아비멜렉이 살해되었다" 표현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인이 폭군의 머리를 깨뜨린점(참조창3/15,5/24-27),그리고 그가 돌로 파멸당한점(참신13/10,9/5,삼상17/49,2/34,21/44), 폭군에 승리하는 도구가 맷돌이란점(1/18-21)등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막연한 추측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경적 근거와 계시사적 맥락에서의 상징적 의미이다.

따라서 말은 쓰여진 표현() 의미() 함께 상징이 가리키는 대상 실제적 내용을 반드시 밝혀야 한다. 해석 작업은 언어학적인 면에서 어떤 표현의 뜻을 파악함과 동시에 대상 내용도 규명하는 것이다. 작업은 신학적인 면에서 문맥상으로 동시적인 상징의 대상만 아니라 계시역사상으로 동시적인 면의 상징의 대상도 시대적 변혁에 비추어 철저히 규명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본문을 해석하는데 횡적(씨줄) 고찰이 전자라면,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종적(날줄)고찰이 후자인데 성경의 상징과 연상을 각별히 고려해야 한다.

 

3)상징주의 해석의 유의점

상징주의의 해석을 '극대해석'으로 원리를 삼는다는 것은 상당한 논란과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다음 사항을 유념하여야 하겠다.

①성경에 쓰인 상징과 연상은 '암호 또는 부호(code) 아니다. 모든 상징과 연상은 단순한 직설적 표현이 아니라 표현과 관련된 여러가지 의미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성경의 상징도 성경의 문학적 기법에서 이미 기정 사실화 되어서, 여러가지 의미를 결부시켜 마음에 동시에 연상케 함으로 이를 획일적인 단일 의미로 도식화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이란 말이 단순히 네로황제에 대한 암호나 부호식으로 이해할 없다는 말이다. 만일 그가 '네로' 의도했다면 직접 말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는 그러기 보다는 '짐승' 대한 성경에 연관된 일련의 모든 내용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에덴 동산에서 짐승의 가죽으로 앞을 가리운 아담,짐숭같이 느브갓네살 다니엘의 이상중에 나오는 짐숭,에베소에서 바울에게 대상하던 인간맹수(고전15/32,19)등이 짐승과 관련된다.

②성경의 상징주의는 따로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은 일련의 상징적 관계 또는 상징적 체계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상징들은 위치한 '상징적 구도'속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상징적 구도 안에서 상징들은 '연관체제' 부분으로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상징은 고립시켜서 생각할 없다. 우선 상징의 성경이 말하는 상징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상징 세계는 조직적이고 통일된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③성경에 나오는 상징이나 연상은 반드시 성경에서 명시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어떤 상징을 다른 고대 문헌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주장하기 쉽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제반 현상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유혹도 받기 쉽다. 우리는 고대 근동지역의 이방종교 사상이 우리의 성경해석에 유입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세속적 인본주의적 견해가 성경해석에 이용되어서도 안된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④상징에 대한 구구한 억측을 피하기 위하여 건전한 조직신학적 검토가 필요하다. 성경의 상징적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성경신학 분야이다. 성경신학, 특히 성경을 석의한 결과는 조직신학적 검토가 있어

한다. 우선 역사적 신앙고백의 지지를 무시하여서는 안된다. 말은 신앙고백이 성경 위에 군림한다는 말이 아니다. 신앙고백은 완전 무결하지는 않으나 역사적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은사(4/,8/11-12) 가진 사람들의 지혜가 결집되어 작성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와 지역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정된 존재이므로 성경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주장에 속지 말아야 한다.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에 성경적 근거와 자료를 제공하지만 결코 조직신학과 분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성경해석자 자신이 건전한 성경적 전제 위에 확고히 서있어야 한다.

 

.마감하는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 자체가 말하는 성경적 세계관을 계발하기 위한 기초작업을 해온 셈이다. 성경적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은 상호 보완하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두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알아야 하느냐고 한다면 전자가 먼저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성경적 세계관 없이 기독교 세계관에 집착하면 더욱 이론적이요 철학적이 밖에 없다.

성경적 세계관을 위하여서는 성경의 상징주의를 바로 알아야 한다. 성경의 상징주의는 세상 만물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임을 상징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운데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상징의 최고봉을 차지하고있다. 그리고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상징의 원리적인 패턴이 되는 점은 상징주의가 자연계시론과 뚜렷한 차이를 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 가운데 영역을 분리하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채우는 사역도 성경적 상징주의의 주요 근간이 된다.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유사존재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의 부분이 피조물에 드러난다는 말이다. 이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을 찾아오신 방법이요,이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도 하나님을 이해할 있도록 하나님 스스로 만드신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원본과 사본의 관계라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진 지식은 유사지식이다. 그러나 지식은 완벽하지는 못해도 참되고 순수하여 우리가 의존할만하다.

성경적 세계관은 기본이 성경적 상징주의이다.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가진다. 피조물은 하나님을 올바로 상징할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 가운데서도 인간은 하나님과의 상징으로서 임무를 감당할 의미를 찾을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을 가리키는 상징을 창출할 사람다움이 나타난다.

말은 세상의 자연도 인간도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존재한다는 의도가 담긴 표현인 '존재' '자연'이라는 자체가 오해를 낳게 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적'또는 '초자연적'으로 구분하는 개념 자체가 성경적 상징주의와 거리가 말다. 세상에 하나님을 반영하지 아니하고 중립적이며 무관한 일이나 동작이 어디 있느냐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이러한 말을 습관적으로 쓰다보면 세속주의자의 발상이 크리스챤 마음 속에도 자리잡을 있음을 보아야 한다. 세속주의자들은 세상과 안에 있는 만물이 하나님의 현현임을 거부한다. 초자연에 대한 '자연' 만물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견해가 담긴 자체에 성경적이 아닌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상징주의 연구는 충세적이며 인위적인 맹목적 상징주의라는 오해를 염려가 있으나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성경적 상징주의가 초대교회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풍유적이며 상징적 석의로 혼동될 소지도 있다. 초대교회에 성행하였던 상징주의나 풍유적 해석은 성경 본문에 나오는 단오 뒤에 깊은 숨은 뜻이 있다고 함으로 본문을 단순한 암호 또는 기호적인 상징의 집합으로 취급하였다. 그것은 플라톤의 철학에다 성경해석을 억지로 맞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의 연구를 멈출 없다. 우리의 성경적 상징주의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징주의와 모형(예표) 자체가 해석자마다 의견이 다를 있는 소지도 있다. 보는 견해에 따라서 다르게 수도 있다. 더우기 분야는 최근까지 연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연구 결과를 주목해야 한다. 진지한 성경연구와 건전한 학문적 토론은 이러한 가운데서도 좋은 결과를 이끌어 것이다.